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공략자들 73화>
‘좆 됐다!’
이창훈이 고개를 푹 숙이고 오들오들 떨었다.
인한이 그런 이창훈을 보며 혀를 차고는 말했다.
“잠깐 글로테크에. 명령이 있었어.”
“그래? 뭐야, 그 뒤에 놈은? 왜 그렇게 계집애처럼 쫄아 있는데? 누가 두들겨 패기라도 했어?”
“말을 좀 안 들어서 말이지.”
“흐음.”
입에 대마를 물고 있던 흑인 사내는 인한에게 손을 뻗었다. 인한이 자연스레 손을 맞잡자 흑인이 인한을 끌어당겨 어깨를 툭 치며 등을 두들겼다.
“뭐, 쉬엄쉬엄하라고. 어차피 디데이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디데이?
“……그래.”
인한과 이창훈은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혀, 형님, 지금 뭡니까?”
“뭐가.”
“저 흑형 말이에요. 어떻게 넘어간 거예요? 혹시 아는 사이세요?”
“그냥 연기한 거야. 저딴 쓰레기들 몰라.”
갑자기 차가워진 인한의 분위기에 순간 입을 꾹 닫았다.
“넌 슬슬 시작해라.”
“혀, 형님…… 저 진짜 못하겠어요…….”
“걱정 마. 낮 시간이라 어지간히 게으른 놈 아니면 마을에 없을 테니까.”
그러고 나서 인한은 주위를 둘러보다 찾던 것을 발견하고는 이창훈에게 말했다.
“저거다. 저 텐트들 보이지? 저기서부터 시작해.”
“씨, 씨발…….”
이창훈이 울상이 된 채 어딘가로 떠났다.
인한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번에 왔을 때 대략적인 길을 파악해 두었기에, 누구에게도 띄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가 향한 곳은 창고로 보였던 목조 건물이었다.
창고 앞 땅바닥에 주저앉아 술을 마시며 킬킬대던 킬러 두 명이 인한을 확인하고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뭐어야. 이쪽으로 오면 안 된다고 애송아, 흐흐흐!”
“얼른 꺼져라! 딸꾹!”
그냥 맥주 한두 병 마신 줄 알았더니 술 냄새가 훅 느껴지는 게, 어지간히도 마신 것 같았다.
그 와중에 한 사내가 흐느적대며 인한에게 칼을 겨눴다.
인한이 그를 한심하게 쳐다보자, 킬러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곧장 인한에게 달려들었다.
“너 이 새끼, 눈을 고따구로 뜨고…… 컥!”
콰득!
바로 목뼈가 부러진 킬러가 비명 하나 없이 풀썩 쓰러졌다.
“뭐, 뭣! 너 이 새끼……!”
그제야 술기운이 달아났는지 나머지 하나가 벌떡 일어섰지만…….
우득!
주먹을 뻗은 인한에 의해 소리 지를 틈도 없이 가슴뼈가 주저앉으며 즉사했다.
인한은 발로 툭툭 시체들을 밀어내고. 자물쇠를 만져 보았다. 두께가 족히 5센티는 되어 보이는 자물쇠였다.
이 정도면 열쇠가 없으면 렌치나 망치로는 열지도 못할 것 같았지만…….
‘그래 봤자 자물쇠가 자물쇠지.’
끼기기긱-!
인한이 마력을 손에 모아 잡아당기자, 자물쇠는 종잇조각처럼 간단하게 우그러졌다.
인한이 자물쇠를 획 던져 버리고, 창고 문을 열었다.
“흐음, 이건…….”
그냥 잡동사니만 모아 둔 창고가 아니었다.
각석, 장비, 재료 아이템, 소비 아이템…….
수많은 종류와 수많은 양의 아이템이 그곳에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야말로 보물 창고였다.
‘창고 같은 거, 탑에선 진짜 쓸모없는 건데 말이지.’
아직 무한의 항아리에 대한 정보가 넓게 퍼지지 않아서 그런지, 아이템을 창고에 보관한다는 멍청한 짓을 한 모양이었다.
“나야 고맙지만.”
인한이 비릿하게 웃으며 가장 가까이 있는 아이템에 손을 뻗었다.
화악!
인벤토리의 장점은 딜레이 없이 뭐든 수납할 수 있다는 것.
인한이 양쪽 진열대 위에 손을 쭉 뻗은 채, 그대로 달렸다.
화악! 화악! 화악!
[오크의 뻐드렁니]
[하급 앤트 묘목]
[클렙틀의 가죽]
[이각석]
[일각석]
……
“오! 보스 아이템도 있네?”
[빅 보어의 가죽 장갑]
[등급 : D-]
[오크 족장의 완장]
[등급 : E-]
[샌드 크리퍼의 혈사(血沙)]
[등급 : D]
그것뿐이 아니었다.
창고에 있는 물건들의 대부분이 장비였다.
[블랙 타워 인더스트리 시리즈 No.10 클레이모어]
[야마카미 사(社) 카타나]
[슈왈츠 사 혈조 단검]
[강철 철창]
[견고한 가죽 갑옷 세트]
탑에서 나온 아이템은 아니지만, 미국의 회사인 블랙 타워 인더스트리, 약칭 BTI와 일본, 독일의 유명 도검 제작 업체 야마카미와 슈왈츠의 제품들.
그것들은 디자인도 실용성도 뛰어나서 리셀가만 해도 수백에서 수천만 원에 달하는 걸로 알고 있었다.
자연스레 아이템들을 쓸어 담던 인한이 순간 멈칫했다.
“잠깐, 이거 설마?”
[하급 마나의 정수]
[등급 : B]
정수다.
정수가 있다.
천문을 읽어 보니 마력을 50 포인트 정도 올려 주는 아이템이었다.
‘그렇구나. 지금 마력은 쓸모없는 스테이터스니까.’
괴담처럼 마력 스테이터스를 올리면 다른 스테이터스가 떨어진다는 소리까지 돌 정도다.
그래도 그렇지, 쓸모없기는 해도 공짜로 스테이터스 하나를 50이나 올려 주는데, 속는 셈 치고 마시지도 않고 이렇게 아무데나 박아 놨다니…….
‘덕분에 난 대박이다.’
거기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죄다 하급이지만 ‘마나의 정수’가 다섯 개나 있었다.
“바로 마셔야지.”
정수는 평범한 영약처럼 소화시키는 과정이나 부작용이 없는 게 장점이다.
‘안 그래도 내상 때문에 마력이 부족했는데, 잘 됐다.’
꿀꺽-!
인한은 목구멍을 타고 들어감과 동시에 마력으로 전환되는 것을 느끼며 히죽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몇 분 뒤, 인한은 기어코 창고 하나를 전부 털어 버렸다.
그중에는 쓸데없는 물건도 몇 개 있었는데, 킬러들한테 넘어가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모조리 챙긴 것이었다.
인한의 인벤토리도 이쯤 되니 슬슬 남은 칸이 아슬아슬했다.
“이제 창훈이랑 합류해야겠군.”
-쉬익!
창고를 나가려는 그때였다.
갑자기 샐러가 격하게 의지를 보내왔다.
“응? 왜 그래?”
의아하게 여긴 인한이 샐러를 소환했다.
샐러는 허공에 붕 떠오르더니 인한에게 눈짓했다.
“따라오라고?”
-쉬익! 시익!
인한의 말에 동의한 샐러가 창고 중앙으로 향하더니 땅바닥을 꼬리로 찰싹 찰싹 때렸다.
“뭐라도 있어?”
아무것도 없는 나무 바닥이었다.
인한은 발로 툭툭 건드려 보았다.
끼긱!
그런데 뭔가 소리가 이상했다.
인한이 한 발자국 물러서서 다른 쪽 바닥을 건드려 보았다.
투둑!
확연히 다른 소리.
귀를 가져다 대자, 웅웅거리는 무거운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아래에 무슨 공간이 있다.
인한이 바로 주먹을 들고 내리쳤다.
콰앙! 와르르!
“……금고?”
샐러가 금고를 맹렬하게 두들겼다.
인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아도 저 금고 안에 뭐가 있는 지 알 것 같다.
‘정령석이다.’
그것도 인한이 속성력으로 억지로 변화시킨 반쪽짜리 정령석이 아니라, 제대로 된 속성을 가진 진짜배기 정령석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직 정령술에 대한 인한의 숙련도가 낮아, 무슨 속성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만 있는 게 아닌 거 같은데.’
금고의 크기가 가로 세로 4, 50센티는 되어 보였다.
정령석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숨겨져 있는 이유가 따로 있을 터였다.
“이것도 가져간다.”
열 방법이야 어떻게든 찾으면 되겠지.
인한이 손을 가져다 댔다.
그렇게.
일천에 가까운 킬러들과, 육룡 레오 뒤보아, 육룡급의 헌터인 장 플뢰르를 포함한 수많은 공략자 클래스의 간부들이 모아 뒀던 헬 하운드의 창고가 모조리 털려 버렸다.
* * *
레오가 눈가를 찌푸렸다.
“이게 도대체…….”
30분을 내리 달려서 도착한 공터엔, 인한이 있을 것이란 그의 예상과 달리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신경을 건드리던 기운의 흐름이 흐릿해졌었는데, 설마 자리를 옮긴 걸까?
그럴 거면 왜 도발했을까?
그때, 레오의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이건 뭐지?”
공터의 중앙에 수북한 풀들이 미스터리 서클처럼 기이한 문양으로 꺾여 있었다.
레오가 그곳에 손을 뻗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하얀 가루가 풀이 꺾인 문양을 따라 뿌려져 있었다.
아니, 원래는 하얀 가루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문양의 위쪽에 푸른 점액질의 물체가 있었는데, 그 점액질의 물체가 타들어 가듯 서서히 하얗게 변색되어 가고 있었다.
레오는 고개를 갸웃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 거대한 한 마리의 뱀처럼 꿈틀거리며 하늘로 올라가는 검은 연기가 보였다.
“저쪽은 마을인데?”
화재라도 난 건지, 연기의 양으로 보니 규모가 엄청난 것 같다.
저 정도면 마을 전체가 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을?’
레오의 눈이 커다래졌다.
“설마?”
레오가 멈칫하고 하얀색 가루가 뿌려진 문양을 바라보았다.
“하, 하하하하하!”
그러고는 고개를 꺾으며 미친 듯이 웃었다.
“날 유인한 건가? 최인한!”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비튼 레오가 한 방 먹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레오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있다.
유인한 것은 맞지만, 그 목적이 그저 레오의 위치를 옮기려고 한 것만은 아니다.
마나 페이크 파우더는 그냥 뿌리기만 하면 작동되는 아이템이다. 굳이 문양을 그릴 필요가 없다.
즉, 인한은 함정을 설치한 것이었다.
“큭!”
우웅-!
파우더의 푸른 부분이 전부 하얀색으로 변한 순간, 지면이 크게 진동했다.
레오가 불안함을 느끼고 곧장 몸을 날렸지만, 진동과 함께 터져 나온 백색의 빛이 벌써 사방을 집어 삼킨 상태였다.
“뭐지……?”
하지만 뭐가 변한 게 없었다.
레오는 긴장을 풀고 주변을 살폈다. 역시 변한 건 없었다.
레오는 다시 고개를 갸웃하고 땅을 박찼다.
그런데.
“……?”
분명 땅을 박찼을 텐데, 레오의 몸은 방금 그 자리였다.
타닥!
다시 달려 봤지만 변한 게 없었다.
굴러도 보고, 땅을 파 보기도 하고, 점프도 해 보았지만, 레오는 문양이 있는 곳에서 채 1미터도 이동하질 못했다.
“허, 이건…….”
귀신에라도 홀린 기분이다.
그때, 허공에 천문이 떠올랐다.
[환상진에 빠졌습니다.]
[지속 시간 : 72시간]
[생로(生路)를 찾아 탈출하십시오.]
[진법 작성자의 문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By 최인한]
[불사신은 사흘 굶으면 어떻게 되려나?]
순간, 레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 * *
한편, 이창훈은 울상이 된 채 커다란 포대 자루에 흙빛의 가루를 이곳저곳에 뿌리고 있었다.
‘시, 시발. 아무도 없어라, 걸리지 마라, 제발! 하나님, 도와주십쇼-!’
중학교 때 좋아하는 여자애 따라다니느라 잠깐 다녔던 것 빼고는 교회랑은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이창훈이지만, 지금만큼은 기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였다.
“요즘 벌이가 별로였는데 대박이군.”
“그건 그렇고 이번에 재미 좀 보겠는데? 흐흐!”
“제, 제발요. 제발 살려 주세요…….”
킬러들 여섯 명이 모여 있는 곳에서 여자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이창훈은 눈을 껌뻑이다가 힐끗 그쪽을 바라보았다.
거의 반나체 상태로 땅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여자 두 명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한 명은 고작 고등학생 정도로밖에 보이질 않았고, 나머지 한 명은 20대 중후반 정도였다.
‘…….’
안 봐도 비디오다.
‘그렇다고 내가 뭘 어떻게 하냐. 곱린이도 놓고 왔고…… 그냥 할 일이나 하자.’
이창훈은 몸을 돌렸다.
툭 까놓고 이창훈이 저걸 구해 줬다고 나서 봤자 이창훈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꺄아아악!”
“흐흐흐! 역시 젊은 년이 살결이 곱다니까!”
뒤쪽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다.
이창훈이 한숨을 푹 내쉬고 몸을 획 돌렸다.
“아니, 시발! 좆같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