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공략자들 83화>
“선물이요?”
인한이 의아해했지만, 그래도 이소영이 먼저 제안하게 만든 게 미안했기에 머릿속으로 일정을 떠올려 봤다.
“당장은 힘들고, 오늘 저녁이나 내일 점심 전이 좋겠군요. 다시 탑에 들어가게 될 것 같아서요.”
-그래요, 그럼! 6시 괜찮아요?
“그러죠. 어디서 볼까요?”
-문자 보낼게요! 그럼 그때 봐요!
이소영의 밝은 에너지는 저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게 된다. 인한은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기차가 천안에 도착했다.
역에서 택시를 잡아 탄 인한은 주소지로 향했다.
금고상은 천안의 번화가인 신부동에 위치해 있었다.
‘여기라 이거지.’
복잡한 번화가와 한적한 인가의 묘한 교차 지점에 금고상이 있었다.
인한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그대로 안으로 들어섰다.
딸랑!
둔탁한 풍경 소리가 울렸다.
특별해 보이는 건 없었다. 다만, 짙은 쇠 냄새가 인한의 코를 찔렀다.
사방에 금고나 열쇠고리 등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누구쇼.”
그때, 안쪽에 있는 미닫이문을 열며 등이 굽은 노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명동 최 씨 소개로 왔습니다.”
“명동? 최 씨? 푸핫!”
노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황보 놈 그거, 아직도 내가 지를 최 씨로 아는 줄 아는갑네.”
“예?”
“그 꼬장꼬장한 늙은이, 나한테 사기 처먹었을 때 조선인인 거 티 안 나게 하려고 성씨를 바꿨었거든. 썩을 놈! 말투에 연변 티가 그렇게 나면서 속여?”
“사기요?”
“그래! 그놈 때문에 내가 5천만 원을 날려먹었지! 썩을 놈!”
“……!”
인한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클클! 젊은이가 표정이 가관이구만. 걱정 말게, 이미 다 지난 일이니까. 그래서? 나한테 온 거면 뭘 따려고 온 거 같은데?”
“아, 예, 금고를 열어 주셨으면 해서요.”
“그래그래. 나한테 온 건 그게 이유겠지. 얼른 줘 봐.”
노인이 눈을 빛냈다.
그러자 그냥 동네 할아버지 같던 인상이 확 바뀌었다. 주름 속에 감춰진 두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쿵-!
인한이 인벤토리에서 금고를 꺼내 땅에 내려놓았다.
가로 세로 1미터 정도의 크기다.
그냥 간단하게 서류나 인감도장을 넣어 놓기에는 너무 큰 금고였다.
노인이 인한을 바라보았다.
“자네 헌터인가?”
“예, 그렇습니다.”
“그렇군. 그럼 이것도 아이템인가?”
“……예.”
노인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금고에 다가가, 입구를 바라보며 쪼그려 앉았다.
“허어, 이놈 이거, 참 특이하군.”
“강제로 열면 안쪽이 소각되는 아이템입니다. 어떻게, 열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내가 이놈 본 지 고작 1분 됐어. 조금 기다려 봐.”
노인은 인한도 처음 보는 기구를 몇 가지 가져오더니, 이리저리 조작하며 금고를 살폈다.
그러던 노인이 와락 눈가를 찌푸렸다.
“뭐여, 이 구닥다리는.”
“예?”
“의외로 쉽게 열겠구만?”
노인이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흐음, 그걸 어디다 뒀더라…… 안 쓴 지가 워낙 오래됐더니……. 어이쿠, 여깄구만.”
뭔가를 뒤지던 노인이 이내 먼지 쌓인 박스에서 무언가를 꺼내 왔다.
“청진기?”
“그래. 내 참, 이걸 다시 쓰게 될 줄 몰랐구먼.”
인한이 눈가를 찌푸렸다.
보통 영화에서 보면 청진기로 금고를 여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그건 굉장히 허구적이다.
금고란 보통 홈이 일치할 경우 열리는데, 소리로 열리는 걸 방지하고자 홈이 틀렸을 때도 소리가 나게끔 해 놓기 때문이다.
거기다 최근에는 방음제나 특수한 재질을 넣어서 금고를 제작하기 때문에 아무리 청진기라도 내부의 소리를 듣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거 다른 놈들한테 가져가면 엄두도 못 내겠구만. 어느 누가 이런 방식을 쓸 줄 알겠어?”
“예?”
“구닥다리야, 구닥다리. 요즘도…… 아니다, 내가 생전 이런 금고는 처음 봐.”
“아……!”
인한이 탄성을 내뱉었다.
그렇다.
이 세계에서는 금고 기술이 발달했다.
하지만 이 아이템은 검은 탑 내부의 것.
아이템이 아무리 수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구의 기술적인 발전을 무시할 수는 없다.
청진기를 가져다 댄 노인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뭐, 이것도 사실 거의 안 들리다시피 하네.”
“……예?”
“나니까 듣는 거야. 알간?”
노인이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틱틱 조작하다 중얼댔다.
“이런 방식은 또 처음인데……? 이렇게도 할 수 있나?”
노인이 다이얼을 조작하자, 갑자가 팅! 하고 무언가가 맞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와 함께, 다이얼의 가장 위에 있던 육각형의 도형이 툭하고 땅에 떨어졌다.
노인이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곧 미간을 찌푸렸다.
“참 내. 누구 취민지 고약하게도 만들었군. 한 번 쓴 방법은 다시 못 쓰게 되어 있는 건가? 금고가 뭐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에이, 귀찮게 이런 걸 가져와!”
노인이 호통을 치고는 수염을 벅벅 긁다가 다시 소리쳤다.
“원래는 그냥 다이얼 분해해서 열어 버리면 되는 걸, 니미 부숴도 안 된다고 하고, 한 번 쓴 방식도 안 된다고 하고. 안 해! 도로 가져가!”
인한이 다급하게 말했다.
“열어 주기만 하신다면 원하시는 만큼의 사례금을 드리겠습니다.”
노인이 미간을 팍 찌푸렸다가 조롱조로 말했다.
“흥! 그럼 황보 놈이 떼어먹은 5천만 원이라도 내놓든가!”
“예, 알겠습니다.”
인한이 인벤토리를 조작해 현금을 꺼냈다.
5만 원권 지폐 다발이 후두둑 떨어졌다.
“으, 으응?”
“이거면 되겠습니까?”
노인이 멍하니 인한을 올려다보았다.
신사임당이 다발로 열 개가 소복이 쌓여 있었다.
* * *
돈의 힘은 위대했다.
노인은 바로 여기저기에 연락하더니, 각종 기계와 도구들을 가져와 그 자리에서 금고를 열어 버렸다.
바로 그 자리에서 금고 안을 살펴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인한은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다행히 번화가에서 조금만 벗어나 걸어가자, 어두컴컴한 골목길이 나왔다.
그제야 인한은 인벤토리를 확인했다.
[바람의 정령석]
[메모리 스톤 x18]
[10층 무한의 열쇠]
[회복 포션 x3]
[씨앗]
아이템 자체는 고작 5개뿐이지만, 그 가치가 충격적이었다.
‘씨앗?’
인한은 씨앗을 꺼내 들었다. 그건 새하얀 빛의 응집체였다.
빛이 만질 수 있다면 이럴까.
분명 손에 쥘 수는 있지만, 마력처럼 묘하게 감촉이 없는 물체였다.
수많은 모양으로 조각난 빛들이 얽히고설켜 투박한 구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게…… 씨앗이란 말인가?’
[씨앗]
[등급 : EX]
[종류 : 씨앗]
[상세설명 : 발아하지 않은 왕의 씨앗입니다.]
간략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천문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씨앗이 갑자기 인한의 손에서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인한의 내부에 있던 그 정체 모를 기운이 뻗어 나갔다.
‘대체!’
우웅-!
인한이 씨앗을 놓을 새도 없이 정체불명의 기운이 빛의 조각들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씨앗을 흡수합니다.]
[독소를 제거합니다.]
[힘의 원형을 되찾았습니다.]
[동화율 3%]
[동화율 14%]
……
“끄아아악!”
인한은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 * *
-언젠가 놈들의 힘의 일부를 얻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말이야.
기억의 파편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막연한 감각이었다.
조금 더 모호하지만, 조금 더 직접적인, 그야말로 정보가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넌 오래 전부터 그래 왔지.
인한은 ‘그녀’를 알았다.
오랜 시간 그녀와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인한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아직, 인한은 그녀에게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아직 시간은 많아. 하지만, 빨리 떠올려. 이번만큼은 기억해야…….
그녀의 말이 아득히 멀리 멀어져 가는 기분이다.
기억해야 한다.
모든 것은 환상, 현실은 한낮의 꿈.
하지만…….
* * *
“흡!”
인한이 숨을 몰아쉬었다.
모호했던 의식이 금세 또렷해지고, 생각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형태를 유지하던 씨앗이 공기 중에 번지듯 뿌옇게 흩어지고 있었다.
인한이 급히 손을 뻗었지만, 빛의 알갱이는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갈 뿐이었다.
[씨앗을 흡수했습니다.]
[모든 스테이터스가 20 상승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뭐지?’
씨앗을 흡수한 여파일까. 한동안 천문이 떠올랐다.
인한은 전신에 차오르는 충만함을 느끼면서도 눈살을 찌푸렸다.
스마트폰을 확인하자 5분 남짓한 시간이 흐른 걸 알 수 있었다.
……백일몽?
무언가 꿈을 꿨다. 기억이 나지 않지만 모호한 감정이 남아 있다.
그리움, 아쉬움, 그리고 다급함.
‘도대체…….’
무언가 잊어선 안 된다는 걸까.
‘피곤하기라도 한 건가.’
인한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러고 보니 정신을 차렸을 때 몸이 조금 나른하게 느껴졌다. 물론 지금은 레벨 업을 통해 전신에 힘이 넘쳤지만.
무슨 연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씨앗이 흡수된 모양이었다.
‘그것보다 아이템.’
인한은 얼른 인벤토리를 바라보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무한의 열쇠다!’
‘무한의 열쇠’.
강한 자도, 돈이 많은 자도 얻을 수 없었던 아이템.
오직 선택받은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 인한의 손에 들어왔다.
‘인피니트 시리즈를 얻을 수 있게 되다니!’
‘무한의 열쇠’는 스페셜 던전으로 출입하는 열쇠.
검은 탑에는 10층마다 열쇠를 가진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숨겨진 공간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곳을 클리어하면, 어떤 장비를 얻을 수 있게 된다.
통칭 인피니트 시리즈.
효과는 간단하다.
‘주인과 함께 성장한다.’
아무리 높은 등급의 장비라도 천문은 변하지 않는다.
강화를 하거나 효과를 부여한다고 해도 결국 한계는 있는 법이다.
하지만 인피니트 시리즈는 그 이름처럼 한계가 없다. 주인에 따라 천차만별의 효과를 보이며, 무한히 성장한다.
다음으로는.
‘포션이 있다니.’
마력을 회복시켜 주고, 상처 입은 육체를 치유시켜 주는 전설의 약물.
검은 탑에도 ‘포션’은 존재한다.
하지만 포션은 게임처럼 흔한 아이템이 아니었다.
중층을 넘어간 후부터는 제작법이 알려지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포션은 한 병에 수십억을 호가했다.
‘최하급이지만, 여벌 목숨이 생겼다.’
피해의 25퍼센트밖에 회복시킬 수 없지만, 목숨이 끊어져 갈 때 그 정도의 회복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거.’
인한이 히죽 웃었다.
-쉬익!
샐러도 인한에게 의념을 보내왔다.
[바람의 정령석]
[등급 : C-]
[종류 : 소모품]
[효과]
-속성력 스테이터스가 50point 상승합니다.
-바람의 정령과 계약할 수 있게 됩니다.
드디어, 두 번째 정령과 계약할 시간이 된 것이다.
마지막이었다.
인한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이템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대체 이건 뭐야?’
메모리 스톤.
한 면이 납작한 돌덩이가 인한의 손에 잡혔다.
인한은 돌에 적힌 문구를 읽다 경악했다.
‘잠깐, 설마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