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공략자들 62화>
“특별한 이유는 없어. 혼자 다니는 게 거추장스러운 거뿐이다.”
퉁명스러운 어조긴 했지만 인한이 대답해 주자, 이창훈은 밝은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헌터 생활은 얼마나 되신 겁니까?”
얼마나라.
인한은 전생와 이번 생의 모든 시간을 탑에 바쳤다.
“그냥, 오래.”
“오래요? 형님도 1세대 헌터신가 보네요?”
“1세대 헌터……. 그렇게 봐도 되겠지.”
“그럼 설마 처음부터 혼자 다니신 겁니까?”
인한은 잠시 움찔거렸지만 곧 대답했다.
“……아니. 동료들이 있었어.”
대답하기까지 있었던 약간의 시간에 이창훈은 의아해했다.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인한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아 버렸다.
이창훈은 좀 더 말을 걸어 보려고 했지만 뭔가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여서 입을 닫았다.
결국 둘 사이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먼 곳에서 메아리처럼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풀벌레의 날갯소리와 바람에 흐느적대는 수풀들의 소리가 유난히 또렷이 들릴 때쯤, 전조 없이 인한이 입을 열었다.
“나 때문에 죽었어.”
토해내듯 한 글자 한 글자 힘이 들어간 어조였다.
인한은 자기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잘 몰랐다. 술에 취한 것처럼 저절로 혀가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가족보다 더 소중한 사람들이었는데, 내가 실수하는 바람에 다…… 죽었지.”
인한은 오른팔을 반대쪽 손으로 문질렀다.
그러다 멍청한 표정으로 멀뚱히 서 있는 이창훈을 보고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됐어, 잊어버려.”
“아, 예, 예, 알겠습니다…….”
이창훈은 애써 대답하며 울상을 지었다.
‘시발……. 지뢰 밟았다. 애써 입 열게 했더니 다시 닫히게 생겼잖아!’
이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는 이창훈과는 다르게, 인한은 굉장히 굳은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런 얘길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인한의 실수로 전멸한 동료들, 노예처럼 지냈던 데스 파티의 시간.
그래, 과거다. 없었던 일이고, 지나간 일이다.
실제로 인한은 그 과거를 떨쳐 냈다.
……떨쳐 냈다고 생각했다.
인한은 번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나약한 생각이야. 어차피 다 과거다.’
인한은 불끈 주먹을 쥐었다.
‘한눈 팔 시간 없어.’
인한은 이를 악문 채 앞을 바라보았다.
* * *
-키엑!
곱린이 다가와 뭔가를 중얼댔다.
이창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곳으로 다가가, 몸을 낮춰 땅바닥을 훑었다.
낙엽을 치우자 가려져 있던 지면에서 푹 파인 거대한 발자국이 들어났다.
“이쪽 길인 것 같습니다. 놈이 매일 저쪽에서 나왔다 다시 돌아가는 모양입니다. 제가 알고 있던 활동 지역은 이렇게 깊이 있는 곳이 아니라 필드 근처였는데…….”
“하긴, 꽤 많이 들어왔군. 메인 던전과도 거리가 상당히 멀고…… 이제 얼마나 남았지?”
“저도 확실히는…….”
“대충이라도.”
“크흠, 온 만큼은 더 가야 할 것 같은데…… 저, 혀, 형님, 그냥 접으면 어떻습니까? 솔직히 굳이 발품 팔아 호랑이굴에 들어갈 필요는 없잖습니까? 상층에서 놈을 잡으려고 랭커도 내려온다니까 조금 기다리면 토벌될 것 같은데…….”
“그런 소리 할 거면 길이나 빨리 안내해.”
“예? 지금부터요? 이제 슬슬 날이 집니다!”
“어차피 너보고 싸우라고 안 해.”
“그런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인한은 말없이 앞으로 나갔다.
이창훈은 울상 지으며 인한의 뒤를 따랐다.
* * *
콰앙!
거친 폭음과 함께 상대하기 까다롭기로 유명한 몬스터, 우르가가 쓰러진다.
-키, 키에…….
“허, 허허…….”
곱린과 이창훈은 우두커니 전투를 구경하다 허탈한 한숨을 쉬었다.
‘저게 사람이야?’
우르가는 오크와 비슷한 인간형 몬스터로, 오크가 돼지를 닮았다면 우르가는 곰을 닮았다.
특이한 점은 전신이 비대한 근육으로 뒤덮여 있다는 것이고, 육체의 한 부분이 단단한 금속으로 되어 있어서 그걸 휘두른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우르가는 굉장히 호전적이고 강력한 몬스터였다.
거기다 지금은 밤, 놈은 탑의 축복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 우르가의 공격을 인한은 몸으로 가볍게 때우면서 고작 일격에 처리했다. 무기도 안 쓰고 그저 맨몸으로!
“뭐 해?”
“예, 예?”
“도와.”
“뭐, 뭘 도우라고……?”
“도축 말이야. 뭘 멍때리고 있어. 우르가한테서 얻을 수 있는 금속이 비싼 거 몰라? 죽고 나서 바로 도축한 거 아니면 바로 녹슨다.”
“그, 그걸 왜 제게…….”
인한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창훈은 울상을 지으며 다가갔다.
“흑, 알겠습니다.”
이창훈은 세 마리의 우르가 중 한 놈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곱린에게도 명령해, 나머지 한 마리를 맡게 했다.
이창훈은 한숨을 내쉰 다음 단검을 꺼내, 팔 한 쪽이 기다란 검처럼 된 우르가의 팔을 잘라 냈다.
‘와…… 이 정도면…….’
우르가의 금속은 주로 탑 밖에서 무기를 만드는 데 쓰인다.
보통은 소량만 넣고 철이나 각종 금속과 합금해 쓰는데, 그러면 굉장히 질 좋은 철이 만들어졌다. 우르가의 금속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해서 제법 값이 나가는 편인데…… 이 세 마리에게서 나온 것만 해도 수백 만 원은 할 것 같았다.
‘크흑…… 이 정도면 내가 한 달은 사냥해야 간신히 얻을 텐데!’
이창훈이 울상이 되었다.
이 불공평한 세상!
될놈될 안될안!
누구는 괴물처럼 강해졌는데 1세대 헌터인 자신은 고작 고블린 한 마리 데리고 다녀야 한단 말인가!
‘어라? 잠깐만. 그, 그러고 보니까 요즘에 탑에서 가장 핫한 게 맨몸에 주먹 쓰는 헌터……!’
소문에 빠삭한 이창훈.
생각지도 못했다!
“다했어?”
“아, 네, 넵!”
이창훈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인한에게 쇳덩이를 내밀었다.
인한은 상태를 한 번 확인하고 인벤토리에 저장했다.
“다시 안내해.”
“넵…….”
둘은 점점 더 필드의 깊숙한 곳으로 나아갔다.
가는 내내 이창훈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입을 뻐끔거리다 슬쩍슬쩍 인한을 쳐다보기를 반복했다.
인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뭔데?”
“저, 저, 형님. 실례가 되지 않으시다면 하나만 여쭤 봐도…….”
“뭐지?”
“혹시 형님, 자이언트라고…….”
인한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도대체 얼마나 알려진 거야, 그 별명!’
오글거리는 별명이야 별로 바라지도 않지만, 그래도 멋진 이름이 얼마나 많은데 거인[Giant]라니!
“맞아. 그런데 그걸로 부르지 마. 마음에 안 드니까.”
“여, 역시!”
이창훈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설마 진짜일 줄은!’
탑에서 칭호를 얻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탑은 어찌 됐든 전 세계의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
그런 곳에서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이름을 알리기가 쉽지 않았다.
칭호가 붙거나 이름을 알렸다는 것은, 그만큼의 실력이나 주목할 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자이언트, 아니, 인한은 전자와 후자를 모두 포함해서 그야말로 최근에 탑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실력파 루키 중의 루키였다.
“설마 형님이 그분이셨다니! 형님! 존경합니다!”
“갑자기 왜 이래?”
인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옷소매를 꽉 움켜쥐는 이창훈을 벌레 쫓듯 털어 냈다.
그게 시작이었다.
이창훈이 입에 모터를 달았다.
“캬! 그래서 말입니다. 제가 거기서 간신히 도망쳐 온 것 아니겠습니까. 제 클래스를 듣고 눈 돌아간 양키 놈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 제가 헌터 1세대라는 말도 해 드렸죠? 그래서 말입니다…….”
이창훈은 쉴 새 없이 입을 놀렸다.
처음에는 그래도 조용한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피식 웃으며 걷던 인한이었지만.
“하지만 역시 형님만큼은 아니죠! 얼마나 소문이 무성한지 아십니까! 제가 들은 것만 해도……!”
“와, 이 몬스터는 첨 보네. 필드 깊숙한 곳이니까 이런 몬스터도. 형님, 제가 예전에 말입니다…….”
“곱린아! 뭐야, 그거! 가져와 봐! 캬! 형님 이거 보십쇼. 제 곱린이가 그렇게 전투에는 뛰어나지 않지만…….”
무려 한 시간을 내리 떠들어 대자, 인한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후우……. 오늘은 여기까지만 가지. 피곤하군.”
“아, 그럴까요? 하긴, 오늘 좀 힘들었죠?”
인한이 이창훈을 찌릿 노려보았다.
‘무엇보다 네 주둥아리가 말이지.’
이창훈은 그 눈빛에 순간 오한을 느꼈다.
“크, 크흠, 왜 그런 눈으로……. 그, 그런데 주변에 안전지대도 못 찾았는데 조금 더 가시고 쉴 때를 정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찾아, 그럼.”
“예? 아아, 뭐 오해하고 계시는데 곱린이도 기본적으로는 몬스터라 안전지대 찾는 건 내켜하지 않…….”
“그래서?”
“예? 뭐가 그래서요?”
“찾으라고. 네 일이잖아.”
“……예?”
* * *
닷새째 아침, 그들은 비로소 데스 시커를 발견했다.
‘꽤 오래 걸렸군.’
데스 시커는 입가에 시퍼런 피를 뚝뚝 흘리며 신장이 4미터는 되어 보이는 대형 오크를 씹어 먹고 있었다.
“히, 히익…….”
이창훈이 덜덜 떨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데스 시커가 오크 한 마리를 전부 삼키고는 낮게 그르렁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한은 망설임 없이 수풀에서 몸을 일으켰다.
“헉! 뭐, 뭐합니까! 들켜요!”
이창훈이 화들짝 놀라며 인한을 끌어내렸다.
하지만 인한은 꿈쩍도 하지 않고, 이창훈의 손을 툭 쳐 내고는 저벅저벅 데스 시커에게 다가갔다.
“허헉! 눈치챘어! 눈치챘다고요! 좆 됐어! 인생 시발!”
“말했잖아. 사냥할 거라고.”
“뭔 개소리예요! 그냥 빨리 튑시다! 예!?”
-크르르…….
영화 속 괴수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 실제로 괴수가 맞았다.
인한은 데스 시커에게서 고작 5미터의 거리에 선 채 놈을 올려다보았다.
데스 시커는 인한을 보자마자 세로로 찢어진 파충류의 동공을 빛냈다.
인한이 서늘하게 웃었다.
“이번엔 도망치는 일 없을 거다.”
스멀스멀 인한을 중심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듯 마력이 흘러나왔다.
-캬르라르라라!
곧이어 데스 시커가 인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아아악! 위험해!”
뒤쪽에서 이창훈이 비명을 지르는 게 들렸다.
인한은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위이이잉!
전신에 피어오르던 마력이 주먹에 집중됐다.
고밀도로 응집된 마력은 인한의 주먹을 중심으로 맹렬한 회전을 시작했다.
“파검식…….”
데스 시커의 거구가 인한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마력이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 인한이 혼신의 힘을 다해 주먹을 뻗었다.
위이이이이이잉!
파검식 최강의 파괴력을 자랑하는 비기가, 인한의 주먹에서 전개되었다.
“폭풍형(暴風形)!”
콰아아아앙!
가공할 힘이 일거에 해방된다.
방대한 힘의 흐름이 얽히고설키며 휘몰아쳤다.
그야말로 폭풍과 같은 그 가공할 힘이 한 줄기 선을 그리며 데스 시커에게 작렬했다.
응집된 힘의 방출은 주변에 엄청난 파괴의 흔적을 남겼다.
지면의 먼지가 훅 치솟고, 수풀들이 갑작스러운 돌풍에 뽑힐 듯 요동쳤다.
그리고.
-크르어어어어어!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데스 시커의 거구가 지면에 나뒹굴었다.
인한은 씨익 웃으며 주먹을 풀었다.
“이제 슬슬 할 만하군.”
인한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오른 주먹을 휙휙 털었다.
왕의 권세가 있었음에도 펼칠 수 있는 실력이 없어 펼치지 못했던 스킬이자, 필수적으로 마나 스킬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스킬.
파검식.
인한은 6층에서 마력이 상승한 후, A급 액티브 스킬 파검식을 얻는 데 성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