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공략자들 95화>
“허억, 허억…….”
인한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인한은 마치 마라톤이라도 뛴 것처럼 전신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어둠을 밀어내고자 정령술로 허공에 띄워 둔 불꽃이, 인한이 숨을 쉴 때마다 흔들렸다.
“이런 쓸데없는 일에 땀을 흘려 본 게 얼마만인 거야?”
한동안 두드리던 벽에 등을 대고 주저앉은 인한이 숨을 몰아쉬었다.
체감 시간으로 대략 1시간 정도.
인한은 끊임없이 아공간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벌써 1천 포인트에 가까워진 마력 스테이터스였음에도 아공간의 견고함에는 변화가 없었다.
참다못해 손해를 감수하고서 큰 기술을 날려 보았지만, 공간이 미친 듯 요동칠 뿐 큰 변화는 없었다.
‘오러만 익혔더라도 비집어 열었을 텐데.’
인한이 혀를 찼다.
오러는 마력을 육체로 가공해 사용하는 무투가들이 도달하는 최상의 힘이다.
아직까지 클라우스는 자신의 힘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니 인한이 보기에도 미숙해 보이는 아공간 결계가 만들어진 것이겠지.
오러가 있다면 이쯤이야 간단하게 부술 수 있다.
하지만 오러는 마나 스킬 4단계에서 얻게 되는 힘이었다. 마력 스테이터스가 비약적으로 높아지긴 했지만 아직 마나 스킬 3단계인 인한에게는 요원했다.
인한은 벽에 기댄 채 뒷머리로 쿵쿵 두드렸다.
‘덕분에 오히려 마력 운용만 좋아지는군.’
인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이런 상황이 인한에게는 필요했다.
가진 모든 마력과 스킬들을 쏟아부어도 아무런 뒷감당이 필요 없는 공간.
7층에서의 사건 이후 많은 걸 얻고, 또 많은 걸 깨달은 인한이지만, 그것들을 받아들이기엔 만나 왔던 상대들이 전부 빈약했다.
조금 과장해서 지금의 인한이 가진 힘이라면 보스 몬스터도 한주먹감에 불과하지 않으니,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허공에다 대고 수련하려니, 워낙 요란해서 주위의 몬스터를 전부 끌어들일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이 공간은 그런 걱정이 필요가 없었다. 인한이 전력으로 펼치는 마력과 스킬을 받아들여도 깨지지 않았으니까.
거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공간이기에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
전화위복이라면 전화위복이랄까.
7층 이후로 가닥을 잡았던 부분들을 직접 펼쳐 보며 인한은 자신의 힘을 다듬어 갈 수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그 자식이 뭘 할지 모르는데…….”
인한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수련하는 건 좋지만, 이제 그만 나가야 할 때였다.
클라우스처럼 음흉한 놈들은 무슨 짓을 예측할 수가 없다. 거기다 일단 무슨 일이 벌어졌을 때는 수습하기에 너무 늦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 돼. 뭔가 새로운 방법이 필요한데.”
그렇게 공격을 해 댔는데도 이 빌어먹을 공간엔 금이 갈 기미조차 보이질 않는다.
인한이 현재 펼칠 수 있는 최고 위력의 기술을 퍼부었는데 변화가 없다는 것은, 이제까지 한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의미였다.
“대체 뭐가…….”
그렇게 고민하던 인한의 눈에…… 허공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꽃이 보였다.
“……정령술?”
불현듯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인한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마력과 정령술을 합칠 수 없는 건가?”
인한은 바로 실행에 옮겼다.
지금껏 두 힘을 같이 펼친 적은 많다.
하지만 보통, 마력은 위력 자체를 높이는 용도로, 정령술은 부가적인 용도로 사용했다. 검사로 따지자면 쌍검을 사용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 하려는 건 검 두 개를 녹여서 하나의 검으로 재탄생시키는 방법이다.’
얼토당토않는 생각이지만, 또 그렇게 허무맹랑하지도 않다.
정령술과 마나 스킬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정령술은 속성력이라는 모종의 힘을 통해 자연의 화신인 정령이 가진 힘을 끌어다 쓰는 것이고, 마력은 마나 스킬을 통해 자연의 힘인 마나를 가공한 것이다.
거기다 정령과의 첫 계약 때는 마력을 사용하지 않았던가?
웅웅웅-!
인한이 천천히 손을 폈다.
손바닥 위로 새하얀 마력이 피어올랐다. 그러자 주위를 환히 밝히는 백색의 기운 위에 붉은 불꽃이 휘감겼다.
하지만 인한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냐, 이래선 평소와 똑같아.”
지금 상태는 마력 위에 정령술의 불꽃을 덧씌운 것과 마찬가지였다.
“합칠 수는 없나?”
인한이 끙끙대며 다시 마력과 속성력을 운용했다.
이번에는 붉은빛과 백색의 빛이 한데 뒤섞이며 어우러졌다. 하지만 절대 하나의 빛으로 합쳐지지는 않았다.
‘불가능한 일이었나?’
잠시 집중을 풀자 두 힘이 서로를 밀어내며 다시 원 상태로 돌아갔다.
하지만 인한은 이것을 계속해서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미드 코어가 알려 주는 예감과는 조금 달랐다. 오히려 본능적인 개념이었다.
마치 익숙한 행동을 하듯, 데자뷰와 같은 감각과 함께 몸이 멈추지 않고 마력과 속성력을 한데 뒤섞고자 했다.
그렇게 연달아 마나 스킬과 정령술을 운용하던 순간이었다.
-멍청한 자식, 그게 아니란 말이다. 이쪽, 이걸 사용하란 말이야.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들었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기억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를 막고 있던 것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알 수 없는 곳을 향한 향수가, 기억에 없을 지식이 홍수처럼 떠올랐다.
‘그래…… 분명 이렇게…….’
인한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마력을 미드 코어로 이동시켰다.
‘미드 코어는 이렇게 쓰는 게 아니었어.’
미드 코어의 내부로 보내던 마력을, 미드 코어의 외부로 보내 둘러쌌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구(球)가 마치 위성처럼 미드 코어를 중심으로 공전하기 시작했다.
그 공전을 시작으로, 잠자고 있던 미드 코어가 서서히 침묵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속성력이 인한의 몸에 자리한 수많은 자그마한 ‘코어’들로 퍼져 나간다.
마력로에 존재하는 중요한 분기점들.
그 점들에 속성력이 스며들었다.
쿵! 쿵! 쿵! 쿵!
인한의 내부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듯한 소음이 멈추지 않고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위잉!
마치 벌 떼가 지나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인한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던 흰색과 붉은색의 기운이 기어코 합일(合一)되었다.
* * *
이창훈은 울상이 되었다.
“이런 시발…….”
이창훈의 앞에는 블러드 울프의 분열체가 서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이창훈은 힘겹게 블러드 울프의 돌진을 막아 냈다.
그때, 어디선가 외침이 들려왔다.
“분열체는 어차피 1단계야! 금방 제압하면 본체에게 공격을 가할 수 있어!”
“예!”
“어이, 거기! 왜 계속 어리바리 까나!”
“어억! 다리가!”
이창훈은 자연스럽게 넘어지며 은근슬쩍 전선에서 물러났다.
그러고는 눈치를 슬쩍 보다가 뒤쪽 구석에 몸을 숨겼다.
그렇게 뒤에서 장엄하게 전투를 이어 가는 공략자들을 보고 있자니, 이창훈은 문득 인한의 안위가 걱정됐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지. 그 인간만 제대로 했어도 내가 여기 있을 리가 없잖아!’
이창훈은 몇 시간 전의 일을 떠올렸다.
10층 보스존 진입 1시간 전.
인한과 클라우스의 전투를 멀리서 숨은 채 바라보던 이창훈은 인한이 마법진에 휩싸여 사라지자, 무언가 잘못됐음을 감지했다.
‘그 인간 같지도 않은 양반 일이니까 어디 큰일이야 있겠냐마는…….’
그래도 인한이 사라진 건 사라진 것이었다.
이창훈은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자연스럽게 안전지대로 스며들었다.
그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는 건지, 클라우스는 이창훈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렇게 특유의 친화력과 눈치로 원래 연합에 있었던 것처럼 행동하던 이창훈이었지만…… 갑자기 공략이 진행되는 바람에 떠밀리듯 보스존에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그때였다.
콰앙!
무언가가 휙 날아오는가 싶었는데, 한 여성이 날렵하게 바닥에 착지했다.
‘헉! 드, 들켰다!’
이창훈이 몸을 숨긴 바로 옆에 떨어진 여성이 그를 발견하고 한순간 눈을 크게 떴다.
“어? 분명 그때…… 인한 씨와 같이 있던 분?”
“예? 형님을 아세요?”
“그런데 당신이 왜 여기에? 혹시 인한 씨도 이곳에 있는 건가요?”
“형님은…… 어엇! 저기 앞예요!”
“으윽!”
이창훈을 알아본 여성은 다름 아닌 하영이었다.
그녀는 이창훈의 외침과 동시에 뒤를 노리고 달려든 블러드 울프의 분열체를 베어 냈다.
“가, 강하다!”
이창훈은 저도 모르게 외쳤다.
분열체는 본체만큼의 힘이 없다지만, 원래 강한 몬스터인 만큼 분열체도 상대하기 힘들었는데 그걸 단숨에 베어 낸 것이었다.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달의 검 소속의 유하영이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거…… 크흠! 그냥 이창훈이라고 불러 주십쇼.”
이창훈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하영과 악수했다.
도저히 몇십 미터 앞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광경은 아닌 것 같았다.
“인한 씨와 10층에서 같이 있는 걸 봤습니다. 아마 그래서 창훈 씨는 저를 모르실 거예요.”
“아!”
이창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속으론 이를 갈았다.
‘어이고, 형님. 이런 예쁜 여성분이랑도 알고? 배신자!’
귀엽다거나 화려하다기보다는 수수하고 차분한 아름다움을 가진 여성이었다. 목소리도 깊게 울리는 나긋한 목소리였다.
“그보다 안 돌아가셔도 괜찮으십니까?”
“모두 느긋하게 공략하고 있어요. 생각 외로 공략이 순조롭네요. 역시 이 정도 인원이 있으니까 1단계가 힘들지 않아요.”
하영은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말했다.
움직이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인지, 길게 늘어뜨린 흑발을 이마가 보이게 뒤로 질끈 묶은 하영은 건강한 매력이 절로 드러났다.
“어쩌면…… 오늘 결착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하영이 진지한 눈동자로 블러드 울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건 크나큰 오산이었다.
그것이 일어난 것은 2단계로 블러드 울프 공략이 넘어갔을 무렵이었다.
-아우우우우우!
블러드 울프가 돌연 공동이 울릴 정도의 큰 하울링을 토해 냈다.
“으윽!”
“커윽! 이게 뭐여!”
이창훈과 하영이 귀를 감쌌다. 거센 압력이 전신을 짓누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여파는 하울링이 끝난 후에도 이어졌다.
‘이, 이럴 때는 분명……!’
인한이 말해 줬던 것들을 떠올린 이창훈이 빠르게 마력을 운용했다. 몸을 누르던 압력이 한결 줄어든 것을 느낀 이창훈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저, 저, 저게 뭐…….”
이창훈은 눈을 벅벅 비볐다.
눈을 아무리 의심해 봐도 현실은 그대로였다. 착각이나 착시 현상이 아니었다.
“으으…….”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하영도 힘겹게 몸을 일으키더니 정면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이 경악과 충격으로 물들어 갔다.
“저게 대체……!”
-아우우우!
-크르르르!
-컹! 컹!
그곳엔, 세 마리의 블러드 울프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 * *
10층 보스존의 최전선.
스태프를 쥐고 몸을 간신히 지탱하던 클라우스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 시작이다.’
의식이 시작된다.
제물의 의식은 그 이름만큼이나 많은 제물을 먹어 치울 것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이곳엔 제물이 될 재료가 넘치도록 많다.
‘왕이여, 계약은 지켰다. 이제 당신 차례다.’
클라우스의 미소가 점점 더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