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공략자들 69화>
인한은 천천히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 인한을 반겼다.
‘여기가 대체…….’
인간이 사는 걸로는 보기 힘들 정도로 낮은 천장이었다.
“으윽.”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인한은 전신을 울리는 격통을 느꼈다.
송곳으로 전신을 쿡쿡 쑤시는 느낌.
푹신하진 않지만 평평한 곳에 누워 있는데, 예리한 면도칼이 박혀 있는 땅바닥에 누운 기분이었다.
‘내가 왜 이런 곳에?’
인한은 숨을 낮게 몰아쉬었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들썩이는데, 그것만으로도 엄청나게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인한은 기억을 되짚었다.
그러자 하나둘씩 기절하기 직전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내가 이겼나?’
최후의 일격.
처음으로 경험하는 느낌이었다.
전신의 모든 게 오로지 주먹에 모이는 감각과 함께 주먹을 뻗어 냈다.
폭풍식도, 폰 체술도, 제대로 익히지도 않은 아이언 크래시도 아닌…… 전혀 새로운 무언가였다.
그런데 결과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성공했으리라.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이렇게 숨 쉴 수 없었을 테니까.
‘아니, 잠깐만. 성공했더라도 내가 살아 있는 이유가 뭐지?’
그러다 모순을 깨달았다.
인한은 최후의 일격 후 그대로 기절했다.
그토록 요란하게 싸웠으니 킬러들이 인한을 찾아냈을 거란 사실은 자명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 있는 걸까?
그때였다.
-키엑! 크르락!
몬스터의 울음소리였다.
인한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역시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오히려 격통만 느껴졌을 뿐이었다.
직후, 녹색 손이 불쑥 눈앞에 나타났다. 몬스터의 손이었다.
놈은 딱 봐도 수상해 보이는 자주색 가루를 인한의 인중에 뿌리기 시작했다.
인한은 바로 호흡을 참았지만.
퍽!
‘컥!’
목젖을 내려치는 몬스터의 손날에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실 수밖에 없었다.
화악!
동시에 그 정체불명의 몬스터가 이곳의 밖을 나서는 소리가 들리고, 눈이 시릴 정도로 밝은 햇빛이 들어왔다.
‘으윽.’
곧장 짙은 수마가 인한을 덮쳤다.
자주색 가루의 정체에 대한 천문이 눈앞에 떠올랐지만, 제대로 확인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인한은 금세 잠에 빠졌다.
* * *
인한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익숙한 몬스터의 얼굴이 있었다.
-키엑!
이창훈의 몬스터인 곱린이었다.
‘이놈이 왜?’
곱린이는 인한의 몸을 살피고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천막을 열 때 빛이 안 들어오는 걸 보니 밤인 모양이었다.
“깨어나셨습니까, 형님?”
이창훈이었다.
몸을 낮추고 기어 온 이창훈이 쪼그려 앉아 인한을 내려다보았다.
“어우 씨, 진짜 불편하네. 무슨 내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도 아니고. 아아, 그게 아니라. 형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어떻게 된 거지?”
“아따, 거참 쌀쌀맞게 그거부터 물어보십니까? 제가 진짜 죽을 위협을 불사하고 형님 구하기 위해서…….”
“…….”
“구하기, 구하기 위, 위해서…….”
“…….”
“흑!”
인한의 무표정에 이창훈이 울상을 지었다.
인한은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며칠이나 지났지?”
“얼마 안 됐습니다. 오늘로 사흘째입니다. 곱린이한테 들어보니까 이틀 전에 한 번 깨셨는데 상처 벌어질까 봐 다시 재웠다고 하던데요.”
“사흘…….”
꽤 긴 시간이 흘렀다.
체감상으로는 잠깐 눈이 뜬 후로 길어 봤자 반나절 정도 지난 줄 알았더니 이틀이나 지났던 모양이다.
“그럼 여긴 어디지? 내가 꿈결인지는 몰라도 몬스터의 손 같은 걸…….”
“그, 그게, 고블린 부족의 마을……입니다.”
“……뭐?”
“고, 고블린들 마을이요!”
“…….”
“아이 씨! 왜 제가 말할 때면 맨날 그렇게 벌레 보듯이 보는 겁니까! 사실입니다! 사실이라구요!”
“그래서? 진짜 어딘데?”
“아니, 정말 고블린들 마을입니다……. 그리고 곱린이가 장악했고요…….”
“어떻게 된 거지?”
“그, 그게 말입니다…….”
이창훈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인한에게 버려진 후, 이창훈은 안전지대에서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그러다가.
“아니, 생각해 보니까 겁나 어이없네.”
땅을 손바닥으로 탁 치면서 욕했다.
“처음에 봐준다면서 내보냈잖아. 그럼 그건 그거대로 끝 아니야? 그 뒤로 계속 도와줬는데 퉁 치자는 게, 어? 그게 말이 되는 거야? 어!? 안 그러냐! 곱린아? 수고비로 몇 푼 더 주기라도 하던가!”
-키엑! 키엑…….
주인이 또 발작한다는 생각에 곱린이는 무슨 말인지 이해도 못했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따져 보기라도 해야지! 캬, 내가 이걸 까먹고 있었네. 이걸로 밀어붙이면 봐주……진 않겠지만, 크흠! 몰라. 일단, 곱린아! 형…… 아니, 그 새끼 어디로 갔어!”
-키엑!
곱린이가 벌떡 일어나 움직였다.
그 후, 인한을 찾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중간부터 인한과 마찬가지로 정비되어 있는 길을 따라 걸었고, 그 끝자락에 있는 불타는 듯 밝게 빛나는 산자락을 보고 따라 왔더니 인한이 있었던 것이다.
‘저, 저, 저게 뭐야!’
그런 이창훈의 눈에 거대한 규모의 마을의 모습이 드러났다.
5층 이하에서야 한 층에 복수의 마을이 존재하지만, 5층 이상부터는 보통 한 층에 한 개밖에 없다.
일단 마을이라는 게 사람이 모여야 만들어지는 법인데, 5층의 난이도 때문에 인원이 확 줄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7층의 마을인 글로테크 외에 마을은 없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어떻게 마을이 있지? 설마 소문으로만 듣던 아인종의 마을……은 아니네. 죄다 헌턴가? 자, 잠깐만. 그 새끼가 분명 킬러를 노린다는 듯이 말했는데…… 서, 설마! 저게 다 킬러들이라고?’
이창훈은 머릿속에 떠오른 가설에 경악했다.
‘조, 좆 됐다.’
자신이 낄 그림이 아니었다.
킬러들의 마을이라니.
요즘 킬러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얘긴 들어서 알고 있지만, 설마 이런 깊은 곳에 마을까지 만들어 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응?’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데, 그의 시야에 인한이 갑자기 도망치기 시작하는 게 들어왔다.
곧, 마을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야, 야, 얼른 가자!”
이창훈도 다급히 일어나 곱린이에게 말했다.
여기서 하나의 혼선이 발생했다.
보통 이창훈은 필드를 돌 때 곱린이에게 길 안내를 맡겼었고, 곱린이가 직전에 받은 명령은 인한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라는 것이었다.
자연스레 곱린이는 이창훈을 인한에게 안내했다.
* * *
“그래서 말입니다. 어쩌다 보니 킬러들의 우두머리랑 형님이 싸우는 걸 봤습니다. 설마 랭킹 2위, 무엇 하나 밝혀진 게 없던 레오 뒤보아가 킬러일 줄이야……. 아, 아니, 그리고 그러니까 그게…… 놀랐습니다. 크흠, 그러니까…….”
이창훈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바, 반했습니다?”
“…….”
“왜, 왜 그렇게 보십니까?”
“이해해 주지.”
“뭐, 뭣! 헉! 아니거든요! 저 게이 아닙니다!”
“아무 말 안 했다만.”
“으아악!”
“그래, 뭐, 말 안 해도 대충 구해 준 이유는 알겠군.”
인한이 피식 웃었다.
이창훈이 그 모습에 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누, 눈치 빠른 새끼.’
들킨 모양이다.
사실 반했다는 말은 개뻥이다.
물론, 그 싸움에 아무것도 느끼지 않은 건 아니다.
인한과 레오의 전투는 그야말로 랭커 정도나 보여 줄 수 있을 법한 싸움이었다.
아니, 인한이 상대하는 자가 랭킹 2위인 프랑스인 레오 뒤보아라고 하지 않던가.
랭커 중에서도 육룡급이나 보여줄 수 있는 싸움이었다.
랭커란 건 한마디로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한 인간을 의미한다.
세계 격투기 챔피언보다 탑을 오르는 일반 헌터 한 명이 더 강한 세상이다. 그런데 인한은 랭커 중에서도 최상위권인 육룡과 대등했다.
솔직히 마지막에 방해만 없었더라도…… 결과는 몰랐다.
그야말로 인한은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강한 사람과 승부를 점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제길, 존나 사악한 새끼. 눈치 깠으면 왜 물어봐?’
한마디로 이창훈의 입장에서는 월드 클래스로 강한 사람에게 빚을 지울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그래서 여기 있는 이유는? 아까 곱린이가 장악했다는 건 무슨 소리야?”
“아, 그거 말입니까?”
이창훈은 인한을 돕고자 했다.
돕고자 하긴 했는데…… 그걸 솔직히 어떻게 도우란 말인가.
인간의 탈을 쓰고 있는 작자가 칼질 한 번에 커다란 암석과 아름드리나무를 반쪽내고, 그자를 상대하고 있는 작자는 주먹질 한 방에 지면을 붕괴시키는데.
그래서 이창훈이 생각한 건 이거였다.
‘그래 봤자 다굴빵에 이길 사람은 없다!’
곱린이와 지내면서 알게 된 고블린의 습성이 몇 가지 있다.
고블린 부족에선 가장 강한 자가 우두머리가 된다는 것, 우두머리의 명령은 절대적이라는 것.
그래서 이창훈은 곱린이로 하여금 부족 하나를 통째로 접수하게끔 했다.
마침 근처에 부족이 하나 있었고, 고블린들을 써먹은 것이었다.
“그래서였군. 그런데? 왜 안 도왔는데?”
“저, 그게…… 저도 그걸 모르겠습니다.”
이창훈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저야 도우려고 했죠. 도우려고 했는데…… 형님과 레오가 싸울 때 곱린이가 갑자기 명령을 듣지 않게 됐어요. 스킬이 먹통이 됐다고 해야 하나? 아니, 스킬이 먹통이라기보다는…… 곱린이가 먹통이 됐어요. 갑자기 멍하니 형님과 레오만 뚫어져라 바라보더라고요. 숨도 제대로 쉬지 않는 것 같던데, 배터리 방전된 로봇처럼 꿈쩍도 안 하더라구요. 곱린이 키운 지 꽤 됐는데 그런 적은 처음이었어요.”
“……?”
“거기다 곱린이만 그런 게 아니라 데려온 고블린들도 그랬어요. 무슨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 줄 알았다니까요.”
이건 또 무슨 경우란 말인가.
인한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혹시 ‘그 공간’에서 싸우게 된 여파였던 건가?
뭔가 알아내야만 하는 진실의 단면이 드러난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전투가 끝났죠. 멀리서 화살이 날아와서 형님 옆구리에 꽂혔습니다. 주먹은 빗나가긴 했는데, 비껴 맞았는데도 레오의 머리에서 피가 철철 흐르던데요? 마침 곱린이가 정신을 차리길래 이때다 싶어서 마비독을 쏜 거구요. 그 뒤로는 사람들이 다가오는 게 보여서 어쩔 수 없이 곱린이랑 고블린들을 시켜서 형님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겁니다. 곱린이가 우두머리라 그런지 손님처럼 극진한 대접…… 이라기엔 고블린 스타일이라 솔직히 좀 이상한데…… 저 무슨 벌레를 대접받았다니까요. 그게 무슨 귀빈한테만 주는……”
또다시 삼천포로 빠지기 시작하는 수다쟁이 이창훈을 내버려 두고, 인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고블린들이 넋을 놓았다는 것도 의아하지만, 더 이해 안 되는 게 있었다.
인한이 여기 있는 것 자체다.
몬스터에게 최우선순위는 언제나 인간이다.
인간이 있으면 몬스터는 무조건 달려든다.
뭘 먹던 중이더라도, 배설하는 중이더라도, 자다가도, 달려들면 확실하게 죽는 상황이더라도, 언제 어느 때든 몬스터는 상관없이 인간을 죽이려고 한다.
때때로 지능이 높은 몬스터의 경우엔 자신보다 강한 헌터를 보면 도망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건 정말 드문 경우였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몬스터는 팔다리가 잘리고 내장이 흘러내려도 죽기 전까지 인간을 죽이려고 한다.
그런데 인한은 지금 사지를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로 고블린 부족의 마을에 있다. 거기다 치료까지 받았단다.
지금껏 인한이 알던 상식과는 다른 사건이었다.
‘아무리 우두머리의 명령이 있더라도…… 이상해. 그러고 보니 고블린 놈들은 언제나 이상했지. 약한 주제에 상층 구간에서도 나타나고, 몬스터인 주제에 원시적이지만 문화마저 가지고 있고, 드물게 마력을 가공해서 마법이나 오러로 다루는 놈들도 있었고…….’
그러고 보니, 탑의 현자라 불렸던 리 셴펑도 고블린을 포함한 몇몇 몬스터에 대해 의문을 표했었다.
도대체…… 이놈들은 무엇일까?
아니, 애초에 몬스터들은 도대체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