# 96
<공략자들 96화>
하영은 입을 앙 다물었다.
‘뭐지, 이게?’
머릿속에서 눈으로 보고 있는 상황을 따라가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보스존, 공략 중, 세 마리의 블러드 울프.
[제물의 의식이 시작됩니다.]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웨이브에서 살아남으십시오.]
알 수 없는 내용의 천문 세 줄이 떠올랐다.
또한, 그 수많은 공략자들이 다 넋을 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하영이 다급하게 외쳤다.
“정신 차리세요! 우리는 아직 공략 중입니다!”
하영의 맑은 목소리는 정신을 일깨우는 묘한 울림이 있었다.
공동에 가득했던 적막을 뚫고 울려 퍼진 목소리에 헌터들이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동료에게 이로운 효과를 주는 클래스, 드루이드의 스킬이 도움을 준 것이었다.
“어차피 이 정도 인원이면 한 마리나 세 마리나 큰 차이 없다! 정신 차려, 이 새끼들아!”
호전적이기로 유명한 철벽 팀의 팀장은 라운드 실드에 대검을 쾅쾅 두드리며 팀원들의 정신을 깨웠다.
하영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가진 바 무력이 대단한 것보단, 그녀가 뱉은 한마디로 인해 전열이 가다듬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정신 차리자! 하영이보다 못하고 있는 게 말이 되냐!”
하영의 오빠인 유찬웅도 재빨리 팀원들을 수습했다.
한편,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드루이드의 정신 면역 효과를 뿌리는 하영을 멀리서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역시 유하영은 위험해.’
박철환이었다.
박철환은 굳은 표정으로 하영을 바라보았다.
“…….”
그리고 거기서 떨어진 곳에 또 한 명, 클라우스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첫 일격을 놓쳤다.’
피어를 발한 후 잠깐이나마 시간이 있었다.
클라우스는 그때 공격을 가하려는 계획으로 그 순간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웨이브를 발생시키기 위한 준비 때문에 블러드 울프가 선공을 취할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거기다, 그가 예상치 못한 변수는 또 있었다.
‘피어를 극복해 내다니?’
피어는 인간이라는 생물의 탈을 쓰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굴복하게 되는 스킬이다.
그런데 하영은 그걸 고작 몇 초 만에 극복해 낸 것이다.
‘저 여자…….’
클라우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클라우스 씨! 명령을!”
붉은 수염 팀장이었다.
백 명이 넘는 공략자들을 이끄는 팀의 팀장이라는 자가 팀원들을 수습하기는커녕 헐레벌떡 뛰어와 의견을 물어본다니. 이름 있는 헌터임에도 하찮은 자다.
“퇴각한다!”
클라우스가 외쳤다.
하지만 그는 좋은 타이밍에 클라우스에게 와 줬다.
이로써 이번 의식은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린다.
클라우스가 서늘함조차 느껴지는 미소를 지었다.
“후방! 버텨라!”
“크윽! 여기 조금 도와줘!”
-크르르르르-!
탱커, 근거리 공격형 헌터들과 팀장들이 후방에 남아 블러드 울프의 공격을 차단하고, 나머지 헌터들이 재빨리 보스존의 입구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의식 중에는 보스존을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웨이브에서 살아남으십시오.]
절망적인 천문이 떠올랐다.
계획대로였다.
이곳에선,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 * *
치열한 전투가 계속됐다.
하영은 근거리 공격형 헌터들의 집단에서 힘겹게 숨을 내뱉었다.
‘하아, 하아.’
이 믿을 수 없는,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지고 고작 10분이라는 시간이 지났을 뿐이었다.
하지만 벌써 수십 명의 공략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패색이 짙었다.
모두가 절망을 느꼈다.
용감하게 맞서는 자도 있었으나,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몇 년간 공략의 실마리조차 보여주지 않았던 보스 몬스터를 무려 두 마리나 더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블러드 울프의 전력은 단순 덧셈으로 두 마리가 는 것이 아닌, 수십 수백 배의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으드드득! 으적!
블러드 울프가 쓰러진 공략자들의 시체를 씹어 먹었다.
그들이 흘린 피가 지면에 후두둑 떨어지고, 다시 블러드 울프에게 흡수되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연합의 헌터들이 사색이 됐다.
“흐으…… 흐윽!”
어디선가 울음인지 숨을 몰아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탱커들은 이미 너무 많이 지쳐 버렸다.
근거리 공격 헌터들은 너무 많이 죽어 버렸다.
원거리 공격 헌터들은 쓸모가 없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영아!”
유찬웅이 다급히 하영을 불렀다.
“어차피 나갈 수 없다면, 공략을 해야 해. 이대로 버티면서…….”
“아니, 오빠. 안 돼.”
하영은 고개를 저었다.
“연합은 손발을 맞춰 보지 않았어. 버티다 보면 오히려 균열은 더 심해질 거야.”
하영이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주위를 훑었다.
“시간이 필요해.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 랭커들이 앞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고, 그사이에 진형을 다시 갖춰야 해.”
하영의 말은 확실히 타당했고, 유찬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래, 그게 좋겠다. 그렇다면 네가 움직여. 클라우스 씨에게 가 봐!”
“알았어!”
하영이 바로 땅을 박찼다.
절망적인 순간, 영웅들은 나타난다.
하지만 교묘하게 어둠 속에서 틈새를 노리던 비겁자들 또한 힘을 발휘하는 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안 됩니다.”
클라우스가 부정했다.
하영의 표정이 굳었다.
“어째서입니까?”
“랭커들이라고 한들, 보스 세 마리에게서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 진형을 유지하고 시간을 끌며 버티는 편이 낫습니다.”
“…….”
하영이 저도 모르게 혀를 차고 클라우스를 노려보았다.
‘이자는…….’
여전히 그는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하영은 그동안 느꼈던 위화감을 떠올렸다.
하영의 깊은 눈빛이 클라우스의 허실을 꿰뚫었다.
‘믿을 수 없는 자다.’
하영이 지체 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떠나기 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차피 당신은 우리들의 리더가 아닙니다.”
“……?”
“매지션즈는 당신의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는 제 의지대로 움직이겠습니다.”
하영은 분주히 움직였다.
아무리 하영이더라도 100명에 달하는 랭커들을 전부 기억하진 못하지만, 10층에서 오랜 시간 지낸 까닭에 많은 수의 랭커들을 알고 있기는 했다.
“쇼고!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합니다! 도와주세요!”
“하영 씨? 앗! 예! 알겠습니다!”
철충검의 쇼고가 힘을 보탰다.
“드레이크 팀장님!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요. 지금 이렇게 버티기도 바쁜데!”
“설명은 나중에 하겠습니다! 힘을 빌려주세요!”
“…….”
하영의 말은 다급하고 두서가 없었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결국, 랭커들을 차출해 가는 것을 반대하던 드레이크 팀까지 하영의 의견에 동의했다.
열 세 개의 팀, 서른 명의 랭커와 스무 명의 실력자로 이름 알려진 헌터들.
하영이 이끄는 별동대가 블러드 울프 세 마리와 부딪쳤다.
콰앙! 콰앙!
랭커의 힘은 그야말로 경이 그 자체였다.
오히려 주변에 거슬리는 동료들이 없자, 그들은 자유롭게 블러드 울프의 공격을 봉쇄하고 반격해 나갔다.
‘이대로라면……!’
하영은 다시 한 번 버프의 힘을 강화하며 뒤를 바라보았다.
짧아도 십 분은 충분히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정도면 진형을 다시 짜기는 충분할 터였다.
“정신 차려! 랭커들이 시간을 끌어 줄 동안 진형을 갖춰!”
“서둘러! 정신 차리라고, 이 새끼들아!”
흐름이 변하고 있었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고 있었다.
하영은 검을 휘두르면서,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2차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웨이브에서 살아남으십시오.]
쿠구구구구!
지면이 거세게 울음을 토해 냈다.
“저게…… 뭐야?”
블러드 울프를 상대하던 랭커가 허탈한 듯, 길게 늘어지는 숨을 내뱉었다.
그그그극!
그들의 눈앞에서 블러드 울프 세 마리의 형체가 무너지며 뒤섞였다.
그리고 거대한 피 웅덩이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대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덩치는 월등히 작아졌거늘, 존재감만큼은 한없이 거대해져 갔다.
‘위험해.’
살을 콕콕 쑤시는 위기감에 하영의 표정이 절로 굳었다.
한순간, 형체를 갖추지 못하고 꿈틀대던 핏덩이가 형체를 갖췄다.
늑대라고 하기에는 너무 인간을 닮은,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대하고 기괴한.
머리에는 뿔 세 개가, 손과 발에는 짐승의 발톱이 달려 있는, 하나 분명 새빨간 선혈만이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존재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존재의 머리, 몬스터의 증거인 뿔이 있는 자리에는…… 아주 천천히, 두 개의 뿔이 더 솟아나고 있었다.
[‘Lv.53 블러드 울프’가 ‘Lv.76 블러드리드’로 진화했습니다.]
‘오각……?’
지금껏 등장한 적 없었던 다섯 개의 뿔.
뿔의 개수는 몬스터의 강함을 드러낸다.
그런데…… 다섯 개의 뿔이라니?
그 직후였다.
모두가 충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블러드리드로부터 무언가가 촉수처럼 뻗어 나와 가장 가까이 있던 랭커 하나를 후려쳤다.
퍼엉!
랭킹 78위에 달했던 그였지만, 그는 방어 동작조차 취하지 못하고 얻어맞아 허공에 붕 떠올랐다.
“……!”
지면에 추락한 그에겐 미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즉사였다.
-크흐흐! 드디어!
그때 몬스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깊은 지옥 속에서 들려오는 듯한 거칠고 음침한 소리.
헌터들이 경악했다.
“몬스터가 말을?!”
-이렇게 모습을 갖추게 되었구나. 마침 맛있는 먹잇감들이 준비되어 있군. 내 너희들을 포식하고, 종족의 힘을 되찾겠다!
블러드리드의 등에서 핏빛의 날개가 솟아나 허공으로 치솟았다.
공동의 가장 위까지 솟아오른 블러드리드의 날개가 접혀지는 순간, 블러드리드의 몸이 연합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유성처럼 떨어졌다.
“위험해!”
하영은 넋을 놓고 있는 옆의 여성 헌터를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콰아아아아앙!
충돌에 의한 충격이 사방을 휩쓸었다. 운석이 떨어진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힘이었다.
그 여파에는 랭커도, 일반 헌터도 당해 낼 수 없었다. 그저 모두가 휩쓸려 사방팔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으, 으윽……!”
그리고 그건 하영도 마찬가지였다.
드루이드의 방어 증가 스킬의 발동으로 인해 충격에 의한 여파가 순식간에 줄어들었지만, 그래 봤자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하영의 몸이 허공을 붕 날아 지면에 몇 번이나 처박히며 굴렀다.
“윽, 아…….”
충격의 여파가 사라졌을 때, 하영은 거칠게 숨을 토하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몸의 많은 부분이 망가진 것처럼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을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하영은 힘겹게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모래 먼지가 자욱이 피어올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크윽…….”
다행히 하영이 끌어안았던 여성 랭커는 목숨을 부지한 듯 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녀에게 하영이 힘겹게 기어갔다.
“쿨럭! 괘, 괜찮습니까?”
“하, 하영 씨…… 저는……. 우욱!”
여성 랭커가 구역질을 해 댔다.
몸이 위아래로 몇 번이고 흔들린 탓에 위장이 뒤집힌 듯했기 때문이다.
“어서…… 움직여야…… 윽!”
하영이 표정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구역질을 멈춘 여성 랭커가 하영을 말렸다.
“하영 씨! 안 돼요. 다른 사람들이 할 겁니다. 윽, 하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잖아요! 일단…… 이 먼지가, 가라앉을 때까지만이라도……!”
후두둑!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영과 여성 랭커가 동시에 숨을 멈췄다.
-역시 인간의 피 냄새는 향기롭구나.
“……!”
블러드리드가 하영의 앞에 나타났다.
“크윽!”
하영은 없던 힘을 쥐어짜서 일어나 검을 움켜쥐고, 블러드리드에게 겨눴다.
-크흐흐! 귀엽구나.
하영의 코앞까지 다가온 블러드리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하영은 죽음이 성큼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죽는 건가……!’
몸이 정상이었더라도 상대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은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희망은…… 없었다.
-크하하하! 즐겁구나!
블러드리드의 거대한 발톱이 휘둘러졌다.
하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쉬이이이익! 콰아앙!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먼지를 걷으며 날아와, 블러드리드의 신형을 강타했다.
-크아아아!
콰앙! 콰앙! 콰앙!
뒤이어 후속타가 작렬했다.
그에 블러드리드가 괴기한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하영아-!”
맹수의 포효 같은 외침이 있었다.
모래 먼지를 걷어 내며, 한 사내가 하영의 앞에 우뚝 섰다.
하영은 자신의 이름이 들린 듯한 생각에,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누구……?”
타오르는 듯한 새하얀 광휘를 전신에 휘감은 사내였다.
그 새하얀 빛 때문에 사내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번엔 늦지 않았어.”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반드시 지킬 거야.”
하영은 사내의 말에 의아해했다.
이 사내는 누구기에 자신을 지켜 준다고 하는 것일까.
“이번에는, 꼭.”
빛을 휘감은 사내, 인한이 굳은 표정으로 주먹을 쥐었다.
위이이이이이잉!
응축된 마력이 거친 소리를 토해 냈다.
아니, 응축된 마력이 아니었다.
오러.
그것은 오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