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공략자들 66화>
인한이 한창 수풀을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그가 몸을 뺀 지 2, 30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설마 나 말고도 저기서 뭘 얻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
옆쪽,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척을 느끼지 못했어.’
인한이 다급히 몸을 멈췄다.
땅을 긁으며 한참을 나아간 인한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인한은 목소리의 주인이 어디 있는지 찾아내지 못했다.
“너무 놀라는군. 그렇게까지 격하게 반응할 것까진 없는데 말이지.”
사내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제야 인한은 사내의 기척을 잡아 낼 수 있었다.
바로 옆, 짙은 어둠 속에서 커다란 암석의 위였다.
이렇게까지 가까이 있었는데 눈치채지 못했다니.
“그럼, 네가 세 번째라 이건가.”
사내가 엉덩이를 탁탁 털며 천천히 인한에게 다가왔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어딘가 권태로워 보이는 눈매를 지닌 백인 사내.
퇴폐적인 향기를 물씬 풍기는 그가, 새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새빨간 입술을 말아 올렸다.
‘강하다!’
인한은 깜짝 놀랐다.
알 수 있다.
마력도 아니고, 특별히 자신을 드러낸 것도 아니다.
선천적인 기세.
사내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기운에, 인한은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이 들었다.
“당신은 누구지?”
질문해 놓고, 인한은 자신이 멍청했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의 기세를 지닌 자. 그리고 방금 지나왔던 킬러들의 마을.
따로 누가 있을까.
“그건 내가 물어보고 싶은데. 남의 집 앞마당에 침입해 놓고 주인의 이름을 묻는다니 말이야.”
사내는 빙그레 웃고는 말했다.
“그래도 뭐, 상관없겠지. 만나서 반갑군, 최인한. 내 이름은 레오 뒤보아다.”
레오 뒤보아.
미래에는 그 이름만으로 수많은 사람의 분노와 원망을 샀던 존재.
그가 인한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 *
인한이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이름이야 브라이언에게 들었지. 최인한, 최인한……. 발음하기 제법 어려운 이름이야.”
“그걸 물어보는 게 아니다.”
“그럼 뭐지? 아아, 네가 침입한 거?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마을 주변을 맴돌 때부터 눈치는 채고 있었으니까.”
“……!”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들키지 않았을 셈이었건만, 시작부터 발각됐었을 줄이야.
“그러고 나서는 이쪽으로 오리라 생각하고 기다렸지. 코어 스톤을 한참 붙잡고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건 그렇고…… 최인한, 브라이언을 죽인 사람이 너지? 방금 전에 장이 데스 시커의 신호가 끊겼다고 하더군. 그것도 너일 테고. 너는…… 씨앗 보유자 중 하나겠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 씨앗이라는 것.
인한은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궁금하군. 넌 코어 스톤에서 뭘 얻었지?”
“기이한 환상을 경험했을 뿐이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잘 생각해 봐.”
“……?”
인한이 의아해하는 순간이었다.
두근!
인한의 심장이 묘한 박동을 토해 냈다.
또다. 방금 전의 알 수 없는 감각.
몸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마력원이……!’
곧 인한은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인한의 상식을 벗어난 일이 일어났다.
심장이다.
심장에…… 또 하나의 마력원이 생성되어 있었다.
“알아챘군. 뭘 얻었지? 말해 줄 수 있나?”
레오는 사뭇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인한은 그 표정에 위험을 감지했다.
“모두가 같은 걸 얻는다면 그렇게 물어보진 않았겠지.”
“이런, 들켰군. 난 역시 정보를 캐는 것엔 소질이 없어.”
레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로는 아쉬워하지만,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다.
“저건 내가 1층에서 발견한 아이템이지. 땅의 돌인 줄 알았는데, 땅의 돌이 아니더군. 굳이 말하자면, 땅의 돌의 근원? 음, 이건 좀 아닌가. 그래, 원본이랄까?”
“원본이라고?”
“그래. 그건 그렇고, 지금쯤 슬슬…….”
레오가 몸을 일으켜 밝게 빛나고 있는 마을 쪽을 바라보았다.
인한도 저절로 그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그리고, 또 한 번 그 정체불명의 예감이 인한의 뇌리를 잠식했다.
인한은 본능적으로 그 위험의 정체를 알아챘다.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다!’
보이는 거라곤 아스라이 보이는 마을의 빛뿐이건만, 분명 그 빛에 숨어 킬러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도대체 이건 뭐지?’
이해할 수 없는 감각. 원인이 있을 터다.
곧 인한은 그 대답조차 알 수 있었다.
심장에 생성된 마력원이 그 원인이었다.
맥동과 마력 전달의 효율이 상승하고, 마력의 흐름이 머리를 맑게 한다.
인한은 머릿속에 들불처럼 번져 가는 예지가 사람들의 흐름을 잡아냈다.
“호오, 알아챘나? 이렇게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인한이 레오에게 획 시선을 돌렸다.
역시 그 확신은 틀린 게 아닌 모양.
“시간을 끈 건가.”
“오해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딱히 저놈들을 이용해서 널 잡으려는 건 아니니까. 그런 아까운 짓을 할 리가 없지.”
“……?”
“룰은 간단하다. 이곳에 저놈들이 오기까지 대략 3, 40분 정도. 그 동안 날 넘어서면 너의 승리, 내가 널 죽이거나 그 시간을 넘기면 나의 승리.”
게임이라도 하자는 듯이 말하는 어투다.
피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피할 수 없음을 알았다.
레오가 인벤토리에서 기다란 검 두 자루를 꺼냈다.
“어때, 꽤 재밌을 것 같지 않나?”
* * *
“전력을 다해. 안 그러면 금방 죽을 테니까.”
화아아악!
순간 바람이 불어왔다.
아니, 어쩌면 레오의 강렬한 기파를 마주하며 느낀 착각일까.
공간을 접듯, 마주 보고 있던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쿠웅-!
인한의 주먹과 레오의 쌍검이 부딪치며 사방으로 돌풍이 몰아쳤다.
첫 번째 충돌. 직후 빛살처럼 두 자루의 검이 호선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빠르다!’
믿을 수 없는 속도다. 회귀 후 경험한 어떤 적들보다도 빨랐다.
거기다 때가 좋지 않다.
사위를 잠식한 짙은 어둠.
이 정도야 장애가 될 것이 없는 인한의 감각이지만, 그 어둠에 숨어 엄청난 속도로 휘둘러지는 검을 완벽히 파악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콰득!
날카롭게 찔러오는 검격.
레오도 두 팔과 두 다리가 달린 사람일진대, 그 쾌속함에 수십 명의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다.
‘크윽!’
옆구리에 일격을 허용했다. 분명 쳐 냈을 검격이 어느새 다시 휘둘러진 것이다.
극체술이라는 최상위 마나 스킬이 3단계에 오르지 못했다면, 혹은 레오가 높은 등급의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면, 인한은 지금 일격으로 쓰러졌을 것이다.
‘믿을 수 없어.’
콰과가가가가강!
휘둘러지는 인한의 주먹도 분명 빠르다.
현재 인한의 기본 스테이터스는 동 레벨대의 헌터들을 상회한다. 거기에 상당한 포인트를 투자한 마력 스테이터스도 있다.
그런데 레오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그는 이 먼 과거에서조차 괴물처럼 강하다.
‘얌전히 질 생각은 없다.’
인한은 방어를 내던지고 공격을 뻗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도 마구잡이로 팔을 베어 가는 두 자루의 검.
무시한다.
애초에 속도는 인한의 분야가 아니다.
힘.
힘이라면 인한이 뒤질 리가 없다.
‘파공권!’
퍼엉!
곧은 선을 그리며 뻗어나간 주먹질.
그 끝에 두 줄기의 마력이 나선형으로 회전하며 강맹한 파괴력을 뿜어냈다.
레오는 검을 휘둘러 주먹에 맞섰다.
콰앙!
레오의 몸이 맥없이 튕겨 나갔다.
따라 붙으며 후속타를 이어 가려던 인한.
하지만 레오가 날아가는 순간에도 대여섯 번의 검격을 떨쳐 낸다.
인한은 거리를 벌릴 수밖에 없었다.
“하하, 이거 꽤 아프군.”
레오가 표정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떻게 된 몸뚱이지? 베이지도 않고, 찔리지도 않고, 징그러울 정도군. 도대체 무슨 사기적인 스킬을 쓰는 거야. 거기다 마지막의 하얀빛은 뭐고.”
일격을 허용했지만, 여전히 레오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인한도 말없이 주먹을 바라보았다.
주먹만큼은 인한도 집중해서 마력을 흘려보냈건만, 그의 주먹에는 욱신거리는 통증과 함께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이대로라면 시간 내에 날 이길 수는 없을 텐데?”
레오가 즐겁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인한이 땅을 박찼다.
쩌저저저저정!
주먹과 쇠붙이의 격돌.
그런데 대체 어떻게 폭발하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이길 수만 있다면…….’
인한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죽인다.’
그리고 전개되는 극체술.
펼쳐진 것은 인한이 가진 최강의 스킬, 파검식이다.
최고조로 끌어 올린 마나 스킬 3단계의 마력이 인한의 주먹에 실렸다.
“흐음?”
자유로운 전투법에서 정형화된 형(形)을 가진 파검식으로 움직임이 바뀌었다.
뻗는 주먹에 형식이 있고, 땅을 박차는 발놀림에 법도가 따른다.
저절로 흐름을 만드는 마력이 그 뒤를 받쳐 주니, 인한의 주먹은 거칠 것이 없었다.
“큭!”
인한의 일격을 간신히 막아 낸 레오가 처음으로 신음을 흘렸다.
막긴 막았지만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었던지, 레오의 입가에 핏방울 한 줄기가 흘렀다.
하지만 레오의 표정.
그 표정만은 여전히 미소가 가득했다.
“재밌어. 나도 슬슬 가지고 있는 카드를 한 장씩 보여줘 볼까. 그 몸뚱이, 곧 뚫어 주지.”
레오가 순식간에 짓쳐 들었다.
또다시 쇄도하는 검격.
휘둘러지는 좌검(左劍)은 몸으로 받아 내고, 찔러 들어오는 우검(右劍)은 흘린다.
레오는 두 팔을 다 사용했지만, 인한에겐 팔 하나가 남아 있다. 이제 반격을…….
‘뭐!?’
오른쪽, 받아 냈을 터인 좌검이 어느새 코앞까지 휘둘러졌다.
예리하다.
인한은 본능적으로 맞아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큭!”
급히 몸을 꺾었다. 피할 수는 있었지만.
쩌-억!
묘족에게서 얻은 가죽 갑옷이 예리하게 갈라진 채, 땅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분명 흘려 냈을 우검이 불쑥 솟아올랐다.
콰득!
인한이 발악적으로 발을 휘둘러 공격을 막아 냈다.
거리를 벌리고자 했지만, 레오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곧바로 따라붙었다.
쾅! 콰가가강!
밀린다.
인한은 간신히 공격들을 막아 냈지만, 레오의 공격은 그야말로 폭풍처럼 쉴 새 없이 휘몰아쳤다.
그 때문에 인한은 공격은커녕 반격의 틈조차 찾아낼 수 없었다.
‘도대체가!’
원래도 그 속도 탓에 수십 자루의 검을 상대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더했다.
이유는 무엇인가.
인한은 머지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검을……!’
레오는 인벤토리에서 검을 뽑아내고 있었다.
검이 튕겨 나간다면 그대로 놓아 버리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파격적인 방법이었다.
그는 부딪치는 충격은 검을 놓아 버리는 것으로 해결하고 허공, 즉 인벤토리에서 새로운 검을 뽑아냄과 동시에 휘둘렀다.
인벤토리는 손이 닿는 곳이라면 허공이든 어디든 꺼낼 수 있는 바, 레오의 발치엔 벌써 세네 자루의 검이 뒹굴고 있었다.
‘인벤토리를 이렇게도 사용할 수 있는 건가!’
발상의 전환이다.
팔이 닿는 곳이기만 한다면, 그곳이 검집이 되고 공격의 시작점이 된다.
거기다.
쐐액!
레오가 발치에 뒹굴던 검의 손잡이를 발끝에 걸더니, 그대로 차올렸다.
인한의 코끝을 스치며 하늘로 치솟는 검날.
간신히 피했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레오는 튕겨 나간 검의 손잡이를 중간에서 잡아채더니 그대로 내리찍었다.
‘큭!’
카가각!
베이지는 않았지만 막아선 주먹에 묵직한 충격이 느껴졌다.
상상치도 못했던 방향으로 공격이 몰아친다.
넓고 세밀한 시야, 유연성과 속도, 거기다 기괴할 정도의 발상 전환이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전투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쐐액! 쐐애애애액!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공격에 인한의 가슴이 얇게 베여 피가 흘렀다.
피가 흐르는 것은, 즉 극체술이 뚫렸음을 의미한다.
레오는 그저 순수한 육체의 힘과 몸에 붙은 숙련된 기술만으로, 대포에도 뚫리지 않던 인한의 방어를 뚫은 것이다.
‘이대로라면 진다.’
검과 맨손의 싸움이라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거리의 싸움이 된다.
그런데 인한은 지금 자신의 거리를 찾지 못하고 레오의 거리에서 휘둘리고 있다.
지금이야 육체가 버텨 준다지만, 장기전으로 이어져 마력이 한계에 달한다면 목숨도 위험할지도 몰랐다.
이래선 안 된다.
되찾아야 한다. 자신의 호흡을, 자신의 거리를.
‘……그렇군.’
인한의 눈빛이 한순간 이채를 띠었다.
레오에게 변칙과 속도가 싸움법이라면, 인한에게는 힘과 맷집이 있다.
자신의 싸움법.
공격을 몸으로 버티며, 단 한 번에 상대를 침몰시킬 일격을 뻗어 내는 것.
그것이 인한의 전투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