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공략자들 60화>
“예? 저요? 저 아세요?”
사내가 한 발자국 다가왔다.
이창훈은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섰다.
“저기요? 왜 절 찾으시는……. 흐억!”
콰앙!
사내가 주먹을 휘두른 순간, 이창훈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간신히 주먹은 피할 수 있었지만.
‘뭐, 뭐야! 나무가…….’
그 뒤에 있던 나무가 섬뜩한 소리를 남기며 쓰러졌다.
저 아름드리나무보다 자신의 몸뚱이가 단단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맞으면 최소 사망이다.
이창훈의 표정이 사색이 됐다.
“왜, 왜 이러십니까?”
“네가 더 잘 알 텐데?”
알긴 뭘 안다고!
그냥 살인마도 아니고 사이코 살인마다!
“시, 시발!”
이창훈은 허겁지겁 땅을 박찼다. 킬러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튀고 봐야 했다.
“소용없어.”
쿵!
하지만 이창훈은 제대로 달리기도 전에 뭔가에 부딪치며 엉덩방아를 찌었다.
정면에 사내가 시퍼런 안광을 흘리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아니, 이 새끼는 홍길동이라도 돼!? 방금 뒤에 있던 놈이 왜 여기 있는데!’
우웅-!
사내가 말없이 주먹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각오는 되어 있겠지?”
“가, 각오? 무슨 각오? 저, 저기요? 이유라도 말해 주세요! 제발!”
“내 장비 훔치려고 했잖아?”
“예? 누가요? 제가요? 제가 무슨 장비를…….”
이창훈은 죽을 맛이었다.
오해도 이런 오해가 없다. 거기다 이런 사이코한테 오해를…….
“……!”
순간 이창훈이 번뜩 고갤 돌려 곱린이를 바라보았다.
곱린이가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시선을 돌렸다.
‘좆 됐다!’
상황 파악 끝!
하지만 호랑이 굴에서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난다고, 이창훈은 곧바로 빠져나갈 구멍을 떠올렸다.
사내가 쫓아온 것은 곱린이었다. 아직 몬스터 테이머라는 클래스가 알려지지도 않았는데 자신과 곱린이의 연관성에 눈치채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한 놈만 희생하면 된다.
이창훈은 곱린이를 힐끗 바라보았다.
-키, 키엑?
이창훈이 보낸 염파를 깨달은 곱린이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맹렬히 좌우로 흔들었다.
‘미안하다……. 둘 다 죽을 순 없잖아…….’
-……!
곱린이가 배신당했다는 표정으로 입을 떡 벌렸다.
이창훈은 사내에게 시선을 돌려 말했다.
“저, 저기요. 고블린이 장비를 건드린 거랑 저랑 무슨 상관일까요……? 저는 그냥 지나가던 헌터인데요. 헤헤.”
이창훈은 최대한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심 자신의 역대급 연기에 박수라도 쳐 주고 싶었다. 이 정도면 베를린 영화제 남우 주연상급이다!
“웃기시네. 몬스터 테이머인 거 다 알아.”
“……시발?”
“어때? 맞을 만한 것 같지?”
“저, 저기요? 마, 말로 합시다. 에이, 한국 분이신 거 같은데 같은 나라 사람끼리 힘 합치고 그래야지. 제가 한 게 아니라 이놈이 멋대로 장비에 손 댄 거예요. 전 죄가 없어요!”
사내는 이창훈의 횡설수설에도 멈추지 않고 걸어왔다.
이창훈은 다급해졌다.
“거, 거, 보기보다 젊어 보이는데 몇 살이야! 민증 까 봐! 내가 이래 봬도 먹을 만큼 먹었거든? 지금 어디서 건방지게 말이야!”
인한은 말없이 주먹을 들었다.
이창훈의 표정이 사색이 됐다.
“에, 에이. 농담인데 왜 주먹은 들고 그러십니까……. 헤헤.”
“왜일 거 같아?”
“서, 설마 그걸로 치려는 건…….”
지렁이 같은 핏줄이 맥동하고, 풍선 같은 빵빵한 근육이 꿈틀대는 저 팔로?
모르긴 몰라도, 저걸로 맞으면 참 아플 것 같았다.
원 펀치 쓰리 강냉이 수준이 아니라 삼도천 건널 지도!
“한 번만 봐주세요!”
이창훈이 허리를 푹 숙였다.
반응이 없길래 힐끔 목만 들어 사내를 바라본 순간.
“흐억!”
부웅!
어퍼컷이 날아왔다.
이창훈이 뒤로 넘어가듯 주저앉으며 간신히 피해 냈다.
“한 수 재간은 있는 모양이군.”
“치, 치사하게 고개까지 숙였는데!”
“킬러에게 봐주는 게 있을 줄 알아?”
“킬러는 그쪽이고!”
“끝까지 시치미를 떼는군.”
부웅
결국 그 우람한 주먹이 또 한 번 휘둘러졌다. 적어도 방금 전 두 번의 주먹질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였다.
이창훈은 직감적으로 이건 피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주먹은 깔끔한 일직선을 그리며 안면을 강타했다.
이창훈은 기분 나쁜 부유감을 느끼며 처량하게 땅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키, 키에…….
땅바닥에 쓰러진 채 꿈틀대는 자신의 주인을 본 곱린이가 벌벌 떨었다.
인한이 곱린이의 앞에 서서 주먹을 들었다.
* * *
인한은 꺼진 모닥불을 다시 피우고 힐끗 옆을 바라보았다.
“일어난 거 다 안다. 기상!”
“…….”
“또 한 대 맞고 싶나 보군.”
“기, 기상!”
이창훈이 벌떡 일어서며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우리, 해야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지?”
“아니…… 그게, 제가 진짜로, 진짜 정말로 제가 시킨 게 아닙니다. 제가 요즘 벌이가 별로 안 좋아서 돈 좀 벌어 오라고 시킨 거였는데 지 멋대로…….”
“시끄러워.”
“큽…….”
합죽이가 됐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크흐흡! 어머니! 아버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창훈은 기절한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곱린이를 보며 이를 갈았다.
“몇 가지 물어보지. 대답 여하에 따라 어떻게 할 건지 결정할 거니까 알아서 잘 대답해.”
“아, 알겠습니다!”
인한은 서늘한 눈으로 이창훈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첫 번째. 내가 이거에 맞았는데, 이게 뭐지?”
“아, 그건…… 도, 독침입니다…….”
이창훈은 인한의 손에 들린 얇은 침을 보며 말했다.
고블린이 대롱으로 발사한 침으로, 끝에는 강한 마비성 독이 발라져 있었다.
‘그거 한 방이면 대형 몬스터도 쓰러지는데…… 그걸 맞았는데 괜찮다고? 이 새끼, 사람 맞아!?’
도저히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냥 괴물이다.
“이게 내 피부를…… 아니, 갑옷을 뚫었어. 이 얇은 게 그걸 뚫은 게 말이 되는 건가?”
“그, 그게 제 곱린이의 스킬인데…….”
“곱린?”
“아! 저 고블린한테 붙인 이름입니다! 그 스킬의 효과가…… 대롱으로 발사한 독침 종류에 방어력 관통력이 50퍼센트 붙어 있습니다.”
“설마 특성 발현인가?”
“헉! 그것까지 어떻게!”
인한이 미묘한 표정으로 옆에 쥐 죽은 듯 입을 닫고 있는 곱린이를 바라보았다.
테이밍된 몬스터는 주인을 통해 특성 발현이라는 과정을 갖게 된다. 굳이 표현하자면 잠재력을 개화하고, 그걸 천문이 수치화시키는 건데…….
‘설마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위험에 처할 줄이야.’
아무리 자고 있었다지만 그동안 자신만만했던 육체의 방어가 단숨에 뚫려 버린 것은 충격이었다.
‘극체술도 완벽하지만은 않다는 건가.’
마력이 3단계에 오르고, 한동안 큰 상처를 입지 않았다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만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곱린이 지척까지 다가올 동안 눈치채지 못한 것이고.
거기다 얼마 전 데스 시커와의 전투에서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던가.
아직 갈 길이 멀다.
인한은 잠시 숙연한 기분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질문을 이어 갔다.
“데스 시커를 아나?”
“아, 압니다. 7층 필드의 제왕……. 지금 놈 때문에 8층으로 가는 인원의 수가 팍 줄어서…….”
“놈은 몬스터 테이머에게 종속된 몬스터다. 네가 데스 시커의 주인인가?”
“예? 데스 시커가 종속된 몬스터라구요? 에이, 그게 무슨…….”
“대답만.”
“아, 아닙니다.”
“그럼 키우는 건?”
“자, 잘 모르겠네요? 등급 높은 몬스터를 운 좋게 잡는다면 모를까…….”
인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혹시 너 말고 테이머를…….”
“저 말고 테이머가 또 있는 것도 지금 알았습니다.”
“후우, 그럼 데스 시커를 본 적이나 어디 있는지 아는 거라도 없나?”
“……그랬으면 제가 그놈 이빨에 껴 있겠죠?”
몇 가지 더 물어봤지만 대답은 매한가지였다.
‘……몬스터 테이머가 또 있었다니.’
이창훈, 그리고 아직 불확실하지만 장 플뢰르까지.
굉장히 까다로운 재능이 필요한 데다, 히든 클래스도 아닌 주제에 획득 조건도 어려워서 이 시기에 있는 것부터 신기했는데, 그런 몬스터 테이머가 하필이면 한 명이 더 있다니, 놀라웠다.
“그럼 왜 내 장비를 훔치려고 한 거지?”
“아, 그, 말씀드렸지만 곱린이 놈이 멋대로…….”
“아, 그건가? ‘그거 우리 집 고양이가 누른 거예요. 죄송해요.’ 이런 거?”
“저, 정말인데……. 억울합니다!”
“그래그래, 그런 셈 치지.”
‘그런 셈 치긴 뭘 쳐! 그게 맞다니까!’
이창훈이 뭔가를 외치려는 순간, 인한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서 그에게로 다가왔다.
“허, 헉! 왜, 왜 가까이 오십니까?”
“귀 울려. 목소리 좀 낮춰.”
인한이 이창훈을 향해 손을 뻗으며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창훈에게는 그 모습이 자신의 목숨을 거두러 오는 사신처럼 보였다.
“으, 으아아! 죄, 죄송합니다! 살려 주세요! 제발 목숨만은……!”
툭! 투둑!
다음 순간, 밧줄이 풀렸다.
이창훈은 슬쩍 실눈을 뜨고 이리저리 살폈다.
인한은 잔뜩 움츠린 이창훈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꺼내 휙 던졌다.
“네 목숨을 어디다 쓰라고. 이거나 발라.”
“뭐, 뭐, 뭔가요, 이건?”
“연고. 타박상에 잘 듣는.”
“……나뭇잎에 싸여 있는데요?”
“쉽게 못 구하는 거다. 구시렁대지 말고 고맙게 써.”
이창훈은 순간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가 때려 놓고!’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병 주고 약 주고다!
하지만 악도, 깡도, 무엇보다 자살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는 이창훈은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이창훈은 진녹색 이파리를 받아 천문을 확인했다.
[트리비 연고]
[타박상을 빠르게 치료합니다.]
밑에 적힌 내용을 봐도 정말 나쁜 효과는 없었다.
천문에 그렇게 적혀 있는데 안 믿을 수도 없고…… 싸가지는 없어 보이는데 사람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것보다, 이런 아이템이 있었어?’
수제라는 말이 천문에 적혀 있었다.
이창훈이 인한을 힐끗 살폈다.
‘저 깡패 같은 사람이 이걸 만들었다고?’
그럴 리가. 그냥 어디서 구한 거겠지.
“……그 눈빛은 뭐지?”
“아닙니다!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이창훈은 이파리를 걷어 냈다. 크림 형태의 연두색 고체였다.
약에서는 향긋한 풀 내음이 났다. 촉감은 조금 무른 젤리 같은 느낌이었다.
이창훈은 연고를 손으로 푹 찍어, 부어오른 눈가에 살살 펴 발랐다.
“오, 오오……?”
바르자마자 느낌이 왔다. 매운 향 없는 파스랄까?
시원한 느낌이 확 퍼지더니, 상처의 고통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다 발랐으면 가.”
“엇! 정말입니까?”
인한은 손을 휘휘 젓고는 이창훈에게 등을 돌린 채 털썩 누웠다.
이창훈은 눈을 껌뻑였다.
‘개이득이잖아?’
오해긴 했지만 죽을 각오까지 했는데, 약까지 주면서 그냥 봐주다니.
이창훈은 바로 벌떡 일어나 도망치려다, 우뚝 멈춰 서서 인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웬만한 보스 몬스터도 잡지 못하는 곱린이를 추격해 온 것 하며, 신출귀몰한 그 움직임 하며, 이 정체 모를 고급 연고 하며…….
‘이거…… 기회 아니야?’
줄 한번 잘 잡으면 인생이 핀다.
아니, 거기까진 아니더라도 이런 사람 따라다니며 콩고물 좀 얻어먹으면…… 그게 한두 푼으로 끝날 리가 없지 않은가?
이창훈은 입가를 혓바닥으로 핥고는 입을 열었다.
“저…….”
“뭐지?”
“그, 제가 못된 짓을 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감히 아이템을 훔치려고 한 데다 도망치려고까지 했고…….”
“용건만 말하지?”
“혀, 형님으로 모시게 해 주십쇼!”
“뭐?!”
인한이 어처구니없어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내가 왜 내 장비 훔치려고 했던 사람을 동생으로 둬야 하는데?”
“아니, 정말 저는 훔치려고 안 했다니까요?”
“하여튼 내가 득 될 게 없잖아?”
“호, 혹시 데스 시커는 왜 물어보신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건 갑자기 왜.”
“제가 도와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