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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자들-44화 (44/266)

# 44

<공략자들 44화>

“그래서예요. 아, 그런데 인한, 혹시 저 매력 없나요?”

“푸흡!”

“제가 아는 동양인들은 제 얼굴이나 몸을 힐끔거리느라 바쁘던데. 인한은 굉장히 이상하네요. 아, 혹시 오해하지 마요. 저는 인종차별은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쿨럭! 쿨럭! 갑자기 무슨…….”

“말해 줘요. 꽤 중요한 일이니까.”

마침 물을 마시다 사레가 들린 인한은 입가를 스윽 닦아냈다.

“그,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겁니까?”

“제가 아무리 지금은 난장판인 상태로 있어도 여자거든요? 다시 말하지만, 이건 중요한 문제에요.”

“그…… 아마도…… 예. 굉장히 아름다워요. 걱정 마요.”

다만 그녀가 좀 심하게 말랐을 뿐이지.

하긴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는 굉장히 아름답다. 인한도 남자인지라 그런 데 관심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 등짝에 칼빵 넣은 사람인데…….’

대뜸 마음에 안 든다며 검을 뻗었던 그때의 공포가 아직 기억에 있는데, 순전히 남성의 눈으로만 그녀를 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건 다행이네요.”

“네? 뭐가 다행이죠?”

“아무것도.”

아나스타샤가 배시시 웃었다.

인한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것보다 이야기로 돌아오고 싶은데……. 혹시, 스킬북에 적힌 스킬 이름은 뭐죠?”

“갑자기 관심이 엄청나셔서 조금 걱정되는데요…….”

아나스타샤가 경계의 시선을 보냈다.

아니, 그럴 거면 보여 주질 말든가.

“아쉽게도 스킬북은 사용 전까지 스킬 이름을 알 수 없는 모양이에요.”

“네?”

스킬북에 이름이 없다?

그럼 설마?

“한번 봐도 되겠습니까?”

“뭘요?”

“천문 말입니다.”

아나스타샤가 잠깐 고민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스킬북을 살짝 내밀었다.

인한은 스킬북의 끝부분을 건드렸다.

[정체 모를 스킬북]

[등급 : ??]

[종류 : 스킬북]

[효과 : 스킬북에 저장된 스킬을 익힐 수 있습니다.]

‘역시! 랜덤 스킬북이다!’

인한이 침을 꿀꺽 삼켰다.

랜덤 스킬북.

스킬의 개수, 등급, 효과가 랜덤으로 나오는 스킬북이다. 그 희귀함은 일반 스킬북보다 높다.

‘엄청난 가격이었지.’

스킬북이 종종 나오고, 헌터들이 어느 정도의 스킬을 보유하기 시작하는 50층대에서 랜덤 스킬북은 수십억, 수백억 단위의 가격을 호가했다.

‘소드 퀸의 S급 스킬 소드댄스가 여기서 나온 거였나?’

인한은 천문에서 눈을 떼고는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에게 블러디 아나가 아닌, 소드 퀸이라는 이름을 붙여 준 액티브 스킬, 소드댄스.

“저기요. 인한?”

아나스타샤는 생각에 잠긴 인한을 보며 조금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죠?”

“그거, 어떻게 하면 뺐을까 생각했어요.”

“……!”

“거짓말입니다. 분위기 풀려고 농담한 건데 그렇게 정색하면…….”

“……인한. 주변에서 농담하면 사람들이 농담으로 안 듣죠?”

“그, 그걸 어떻게?”

이정환이 허구한 날 말했다.

넌 농담 같은 거 하지 말라고. 그냥 입 닫고 있으라고.

“농담하지 마요. 그냥 입 닫고 있는 게 좋을 거 같아요.”

“…….”

조금 좌절이다. 미래나 지금이나 직설적인 성격은 언제나 똑같은 모양이다.

“풋…….”

그때 갑자기 아나스타샤가 웃음을 터트렸다.

“풋! 하하! 호호호!”

인한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아나스타샤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미안해요. 그런데 표정이…… 하하! 강아지 같아서…… 하하하!”

인한은 벙찐 표정을 지었다가, 곧 엷은 미소를 띠었다.

어디선가 늑대의 울음소리 같은 몬스터의 소리가 들려왔다. 숲속에서 미녀와 함께 모닥불을 둘러싸고 웃고 있다니. 예전이면 꿈도 못 꿀 일이었겠지.

시간이 지날수록, 인한과 아나스타샤의 사이에선 대화가 줄어들었다.

곧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게 됐을 때, 인한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계획은 있습니까?”

“없어요. 저, 지금 맨몸에 칼 한 자루와 스킬북 하나뿐인 빈털터리예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나스타샤는 밝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러시아 속담에 이런 말이 있어요. 시작이 어렵다.”

“시작이 어렵다?”

“일단 시작을 하면 어떻게든 된다는 의미죠. 계획은 없지만, 하면 어떻게 되지 않겠어요?”

“시작이 반이라. 그건 우리나라에도 있는 속담이네요.”

“이제 더 이상 인한에게 폐를 끼칠 순 없죠. 일단 5층의 필드를 돌아다녀 볼 거예요. 힘을 길러야죠. 저 혼자 도망친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마피아에게 잡힌 사람들이 아직 더 있어요. 그들을 구하려면 힘이 필요해요.”

인한은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강한 여자다.

당연한 듯이 인한에게 힘을 빌릴 줄 알았는데, 자신의 길을 가려고 한다.

그녀의 운명은 그녀가 개척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 정도의 도움은 괜찮겠지.’

인한은 인벤토리를 뒤져서 아이템을 건넸다.

[리자드 본 소드]

“받아요.”

“이게 뭐죠……?”

아직은 탑 밖에서 만들어지는 기성품은 아무리 좋아도 E등급을 넘지 못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헌터들은 이 기성품을 사용한다. 그런 만큼 몬스터에게서 얻을 수 있는 장비는 엄청난 가격을 자랑한다.

“몬스터 아이템! 이런 건 받을 수 없어요!”

“괜찮아요. 어차피 전 검을 쓰지 않으니까.”

인한은 리자드 본 소드를 넘기며 히죽 웃었다.

‘이걸로 무려 히든 던전의 보스 몬스터를 몰살시켰다면 이 사람은 믿을까?’

물론 인한의 실력은 아니긴 했다.

쓰러진 놈들에게 칼침을 한 방씩 먹였을 뿐이지.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검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무게 있는 검보다 가벼운 검이 어울려요. 치명타로 몬스터를 잡을 생각하지 말아요. 유연성을 최대한 살려 보시죠. 힘으로 해 봤자 되는 건 없을 겁니다.”

미래의 소드 퀸의 싸움 방법.

여자는 어쩔 수 없이 남자보다 힘이 약하다. 근육과 골격적인 부분에서 그렇다. 하지만 여자에겐 유연성이 있다.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거죠?”

아나스타샤가 놀란 듯 토끼눈을 떴다.

‘이, 이런…….’

실수했다.

거기까지 생각은 안 했는데…… 인한은 난처한 표정이 됐다.

“아, 그렇군요. 인한은 실력자니까 그런 것도 알 수 있는 건가요?”

“아! 하하하! 예, 그런 셈이죠.”

인한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혼자 말하고 혼자 결론 내어 줘서 고맙다. 아나스타샤!’

인한은 하나를 더 꺼냈다.

“이것도 받아 가요.”

“이건?”

인한은 인벤토리에서 음식 몇 개, 물을 담을 수 있는 통 두 개와 지도 한 장을 건넸다.

“묘족인 푸른숲 부족으로 가는 지도예요.”

“묘족? 설마 아인? 인한, 아인을 알아요?!”

“제가 가르쳐 줬다고 하고 가 보세요. 조금 서둘러야 할 거예요. 곧 이동할지도 모르니까요. 거기까진 유적들을 징검다리 삼아 가요. 유적 주변에는 몬스터들이 잘 안 나타나니까.”

“아인이라니, 있다는 건 소문으로 들었지만……. 묘족 지도는 왜 주시는 거죠?”

“거기에 팀이 하나 있을 거예요.”

“팀이요?”

“제 이름을 대면 받아들여 줄 겁니다. 사정을 말하면 숨겨 주기도 할 거고요. 연락은 제가 해 둘 거니까 걱정 마시고요.”

이정환과 연결되는 드루이드의 인형이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지도를 품에 꾹 안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 은혜는 꼭 갚을게요, 인한.”

“당연하죠. 이자까지 칠 테니 긴장하세요.”

아나스타샤가 피식 웃었다.

“그런 농담은 좋아요.”

“하하.”

“그런데 제가 빚쟁이인 건 알고 그런 말을 한 건가요?”

“아, 그, 그건…….”

인한이 급 경직되었다.

“푸훗! 농담이에요!”

“…….”

* * *

다음 날 아침.

아나스타샤가 떠나기로 했다.

“그 스킬북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인한의 물음에 아나스타샤가 긴장했다.

“설마 노리는 건…….”

“아니…….”

“알아요. 이건, 제 빚을 갚는 데 써야죠. 좀 부족하면 돈 좀 벌어서라도. 그래도 꽤 하지 않겠어요?”

역시 그랬나.

인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주 먼 훗날 랜덤 스킬북의 가치를 알면 그녀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그러지 마시죠.”

“네?”

“그건 직접 익히세요.”

인한의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가 원래 익혔던 스킬이 나올지도, 잡스러운 스킬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스킬 하나를 꽁으로 익힐 수 있는 건 가치가 높다.

저걸 판다면 너무 아깝다.

“알겠어요. 인한이 그렇게 말한다면.”

“빚은 어차피 탑의 부산물을 이용하면 몇만 달러는 금방 벌 수 있을 거예요. 걱정 마요. 그럼 이제 슬슬…….”

“저기요. 인한.”

아나스타샤가 인한에게 한 발자국 다가와 올려다보았다.

‘가까워!’

그녀의 물기 서린 코발트 블루색 눈동자가 빛났다. 아나스타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벼, 별것 아닙니다.”

인한은 어색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때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인한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쪽!

인한은 자신의 몸이 앞으로 확 젖혀진다는 걸 안 순간, 입술에 촉촉한 감촉을 느꼈다.

아나스타샤가 몸을 획 돌려 달아나듯 뛰어갔다.

“이건……?”

인한은 낯선 감촉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나스타샤가 뒷걸음질 치며 짓궂게 웃었다.

“오해하지 마요. 한국에선 아니겠지만 외국에서 키스는 인사 대용이니까.”

“아, 예. 그, 그렇군요…….”

“그럼 갈게요. 꼭 다시 봐요, 인한.”

“그래요. 조심해요,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는 미소를 지은 채 손을 흔들고 몸을 돌려 걸어갔다.

문득 미소가 흘러나왔다.

인한의 멍한 표정이 꽤 귀엽게 느껴졌다.

‘그것보다 정말 믿은 것 같지?’

생각 없이 내뱉은 거짓말인데 정말 믿다니. 애초에 러시아 인사도 아닌 데다 대놓고 입술로 하는 것도 아닌데.

“꼭 다시 봐요.”

아나스타샤는 힐끗 고갤 돌려, 걸어가는 인한의 등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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