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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자들-89화 (89/266)

# 89

<공략자들 89화>

반나절의 휴식 시간을 가진 뒤, 인한과 이창훈은 필드로 들어섰다.

10층의 필드는 초원이었다.

지구로 치자면 몽골과 비슷한 환경이다. 싸늘한 기온, 드넓은 초원, 건조한 공기와 무수히 많은 고원 지대까지.

다른 점이 있다면 돌아다니는 생물이 늑대나 사슴이 아니라 몬스터들이란 점일까.

“휘유! 장관이구먼.”

이창훈은 주위를 둘러보며 휘파람 소리를 냈다.

인한이 그걸 보고 피식 웃었다.

하긴 마천루의 숲에서 지내 온 도시인들에게, 지평선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펼쳐진 초원은 장관이라면 장관일 것이다.

“그래서 형님, 어디로 가실 겁니까? 바로 메인 던전까지 달리실 겁니까?”

“아니, 오늘은 들를 곳이 있어서.”

10층까지 왔으니, 이제는 새로운 정령과 계약할 생각이었다.

사실, 이전 층에서도 가능하기는 했지만 굳이 여기에 올 때까지 미뤄 뒀던 이유가 있었다.

정령석은 언제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긴 하지만, 되도록 해당 정령의 영향력이 큰 지역에서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물의 정령석일 경우엔 바다나 강에서, 흙의 정령석일 경우엔 산이나 모래밭 같이 말이다.

그리고 바람의 정령석은 당연하게도, 바람이 많이 부는 지대면 좋다.

둘은 반나절 정도를 이동했다.

인한도 이창훈도 일반인을 초월한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빠르게 뛰어갔다.

“헉! 헉! 형님, 여기 처음 오시는 것 아니십니까? 어떻게…… 허억! 하는 것만 보면 한 번 와 본 사람처럼…… 아이고, 숨 차라.”

족히 20킬로미터는 달린 참이었다.

인한은 잠시 멈춰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맞는 것 같긴 한데.’

인한은 어렵게 기억을 떠올렸다.

5층의 대폭포, 10층의 대수림.

회귀 전에 정령사 클래스 획득 위치와 함께 나왔던, 정령과 계약하기 좋은 장소들이었다.

유난히 정령의 힘이 많이 집약되는 공간. 대수림도 그 중 하나였다.

다만 인한도 직접 가 본 적은 없고, 방향과 이정표가 되는 지형들만 기억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확실치가 않았다.

인한은 이윽고 고원 지대로 들어섰다.

넓은 풀밭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인한의 눈앞에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은 침엽수들이 가득한 숲이 나타났다.

‘찾았다.’

인한은 지상에 가득한 속성력을 느꼈다.

충만한 대지의 힘과 시원한 바람의 힘.

바람과 불의 힘이 미약하지만, 이곳은 충분히 자연의 힘이 넘쳐흘렀다.

인한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점점 더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쯤이었다.

넓은 공간이 나타나고, 공기가 달라졌다.

[타락스의 대수림에 입장하셨습니다.]

[일시적으로 정령과의 교감도가 100% 상승합니다.]

[일시적으로 정령의 힘이 100% 상승합니다.]

[무수히 많은 반정령이 당신을 반깁니다.]

[새로운 친구를 맞이해 보세요.]

한 발자국 내디뎠을 뿐인데 전혀 다른 세계에 들어선 듯한 느낌이었다.

풍경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곳곳에 높이 뻗은 침엽수들이 있었고, 단층 구조의 넓은 공터가 계단처럼 이어져 있었다.

다만, 공기가 맑다 못해 짙게 느껴졌다. 공기 중의 마력 또한 보통의 공간보다 두세 배는 많았다.

인한은 숨을 들이쉬고 마실 때마다 체내에 마력이 충만하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우, 아우.”

이창훈도 이제 마력을 느끼기 때문인지 호흡이 조금 힘들어 보였다. 아직 3단계에도 들어오지 못한 탓일 터였다.

“마나 스킬을 운용해. 그럼 조금 편해질 거다.”

“커흡, 예, 예…….”

눈을 질끈 감고 식은땀을 뚝뚝 흘리던 이창훈이 곧 눈을 떴다.

“어우, 진작 가르쳐 주시지. 훨씬 편하네요. 대체 여긴 뭡니까?”

이창훈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인한은 대답 대신 슬쩍 웃고 말았다. 아직 조금 답답함이 느껴지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이창훈에게 도움이 될 것이었다.

우웅!

그때, 인한과 이창훈의 앞에 하얀 빛무리가 땅에서부터 떠올랐다. 클리터의 대폭포에서 봤던 반정령들이었다.

곳곳에서 피어오른 반정령이 사방을 날아다녔다.

“와…… 진짜 이게 뭐다냐…….”

이창훈은 탄성을 지르며 반정령들에게 손을 뻗었다.

반정령들은 부드럽게 이창훈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형님, 이게 다 뭡니까?”

“반정령이라고 한다. 아직 정령이 되지 못한 놈들이지.”

인한이 툭 던지듯 말했다.

“거기 앉아서 마나 스킬 수련이나 하고 있어. 금방 올 테니까.”

“어디 가시는데요? 저도 가면 안 됩니까?”

또 뭔가 얻어 낼 수 있을까 싶어서 이창훈이 인한을 붙들었지만, 인한은 단호했다.

“안 돼.”

입을 삐죽이는 이창훈을 뒤로하고, 인한은 밑으로 점점 더 깊숙이 들어갔다.

깊이가 깊어질수록 반정령의 수도, 마력의 농도도 점점 짙어져 갔다.

-쉬익!

그때, 샐러가 의념을 보내왔다. 나오고 싶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인한은 바로 샐러를 소환했다.

화르륵!

작은 도마뱀 같던 샐러는 이제 성장을 거듭해 인한보다 덩치가 커졌다.

-쉬이익! 시익!

샐러는 즐거운 듯 사방을 뛰어다녔다.

반정령들이 그런 샐러의 뒤를 옹기종기 모여 따라갔다.

인한은 그 모습을 잠시 살피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곧 인한은 대수림의 가장 깊은 곳, 은은한 빛에 휩싸여 있는 곳에 들어섰다.

‘이제 시작해 볼까.’

인한은 바람의 정령석을 꺼냈다.

그것은 녹색의 투명한 빛을 띠고 있는 주먹만 한 돌이었다.

분명 생김새는 돌이건만, 잡고 있는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세차게 부는 바람을 손에 쥐고 있는 기분이었다.

우웅!

인한이 정령석을 꺼낸 순간, 반정령들이 인한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정령석의 응집된 속성력에 이끌린 것이다.

‘미안하지만 이번엔 너희들과 계약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인한은 바람의 정령석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화악!

그러자 정령석이 흩어지며 한 줄기의 거센 돌풍이 되어 인한을 휘감았다.

공기가 있으면 바람도 있다.

바람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바람의 존재를 느끼지만 손에 쥘 수는 없다.

자유.

바람은 자유로움을 의미했다.

‘이게 바람의 정령.’

우웅!

인한은 무아지경 속에서 전신에 바람을 받아들였다.

온몸에 피 대신 바람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몸속에서 바람의 속성력이 가득 차올랐다.

그때.

-이 사람, 우리를 끌어들여.

-맛있어 보여.

-이 사람하고 친구할까?

-내가 할래! 내가! 내가!

-이 사람은 이미 친구가 있는 거 같은데?

-몰라, 몰라! 친구! 내가 할래!

-아직 날 받아들이기엔 부족하군.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들이 인한의 귓가에 들려왔다.

어린 아이 같은 목소리, 관록이 느껴지는 목소리, 청년의 패기가 느껴지는 목소리…….

정령들이었다.

아직 인한과 계약하지 못한 정령들은 인한의 눈에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그저 돌풍에 섞여 쉴 새 없이 의념만 쏟아 낼 뿐이었다.

-하나 묻고 싶다.

그런데 그 의념을 뚫고 한 줄기 목소리가 인한의 귀에 꽂혔다.

-너에게선 나와 같은 고대의 향기가 난다. 헌데 너는 그 정신도, 힘도 연약하기만 하다. 하물며 순수한 정령들의 친구도 아니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확실한 자아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

그 존재감은, 단연 수많은 정령들 사이에서도 압도적이다. 고작 C-급의 정령석을 통해 접촉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만약 계약할 수만 있다면……!’

이 정도의 존재감은 상위 정령이나 정령왕급이었다.

인한이 눈을 빛냈다.

“……나도 모른다. 하지만 네가 나와 계약을 한다면 알 수 있을지 모르지.”

대놓고 끌어들이는 인한의 말에 정령이 유쾌하다는 듯 말했다.

-솔직하군. 나는 네게서 인연을 느낀다. 어쩌면 오랜 옛날, 모종의 안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내가 너와 계약을 하려면 나의 격을 몇 단계나 낮춰야 할지 모르겠군. 너는 너무나도 연약하니까. 그러니 묻겠다. 너는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지?

인한은 속으로 당황했다.

정령과의 계약이란 5층에서 샐러와 계약한 것처럼 일방적인 것이다.

정령이 인한을 받아들이면 하는 것이고, 아니면 실패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건을 물어 오다니?

“넌 뭘 원하지?”

-모르겠다. 나는 이곳에서 이미 충만하다.

인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기가 분수령이다. 이곳에서 인한이 취하는 방식에 따라 계약의 여부가 결정된다.

‘충만하다.’

인한은 정령이 한 말을 떠올렸다.

그 말이 걸렸다.

인한이 느낀 바람의 성질은 정체되어 충만함을 느끼는 존재가 아니다.

“자유를 주지.”

-음?

“여기선 넌 멈춰 있을 뿐이야. 나랑 같이 어디든 돌아다녀 보자.”

-…….

정령의 의념이 흐트러지는 게 느껴진다.

-하하하!

그러던 정령이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소리와 함께 갑자기 몰아친 힘의 여파에 인한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좋다! 너와 계약을 하도록 하겠다!

[바람의 고대 정령 ‘실리암’이 계약을 받아들였습니다.]

[‘실리암’의 격이 계약자와 맞지 않습니다.]

[‘실리암’의 힘이 다수 봉인됩니다.]

[패시브 스킬 ‘정령술’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패시브 스킬>

[정령술]

[등급 : B]

[숙련도 : Lv.9 (23.14%)]

[효과: 정령을 다룰 수 있게 됩니다.]

[계약 정령]

1. 샐러

2. 실리암

* * *

이창훈은 마도의 길을 연마하고 있었다.

‘흐음…… 마력로라…….’

현재 이창훈이 하고 있는 건 마력에 흐름을 부여하는 일이었다.

축적하는 건 성공했고, 사용도 할 수 있었지만 아직 흐름을 부여하는 것은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크아악! 어떻게 물에 흐름을 부여하라는 거야?”

이창훈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신음 소리를 흘렸다.

이창훈에게 마력은 물과 같은 존재였다.

물은 인간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다.

손이나 발로 분탕질이야 칠 수 있겠지만, 결국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기 마련이다.

“아, 몰라!”

이창훈은 땅바닥에 털썩 누웠다.

-쉬익?

-샤악!

그런 이창훈의 옆으로 곱린이와 리자가 다가와서 기웃거렸다.

그러고 보면 마력이 강해진 후로는 테이밍된 몬스터의 지능이 더 높아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 곱린이는 때때로 심심하면 칼이나 활로 장난까지 친다.

이창훈은 곱린이를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야, 너 일로 와 봐.”

-키엑?

이창훈의 부름에 곱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다가왔다.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이 새끼들은 생긴 게 참…….’

뭐랄까, 돼지와 굼벵이를 섞은 느낌이랄까.

이창훈은 벌떡 일어나 곱린이에게 말했다.

“야, 너 내 말 따라 해 봐.”

-키, 커 캐…….

곱린이는 혀를 놀렸지만 비슷하게조차 따라 하지 못했다.

“아, 그럼 한번 수학을 가르쳐 볼까…….”

이창훈은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숫자를 적으려다가 관두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뭐 하고 있는 거냐, 몬스터 상대로. 됐다.”

이창훈이 손을 휘휘 젓자 곱린이가 다시 몸을 돌려 리자와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응?’

그런 곱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창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쟤 뿔이 좀 얇아졌나……?’

곱린이의 머리, 몬스터의 증거인 뿔의 크기가 얇아진 것처럼 보였다.

그때였다.

“어억!”

휘이익!

갑자기 불어온 거센 돌풍에 이창훈의 몸이 붕 떴다가 그대로 땅바닥에 추락했다.

“에, 퉤퉤!”

잔뜩 흙을 먹은 이창훈이 혀를 쭉 내밀고 흙을 털어 내다 눈을 커다랗게 떴다.

덩치가 자신만 한 거대한 매가 이창훈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허, 허억!”

이창훈이 다급하게 곱린이에게 활을 쏘게 했다.

하지만 곱린이의 화살은 매의 몸을 통과해 하늘로 올라갈 뿐이었다.

“생각 외로 장난기가 많은 모양이네.”

그때.

멀리서 천천히 인한이 다가왔다.

인한의 옆에는 붉게 빛나는 갈기를 휘날리는 늠름한 사자가 있었다.

“서, 설마 이거 저, 정령입니까?”

이창훈이 천천히 땅에 내려앉는 매를 보며 물었다.

인한은 씨익 웃었다.

인한에게 두 개의 정령이 생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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