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자들-86화 (86/266)

# 86

<공략자들 86화>

“태호 형님?”

거기엔 임태호가 서 있었다.

큰 키에 근육질의 육중한 몸매, 거기다 그 몸매만큼이나 두꺼운 갑옷을 두른 임태호가 씨익 웃었다.

‘아차.’

인한은 서둘러 샐러를 들어가게 했다.

다행히 모닥불의 빛 때문에 샐러가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게 얼마만이냐!”

임태호가 버럭 소리를 치며 인한의 등을 퍽퍽 두들겼다.

일반인이었으면 단말마를 질렀을 공격(?)이었지만, 인한은 밝은 표정으로 임태호를 반겼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형님. 절 기억하고 계셨네요?”

“어찌 잊겠냐! 그래, 어떻게 잘 지냈냐? 벌써 8층에 올라온 거야?”

“저야 잘 지냈습니다. 형님은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나도 올라온 지 얼마 안 됐다.”

인한은 순간 흠칫 놀랐다.

‘잠깐, 아무리 재능을 가지고 계셨다지만 벌써 8층에 올라오셨다고?’

인한이 천천히 올라왔다고는 해도, 그조차도 역대급으로 빠른 공략 속도였다.

임태호의 재능은 과거에도 최상위 랭커급이었지만, 당시에 인한과 같이 올랐을 때는 3차 몬스터 웨이브의 소식이 들렸을 때 고작 5층까지밖에 못 올랐었다.

‘설마 나 때문에?’

과거의 자신은 임태호라는 거물의 성장을 막는 존재였던 것일까?

뭔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임태호가 입을 열었다.

“어때, 나 제법 많이 올라오지 않았냐?”

“예…… 엄청나게 빨리…….”

“원래는 비밀이지만 알려 주마. 사실, 나…… 길드에 가입했다.”

“길드요?”

인한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아직 탑에는 길드가 출현하지 않았다.

그나마 길드의 형태를 띠고 있는 조직이 있다면 헬 하운드였다.

하지만 적어도 합법적인 조직이 정당한 방식으로 길드의 이름을 내건 조직은 없었다. 아니, 없어야 했다.

‘그런데 길드가 만들어졌다고? 거기다 형님이 그 길드원이 됐다니.’

과거의 임태호는 인한과 함께 어디에 속하지 않고 직접 길드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마음 맞는 사람들과 같이 탑을 오르던 것이, 점점 규모가 커지더니 길드가 된 것이었다.

“랭킹 3위의 헌터 매지션(Magician) 클라우스 두비취가 수장으로 있는 ‘매지션즈’의 스카우트를 받았다. 그들은 비밀리에 조직의 규모를 키우고 있는 모양이더군. 내가 5층 보스존에서 애먹고 있을 때 내 팀에게 스카우트를 권해 왔다.”

랭킹 3위, 클라우스 두비취.

대마법사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육룡.

‘매지션즈가 벌써부터 움직였었구나.’

인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지션즈의 수장인 클라우스 두비취는 검은 탑 사건 이전에는 유명한 사업가였는데, 몬스터 웨이브에서 도망치려고 탑에 들어간 1세대 헌터였다.

그는 탑을 공략할 때 굉장히 체계적이고 효율성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을 사용하기로 유명했다.

거기다가,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검은 탑에 길드를 도입한 사내였다.

“뭐, 나도 길드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다만, 일단 팀들을 한데 모아 더 큰 조직으로 만들려는 거겠구나, 생각했지. 3년만 조직에 있으면 언제든지 나가도 된다길래 제안을 수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서 들어가기로 했었다. 그러자 팀에 랭커를 보내 주더구나. 이동 시간을 줄이라고 오프로드 바이크도 가져다주더군. 덕분에 벌써 8층인 거다. 뭐, 오프로드 바이크란 놈이 보기보다 약해서 정비에 돈도 많이 깨지긴 하지만 말이다.”

“……!”

인한이 순간 눈을 번쩍 떴다.

그 생각을 못했다.

오프로드 바이크는 이동 속도를 줄일 명안이었다.

인한이 마음먹고 이동에만 전력을 다한다면 그깟 기곗덩어리보다 느릴 건 없겠지만, 이창훈도 있고, 지속력 면만 봐도 그쪽이 나았다.

‘당장 이창훈에게 사 오라고 시켜야겠군.’

인한은 임태호에게 옆에 앉기를 권유한 다음, 인벤토리에 있는 간단한 간식과 맥주를 꺼내어 이야기를 이어 갔다.

“하여튼 그래서 지금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대단하네요. 벌써 8층이라니.”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임태호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맥주를 들이켰다.

그러더니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 표정으로 빈 캔을 바라보았다.

“역시 식은 맥주는 별로라니까.”

임태호가 맥주 캔을 우그러뜨리고는 뒤로 획 던져 버렸다. 그리고 인한을 힐끔 쳐다보며 툭 내뱉었다.

“그래서? 아직도 혼자 다니는 거냐?”

“아니요. 좀 특이한 놈 하나 끌고 다닙니다.”

“그래?”

임태호가 눈을 빛내며 인한을 훑어보았다.

‘오호, 이놈…….’

사람이 달라졌다.

근육이 붙고 몸의 비율이 좋아진 거야 탑을 오르니까 당연한 거다.

변한 것은 그런 외적인 게 아니라 내적인 부분 쪽이다. 분위기나 눈빛이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할 만큼 달라졌다.

“좋구나.”

“네?”

“아무것도 아니다, 흐흐!”

인한이 피식 웃고는 아직 한 모금 남은 맥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 뒤로도 대화가 오고 갔다.

사실상 인한은 임태호와 회귀 후에 하루도 채 같이 있어 보지 못했지만, 거리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임태호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뭐 솔직히, 우리가 그렇게 오래 만난 사인 아니지만 말이다. 그…… 내가 들어 줄 수 있는 귀는 가지고 있다.”

“네?”

“뭔가 고민이 있지?”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헹! 다 큰 사내놈이 불 앞에서 궁상떨고 있으면 고민 있는 거지. 그럴 땐 딱 두 가지거든. 여자 문제랑…….”

임태호가 팔짱을 끼며 씨익 웃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한 문제.”

“……후자입니다.”

인한은 맥주의 나머지 한 모금을 마셔 버렸다.

‘말할까?’

인한은 문득 자신의 입이 생각 외로 가벼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은 제게 꽤 쉬운 일인데, 다른 사람들한텐 상당히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죠. 제가 해내면 많은 사람들이 편합니다. 그런데, 제가 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걸 해결하기까지 걸리는 고민과 성장이 없어집니다. 거기다…… 사람들은 안일해지고, 편안함에 찌들 겁니다.”

인한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임태호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껌뻑이더니,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던졌다.

“뭐냐, 너. 헌터 말고 직장이라도 다니냐?”

“예? 아니요? 왜 갑자기 그런 얘기를…….”

“아니, 너 하는 말 들어 보면 딱 직장 얘기구만?”

“예?”

“어떤 업무가 있는데 너만 할 수 있지. 그런데 네가 해 버리면 부하 직원들이 그 일을 배울 수가 없어. 거기다 또 네가 할 줄 알고 위기감이 사라지지. 아니냐?”

“어, 어?”

그렇게 듣고 보니 또 그런 얘기다.

인한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우면서도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흥! 세상일이 다 거기서 거기지.”

“허어…….”

인한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형님은 답을 아십니까?”

“당연하지, 인마! 그럴 때 답은 하나다!”

인한이 눈을 빛냈다.

임태호는 회귀 전에도 보기보다 묘하게 현명한 구석이 있었다.

“그냥 꼴리는 대로 하는 거다!”

착각이었다. 절대 현명하지 않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건 그렇게 간단히 정할 문제가 아니에요! 정말 중요한 일이라구요!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어요, 그것도 엄청난 숫자의!”

“그래도 세상은 돌아간다. 어차피 어느 쪽을 택해도 후회할 거라면, 차라리 내 마음이 가는 쪽을 향하고 후회할란다!”

“……!”

인한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랬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인한은 분명 후회할 것이다.

인한은 허탈하게 웃었다.

“허어, 이거 진짜…….”

그렇다면 인한의 마음이 가는 쪽은 하나였다.

‘클리어한다.’

사람들의 목숨을 도외시하면서까지 탑을 오르고 싶지 않다.

분명 결심했던 일이다.

인한이 탑을 오르는 이유는, 이 세상이 다시 돌아오길 바라는 이유에서였다.

목적을 잊어선 안 됐다.

“답이 됐냐?”

인한의 표정이 변하는 걸 본 임태호가 물었다.

“예. 감사합니다, 형님.”

“그래, 내일 필드 나가냐?”

“예, 그럴 것 같습니다. 형님은?”

“우리도 그럴 것 같은데, 같이 갈래?”

“아뇨. 저희는 좀 빠르게 움직이고 있어서요.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래?”

빠르게 움직여 봤자, 랭커가 있는 데다 인원도 많은 자신의 팀만 할까.

그런데 임태호가 순간 흠칫했다.

인한이 말한 내용을 기억해 낸 것이다.

같이 다니는 놈이 한 명이라고.

‘그럼 설마 둘이서 그새 8층까지 올라온 건가? 이놈?’

임태호는 그런 놈을 한 명 알고 있다.

동양인이고, 경이적인 속도로 공략을 거듭해 나가고 있는 천재적인 헌터.

‘자이언트?’

임태호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인한을 바라보았다.

인한은 그저 밝은 표정으로 웃을 뿐이었다.

“형님, 그때처럼 조언 하나 더 해 드릴까요?”

“조언?”

임태호가 다소 경직된 표정으로 반문했다.

“해태라는 이름의 스트리머를 찾아보세요. 검은 탑과 관련된 유명한 스트리머입니다.”

“스트리머? 그게 뭐냐?”

“동료들한테 물어보면 알 겁니다.”

인한이 웃으며 말했다.

“거기 있는 내용, 다 사실이고 진짜입니다. 조금 더뎌지거나 부작용이 있는 것같이 느껴져도 사실은 다 진짜더군요. 거기 있는 내용을 따라가십쇼.”

“뭐, 그래, 알았다.”

임태호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 임 씨!”

그때 마을의 어딘가에서 임태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기 다 타겠어! 빨리 와!”

“응? 어! 알았어! 아이고, 나도 슬슬 가야겠구나.”

“예, 형님. 들어가십쇼.”

“것보다 밖에서 연락이나 하자. 번호 좀 줘라.”

“아, 네.”

인한은 임태호에게 번호를 찍어 주었다.

“그래, 그럼 형이 언제 한 번 부르마. 어디 사냐.”

“서울입니다.”

“잘 됐네! 나도 서울 산다! 언제 한 번 한우 맥여 주마 연락해라!”

임태호는 인한의 어깨를 팡팡 두드리고 손을 휘휘 저으며 걸어갔다. 인한은 자리를 떠나는 임태호를 보며 피식 웃었다.

* * *

공략은 계속됐다.

이창훈은 허허 웃었다.

“왜 전 이런 걸 생각 못했을까요?”

“이렇게 가면 몬스터들이 모조리 여기에 신경이 쏠리는 데다, 중간에 습격이라도 받으면 망하니까. 이건 습격을 받아도 뿌리칠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없으면 애초에 사용할 수 없는 방법이야.”

“헉! 그, 그러네요? 형님, 저희 어떻게 합니까! 혹시라도 이 비싼 차, 대형 몬스터가 들이박으면!”

8층의 필드를 거대한 자동차 한 대가 나아가고 있었다. ‘오프로드 카’ 하면 떠오르는 유명 브랜드의 자동차였다.

차체가 과하게 흔들리고 있지만, 인한도 이창훈도 이 정도로 멀미할 만큼 약골이 아니었다.

“그런 거 신경 끄고 운전이나 똑바로 해라.”

“아, 예…… 근데 이거 한 대에…… 어우. 아니, 애초에 이거 유지 비용이 더 나가겠는데요. 시동 한 번 걸 때마다 기름값이 훅훅 빠져나가는 기분이에요.”

결국 인한은 자동차를 샀다. 그것도 검은 탑에서 쓸 용도로.

인한의 말마따나 위험한 요소가 몇 개나 있지만, 인한의 감각이 이미 사방으로 퍼져 나간 상태였다.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멈추면 되니, 이들이 위험할 일은 딱히 없었다.

인한이 문득 말했다.

“마나 스킬 계속 운용하고 있냐?”

“헉! 맞다!”

이창훈이 깜박했다는 듯 외쳤다.

동시에 이창훈의 몸에서 한 줄기 마력이 움직였다.

인한은 이창훈을 보다 피식 웃고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인한의 눈에 희미한 하얀빛이 서렸다.

8층의 외각, 층의 끝자락을 따라 달리고 있는 탓에 인한은 ‘경계선’을 볼 수 있었다.

마치 모자이크처럼 흐릿하고 투명한 경계가 지면에서부터 하늘까지 이어져 있었다.

아니, 원래라면 그렇게 보여야 할 것이 바로 각 층의 끝자락을 막아서는 결계인 ‘경계선’이었다.

그런데.

‘저건…… 도대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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