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공략자들 78화>
-어? 받았어!?
“누구시죠?”
받자마자 밝은 어조의 남자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야! 야! 얘들아! 이 새끼 받았어!
“…….”
인한은 바로 전화를 꺼 버렸다.
잠시 후 다시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왜 끊냐!
“전화 잘못 거신…….”
-인한아! 나야! 나! 이주호!
인한은 눈가를 찌푸렸다.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으니 통성명을 했다는 건데, 전혀 모르는 목소리에 기억에 없는 이름이었다.
“이주호가 누구죠?”
-아-! 진짜 너무하네! 날 까먹냐! 살아 있는 줄은 알았는데, 너 왜 연락을 안 해! 아따 증말, 이 새끼!
“……?”
마지막 한마디에, 인한의 머릿속에 한 인물이 스쳐 지나갔다.
“난봉꾼 이주호?”
-난봉꾼이라니, 이 시발 새끼가!
욕을 들었음에도 짜증 가득하던 인한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먼지 쌓인 오래된 기억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왜 잊고 있었던 걸까.
이주호는 고등학교 시절, 인한의 가장 친했던 친구였다.
-야! 너 왜 그렇게 연락을 안 받냐!
“아, 그…….”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가온 과거의 향수에 인한이 말을 더듬었다.
“일이…… 음, 일이 있었어.”
-……그렇구나.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잠긴 목소리에서 묘한 기색을 알아챈 것인지, 이주호가 말을 잠시 끊었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야?”
-아! 맞아! 야, 우리 동창회 하는 건 아냐? 왜 문자를 보내도 답장이 없어?
“문자?”
검은 탑 안에는 전파가 통하질 않는다. 그래서 수신이 안 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온 후에도 인한이 필요해서 쓸 때 외에는 스마트폰을 켜지도 않았다.
“연락 못 받을 일이 있었어.”
-그래? 야! 오늘은 일단 파장이고, 내일도 모이기로 했거든? 올 수 있냐?
동창회라.
인한은 거절하려다 우뚝 멈춰 섰다.
“그래, 갈게.”
-오! 그래?
-와, 인한아! 반갑다!
-아, 새끼. 죽은 줄만 알았는데!
수화기 너머로 떠들썩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한도 씨익 웃었다.
-그럼! 기다린다!
“그래.”
인한은 전화를 끊고 잠시 스마트폰을 바라보다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금고를 따기 위해 바퀴에게서 얻은 장소로 가려는데, 바로 다시 전화가 왔다.
이창훈이었다.
“그래.”
-형님…… 진짜…… 너무한 거 아니요…….
이창훈은 쇠를 벅벅 긁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거기서 몇 번이나 죽을 뻔했는지 아쇼!
“그래서? 몇 단계?”
-크흠, 그게…….
“왜 그러는데? 설마 너…….”
-아니, 솔직히 그거 5단계 어떻게 클리어합니까! 곱린이랑도 똑같고 나랑도 똑같은 놈인데! 진짜 내가 재지는 않았지만 며칠을 싸웠는데 결판이 안 나서 걍 때려치우고 나왔습니다!
“뭐?”
인한이 눈을 껌뻑였다.
-아 씨, 또 뭐라고 하려고…… 4단계라고요, 4단계!
“너, 너 어디야, 지금.”
-엥? 형님 왜 말 더듬으십니까? 이런 형님 색다르네. 저야 뭐 탑에서 지금 막 나왔죠.
“어디 탑?”
-서울에 있는 거요. 종로에.
“거기 그대로 기다려!”
인한이 그렇게 외치며 땅을 박찼다.
* * *
이창훈은 시작의 신전 4단계를 클리어했다.
“와, 솔직히 이런 던전에 던져 넣을 거면서 조언은 딱 그거 하나만 하십니까? 형님 너무하십니다, 진짜!”
그러면서 이창훈은 시작의 신전에서 겪은 일을 풀어냈다.
일단 들어가니 곱린이가 갑자기 소환됐다.
마을 밖에 두고 왔는데 갑자기 소환된 곱린이를 보고 의아해하기도 잠시, 곧장 1단계가 진행됐다.
수십 마리의 목각 인형.
이창훈은 진짜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싸우고 간신히 클리어했다.
다음으로 2단계.
거의 무슨 에베레스트급으로 높은 산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인한의 조언을 알고 있었지만 그 높이 때문에 엄청나게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극한의 3단계…….
“골렘? 골렘이 말이 돼요?! 난 골렘 본 적도 없다구요! 애초에 탑에서 골렘이 나오긴 했대요!?”
생전 처음 보는 돌덩이로 만들어진 괴생물체.
그건 판타지 영화에서 소위 골렘으로 불리는 몬스터였다.
그래도 간신히 그걸 처리했고…….
“4단계는 뭐…… 크흠, 예, 뭐, 잘 클리어했습니다.”
이창훈은 그렇게 말을 끝내며 헛기침을 했다.
인한이 갸름하게 눈을 떴다.
“정말 4단계를 클리어한 게 맞아? 보상은?”
“아! 정말! 진짜라구요! 보상도 A급 스킬이라서 제가 눈에 불 키고 효과 읽어서 골랐거든요.”
“A급 스킬? 이름은?”
“거기 뭐, 효과 보니까 저처럼 마법사 카테고리는 ‘마도의 길’이라는 스킬이 좋겠더라구요. 그래서 얻었죠.”
마도의 길.
마법사 클래스의 헌터들이 익히는 마나 스킬이다.
하지만 마력의 움직임보다는 부가적인 스테이터스의 수련을 위한 명상에 중점을 둔 스킬이었다.
‘정말이야?’
5단계를 클리어하지 못했다지만, 그건 전 세계에서 단 열 명만 클리어한 단계고, 그 밑인 4단계도 전 세계급이다.
그런데 그걸 클리어했다고?
“자, 잘했다.”
“어? 지, 지금 칭찬하신 겁니까?”
“4단계면 엄청난 거야. 나도 힘겹게 클리어한 단계다.”
“오, 오오오!”
인한은 기뻐하는 이창훈을 보며 계속 당황해했다.
‘어떻게 4단계를?’
수많은 사람들이 4단계에서 실패한다.
두려움, 공포란 그야말로 본능적인 감정이다. 아무리 단련해도 이겨 낼 수 없는 종류의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4단계에서는 그런 심층 심리에 잠자고 있는 근원적인 공포를 끄집어낸다.
‘아니, 설마 이 녀석은 제대로 무서운 게 없는 건가?’
…… 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인한은 착각하고 있었다.
사실 이창훈도 4단계에서 실패할 뻔했다.
‘와…… 시발, 진짜 무서웠지.’
이창훈이 본 건 인한이었다.
인한과 첫 만남 때, 그 죽음의 직전까지 갔던 순간.
‘아우 진짜, 이 양반이 보스 몬스터보다 더 무서워 진짜. 어휴…….’
이창훈은 인한을 바라보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 * *
이소영은 오늘도 필드를 돌고 나오는 길이었다.
팀원들과 헤어진 후, 그녀는 편의점에서 맥주 하나 사서 청계천 밴치에 앉았다.
“아아, 이제 못 찾으려나-.”
이소영은 자신을 구해 줬던 정체불명의 사내를 떠올렸다.
영상이 올라간 후, 정말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났다. 이소영도 놀라울 정도로 조회 수가 올라갔다.
다만 본래 목적이었던 그 사내를 찾겠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매일 7층 땅의 돌에서 5시에 기다리겠습니다!]
영상의 마지막에 그런 말을 했는데, 애석하게도 사내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소영은 혹시라도 그 남자가 댓글을 달았을까,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들어갔다.
-어? 이 사람이 쓰는 거 그거 닮지 않음? 그 뭐지? 그 사람 있잖아요. 왜, 검은 탑 정보 뿌려서 유명해졌던 사람.
└어, 그러고 보니 닮은 듯.
└솔직히 ㅅㅂ 존나 화질 꾸진데 어떻게 앎.
└윗분 눈 사시임? 저 하얀빛 같은 거 마력이라 그러지 않았냐? 본인인 거 같은데?
“검은 탑 정보 뿌린 사람?”
누군지 이소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번뜩 눈을 뜨고는 검색해 들어갔다.
채널 이름은, 기억하기론 ‘해태’.
최근에 올라온 영상까지 고작 6개에 불과한데 구독자가 수천만에 달하는 채널이었다.
그녀는 바로 첫 번째 영상을 재생시켰다.
아무리 봐도 어색해 보이는 사내가 말하기 시작했다.
‘비슷해!’
그러나 이소영은 자신이 찾던 사내와 닮았다는 데에 놀랐다.
계속되는 영상에서는 자신을 튜토리얼 존을 클리어한 최인한이라고 밝혔다.
이소영은 더더욱 놀랐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 이름도 최인한이었어!’
그제야 잊고 있었던 이름에 대한 기억도 떠올랐다. 통성명을 했는데 당연스럽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차, 찾을 수 있겠다!”
최인한, 유튜브 이용자, 헌터, 맨몸을 사용하는 사람.
오성 그룹이라면 이 정도 정보로도 찾아낼 수 있을 터였다.
그때.
“……!”
무슨 운명인지.
아니면 이곳이 탑에서 가까운 곳에 있어서인지.
그녀의 눈에 터벅터벅 걸어가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치렁치렁한 앞머리며, 음울해 보이는 인상이며, 다부진 몸이며. 딱 그였다.
“저기요! 거기!”
그녀의 외침이 들릴 리가 없었다. 여기는 서울의 번화가였고, 주변에서는 자동차의 클랙슨 소리가 가득했으니까.
“에이 씨!”
올라가는 계단까지 한참 걸리는 상황.
이소영은 그냥 땅을 박찼다.
“……?”
인한은 무언가가 자신에게 날아오는 것을 감지했다.
‘불가살이?’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분명 일반인을 넘어선 속도는 이전 자신을 찾아왔던 조직이라 의심하기에 충분했다.
인한은 몸을 돌림과 동시에 팔을 뻗었다.
꾸국-!
그리고 그대로 뒤에 날아온 자의 팔을 붙잡고 한 번 돌리며 반대쪽 손과 동시에 묶었다. 제국식 유술의 기술이었다.
그리고.
“꺄악!”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지극히 여성적인.
인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소영?”
“여, 역시 맞았어! 그때 그 사람 맞죠! 최, 최인한!”
인한이 눈가를 찌푸렸다.
“설마 저 밑에서 뛰어올라 온 겁니까?”
“그, 부, 불러도 안 돌아보니까요! 혹시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 급해서…… 꺄악! 그보다 이것 좀 놓아주실래요!?”
“아, 죄송합니다.”
인한은 손을 놓고 이소영을 일으켜 세워 줬다.
이소영이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무슨 일이십니까?”
“무, 무슨 일이냐니, 그야…….”
이소영이 ‘흠, 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말했다.
“그, 그때는 정말…… 정말 감사했어요.”
이소영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냥 제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니 굳이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요! 제 목숨의 은인이신걸요.”
이소영의 말에 인한이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이런 사람이었다.
“혹시 식사하셨습니까?”
인한이 슬쩍 말을 꺼넸다.
인한과 이소영은 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다. 마침 밤 시간이기도 했고, 둘 다 밥을 안 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인한은 대충 밥 한 끼 사 달라고 하고 퉁치려고 했다.
“제가 맛있는 국밥집 아는데 거기 가시지 않으실래요?”
“국밥이요?”
이소영의 말에 인한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소영은 방긋 웃으며 인한을 끌고 골목길로 들어갔다.
깊숙이 들어가자 음식점이 늘어선 다른 골목이 나왔다.
‘흐음, 이런데 안 올 것 같이 생겼는데 말이야.’
오성 그룹의 따님이 이런 서민적인 곳에 오다니. 누가 말하면 못 믿을 일이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그냥 이런 데 안 올 것 같으셔서요.”
“아아, 그런 소리 많이 들어요. 근데 여기 선지가 진짜 죽이거든요! 엄청 맛있어요!”
거기다 선지 해장국?
인한이 피식 웃었다.
“이모! 저 왔어요!”
문을 벌컥 열더니 큰 소리로 외친다.
부엌에 있던 뽀글 머리의 중년 여성이 방긋 웃으며 이소영을 반겼다.
“아이고! 왜 이렇게 오랜만이여! 옆에 이 총각은 누구여. 허이구, 몸이 아주 돌덩이네!”
“제 은인이세요. 얼마 전에 저 큰일 났을 때 도와주셨다는 분이 이분이시거든요.”
“아이고, 우리 소영이를? 이거 귀인이 오셨구먼. 여기, 이 안쪽으로 들어오셔. 아, 맞아. 뭐 줄까?”
“특이요! 두 개!”
“그려!”
인한은 멍하니 이소영을 바라보았다.
이소영은 배시시 웃더니 물컵에 물을 담아 인한에게 건넸다.
“정말 맛있어요. 저 믿어 봐요. 아! 설마 선지 안 드시는 건 아니죠?”
이미 시켜 놓고 저런 걸 물어보다니.
의외로 허당끼가 있는 걸지도 몰랐다.
“잘 먹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다행이네요.”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대화가 오고 갔다.
연신 고맙다고 고개를 숙이는 그녀에게 인한은 괜찮다고 손짓하느라 바빴다.
곧 음식이 나오자, 둘은 숟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음?’
인한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정말 엄청나게 맛있었다.
한 입 넣는 순간 바로 밥을 말았다.
반찬으로 나온 깍두기와 김치도 여기서 담근 것인지 엄청나게 맛있었다.
그렇게 인한이 저도 모르게 음식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이소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한 씨, 혹시…… 저희 오성 공격대에 들어오실 생각 없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