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공략자들 74화>
이창훈은 전신에 멍 자국이 가득한 채로 땅바닥에 팬티 차림으로 무릎 꿇려졌다.
“죄송합니다.”
이창훈은 훌쩍였다.
“크흡…….”
“너 뭐냐? 왜 지랄인데.”
“억!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살려 주십쇼…….”
킬러의 발길질에 쓰러진 이창훈이 바로 다시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옆에 앉아 있는 여자 둘은 어이없다는 듯 이창훈을 흘겨보았다.
“야, 진짜 미쳤냐? 너 이 새끼, 규칙 몰라? 각자 뭘 하든 신경 안 쓰는 거 말이야!”
짜악!
머리가 울릴 정도로 강한 따귀에 이창훈은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졌다.
이창훈은 볼을 감싸며 훌쩍였다.
‘혀, 형님…… 제발 빨리 도와주세요…… 저 죽습니다. 크흡!’
그때, 가벼운 뇌진탕을 느끼며 일어서는 이창훈의 눈에 인한이 보였다.
평소처럼 눈가를 찌푸린 채 자신을 벌레라도 보는 듯 노려보는 인한이었지만, 지금만큼은 그 모습이 그야말로 구세주처럼 보였다.
‘크하하! 형님이다!’
이제 됐다.
이창훈이 벌떡 일어나 가슴을 쭉 내밀었다.
“이 새끼들이! 너희 이제 좆 됐어, 시발!”
“뭐, 뭐야, 이 새끼.”
“에라이, 더러운 새끼들아. 그럼 너흰 고삐리 데리고 뭘 하려고 한 거야, 이 새끼야! 애를 건들고 있어, 진짜. 카악, 퉤!”
“뭐? 개새끼가 뒤질려고.”
“진짜 죽으려고 환장했냐?”
“내 형님이 지금 저기 계신다. 우리 형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어어, 어!? 혀, 형님! 어디 가십니까! 형님! 꾸웩!”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던 인한이 갑자기 몸을 틀었다.
이창훈이 다급히 인한에게 달려갔지만, 킬러들이 뒤에서 걷어차서 넘어뜨렸다.
“야, 가 봐.”
우두머리로 보이는 킬러가 턱짓으로 인한을 가리켰다.
덩치가 큰 킬러가 성큼성큼 인한에게 다가가 말했다.
“어이, 거기 너.”
“……뭐죠?”
“너 뭐야. 저 새끼랑 알아?”
인한이 힐끗 이창훈을 바라보았다.
이창훈이 방긋 웃었다.
인한도 방긋 웃으며 이창훈을 바라보고는, 킬러에게 말했다.
“누구요? 모르는데요?”
“그래?”
“……!”
이창훈이 나라 잃은 표정으로 입을 쩍 벌렸다.
덩치 큰 킬러가 우두머리한테 고갤 돌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우두머리는 섬뜩한 표정으로 이창훈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때였다.
우드득!
듣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소음.
“어?”
덩치 큰 킬러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왜…… 자신의 등이 보이는 걸까?
“……그런데 너희들은 알겠다. 버러지 같은 킬러 새끼들, 맞지?”
인한이 킬러를 걷어찼다.
큰 덩치가 무색하게 180도로 고개가 꺾인 킬러는 반항 한 번 못해 보고 즉사했다.
“이 새끼가 브라이언을!”
“브라이언? 얘가?”
인한이 눈을 껌뻑이며 목이 꺾인 킬러를 툭 찼다.
브라이언이란 이름이 별로 안 좋은 건가?
왜 이렇게 질 안 좋은 애들이 많은 건지 모르겠는 인한이었다.
“이 노랑 원숭이가!”
“그거 인종 차별적 발언인데.”
인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우두머리와 함께 킬러들이 달려들었다.
인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었다.
“그래도 시간 아까운데 한꺼번에 와 줘서 고맙네.”
분노한 킬러들이 각자의 무기를 휘둘러 왔다.
하지만 인한은 심드렁했다.
원래도 느리게 보였겠지만, 정점에 도달했던 레오의 검격들을 봤기 때문인지, 킬러들의 공격은 어린아이의 장난처럼 보였다.
콰드득!
인한은 몸으로 전부 공격을 해소하며 주먹을 뻗었다.
“크륵!”
인중에 틀어박힌 인한의 주먹에 처음 달려들었던 킬러의 얼굴이 각설탕처럼 주저앉았다.
뒤이어 달려온 킬러가 옆으로 휘두른 검을 인한이 획 피하자, 반대쪽에 있는 킬러가 대신 베였다.
“헉! 케빈!”
우드득!
그게 킬러가 한 마지막 말이었다.
인한은 그대로 칼을 휘두른 킬러의 목을 잡고 부러뜨려 버렸다.
킬러들이 정리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분이었다.
인한이 손에 묻은 피를 털며 여자들과 이창훈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히, 히익!”
인한이 손을 뻗자 여자가 기겁을 하며 몸을 뺐다.
인한은 씁쓸하게 웃었다.
기분이야 조금 그렇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 여섯을 죽이거나 반불구로 만들었는데, 그녀들의 눈에 인한은 킬러나 똑같아 보일 것이다.
인한은 한 발자국 물러선 채 인벤토리에서 몸에 걸칠 만한 옷가지를 내려놓았다.
“죄다 남자 옷이긴 하지만, 없는 것보단 나을 겁니다.”
여자들은 덜덜 떨면서도 다급히 옷을 걸쳤다.
인한은 고갤 돌려 이창훈을 바라보았다.
이창훈이 움찔하고는 여자들과 똑같은 반응을 했다.
“히, 히익! 커흐어억!”
퍼억-!
인한은 그를 바로 발로 걷어찼다.
“왜 저는 취급이 다릅니까!?”
“너도 저렇게 되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하든가.”
인한이 턱짓으로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킬러들의 시체를 가리켰다.
“죄송합니다, 형님. 충성을 다 받치겠습니다.”
“옷이나 얼른 입어라.”
“넵.”
이창훈은 인벤토리에서 가벼운 추리닝을 꺼내더니 서둘러 입었다.
인한이 물었다.
“시킨 일은.”
“그, 그게 거의 다 하긴 했는데…….”
“뭐, 크게 바라지도 않았다. 그보다 하다 남은 거 어디 있어.”
“아, 넵. 여기 있습니다.”
이창훈이 가루가 담겨 있는 포대를 넘겼다.
“그래도 진짜 거의 다 했네. 나머진 내가 할 테니까 집합 장소에서 보자. 저분들 모시고.”
“네, 넵. 그, 그런데 형님, 이 정도로 소란이 일어났는데 얼른 도망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들키기라도 하면 마을에 있는 놈들 다 들고일어날 텐데…….”
“그건 신경 쓸 필요 없고, 그거나 이리 내.”
인한은 그렇게 말하고 포대를 건네받았다.
이창훈의 말마따나 소란을 느꼈는지 킬러들이 하나둘씩 다가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젠 그게 위험하지 않다는 것까지 느껴진단 말이지.’
킬러들이 움직이는 게 감각에 잡히고, 동시에 그 움직임이 자신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인한은 미드 코어로 알 수 있었다.
대체 미드 코어의 정체는 무엇일까.
‘차차 알게 되면 되겠지.’
이창훈이 여성들을 데리고 서둘러 마을을 빠져나갔다.
인한은 잠시 그들의 뒤를 봐 주다가 마을로 다시 돌아갔다. 산책이라도 하듯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소란을 느낀 몇몇 킬러들이 인한을 지나쳐 갔지만, 인한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인한인 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
인한은 그러면서도 포대에 담긴 가루를 가끔가다 한 움큼씩 뿌리는 건 잊지 않았다.
* * *
생각보다 인한은 아이템 제조법을 많이 알고 있다.
자신의 재능 부족을 얄팍하나마 지식으로 채우고자 했던 점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가 알고 있는 상당수의 제조법들은 데스 파티에서 노예처럼 부려지며 익혔던 것들이었다.
어쩌면, 이런 제조법들이 소소하게 인한의 앞길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지금이 그랬다.
[브리의 흙]
[등급 : F]
[종류 : 소모 아이템]
[효과 : 트랜 왕국의 학자 브리가 찾아낸 화약. 브리의 흙에 의해 타오르는 불은 기름이나 흙으로만 꺼지고, 물이 묻으면 화력이 더 강해진다.]
언제쯤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어떤 던전의 보상으로 나왔던 레시피로 만든 아이템이었다.
생각보다 조합법도 간단하고 효과도 좋다.
탑에는 참 별의별 아이템들이 많았다.
인한은 이것을 본격적인 복수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렇게 커다란 엿을 먹었는데 그냥 갈 수야 없지 않나.
그렇다고 창고만 털고 가 버리려니…… 도둑질을 했지만 인한이 좀도둑도 아니고, 뭔가 부족했다.
그렇게 거하게 한 방 날려 줄 방법을 생각하다 떠오른 것이었다.
방화.
모조리 다 태워 버린다.
사람은 불이 붙으면 일단 물을 붓는 것부터 생각한다. 그런데 물을 부었더니 화력이 더 강해진다면 어떨까?
“이, 이게 뭐야!”
“어떤 새끼가 이랬어!”
“브라이어어어언!”
뒤늦게 뒤쪽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한은 신경을 끄고 곧장 목적지로 향했다.
‘여기 있는 것들도 가져가야지. 태우기가 아깝잖아?’
인한이 향한 곳은 식료품들이 들어 있던 거대 텐트들이었다.
인한은 그 텐트들을 보며 섬뜩하게 웃었다.
“거기 누구야!”
때마침 킬러 하나가 천막을 열고 안쪽을 들여다봤다.
인한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왜? 무슨 일이야?”
“소리 못 들었냐? 침입자가 나타났다. 어떤 놈인지 여섯 명이나 죽였어!”
“침입자라고?”
“그래! 너도 얼른 도와!”
“그래, 알았어!”
인한의 대답을 듣자마자 킬러가 텐트 밖으로 나갔다.
인한은 피식 웃고 다시 텐트를 털기 시작했다.
“멍청한 놈들.”
물론, 브리의 흙을 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텐트를 털고 있을 무렵, 갑자기 조금 전 들어왔었던 킬러가 되돌아왔다.
“안 오고 뭐…….”
짜증이 묻어나는 말투로 재촉하려던 킬러가 인한의 손에 들려 있는 가루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너…… 그 가루는 뭐지? 시체에도 그게 뿌려져 있었는데?”
“흐음…….”
생각보다 멍청한 건 아닌 모양이다.
빠르게 이쪽으로 접근해 오는 기척들이 느껴졌다.
인한이 싱긋 웃으며 킬러에게 다가갔다.
“너처럼 눈치가 빠른 사람은 싫어해.”
“뭐…… 컥!”
킬러는 저항도 못해 보고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인한은 텐트를 가득 에워싼 기척을 느끼고 텐트에서 나왔다.
“저, 저 새끼다!”
“뭐해! 죽여!”
킬러들이 땅을 박차고 인한에게 달려들었다.
기껏해야 스무 명밖에 안돼 보였다.
인한은 포대 자루를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눈을 빛냈다.
* * *
장 플뢰르는 레오의 오두막 1층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하는 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는 어젯밤에 잠을 못 잔 것이었다.
헬 하운드의 인원이 어느 정도에 도달한 시점부터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아져서, 장 플뢰르는 철야로 일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곤 했다.
거기다 오늘은 그들의 뒤를 봐주고 있는 ‘어떤 곳’에서 들어온 요청이 있는 상태라, 더 세심히 서류를 확인해야 했다.
‘뭐, 어차피 상관없다. 힘은 우리에게 있으니까.’
혹자는 말한다.
권력이 무력보다 강하며, 금력이 무력보다 강하다고.
장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일단 선결되어야 하는 건 무력이다.
무력의 유무는 생존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일단 무력이 있으면, 금전이 따라오고, 권력이 따라온다.
목전에 드리워진 칼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는 아무도 없다.
“크, 큰일입니다!”
콰당!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다가왔다.
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직무 중에 누군가가 방해하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뭔데 그렇게 소란이지?”
“치, 침입자입니다.”
“뭐? 침입자?”
순간 욱신 눈가의 상처가 쓰라려 왔다.
장은 눈가를 찌푸린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곳에 자리 잡은 뒤로 벌써 몇 년째.
침입은 단 한 번도 겪은 적이 없었거늘.
“이럴 줄 알았다. 최인한…… 그자가 마을의 위치를 불었구나.”
이유라면 그것뿐이다.
최인한.
도대체 고작 한 명에게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던 말인가.
레오가 요양이 필요할 정도로 기운을 소모하고, 데스 시커는 죽었으며, 마을의 위치까지 발각되다니.
‘일이 끝나면 네놈을 최우선적으로 죽여 주마.’
장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지금은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겠군.’
침입자라니.
하필이면 지금은 마을 내에 킬러들이 가장 적은 시간대였다.
“그래서, 적은 몇 명이지?”
“그, 그게…… 한 명, 한 명입니다!”
“뭐?”
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고작 한 명 때문에 이 난리를 친 거냐?”
“하, 한 명이지만 무지막지하게 강한 놈입니다. 그놈이 벌써 간부님들을 세 분이나 쓰러뜨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