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공략자들 45화>
* * *
5층의 메인 던전, 알란 구시가지.
폐쇄적인 지금까지의 던전과는 다르게 사방이 열려 있는 도시 형태의 던전이었다.
인한의 기억으로는…….
‘난이도가 별로 높진 않았지.’
몬스터들은 그렇게 강한 편이 아니다. 다만, 5층의 보스 몬스터는 아마 ‘그 녀석’일 테다.
그렇게 강한 편은 아니다. 굉장히 성가실 뿐이지.
‘그러고 보니 이쯤에는 아직 공략법이 안 알려져서 6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이 많이 없었지.’
공략이 알려지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린다. 생각의 전환을 통해 아주 간단하게 보스 몬스터를 잡을 수 있었는데, 그때까지 아무도 그런 생각을 못했다.
‘그건 준비를 하면 되는 거고.’
보스 몬스터에겐 안타깝지만 인한은 공략법을 알고 있다.
인한은 바로 던전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10분 정도가 지났을 때, 비로소 몬스터와 만날 수 있었다.
처음으로 만난 몬스터는 스톤 스네이크. 전신이 돌로 뒤덮여 있는 아나콘다 크기의 거대한 뱀이었다.
뿔은 두 개. 그렇게 위협적인 몬스터는 아니지만.
‘물리면 석화에 걸렸었지?’
-쉬익! 쉬익!
스톤 스네이크가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는 인한을 덮쳤다. 인한은 팔뚝을 내밀었다.
콰득!
석화의 힘을 가진 송곳니지만…… 일단 인한의 살을 뚫지 못하니 소용이 없었다.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스톤 스네이크를 향해 인한이 손을 세워 휘둘렀다.
쩌억!
스톤 스네이크는 일격에 목이 꿰뚫렸다.
[Lv.31 스톤 스네이크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 4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몇 번의 몬스터와의 조우했고, 전투와 처리까지.
왕가의 비도에서 워낙 비약적인 성장을 한 탓인지 너무 간단하게 느껴졌다. 성장에 도움은커녕 시간 낭비처럼 느껴졌다.
인한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사실 지금 정도의 성장이라면, 인한은 두세 층 위에서도 압도적일 테다.
헌터들이 팀 단위로 움직이기 때문에 개개인의 수준이 낮은 것을 감안한다면 10층의 최전선에 서도 괜찮을 정도일 것이다.
생각이 결정됐으면 바로 움직여야 했다.
‘5층에서 뭘 할 건 아닌 거 같네.’
움직임을 제한하던 재킷도 세릴과의 싸움에서 버리게 됐다.
다시 맞추기에는 이미 인한의 스테이터스가 일정 이상을 넘어 버렸다. 그냥 이대로 층수를 높이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바로 보스존으로 향하려던 인한이 다시 발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그러고 보니까 여기…….”
인한이 눈을 껌뻑였다.
잊고 지나갈 뻔했다.
“무한의 항아리를 얻을 수 있었지?”
* * *
5층의 테마를 말하자면, 유적이다.
그것은 몬스터에게도 드러나는데, 고블린이나 오크와 같은 인간형 몬스터들 중에는 때때로 유적에서 발견되는 아이템이나 보석들을 들고 다니는 놈들이 있었던 것이다.
아주 가끔 고등급의 아이템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그 사람은 로또를 맞은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냥 농담 수준이고.’
인한은 메인 던전을 뒤지기 시작했다. 몬스터를 잡기보다, 던전 곳곳의 건물 벽면을 이리저리 살피며 나아갔다.
‘진짜배기는 무한의 항아리지.’
처음 천문을 얻게 되면 인벤토리가 2백 개로 적용된다. 같은 종류의 아이템은 겹쳐서 저장이 가능하니, 사람들은 보통 굉장히 많은 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같은 아이템일 경우에만, 말이지.’
천문은 세밀하다.
때때로 몬스터 중에서도 [상처받은]이라든가 [광폭한] 등의 이름이 붙기도 한다.
그건 아이템까지 이어져서, 가죽의 질이 낮으면 [질 낮은], [조잡한] 등이 붙는다.
물론 흠집 하나, 얼룩 하나까지 똑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템이란 게 공장에서 찍어 내듯 일치하는 게 아니기에 웬만한 아이템은 겹쳐서 보관하기가 힘들다.
지금이야 탑의 초반이라서 인벤토리의 불편함을 실감하는 사람이 적지만 조금만 지나면 금세 부족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무한의 항아리가 필요한 거고.’
무한의 항아리.
인벤토리의 저장량을 높여 주는 소모형 아이템.
그리 희귀한 아이템은 아니지만, 5층에서만 얻을 수 있었다.
그때 인한은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저 사람 뭐 하는 거지?”
“큭큭! 벽이랑 교감이라도 나누나?”
일단의 헌터들이 인한을 스쳐 갔다.
“입고 있는 것 봐. 전형적인 플러(Fler)잖아. 뭐라도 떨어진 거 있나 뒤지나 보지. 엮이지 말고 가자.”
헌터들은 잔뜩 비웃음을 날리며 자리를 떴다.
플러.
헌터의 수가 가장 많은 서양에서 쓰이기 시작한 말이다. 돈을 위해 탑에 오르는 파리[Fly]와 같은 자들.
사실 최전선의 공략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플러라는 말은 조금 더 더럽고 하찮은 헌터들에게 사용한다.
다른 헌터들이 버리고 간 몬스터의 사체나, 전투 후에 약해진 몬스터를 노리는 자들을 의미했다.
‘내가 파리면 너희들은 아메바야.’
울컥하기보단 귀여웠다. 전투로 번지면 저런 말은 나오지도 않을 테니까.
‘그런데 내 차림이 그렇게 추한가?’
인한은 입맛을 다시며 자신의 전신을 훑었다.
일단 상의의 안쪽에는 검은 면 티.
그 위에 묘족에게서 받은 얇은 가죽 갑옷.
허리춤에는 도축을 위한 단검.
바지는 펑퍼짐한 카고 팬츠.
신발은 가죽으로 된 바람의 장화.
등등.
‘으음…….’
효과나 효율만 보면 뛰어나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정도면 좋게 봐줘야 거지였다.
거기다 워낙 몸을 막 굴려서 그런지 옷에 얼룩들이 가득했다.
애초에 대부분 탑 밖에서 만드는 기성품을 쓰는 헌터들의 기준으로 보면 조잡한 아이템으로 보일 만도 했다.
‘그러고 보니…… 씻은 지도 좀 됐군.’
냄새를 맡아 보려고 팔을 들려다 무서워서 하질 못했다.
이틀 정도 물가를 못 만나서 씻질 못했으니…….
인한은 쩝 입맛을 다셨다.
원래 외견에 신경을 쓰진 않지만, 그래도 씻는 것이나 옷은 관리하는 편이 좋을지도 몰랐다.
‘1층에 한번 들러야겠군.’
인한은 탐색을 계속했다.
인한은 시가지의 벽면을 훑으며 나아가고 있었다. 사실 벽과 교감한다는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인한이 찾는 건물이 있었다.
글자 ‘???’가 적혀 있는 건물.
사람들은 이 글자를 그냥 문양 정도로 인식하겠지만, 씨앗을 가진 사람들에겐 다르게 읽힐 것이다.
‘무한.’
인한도 회귀 전에는 몰랐다. 그냥 무언가의 표시인 줄만 알았지.
곧 인한은 어느 문의 위쪽에 적힌 선명한 ???를 발견했다.
상태가 좋은 집이었다.
여기저기 이끼가 끼고 상처가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바람에 부서지고 색이 바랜 주변의 집들과는 다르게 형태도 그대로였고, 색도 금세 칠한 듯한 모습이었다.
인한은 그 집 안으로 들어섰다.
[스페셜 던전 ‘무한의 방’에 입장하셨습니다.]
주변 풍경이 휑한 돌집에서 사방이 새까만 정체 모를 공간으로 변했다.
[문제가 주어집니다.]
[1/2 + 1/4 + 1/8 + 1/16…… 의 답을 구하시오.]
“1.”
인한이 고민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스페셜 던전 무한의 방은 클리어 조건이 딱 하나, 주어지는 문제를 푸는 것이다.
[스페셜 던전 ‘무한의 방’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보상이 주어집니다.]
[무한의 항아리]
[등급 : S]
[종류 : 소모품]
[효과 : 인벤토리 저장량이 100 증가합니다.]
처음 들어왔던 집으로 세상이 다시금 바뀌고, 인한의 손 위에 형형색색으로 칠해진 항아리가 들렸다.
인한은 무한의 항아리를 그대로 땅바닥에 내던졌다.
[무한의 항아리를 사용하셨습니다.]
[인벤토리 저장량이 100 증가했습니다.]
[재도전이 가능한 스페셜 던전입니다.]
[재도전하시겠습니까?]
인한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재도전.”
무한의 방은 도전 횟수에 제한이 없다. 거기다 인한은 답도 다 알고 있다.
많이는 필요 없다. 10번 정도 도전할 생각이었다.
* * *
인한은 알란 구시가지에 자리를 잡고 미친 듯이 몬스터를 처리해 갔다.
‘코볼트 세 마리.’
인한은 다가오는 코볼트 세 마리를 보며 주먹을 휘둘렀다.
우직!
뻗어진 묵직한 일격에 코볼트들이 금세 쓰러졌다.
정확히 세 번의 공격으로 몬스터들을 사냥했지만, 인한의 지금 공격은 스킬이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잽, 스트레이트, 훅이었다.
“간단하네.”
인한은 쓰러진 코볼트들을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폰 체술이었다.
단순히 주먹을 뻗는 것인데도 올바른 자세와 집중력, 숙련도가 더해지니 웬만한 스킬 정도의 위력을 발휘했다.
인한이 느끼기에 폰 체술은…… 다소 다를지 모르지만, 피아노의 스케일 연습 같았다.
연마하면 연마할수록 움직임에 깊이가 담긴다. 그야말로 ‘주먹은 이렇게 뻗는 것이다’라는 견본과도 같다. 기본기 그 자체였다.
‘조금씩 알겠어. 내가 가야 할 길.’
막연하게 강해지겠다는 것이 아닌, 어떻게 강해져야 할지가 보인다. 자잘한 습관, 오류, 개선점까지도.
인한은 코볼트들에게 다가가 뒤처리를 했다.
[오래된 제국 은화]
[녹슨 코볼트의 단검]
[알록달록한 돌조각 ?3]
“쩝.”
별것 없었다.
뭐 언제나 대박을 터뜨릴 순 없으니, 이 정도가 일반적인 선일 테다.
‘그건 그렇고, 메인 던전의 외곽은 코볼트나 고블린들이 득세하나 보군. 놈들에게선 얻을 게 많이 없는데.’
인간형 몬스터는 그 특성상 가죽이나 힘줄 등이 별로 가치가 없다.
얻는 거라고 해 봤자 때때로 놈들이 가지고 있는 가방에 들어 있는 자잘한 아이템들뿐이다.
‘그런데 이건 도대체 뭐지?’
알록달록한 돌조각, 이건 도대체 뭔지.
몬스터를 잡을 때 때때로 나오긴 했는데 사용법을 모르는 아이템이었다…… 라기보다는 과거에도 얻었을 테지만 딱히 기억이 없는 걸 보니 중요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무지개를 그대로 가져와 돌에 넣은 듯 색 하나는 영롱하기에 뭔가 있어 보이는 아이템이어서 기대했지만, 만춘 형님은 가격을 매기지도 않았다.
‘가치가 없는 건가 보군.’
인한은 돌을 뒤로 휙 던지려고 했지만.
-삐익!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휘파람 소리 같은, 아니, 작은 동물의 울음소리 같은…….
“뭐지?”
주변을 둘러봤지만 몬스터는 없었다.
-삑! 삐익! 삐이익!
“어? 설마?”
인한은 심장 부근에서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샐러?”
인한이 말을 끝내자마자 속성력이 다소 소모되는 것을 느꼈다.
-삑!
* * *
“너 말도 할 수 있었어?”
-삐익!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었다.
분명 사람의 말을 하는 게 아니라서 못 알아듣는데, 희한하게 샐러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이게 정령과의 계약?’
정령과의 교감이란 것일까?
정령사에 대해선 관심이 있어서 여러 정보를 알고 있었지만, 이런 것까지는 예상을 못했다.
“아니 그것보다, 소환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멋대로?”
-삐이익!
인한의 말은 깔끔하게 무시한 샐러가 알록달록한 돌을 향해 눈짓했다.
-삐익! 삐이이이!
“이거? 뭐? 달라고? 왜?”
-삑!
“너도 몰라?”
-삐익!
“속성력을? 여기에?”
-삑! 삑!
“속성력이 마력처럼 사용할 수 있는 힘이었어?”
-삑! 삐이이삐이!
“아하, 정령술로. 오케이, 알았어.”
몸에 두른 화염을 화르륵 태우던 샐러가 인한의 손에 올려진 돌로 다가갔다.
인한은 손바닥에 집중했다. 돌을 향해서였다.
그러자 손바닥에서 2센티 정도 떠 있는 허공에서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불꽃이 타올랐다.
[최초로 아이템의 본질을 간파해 냈습니다!]
[지능 스테이터스가 20포인트 상승합니다.]
[‘알록달록한 돌’의 정보가 갱신됩니다.]
[속성석]
[상세 설명 : 자연의 순수한 힘이 축약된 돌입니다. 주입되는 속성력에 따라 변화가 일어납니다.]
[20의 속성력이 소모됩니다.]
[속성석이 ‘최하급 정령석’으로 변화합니다.]
“……!”
쫘라락 떠오르는 천문.
그 천문을 보며 인한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이게 정령석이 되는 거였냐!’
처음에는 놀랐다가.
‘그럼 정령석을 얻은 거였어!?’
두 번째에는 입을 쩍 벌리고.
‘적어도 40개는 버렸는데!?’
세 번째엔 비명을 질렀다.
인한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통스러워했다.
‘정령석이라니! 정령석이라니……!’
정령석.
보석에 대자연의 기운이 모여서 만들어진 아이템이다.
마력을 올리는 데 정수와 같은 ‘영약’을 사용한다면, 속성력을 올리는 데는 정령석을 사용한다.
그 가격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크악!’
마력을 높이는 영약은 제작법이 제법 많이 알려졌지만, 정령석의 경우엔 제작법이 전혀 없다.
설마 이 알록달록할 뿐인 돌이 정령석으로 변한다니?
인한은 정령석 주변을 기분 좋다는 듯 돌아다니는 수달에게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