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공략자들 91화>
‘유하영.’
인한은 마른침을 삼켰다.
수풀을 헤집고 하영이 다가왔다. 긴장을 풀면 저도 모르게 달려가서 끌어안고 싶어질 것 같았다.
“아, 당신은……?”
“안녕하십니까.”
“분명 최인한 씨, 맞죠?”
유하영이 싱긋 웃으며 다가왔다.
가슴 한편이 욱신거렸다.
“엄청난 우연이네요. 이 넓은 필드에서 마주치다니 말이에요.”
“10층의 메인 던전으로 가는 길은 하나뿐이니까요.”
인한은 저도 모르게 굳은 어투로 대답했다.
그런 기색을 눈치채고 하영이 살짝 표정을 굳혔다.
“혹시 불편하셨나요? 수련 중이신 것 같았는데.”
“……아닙니다. 이제 끝낼 참이었어요.”
“다행이네요.”
배시시 웃는 하영의 미소를 보며, 인한은 짙은 괴리감을 느꼈다.
자신이 아는 그녀는 저런 식으로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의 하영의 미소는, 짙은 피로감과 절망에 지쳐 있는 쓴웃음이 아니라 그 나이 또래에 걸맞은 밝은 미소였다.
‘그래, 그녀에겐 아직 불행이 찾아오지 않았구나.’
인한이 하영과 처음 만나기 전까지, 하영은 두 번의 절망을 마주했다.
첫 번째는 오빠의 죽음이었다.
3차 몬스터 웨이브는 오래 지나지 않아 해결됐지만 초기 진압에 실패해 피해를 남겼다.
그때 그녀의 하나 남은 가족인 친오빠가 죽는다.
그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사건이 찾아왔다. 몸을 담은 철혈 길드도 공략 중 전멸. 탑은 그녀의 가족과 동료를 앗아갔다.
그녀의 삶은 잿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해태 길드가 그녀를 보듬어 줬다고 한들, 그녀의 좌절과 절망은 쉽게 지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하영이 갑자기 주위를 둘러보다 신기한 듯 중얼거렸다.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빛이 나는 게 보였어요. 신기해서 따라 와 본 거였는데…….”
“월광초의 가루라는 아이템입니다.”
땅에 떨어진 가루를 한 움큼 쥐어 하영에게 내밀었다.
하영이 월광초 가루를 받아 들더니 신기한 듯 눈을 반짝였다.
사방에 뿌려진 월광초 가루는 달빛을 닮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연이겠지만, 참 공교로운 타이밍이었다.
회귀 전에, 그녀와 처음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것도 월광초의 꽃밭 위에서였으니까.
“인한 씨는 메인 던전으로 가시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럼 하영…… 씨도?”
“소식을 들으셨는지 모르겠네요. 이번에 10층의 공략자들 팀이 연합을 이뤘거든요. 대규모 공략이 이루어질 거예요.”
“그렇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인한은 도대체 하영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잔뜩 긴장한 채 한 마디 한 마디 생각하면서 말하려니, 말도 조금 더듬는 것 같았다.
그때, 그녀에게서 수선화 향기가 났다.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인한은 몽롱한 상태로 과거의 자신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입에 담았다.
“이건…… 무슨 향인가요?”
“향? 아, 저한테서 나는 냄새요? 수선화 향이에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죠.”
하영은 정말 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얻은 클래스의 영향이에요.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매일 몸에서 꽃이나 풀 향기가 나더라고요.”
알고 있다.
히든 클래스, 드루이드.
서포터 포지션의 클래스지만, 그녀는 탁월한 근접 전투 센스와 합쳐 공격적으로 드루이드의 스킬들을 사용했다.
버프형 스킬을 자신의 몸에 부여해 펼치는 검격은 정말 아름다웠다.
“좋은 향이네요.”
“고마워요.”
다시금 정적이 내려앉았다.
하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인한 씨는…… 자이언트가 맞나요?”
“별로 좋아하는 별명은 아니지만, 맞는 것 같더군요.”
인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본 하영이 조금 밝아진 말투로 말했다.
“확실히, 자이언트랑은 별로 어울리지 않네요. 키가 크시긴 하지만 소문처럼 크지는 않고, 팔도 세네 개가 달린 것도 아니고요.”
“그렇게까지 소문이 나 있었습니까?”
“네, 제가 들은 건 더 엄청났는데요? 세 쌍의 팔을 가졌고, 눈은 세 개고, 키는 몬스터만큼 큰 데다 피부는 쇠처럼 단단하고…….”
“……그만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우울해질 것 같네요.”
“풋!”
“왜 그러시죠?”
“아니, 아니에요. 죄송해요, 웃어서.”
하영이 미소를 지었다. 풀이 죽은 인한의 모습이 대형견처럼 보여서였다.
“인한 씨, 혹시 계속 혼자 활동하실 생각인가요?”
“네, 아무래도 그럴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음……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번 저희 연합에 힘을 보태 주실 수 있겠어요? 인한 씨의 실력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어요. 이 광경을 보면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겠죠.”
하영은 인한이 새로운 기술을 시험한 주변을 가리켰다.
그곳은 폭탄이라도 터진 듯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인한 씨라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3차 몬스터 웨이브도 얼마 안 남았어요. 힘이 있는 사람의 손이 하나라도 더 필요해요.”
하영의 눈이 굳은 의지를 보였다.
과연, 지금 시대에 이만큼의 의지를 보이는 사람이 있을까.
탑은 경제 활동과 정치 활동을 위한 좋은 소재였다.
헌터들은 돈을 벌기 위해 탑을 오르고, 지구에 있는 이들은 더 많은 무력을 보유하고 더 많은 힘을 가지기 위해 헌터들을 탑에 밀어 넣는다.
정말 검은 탑이라는 재앙을 멈추게 하고자 탑을 오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영이는 언제나 그랬지.’
그녀는 남자보다 더 강한 용기와 굳센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영의 말에 인한은 마음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여기서 이걸 받아들인다면, 인한은 하영과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될 터였다.
하지만 인한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하영 씨.”
“아…….”
“전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그렇……군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하영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럼, 이번 10층도 혼자 도전하실 생각이세요?”
“그럴 것 같군요.”
“10층의 보스인 블러드 울프는 정말 이질적인 보스 몬스터예요. 혹시 클리어할 수 없을 거 같다면…… 저희와 힘을 합쳐요.”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100층을 제외한 수많은 층.
그 수많은 층의 공략법을 인한은 전부 숙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네, 알겠습니다.”
인한은 그렇게 답했다.
그날 곱린이의 코골이를 들으며 잠에 들었을 때.
인한은 오랜만에 꿈을 꿨다.
-꼭 네가 탑을 무너뜨려 줘.
얼마나 많이 되뇌었던 문장인지.
그 말을 들은 지 십수 년이 지났는데 잊히지가 않았다.
-일어나. 그리고…… 웃어야 해.
* * *
한 줄기 벼락이 떨어졌다.
-그리야아아아…….
일반적인 오크의 몇 배는 거대한 체구의 오크가 전신이 새까맣게 탄 채로 무릎을 꿇었다.
10층 필드의 몬스터, 오크 광전사였다.
쓰러지는 오크의 앞에는 금발의 벽안의 사내가 있었다.
나이는 대략 30대 중반. 지팡이보다는 둔기에 가까운 두꺼운 스태프를 어깨에 걸친 그는 권태롭게 중얼거렸다.
“이제 이 스킬도 익숙해졌군.”
일반 헌터 두세 명은 달라붙어야 처리할 수 있는 몬스터를 일격에 처리한 사내.
현 검은 탑 유일한 마법사 클래스의 헌터, 클라우스였다.
“보고해.”
“예.”
클라우스가 몸을 돌려 걸어가자 한 여성이 따라붙었다.
“2위 레오 뒤보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얼마 전 7층에서 용의 협곡 깊숙한 곳에 킬러들의 본진이 있다는 소문이 들었는데, 확인해 본 결과 큰 화재가 있었던 흔적이 있었습니다. 4위인 텐무바이는 세력을 키우는 데 집중하는 것 같습니다. 5위와 6위는 며칠 전 9층과 8층의 필드에서 목격된 후 정보가 없습니다.”
여성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정보는 현 검은 탑 최강자들이라 불리는 육룡에 대한 정보였다.
다만, 한 명이 부족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검은 탑 랭킹 1위, 지상 최강의 남자라 불리는 헌터.
발터 에스키엘이었다.
“그자는?”
“종적이 묘연합니다. 10층 땅의 돌에서 모습이 보였습니다만, 그 뒤로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알 수 없군. 그놈은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건지…….”
클라우스가 낮게 중얼거렸다.
여성이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저, 회장님.”
팀장, 혹은 리더가 아니라 회장이란 이름이었다.
클라우스가 눈을 돌려 여성을 바라보았다.
“정말…… 이대로 유지하실 생각이십니까?”
“후후, 뭘 말하는 거지?”
여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회장님은…… 이미 10층을 돌파할 방법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 하지만 현재 상태는 유지되어야 해. 아직 적당한 인원이 모여지지 않았다. 때를 맞춰야 하지.”
“하지만 만약 3차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면…….”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
“……그렇군요.”
클라우스의 말에 잠깐 눈이 흔들린 여성이었지만, 곧 납득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둘은 공략자들의 연합이 있는 안전지대까지 왔다.
매지션즈의 이름 아래에 모인 헌터 팀들은 현재 같이 생활하며, 선결되어야 하는 과제인 메인 던전 클리어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 정도 인원이라면 내일이면 보스존에 도착할 것 같았다.
안전지대를 응시하는 클라우스의 눈빛이 탐욕으로 빛났다.
한동안 그러고 서 있던 클라우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따로 더 보고할 내용은?”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뭐지?”
“자이언트라고 아십니까?”
“자이언트? 그 솔로로 활동한다는 헌터 말인가?”
“예, 그자가 10층에 도착했다는 소문입니다.”
자이언트는 아래층의 헌터들보다 위층의 헌터들에게 더 알려진 이름이다.
엄청난 속도로 검은 탑을 오르는 괴물적인 존재.
칼에 베여도, 총에 쏘여도, 하물며 대포에 맞아도 상처 하나 입지 않는다는 소문은 이미 소문이 아니라 현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래 봤자 랭커도 아닌 어중이떠중이일 텐데.”
“그렇긴 합니다만…….”
랭커가 아니라면, 혼자서 보스존을 도전해 클리어할 수 있지도 않다.
“확실히, 거슬리기는 해.”
클라우스가 눈가를 찌푸렸다.
아무리 9층까지의 보스와 10층의 보스는 급이 다르다고 하지만, 놈이 지금껏 보인 파격적인 행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거기다, 이 탑에는 예외가 너무나 많다.
그가 지니고 있는 ‘씨앗’도 그러하다.
만약 놈이 모종의 능력을 가진 자라면 일부러 정체를 숨기고자 랭커가 안 됐을 수도 있다.
“기분이 나쁘군.”
클라우스가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파악할 수 없는 예외성을 지닌 모든 것을 싫어한다.
계획과 계산, 그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탑에선 그의 계획과 계산을 무너뜨리는 요소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럴 때 클라우스가 취하는 방법은 하나였다.
자신의 계산을 망가지게 하는 요소를 제거하는 것.
“정보를 알아 와. 병력을 풀어라.”
“현재 대부분의 병력이 저곳에 있습니다.”
여성은 안전지대에 있는 매지션즈의 본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클라우스가 대답했다.
“숨겨 놨던 놈들을 풀어. 어차피 놈의 행보를 보면 메인 던전으로 올 생각이다. 던전 내부와 외부에 인원을 배치해라. 지금은 신뢰를 얻어야 해. 저기에 있는 매지션즈의 병력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순 없다.”
“알겠습니다.”
그 순간, 여성의 몸이 흐릿해지며 공기 중에 녹아들었다.
어느 순간 어둠과 하나가 된 여성은 발자국 소리도 남기지 않은 채 모습을 감췄다.
클라우스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한동안 그렇게 감고 있던 클라우스가 눈을 뜬 순간, 그의 표정은 마치 가면을 쓰듯 바뀌어 있었다.
은은한 미소를 띤 채 호선을 그리는 눈을 가진,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사내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