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공략자들 94화>
콰앙! 콰앙! 콰앙!
인한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무지막지한 힘이 공간을 뒤흔들었다.
-말도 안 돼!
아공간을 구성하는 건 초등학교 수학 시간에 배울 정도로 간단한 요소다.
가로, 세로, 높이.
이 세 가지를 정신력과 마력에 의한 계산식으로 치밀하게 구성해 전개하는 것이 바로 아공간이다.
아공간은 말 그대로 공간 그 자체이기 때문에 부수려고 해도 부술 수 없다.
그런데 인한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그 세 가지 요소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클라우스는 크게 당황하여 물었다.
-그 힘은 대체 뭐지?
인한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거기 그대로 있어. 금방 부수고 나가서 설명해 줄 테니까.”
-믿을 수 없지만, 허언이 아니군.
그 말을 끝으로, 인한은 멀리서 들려오던 클라우스의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느끼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자, 그건 그렇고…….”
인한이 목의 관절을 뚝뚝 꺾으며 중얼거렸다.
“이걸 어떻게 한다.”
인한은 보이지 않는 벽을 툭툭 건드렸다.
클라우스에게 호언장담한 것과는 다르게, 공간 마법에 의해 생성된 아공간을 부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력이란 단순 물리력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고도의 에너지다. 그 마력으로 아공간의 세 요소 중 하나만 무너뜨리면 쉽게 이 공간을 비집고 탈출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뒤에 인한이 방전되어선 죽도 밥도 안 된다.
인한은 한숨을 푹 내쉬며, 눈살을 찌푸렸다.
* * *
“말도 안 되는군.”
클라우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공간 마법을 익히기 시작한 지 벌써 2년째다. 그리고 그 2년의 세월의 총아가 바로 인한을 가둔 ‘아공간 결계’였다.
지금껏 아공간 결계에 한번 가둬진 상대는 클라우스가 마법을 해제하고 싶을 때가 아니면 제한 시간이 지날 때까지 아공간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그건 육룡 중에서도 가장 기이한 힘을 다루는 4위도 마찬가지였다.
씨앗의 힘과 클래스의 특성, 긴 시전 시간과 다량의 각석이 소모되는 스킬이지만, 그만큼 위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그런 아공간 결계를 인한이 흔들고 있는 것이다.
지금껏 저기에 갇힌 존재들 중 힘으로 결계를 열려고 한 자들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전부 무의미한 발악에 불과했다.
그런데 인한의 공격들은 확실하게 아공간을 뒤흔들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놔뒀다가는 정말 결계를 부수고 나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클라우스의 머릿속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어떻게 될지 모른다. 도대체 저놈은 뭐지?’
클라우스의 표정에 낭패감이 서렸다.
계산되었던, 계획되었던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다. 그것도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자그마한 하나의 변수에 의해.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그의 비서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선 클라우스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둘러야겠다. 나중에 군소리가 나오더라도 당장 공략을 시작해야겠어. 놈은 보스존을 끝내는 방법조차 알고 있었어. 만약에라도 놈이 결계에서 뛰쳐나와 보스존에 도전해 버리면 모든 게 틀어진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자신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급히 몸을 돌려 클라우스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나갔다.
기막은 인한이 아공간에 갇히는 순간 해제되었다.
클라우스는 실로 오랜만에 다급함과 초조함을 느끼며 연합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안전지대를 향해 달려갔다.
‘변수는 처리했다. 이제 결과만 제대로 도출해 내면 돼. 그 퀘스트는 꼭 성공해야만 한다. 저놈이 멋대로 보스존을 끝내게 둘 수는 없어.’
클라우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클라우스 씨?”
안전지대의 입구쯤에서 클라우스의 눈에 하영이 들어왔다.
그는 순간 눈가를 찌푸렸다가, 빠르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분명, 유 팀장님의 여동생분이셨지요.”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왜 그렇게 다급하게 뛰어 오세요? 무슨 일 있나요?”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괜찮으시다면 유 팀장님을 제 텐트로 불러 주시겠습니까.”
“오빠를요?”
“부탁드립니다.”
“예? 아, 예 뭐…….”
클라우스는 그 말을 끝내고 다시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영이 눈을 껌뻑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저런 사람이었나?’
젠틀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었는데, 왠지 지금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아, 오빠를 불러 달라고 했지.’
한동안 사람들을 붙잡고 무언가를 얘기하는 클라우스를 바라보던 하영이 안전지대 안으로 들어섰다.
* * *
“지금 바로 말씀이십니까?”
매지션즈를 포함하여, 연합에 속해 있는 모든 팀의 팀장들이 모인 자리.
유찬웅이 물었다.
“우리가 보스존 입구에 도착한 지 아직 3, 4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빠르게 이동했기 때문에 상당히 지친 상태구요.”
“공략까지 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디데이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한번 손발을 맞춰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말씀드린 겁니다.”
클라우스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클라우스가 팀장들을 소집한 명목은 단순했다. 충분히 휴식을 취했으니, 연습 삼아 보스존에 도전해 보자는 것.
이 정도로 많은 숫자의 헌터들이 한꺼번에 도전하는 것은 유례없는 일이다. 손발이 꼬였다가는 동료를 해칠지도 몰랐다.
‘물론 일리 있는 말이지만…… 너무 급해.’
유찬웅이 미간을 찌푸렸다.
유찬웅이 말했다시피, 13개 팀의 헌터들은 보스존까지 이동하느라 상당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집단의 수가 많으면 그만큼 공략 속도는 빠르지만, 대신 몬스터들에게 노려지기도 쉽다.
10층 마을에서부터 메인 던전을 돌파하고 보스존의 입구에 다다르기까지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한 그들이었다.
아무리 디데이가 얼마 남지 않아 급하다지만, 그런 만큼 돌아가야 하는 일도 있는 법이었다.
‘느낌이 안 좋은데.’
유찬웅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 때면 저도 모르게 하는 습관이었다.
“그럼 거수로 정하도록 할까요.”
클라우스가 말했다.
오늘따라 묘하게 그가 초조하게 진행하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직 제대로 된 의견 타진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은데……. 원래 클라우스라면 하지 않을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흐음…… 전 찬성입니다.”
호전적으로 유명한 헌터 팀, 철벽 팀의 팀장이 말했다.
“어차피 공략해야 할 일입니다. 굳이 시간을 끌 필요가 없죠.”
“저도 찬성입니다.”
“휴식은 일단 손발을 맞춰 본 후에 해 봐도 되겠죠. 이 정도의 인원이 모였는데 뭐가 일어나기야 하겠습니까?”
“저도 찬성입니다. 휴식은 일단 손발을 맞춰 본 다음에 해도 될 것 같은데요. 이 정도의 인원이 모였는데 설마 뭐가 일어나기야 하겠습니까?”
다음으로 찬성을 표한 것은 붉은 수염 팀이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전 찬성입니다.”
“저는 반대입니다. 너무 급해요.”
그렇게 한동안 거수가 진행됐다.
유찬웅은 클라우스의 얼굴을 응시했다.
‘묘하군.’
애초에 이 자리 선정부터 그러했다.
원탁이 아닌, 기다란 테이블이다. 당연히 상석이 존재하고, 거기에 클라우스가 앉아 있다.
팀장들에게 클라우스가 연합체의 수장이냐고 물어보면 아니라고 고개를 젓겠지만, 실질적인 분위기는 클라우스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순간, 유찬웅은 신경을 건드는 불쾌감의 실체를 눈치챘다.
‘왜 이걸 지금 안 거지?’
연합을 처음 제안한 것도, 분위기를 주도한 것도 클라우스이기에 그를 중심으로 연합이 꾸려지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안 좋다.
클라우스는 결정 사항이 생기면 무조건 거수로 결정한다. 듣기에야 좋은 일이지만,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을 질 사람이 없게 되는 구조이기도 하다.
실질적인 수장이 있지만, 또한 없는 상황.
문제가 생겨도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상황.
‘거기다 만약에 이 팀들 중 이미 클라우스에게 동조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분위기를 마음대로 주도하는 건 어린아이 손바닥 뒤집는 것만큼 쉬워.’
아니, 이미 누군가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클라우스의 길드 제의를 받은 팀장 중에서 그런 이가 없을 거라 낙관하기에는, 세상은 그리 녹록치가 않았다.
이들 중에 그런 자들이 있을 게 틀림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유찬웅은 굳은 표정으로 좌중을 훑어보았다.
그렇다면 그건 누구일까. 가장 먼저 찬성한 철벽 팀의 팀장? 그다음으로 은근하게 분위기를 만든 붉은 수염 팀의 팀장? 아니면 둘 다?
만약 클라우스가 나쁜 마음을 품고 있다면, 그 누구도 그걸 막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문제가 생겨도 그걸 주도했을 클라우드는 혼자 안전할 것이다.
‘대체 언제부터 휘말린 거지?’
지금뿐만이 아니다.
그전부터 10층의 대소사는 모두 매지션즈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니 이곳에서 빠져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달의 검 팀이 연합에서 빠져나가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늦었더라도 빠져나가야 할 것인가. 손해나 평판이 나빠질 것을 감수해야 하나.
그도 아니면 너무 과민한 반응이고, 사실은 별것도 아닌 일일까.
“…….”
유찬웅은 관자놀이를 짚었다. 깊은 수렁에 빠진 기분이었다.
들이마시는 공기가 끈적이며 달라붙는 것 같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 때, 유찬웅은 좌중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려 있음을 깨달았다.
“어디 안 좋으십니까? 유 팀장님?”
클라우스가 사람 좋은 얼굴을 한 채 물어 왔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제 유 팀장님만 남았습니다.”
유찬웅의 표정이 굳었다.
유찬웅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기권…… 하겠습니다.”
“그럼 찬성 9표, 반대 3표, 기권 1표인 것이군요? 그럼 30분 뒤에 보스존에 진입하도록 하지요.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각자의 팀원들을 잘 이끌어 주십시오.”
“수고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테이블에서 일어서서 나가기 시작했다.
유찬웅은 멍하니 빈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클라우스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잘 부탁드립니다, 팀장님.”
클라우스는 그 말을 끝내고 자리를 벗어났다.
유찬웅이 잘근 입술을 씹었다.
* * *
“진입한다!”
보스존의 문이 열리고, 연합이 순식간에 안으로 들어섰다.
어두컴컴했지만, 연합이 들어선 순간 벽에 걸린 횃불들에 순차적으로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꿀꺽.”
누군가 침을 삼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던전 공략은 공략자 수가 많다고 쉬운 게 아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위험할 수도 있다.
특히 블러드 울프처럼, 괴기하며 강력한 몬스터일 경우에는.
-크르르르르…….
횃불이 전부 켜졌을 때, 커다란 공동의 안쪽 핏빛 웅덩이에 파문이 일어났다.
-크르릉!
울음소리와 함께 점점 거칠어지던 파문은 서서히 하나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머리가, 그다음에는 몸통과 다리가 나왔고, 마지막에는 꼬리가 돋아났다.
5층 건물 정도의 덩치를 지닌 몬스터, 블러드 울프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가장 후방에 서 있던 클라우스는 그걸 바라보며, 작게 읊조렸다.
“제물의 의식, 발동.”
우웅!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짧은 진동이 보스존을 감쌌다.
공략을 앞둔 헌터들은 그것이 블러드 울프의 울음소리라고만 여겼다.
클라우스는 스태프를 꺼내 들고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