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공략자들 64화>
해체가 끝난 것은 밤이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다.
안전지대로 같이 돌아간 인한은 이창훈에게 말했다.
“이제 여기서 헤어지자.”
“행님! 제가 밥을 맛있게…… 예……?”
“고마웠다. 덕분에 쉽게 끝났어.”
이창훈이 멍한 표정으로 인한을 바라보았다.
인한은 그 말을 끝으로, 바로 몸을 돌려 안전지대를 벗어났다.
이창훈을 마력을 통해 찾았듯, 아마도 장 플뢰르라고 예상되는 데스 시커의 테이머의 위치도 마력을 통해 잡아냈다.
놈이 데스 시커에게 이변이 생긴 걸 알아채기 전에 마력을 되짚어가야 했다.
“아니, 저기요. 형님! 어디 가시는데요!”
이창훈이 헐레벌떡 뛰어나와 인한을 붙잡았다.
인한이 말했다.
“데스 시커가 원래 목적이 아니야. 그 주인이 원래 목적이지.”
“어, 그럼, 저, 저는 어떻게 하시구요……?”
“알아서 돌아가. 내 물건 훔치려고 한 건 퉁쳐 줄 테니까.”
이창훈이 어처구니없어서 눈을 껌뻑였다.
그러다 울컥 짜증이 치솟았다.
그 정도로 아부를 하고, 그렇게까지 따라다녔는데 매정하게 이러다니.
‘이 재수 없는 놈!’
하지만 맞는 말이라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첫 만남도 곱린이의 잘못 때문에 시작됐고, 인한은 충분히 자신을 ‘처리’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용서해 줬다.
‘그런 데다 수고했다면서 많은 부산물을 양보하기도 했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양심이 없어도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창훈은 어째서인지 위가 따끔따끔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대로 놓칠 수는 없지!’
이창훈이 불끈 주먹을 쥐었다.
“저…… 형님, 저 그래도 꽤 쓸모 있습니다. 제 곱린이도 그렇구요. 솔직히 형님처럼 잘 싸운다고 다짐할 순 없지만 이것저것 귀찮은 일들은 충분히 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거기다 제가 1세대 헌터라 꽤 정보 쪽으로는 빠삭한 데다 인맥도 좀 있고…….”
“그래서?”
말이…… 참 짧다.
또 짜증이 울컥 솟았지만, 이창훈은 심호흡을 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후우…… 이너 피스. 포지티브 띵킹. 후우, 후우.’
이창훈은 무언가 결정한 듯 눈빛을 번쩍 빛내고는…….
털썩,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형님!”
“……갑자기 왜 이래?”
“절…… 받아 주십쇼!”
이창훈이 외쳤다.
어떻게 잡은 인연인데 여기서 헤어지자니! 절대 안 된다!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최대한 따라다니면서 이것저것 보고, 듣고, 배우고, 될 수 있으면 콩고물도 좀 얻어먹어야 했다. 데스 시커 부산물 정도로는 부족하다!
“계속 따라다니게 해 주십쇼! 사나이, 이창훈. 뭐랄까, 운명을 느꼈다고 해야 하나요. 사내로서 모셔야 할 주군을 보았다고 해야 하나요! 형님을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절 부하로 삼아 주십쇼! 제가 형님의 오른팔이 되겠습니다!”
이창훈은 숫제 이마를 돌에 박을 기세로 머리마저 땅바닥에 들이대고 있었다.
그렇게 어울리지도 않는 중2병 대사를 뱉는 이창훈은 하물며 눈물까지 찔끔 흘리고 있었다.
인한은 삐딱한 태도로 눈가를 찌푸렸다.
“연기 잘하네. 왜 헌터 됐냐, 연기나 하지.”
“제 진심을 몰라주시는 겁니까! 형님에게 충성을…….”
“그럼 허벅지는 왜 꼬집었는데.”
“헉!”
인한은 피식 웃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따라오겠다는 거냐? 너, 나 잘 알아?”
“모, 모릅니다! 하지만 형님이라면 충성을 받치는 데 후회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말은 청산유수다.
그래 봤자 대답은 정해져 있지만.
“싫어.”
“예, 예? 형님? 형님!”
“이건 그래도 도와준 거 고마워서 주는 거니까 꼭 읽어 봐라.”
인한이 갑자기 종잇조각을 획 던졌다. 이창훈이 간신히 떨어지는 종잇조각을 잡았을 때.
인한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헐?”
멍하니 넋을 놓았던 이창훈이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이미 인한은 어둠 속 어딘가로 사라져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서, 설마 정말 간 거야? 이렇게? 진짜로?”
이창훈이 이를 바득 갈았다.
“이, 이…… 이 시……!”
말해 줄 거다. 욕이라도 한 바가지 해야 이 군고구마 100개짜리 답답함이 풀릴 거 같다!
“……발 새끼…….”
하지만 이창훈은 그렇게 외치려다, 혹시 인한이 들으면 다시 돌아올까 봐 외치진 못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이창훈이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키엑, 키엑.
곱린이가 그 옆에 다가와 힘내라는 듯 어깨를 두드렸다.
* * *
인한은 마력을 되짚어가며 뛰어가다 피식 웃었다.
‘부하라…….’
좀 쓸 만한 놈인 거 같긴 한데, 어차피 인한이 어디 가고 있는 지 알면 꼬리를 내빼고 도망칠 것 같았다.
‘앞으로가 조금 기대되긴 하지.’
이창훈은 모르는 것 같지만, 분야는 조금 다를지 몰라도 이창훈의 테이머로서의 재능은 장 플뢰르와 비교될 정도였다.
‘탑에서는 전투가 다가 아니야.’
게다가, 지금은 기껏해야 10층까지밖에 공략되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전투력이 높은 걸 최고로 치지만, 그건 중층 구간에만 가도 달라진다.
특정 층들은 그저 강하다고 클리어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인한이 거쳐 온 5층이 그랬고, 지금 수많은 공략자들이 멈춰 있는 10층이 그랬다.
애초에 ‘강하다’의 기준도 모호하다. 그저 잘 싸우고 잘 부수면 강한 것일까?
인한은 고개를 저었다. 전투에 특화된 자들이 화려할지는 몰라도, 그렇지 않은 자들의 도움은 반드시 필요했다.
‘뭐, 인연이 있다면 다시 보겠지.’
지금은 시간이 촉박했다.
데스 시커가 죽은 지 꽤 시간이 흘렀다. 염파에 반응이 잡히지 않는 걸 장 플뢰르가 눈치채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인한은 생각을 털어내고 원래의 목적에 집중했다.
그는 빠르게 움직이며 자취를 되짚어 갔다.
그렇게 1시간, 2시간…… 인한은 걸음을 멈췄다.
걸으면 걸을수록 묘한 위화감이 신경을 자극했다.
‘뭐지? 내가 놓친 거라도 있나?’
인한은 잠시 멈춰서 주변을 살폈다.
평범한 산길, 어두컴컴한 하늘, 평평한 땅…… 평평한 땅?
‘……길이다.’
몸을 낮춰 땅바닥을 살폈다.
말 그대로 길이었다.
보통 산길은 땅은 돌이며 나무며 낙엽들이 가득해서 미끄럽고 울퉁불퉁하기 마련인데, 인한이 걷고 있던 길은 모두 평평하게 다져져 있었다.
걸리적거리는 수풀이나 나뭇가지도 전부 잘려 있었다.
누군가 정비한…… 혹은 많은 수의 사람이 걸어서 자연스레 생긴 길임이 틀림없었다.
‘그러고 보니 몬스터의 낌새도 없어.’
밤이 긴 만큼 야행성 몬스터의 종류도 개체수도 많은 7층에서 벌써 몇 시간째 이동하고 있는데, 인한은 이 길을 걸으면서 한 마리도 만나질 못했다.
“으음…….”
한참을 걷던 인한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저 멀리 산의 능선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직 아침이 되려면 한참 먼 깊은 밤중.
거기다 햇빛이라면 저렇게 붉게 타오를 리도 없었다.
한마디로, 저곳에 인위적인 광원이 있다는 소리였다.
‘저 정도 빛이면 몬스터의 부락 정도도 아니다.’
필드의 가장 깊숙한 곳, 인한도 데스 시커를 사냥하기 위해서라면 오지도 않았을 외딴 곳에 있는 불빛.
인한은 숨을 죽이고 광원을 향해 다가갔다.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자, 인한의 피부에 엷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마나 스텔스.
살짝 흘린 마력으로 기척과 소리를 차단하는 마나 스킬의 기본기 중 하나였다.
[스킬을 익혔습니다.]
<패시브 스킬>
[은신]
평소에는 들소처럼 냅다 들이박아서 그런지 생기지 않았던 스킬이 나타나 줘서, 조금 더 움직임이 조심스럽게 되는 기분이었다.
“……!”
곧 목적지까지 다다른 인한의 표정은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거대한 암석에 몸을 숨기고 힐끗 살펴본 곳.
산과 산이 만나는 곳에 있는 넓은 협곡에는 밤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빛이 아른거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협곡을 빼곡히 채울 정도로 수많은 텐트들과, 그 텐트의 수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이 숨 쉬고 있었다.
그것은 조악하지만, 분명 마을이라 부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마을.
엄청난 수의 사람들.
추측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기억났다.”
오래된 기억 하나가 저절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째서 잊고 있었던 걸까.
아니, 어쩌면 얼마 뒤에 일어날 3차 몬스터 웨이브라는 강렬한 기억 때문에 잊었는지도 모른다.
“조용히 세력을 모은 킬러들이 1층을 점거한 사건. 초기에 아지트를 찾을 수 없었는데…… 그게 7층이었던 거야?”
셀 수도 없이 많은 텐트의 숫자.
저들은 모두 킬러였다.
* * *
킬러를 킬러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살인을 한 사람들이라?
그렇게 따지면 인한도 킬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탑을 오르는 사람들은 꽤 많이 살인을 접한다.
그럼 그들 모두 킬러라고 불려야 하는 걸까?
킬러가 킬러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들에게 살인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탑은 탑의 밖과 다르다.
초법적인 공간인 만큼 사건이나 사고는 있기 마련이고, 윤리나 양심보다는 주먹과 칼이 가까운 공간이기에 살인이나 폭력도 일어난다.
그게 옳은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상적인 헌터 중에 굳이 살인이나 폭력을 수단으로 탑을 오르는 헌터는 없다.
‘몬스터를 잡고 레벨을 올린다.’, ‘반복 행위를 통해 스킬을 얻는다.’ 등등…… 당연하게 존재하는 성장 방법으로 강해지며 탑을 오르는 것이다.
하지만 킬러들은 사람을 죽여 강해진다.
죽이고, 스킬을 빼앗고, 아이템을 빼앗고, 능력치를 얻는다.
킬러들도 처음부터 킬러였던 건 아닐 것이다.
어쩌다 보니 살인을 하게 되고, 떨어진 보상을 두려움 반 놀라움 반으로 얻었으리라.
그 다음에는 잊고 지냈지만 더딘 성장 속에서 또 한 번의 살인을 저지르고, 점점 살인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졌을 테다.
그렇기에 그들을 킬러라고 부른다.
어떻게 보면 몬스터와 한없이 비슷한, 인간으로서 커다란 뭔가를 포기한 진정한 의미의 괴물.
‘이렇게까지 많았나?’
인한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인한은 킬러를 혐오한다.
그것은 단지 인한뿐이 아닐 것이다.
전생에서 열 명의 공략자들을 세워 두면 그들 중 다섯은 킬러에게 원한을 갖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인한도 많은 걸 놈들에게 빼앗겼다.
‘저길 무작정 들이박는 건 자살행위겠군’
아무리 인한의 육체가 한계를 뛰어넘었다고 하지만, 몇 명이나 있을지 모르는 살인마들을 상대로 싸움을 걸 자신은 없었다.
숨어드는 거라면 모를까…….
인한은 심호흡을 하고 텐트촌을 살폈다.
자세히 보니, 일정한 규칙으로 텐트가 서 있는 게 아니라 마구잡이로 펼쳐져 있었다.
게다가 경계를 서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어떻게 필드의 깊숙한 곳에 이렇게 커다란 마을을 만들 수 있었을까?
‘저게 뭐지?’
그러다 인한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경악했다.
텐트촌의 가장 끝자락, 깎아내린 듯한 절벽 밑에 커다란 2층짜리 통나무집이 있었다.
조잡하긴 하지만 텐트만 가득한 곳에 있는 유일하게 제대로 된 건물이었다.
하지만, 인한이 놀란 이유는 그 건물 때문이 아니었다.
건물의 옆, 이 장소에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암석이 있었다.
‘설마……?’
신비로운 황갈색과 안쪽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은 투명도, 그리고 때때로 은은하게 빛나는 엷은 푸른빛까지.
인한뿐 아니라, 이 탑을 오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하나의 아이템의 이름이 인한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저거, 땅의 돌인가?’
아무리 커 봤자 농구공 크기 정도에 불과한, 마을을 생성하는 습득 불가 아이템, 땅의 돌.
하지만 저곳에 있는 것은 돌이라는 이름이 붙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옆에 있는 2층짜리 통나무집의 족히 두 배는 될 만한 기괴한 암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