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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자들-76화 (76/266)

# 76

<공략자들 76화>

인한은 집합 장소인 고블린의 부족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보인 것은 여자들이 구석에 웅크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모습이었다.

인한은 이창훈을 노려보았다.

“또 왜요!”

“넌 눈치도 없냐. 몬스터들이 주변에 돌아다니는데 안 그래도 힘든 일 겪은 사람들이 편안하겠냐?”

“아.”

고블린들은 별로 관심 없는 듯 제 할 일을 하고 있지만, 여자들의 입장에선 그게 안전한 건지 위험한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됐고. 어차피 이제 갈 거니까 움직이자.”

“아, 가시게요?”

이창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인한과 이창훈은 어차피 몸만 와서 몸만 가는 것이기 때문인지 준비까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히려 제일 바빴던 것은 곱린이였는데, 차기 부족장을 정하기 위해서인지 1시간 정도 싸움을 벌이다가, 일부러 누군가에게 져 준 다음 부족장 자리를 넘겨주었다.

-캬약! 키익! 케에에…….

-쉬익! 키레큭…….

-캬악!

무슨 이산가족이라도 보는 듯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대화를 나누는 고블린들.

서로 안고, 비비고, 악수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키이에엑-!

곱린이가 손을 휘휘 흔들었다. 부족의 고블린들도 손을 휘저었다.

이창훈과 인한은 어이없다는 듯 그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이제 어디로 가실 겁니까, 형님?”

여자들을 마을까지 데려다주고 헤어진 후에 긴장이 풀린 것인지, 이창훈이 크게 하품하고 나서는 인한에게 물었따.

인한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물었다.

“1층에 잠깐 들려야겠다.”

“아, 뭐 볼일이라도?”

“팔 거 좀 팔고, 살 것도 좀 있어서.”

“그렇습니까?”

이창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잠깐 집에 가야겠습니다. 형님 따라다니느라 며칠 안 가서 걱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한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이창훈을 쳐다보았다.

“너도 따라와야지.”

그 말에, 이창훈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 어디 가실 생각이십니까?”

“1층에. 아, 너 1층 마을은 어디야?”

“크흠! 제가 1세대 헌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1층에 마을 생길 때 이미 전부 등록해 놨습죠!”

보통 각 층을 클리어하면 다음 층에 있는 마을로 이동하게 된다. 그런데 다음 층의 마을이 여러 개 있을 경우, 랜덤으로 배정된다.

인한의 경우도 튜토리얼을 끝낸 후 배치된 것이 동양인이 제일 많은 시작의 마을이었다.

만약 동일한 층의 다른 마을, 정확히는 다른 땅의 돌로 이동하려면, 미리 해당 마을의 활성화된 땅의 돌에 등록을 해 놓아야 했다.

“그럼 시작의 마을로 가자.”

“넵.”

그렇게 둘은 7층의 마을 글로테크에 있는 땅의 돌에 손을 얹었다.

* * *

딸랑!

풍경 소리가 청량하게 울렸다.

“안녕하십니까, OBT(O sung Black Tower) 마켓입니다! 어서 오십쇼!”

마켓이 가득 찰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지만, 직원들은 인사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창훈이 번호표를 뽑아 오더니 인한에게 말했다.

“여기가 이렇게 컸었나? 흐음…… 역시 오성은 오성인가 봅니다. 형님, 오래 걸릴 거 같은데 어떻게 하실 겁니까?”

예상 대기 시간이 30분이었다.

인한은 번호표를 보고 눈을 껌뻑였다.

‘엄청 커졌네.’

인한은 주변을 둘러보다 허허 웃었다.

분명 김만춘 혼자 운영하던 지점이었는데 직원도 많아지고 손님도 엄청나게 많아졌다. 조금은 초라하게 보였던 건물도 대리석 바닥에, 인테리어도 바뀐 상태였다.

‘원래 이렇게 되긴 하는데, 이렇게 빨리 바뀔 줄 몰랐네. 나 때문인가?’

미래에도 혼자 지점을 맡는 게 힘들었던 김만춘은 직원들을 늘리고 건물도 증축한다.

근데 그건 꽤 나중의 일일 줄 알았는데…… 역시 미래는 바뀐 모양이었다.

“형님, 어떻게 하실 거냐구요.”

“난 그거 필요 없어.”

“네?”

인한이 뚜벅뚜벅 창구로 걸어갔다.

“당신 뭐야?”

창구에 뜬 번호에 해당하는 표를 가지고 있던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어이! 어디서 새치기야! 내 차례라고!”

직원도 둘을 바라보다 인한에게 말했다.

“손님, 번호표를 뽑고 오셔야 합니다. 이렇게 하시면…….”

직원도 웃으면서 말하고 있긴 하지만 눈빛에 짜증이 치민 상태였다.

‘하아, 왜 맨날 이런 진상들이 꼭 있지?’

대놓고 번호 무시하고, 자기 일 바쁘다는 놈들이 워낙 많다.

금방 끝난다고, 자기가 먼저 하겠다면서 막무가내로 들이대는데 이런 사람일수록 상대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근데 잠깐만, 이 사람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러다 직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인한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꼭 기억해 내야 할 인물인 것만 같았다.

그런데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 아이고 형님, 왜 이러십니까! 완력으로 안 되는 것도 있거든요! 새치기를 뭐 그렇게 당당하게……! 죄송합니다, 하하!”

인한이 비키지 않고 있자, 이창훈이 다급히 다가가 인한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인한은 말없이 뭔가를 직원에게 내밀었다.

“이거 있으면 괜찮은 걸로 아는데요.”

인한이 내민 것을 본 직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VIP 등급에게만 나오는 카드.

직원의 표정이 순식간에 공손해졌다.

“V, VIP! 앗, 죄송합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러고는 직원이 옆에 있던 여자 직원에게 말했다.

“경미야, 그 고객님 끝나고 네가 이 고객님 좀…….”

“네, 알았어요.”

“하하! 죄송합니다. 자, 이쪽으로 오시죠.”

직원이 인한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이창훈은 인한의 뒤에서 입을 헤벌렸고, 번호가 불렸던 사내는 어이없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김만춘은 의자에 몸을 깊게 기대며 씨익 웃었다.

‘오늘따라 손님이 많네. 이대로만 계속 가면 또 승진하겠는데?’

부산물 매매, 장비 수리와 판매 등 원래는 부산물 매매만 담당하던 김만춘은 이번에 장비 판매점까지 맡게 됐다.

원래 이 업무를 맡고 있던 놈이 좌천됐지만…… 뭐, 그거야 그 자식이 일을 개떡같이 한 탓이었다. 그의 알 바는 아니었다.

덕분에 일이 꽤 많아져서 직원을 요청했고, 인테리어도 싹 바꿨다.

직원들 감정 스킬을 올리는 데는 좀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건물이 좋아진 덕에 손님도 더 늘고 있는 추세였다.

‘흐흐, 오늘은 집에 치킨이라도 사 갈까나.’

그가 할 일도 대충 끝났겠다, 이제 직원들이 결재 서류를 가져올 때 사인만 해 주면 된다.

콧노래를 부르던 김만춘은 발을 책상 위에 얹은 채 손톱을 깎기 시작했다.

쾅!

그때, 문이 엄청난 소리와 함께 열리는 바람에 손톱깎이가 손톱 사이를 파고들었다.

“악! 내 손가락!”

김만춘이 손가락을 감싸며 신음을 흘렸다.

“부, 부장님, 큰일입니다!”

“이이! 야, 이 새끼야! 조용히 못해!? 너 때문에, 아이고…… 헉! 피까지 나잖아!”

김만춘은 방울 맺힌 피를 닦아 내며 눈가를 찌푸리고는 안절부절못하는 직원에게 소리쳤다.

“야! 큰일은 무슨! 뭐가 큰일인데!”

“그, 내, 내려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 감정 의뢰냐? 너희도 이제 할 수 있잖아!”

“그, 그게…… V, VIP가 오셨는데…….”

“야, 인마! VIP도 네가 처리하라 그랬잖아!”

“제 선에서 처리가 안 될 것 같아서 그래요! 거기다…… 제가 모르는 아이템도 엄청 많이 들어왔단 말이에요!”

“뭐?”

김만춘의 눈이 커다래졌다.

* * *

인한은 VIP실에 앉아 있었다.

‘흐음, 역시 사람은 돈이 있어야 하나?’

무슨 소파인지 알 수 없지만, 탄력감이 장난 아니었다. 이 정도면 침대보다 더 푹신한 것 같았다.

소파뿐 아니라 전체적인 디자인도 굉장히 고급스러워, 눈이 즐거웠다.

“혀, 형님…… VIP셨습니까……?”

이창훈이 쭈뼛대다 물었다.

“와, 정말…… 오성에서 헌터들이 VIP 따려면…… 아니, 뭐 형님 정도니까 거래 몇 번 하면 따겠지만…….”

이창훈은 부럽다는 듯, 이젠 놀라기도 힘들다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 문을 벌컥 열고 김만춘이 들어왔다.

“와,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안녕하십니까, 형님.”

“너는, 어? 간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러는 여기도 몇 주 만에 엄청 바뀌었군요.”

“그래 봤자 인테리어만 바꾸고 직원들만 늘린 거뿐이거든! 근데 넌 이거 너무하잖아! 이 정도로 가져오면 야근해야 하는 거 몰라!? 여기서 출발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 정도를 가져오냐?! 거기다가 또 처음 보는 것투성이야. 이건 뭐야? 데스 시커의 가죽……? 어? 잠깐, 데스 시커?”

김만춘이 눈을 껌뻑이다 입을 쩍 벌렸다.

“7층 필드의 그놈?”

“아시네요?”

“그새 7층까지 간 거야? 거기다 데스 시커까지 잡고?”

“그놈 가죽 엄청 단단합니다. 잘 만들면 드롭 아이템 급으로 나올 거예요. 가격 잘 책정하십쇼.”

“어휴, 징한 놈.”

김만춘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리고 야근 안 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탑 밖에 한 번 나가고 돌아올 거라 느긋하게 하십쇼.”

“그래?”

김만춘은 화색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쪽은…….”

“그냥 데리고 다니는 놈입니다. 이제 얘가 저 대신 거래하러 올 겁니다.”

“그래?”

“예?”

김만춘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정작 당사자인 이창훈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거래라뇨?”

“잡일도 할 거라며.”

“서, 설마 이런 시다바리시키려고……!”

“심부름 값은 알아서 줄 테니까 걱정 말고.”

“충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만담 같은 대화를 보고 있던 김만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지가지 한다.”

“그리고 부탁이 한 가지 있습니다.”

“부탁?”

“혹시, 암상인에 대해 좀 알고 있는 거 있으십니까?”

그 말에 김만춘이 눈가를 찌푸렸다.

검은 탑 관련 사업엔 오성 그룹이나 여타 상점처럼 국가의 승인과 인증을 얻어서 공식적으로 장사하는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규모만 보면 암상인, 즉 음지에서 아이템을 주고받는 자들이 더 많다.

“바퀴들을 왜 찾는 거냐?”

바퀴벌레에서 벌레라는 단어를 뺀 바퀴로만 불리는 암상인들은 널리 보면 검은 탑 인프라 전체를 좀먹는 자들이다.

“뭐 좀 처리할 게 있어서 그럽니다.”

“그런데 왜 바퀴들을 나한테 찾아, 인마.”

“아시잖아요.”

인한이 빙그레 미소를 짓자, 김만춘이 입을 쩝 다셨다.

“소개비가 필요하면 지불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됐다. 인마, 그렇게 돈 잘 쓸 거면 가격이나 후리질 말든가. 쯧!”

김만춘이 품에서 메모장을 꺼내더니 무언가를 휘갈겼다.

그대로 인한에게 종이를 넘긴 김만춘이 말했다.

“뭐 노파심에 말하겠다만, 바퀴들이랑 엮여서 좋을 일 없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럼 뭐, 일 다 봤냐?”

인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서다 반창고가 덕지덕지 반창고가 붙어 있는 김만춘의 손을 보았다.

“어? 손가락은 왜 그러십니까?”

“……몰라, 인마.”

* * *

“이제 밖으로 나가는 겁니까, 형님?”

“아니, 할 일이 더 있어. 따라와.”

인한이 이창훈을 마을의 외곽으로 데리고 갔다.

곧 무너진 교회 같은 분위기의 석조 건물에 도착한 인한이 말했다.

“연락처 좀 알려 줘라.”

“연락처요?”

이창훈이 핸드폰 번호를 인한에게 가르쳐 주었다.

이창훈의 번호를 저장한 인한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형님, 여기 뭐예요?”

“명심해. 기회는 한 번뿐이다. 3등급 이하면 데리고 다닐 생각 없으니까 기억하고. 아, 참고로 2단계 몬스터들은 공격하지 않는 데다, 오히려 길을 가르쳐 준다. 몬스터들 많은 쪽으로 뛰어가.”

“예, 예?”

“난 먼저 밖으로 나간다. 일 끝나면 연락할 테니까 그때까지 쉬고 있어라.”

“……예?”

인한은 멍을 때리고 있는 이창훈의 발을 툭 쳐서 여인상에 있던 던전 발생 장치를 건드렸다.

[스페셜 던전 ‘시작의 신전’으로 통하는 입구를 발견하셨습니다!]

[스페셜 던전 ‘시작의 신전’]

[알 수 없는 고대의 건축물이 만들어진 비밀 던전입니다.]

[난이도 : F~A]

[클리어 적정레벨 : 없음]

“헉!”

인한의 눈엔 안 보이지만 이창훈의 눈에는 입구가 보이는 모양이다.

“저, 저, 잠시만 심호흡…… 어억!?”

주저하는 이창훈의 등을 인한이 걷어찼다.

“으아아아아악-!”

이창훈은 비명을 지르며 시작의 신전에 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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