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공략자들 63화>
이창훈은 그 광경을 눈에 담은 순간, 태어나서 처음으로 ‘입이 쩍 벌어진다.’라는 관용구를 실제로 경험했다.
‘어, 어, 어떻게!?’
족히 몇 톤은 되어 보이는 데스 시커의 거구가 100키로도 채 안 되는 인한이 휘두른 주먹에 나가 떨어졌다.
질량의 법칙은 가볍게 무시한 광경이었다.
데스 시커가 전력을 다해 돌진했는데, 그걸 고작 주먹 하나로, 막아 세운 것뿐 아니라 쓰러뜨린 것이다!
-크, 르르르! 크르륵!
데스 시커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살벌한 눈빛이었다.
안전한 곳에 숨어 있음에도 이창훈은 오금이 저렸다.
“역시 단단하군. 하긴, 제대로 된 폭풍형이 아니었으니.”
여유로운 한마디.
이번에 선공을 취한 것은 인한이었다.
터엉!
허공에 붕 뜬 인한의 주먹이 그대로 쏘아졌다.
-크륵!
데스 시커는 인한의 주먹을 용케 피하며 그대로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인한은 그런 데스 시커를 엘보우로 후려쳤다.
처음의 일격처럼 데스 시커가 튕겨 나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데스 시커의 고개가 휙 젖혀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데스 시커는 반격을 해 왔다. 두꺼운 기둥 같은 데스 시커의 두꺼운 꼬리가 휘둘러진 것이다.
인한이 채 도망치지 못할 위치.
이창훈이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안 돼!”
콰앙!
인한에게 데스 시커의 꼬리가 그대로 직격했다.
이창훈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무를 몇 개나 부러뜨리며 지면에 격돌한 인한 쪽을 바라보았다.
설마 저렇게 어처구니없게 공격을 허용해 버리다니…….
-크르르…….
하지만 이상했다.
데스 시커는 인한을 처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긴장한 듯 몸을 낮추며 으르렁댔다.
“그래, 쉽게는 안 끝난다 이거지?”
인한의 목소리였다.
인한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먼지를 툭툭 털어 내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크르! 크르라아아아!
콰앙! 콰앙! 콰앙!
이제는 비명에 가까워진 울음소리와, 대지를 진동시키는 폭음이 끊이질 않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데스 시커가 거구에 맞지 않은 날렵한 속도로 거리를 벌리며, 토악질을 하듯 입을 쩍 벌리고 무언가를 쏟아 냈다.
쏴아아아!
퀴퀴한 기름 냄새와 함께 인근의 곳곳이 기름에 젖어 축축해졌다.
데스 시커는 입에 기름을 뚝뚝 흘리며 인한을 노려보았다.
인한은 히죽 웃으며 기름이 묻은 지면을 아무렇지도 않게 밟았다.
‘그땐 마력이 없어서 그랬지. 마력만 충분하면 기름 따위 전혀 상관없어.’
마력만 충분하다면 물 위에서도 떠오른 채 싸울 수 있는 인한이다.
고작 드문드문 뿌려진 기름 웅덩이 정도는 방해도 되지 않았다.
콰아아아앙!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이 사라진 데스 시커와의 전투는 당연하게도 인한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인한은 일방적으로 데스 시커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허, 허어…….”
이창훈은 털썩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런 전투법이 있다니.
얻어맞아도 생채기 하나 없고, 멀쩡한 무기 하나 없이 적수공권(赤手空拳) 맨몸으로 달려들다니.
‘이게, 말이 돼?’
이제껏 그가 알고 있던 탑에서의 전투 방식이 산산조각 났다.
아무리 탑에 오르면 인간이 초능력과 같은 힘을 얻을 수 있다지만, 그것도 상식선 안에서였다.
평범한 단련으로는 가질 수 없는 힘과 속도를 가지게 된다 하더라도, 만화책 속 히어로들처럼 인간이라는 ‘종’을 초월한 힘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인한은 그랬다.
저걸 누가 인간이라고 하겠나!
쾅!
그 순간, 무언가 폭발하는 소음과 함께 열기가 몰아쳤다.
깜짝 놀란 이창훈이 열풍의 근원지를 보고는 눈을 의심했다.
인한의 양팔에 주먹에서부터 어깨를 감쌀 정도로 거대한 화염이 타오르고 있었다!
“으어어어?”
이젠 더 이상 놀라기도 힘들다.
세간에 알려진 자이언트에 대한 평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크라라라락!
인한은 데스 시커를 노려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불길의 정체는 바로 샐러였다.
레벨을 올리고, 끊임없이 정령술을 사용하며 성장시킨 불의 정령 샐러는 이제 인한이 쓸 수 있는 어엿한 또 하나의 힘이 된 상태였다.
불은 기름에 붙기 마련.
하지만 주변 수풀엔 불씨조차 타오르지 않았다.
정령술에 의해 모든 게 통제된 불의 속성은 인한의 의지가 향하는 곳만을 태우는 것이었다.
-크륵, 크륵, 크르르…….
그렇게도 강대한 기세를 드러내던 데스 시커였건만, 정령술에 3단계에 도달한 마나 스킬, 그리고 파검식마저 드러낸 인한의 적은 아니었다.
데스 시커는 결국 전신이 불길에 휩싸인 채 비틀거리며 그 거구를 쓰러뜨렸다.
하지만 역시 그 경이로운 생명력은 쉽게 꺼지지 않는 것인지, 데스 시커는 그 와중에도 멈추지 않고 몸을 꿈틀댔다.
“끝이다.”
인한은 천천히 데스 시커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데스 시커의 미간을 향해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크륵!
콰앙!
데스 시커가 외마디 신음 소리와 함께 마지막 숨을 내뱉었다.
맥 빠진다면 맥 빠지게, 마침내 수십의 헌터 팀을 잡아먹은 변종 몬스터 데스 시커의 숨이 끊어진 것이다.
“후우, 끝났군.”
인한은 쓰러진 데스 시커의 앞에서 자세를 풀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샐러.”
인한이 허공에 손을 휘휘 젓자, 주변에 있는 모든 불길이 살아 있는 것처럼 공중으로 모여 들며, 타오르는 듯한 붉은색 털을 가진 귀여운 외모의 동물로 변했다.
꼬리까지 합치면 1미터 정도로 덩치가 커진 샐러가 인한의 주변을 날아다니며 재롱을 부렸다.
그 모습은 정말 만화나 영화 속에서나 나오는 신비로운 장면이었다. 그 밑에 새빨간 피를 철철 쏟아 내는 거대 몬스터만 없었다면 말이다.
한편.
“딸꾹!”
그 모든 걸 보고 있었던 이창훈은 딸꾹질을 했다.
-히꾹!
그리고 그 옆에서 마찬가지로 구경 중이던 곱린도 어깨를 들썩였다.
이창훈은 힐끗 고개를 돌려 곱린이를 바라보았다.
곱린이도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돌려, 이창훈과 눈빛을 교환했다.
‘허허, 내가 오늘 뭘 본 거지?’
-키익! 키에이익!
묘한 공감대가 종족을 초월해 흐르고 있었다.
이창훈과 곱린이는 넋이 나간 얼굴로 다시 데스 시커의 사체를 바라보았다.
* * *
이런 말을 탑에서 하면 좀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창훈은 무신론자인 데다 전설이나 음모론 따위를 거의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이창훈은 이 순간만큼은 악마의 존재를 믿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 시벌.’
이창훈은 덜덜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손에 잡힌 아이템을 바라보았다.
[삼각석]
[등급 : A+]
이창훈은 데스 시커의 하체 쪽에서 놈의 발톱을 뽑고 있는 인한을 힐끗 쳐다보았다.
‘가, 갖고 튈까?’
현재 탑에 나온 각석은 사각석까지.
그 사각석마저도 10층의 최전선에서 하나가 간신히 나와 그 존재가 확인됐을 뿐이고, 현재 가장 등급이 높은 건 역시 삼각석이었다.
거기다 이창훈 같은 평범한 헌터는 이각석조차 만지기 힘들었다.
지금껏 그가 얻어 본 가장 좋은 각석은 천만 원짜리 C-등급의 이각석이었다.
그런데 삼각석이 나왔다. 무려 A+등급짜리로…….
이것은 악마의 유혹이었다.
만약 가지고 튈 수만 있다면, 가족의 생활비는 문제도 되지 않을 정도의 돈이 생길지도 몰랐다.
‘시, 시발, 시발…….’
이창훈은 찔끔 눈물을 흘렸다.
‘아, 신이시여.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뭐야. 각석 나왔어?”
“아, 네, 넵! 삼각석입니다!”
“가져와 봐.”
이창훈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한 번 푹 내쉬고, 인한에게 다가갔다.
“흐음, A+급이네.”
인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탑을 오르려면 여러모로 돈이 필요했다.
아직은 초창기라 그렇지, 조금 지나면 영약도 몇 개 더 만들 생각이고, 그것 말고도 체질 개선을 위한 아이템부터 장비까지 돈이 들어갈 곳은 많았다.
‘흐음…….’
인한은 다시 데스 시커의 상체 쪽으로 돌아가 아가리를 힘겹게 벌려, 이빨을 채취하고 있는 이창훈을 바라보았다.
사실상 전투에서 이창훈이 한 것은 없지만, 데스 시커를 찾는 수고를 덜어 준 건 분명했다.
어느 정도의 사례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봐.”
“네! 형님! 부르셨습니까!”
이창훈이 후다닥 달려와 부동자세를 취했다.
인한이 픽 웃었다.
‘강아지 같네. 뭐…… 강아지처럼 귀엽지는 않지만.’
굳이 말하자면 징그러운 쪽이지.
인한이 말했다.
“지금부터 이놈한테 얻은 아이템은 가져가도 좋아.”
“예……?”
“찾는 걸 도와줬으니까 주는 거야. 적당히 알아서 챙겨.”
“허, 헉! 저, 정말입니까?”
“싫으면 말고.”
“감사합니다!”
이창훈은 몸을 획 돌려 맹렬한 속도로 단검을 놀렸다.
곱린이도 이창훈에게 어떤 명령을 받은 건지 속도가 훨씬 올랐다.
‘이 정도면 되겠지.’
모르긴 몰라도 데스 시커의 이빨이나 발톱 정도면 좋은 가격으로 팔릴 것이다. 가죽도 하체 부분은 거의 안탔으니 제대로 잘라 낼 수 있다면 쓸 만할 거고.
이창훈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인한보다 조금이라도 더 부산물을 가져가기 위해 부지런히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꽤 잘하네.’
인한은 이창훈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마음이 급해서 그런지 대충 손을 움직이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허투루 하지는 않았다.
물론 인한 정도로 숙달되지는 않았지만.
‘고블린은…… 솔직히 나보다 낫군.’
고블린의 도축 실력은, 솔직히 말해서 인한보다 한 수 위였다.
고블린이 조악한 단검을 푹 찔러서 쭉 찢으면 힘줄과 살이 분리되고 뼈와 가죽이 나뉘어졌다.
굉장히 투덜대며 대충대충 칼을 놀리는데, 능력은 엄청났다.
고블린이 독을 제조할 정도로 손재주가 좋은 몬스터이긴 하지만…… 설마 이런 것까지 잘할 줄이야.
“캬! 우리 형님은 참 인성도 좋고 마음 씀씀이도 대단하시단 말이에요! 아이고! 이렇게 대단한 분을 너무 늦게 알아보고…… 제가 곱린이 교육을 잘못 시켜서 이놈이 감히 형님의 아이템을 훔치려고 하고…… 캬! 이렇게 대단하신 분을 진작에 알아 뵀어야 하는 건데!”
“…….”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말만 하십쇼! 이 이창훈이가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아니, 쉬지 않고 아부를 쏟아 내면서도 손은 쉬지 않는 이창훈 쪽이 어쩌면 더 대단할지도 모른다.
인한은 코웃음을 친 후 다시 손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