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공략자들 43화>
인한은 아나스타샤와 한동안 말을 나누며 경계심을 풀었다.
아나스타샤도 치료가 되어 있는 자신의 몸을 보더니 갑자기 사과와 함께 감사를 전했다.
굉장히 색다른 경험이었다.
물론 여자랑 떠든 게 색다르다는 게 아니라, 그녀와 이렇게 떠들 수 있다는 게 색달랐다.
‘이게 그 소드 퀸?’
소드 퀸은 남성 혐오로 유명한 헌트리스였다. 그것도 꽤 극단적으로.
그녀는 자신의 휘하에 여성밖에 받지 않았다.
그렇다고 페미니스트인 것은 또 아니었다. 그녀는 여자들에게도 쌀쌀하고 냉정하기로 유명했다. 다만 남자에게는 그게 몇 발자국 더 나갔을 뿐이었다.
그녀는 남자와 두 마디 이상의 말을 나누지 않았고, 5분 이상 같은 공간에 있지 않았다.
만약 억지로 그녀에게 다가가고자 하면…… 그녀는 검을 휘둘렀다. 가차 없이.
‘그런데…….’
지금의 그녀는 인한을 경계하기는 하지만, 혐오와 같은 감정은 없었다.
조금 진정되고 나자 바로 사과와 감사의 인사를 한 것을 보면 말이다.
‘과거에는 평범했구나. 아마…… 험한 꼴을 봤겠지.’
무슨 일이 있었을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래도 미래의 아나스타샤랑 다른 건 다행이군.’
막 데스파티에 들어왔을 무렵, 인한은 아나스타샤에게 중상을 입었다.
이유는 그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뜬금없이 인한의 등짝에 칼을 쑤셔 박는 그녀의 폭력성은 그야말로 잔혹 그 자체였다.
그런데 지금의 아나스타샤는 먹는 데 한눈 팔려서 숟가락 놀리기 바쁘다니.
‘얼마나 못 먹은 거야.’
인한이 입을 열었다.
“부족하죠?”
“괜찮…… 윽! 콜록, 콜록!”
빵을 수프에 찍어 먹던 아나스타샤가 가슴을 퍽퍽 치기 시작했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여기 물이요.”
“가, 감사……. 휴우.”
“빵과 수프로는 부족하겠네요.”
인한은 좀 과하다 싶을 정도의 음식을 꺼내기 시작했다.
빵, 소시지, 통조림…….
수북이 쌓인 음식들을 본 아나스타샤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이걸 다 먹으라고요?”
“네, 그러라고 꺼낸 건데요?”
“……전 돼지가 아니에요.”
“아, 그럼 도로 넣을까요?”
“아뇨!”
아나스타샤는 반들거리는 소시지의 자태에 결국 자존심을 꺾었다.
“아! 이거 맛있는데…….”
밝은 표정으로 통조림을 하나 집어 든 아나스타샤는 끙끙대며 통조림을 깠다.
인한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구나.’
짙은 괴리감을 느꼈다.
미래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는 같으면서도 다른 사람이었다. 임태호가 그랬고, 만춘 형님이 그랬고, 이정환이 그랬다.
‘새롭게 시작하겠다고 말로만 해 놓고선, 내 맘대로 과거에 얽매여 있었구나.’
인한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때였다.
“……고마워요.”
아나스타샤가 소매로 입을 스윽 닦으며 말했다.
인한은 고개를 획 들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예?”
“고맙다고요.”
“예……?”
인한이 눈을 껌뻑였다.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지? 고맙다고……?’
아나스타샤가 불쾌한 듯 미간을 살짝 좁혔다.
“뭐죠 그 표정은?”
“아, 아니, 조금 놀라서요.”
“놀라다뇨. 제가 고마워하면 안 되는 건가요?”
“아닙니다. 하하.”
역시 적응이 안 된다. 그 아나스타샤가 감사라니…….
“그건 그렇고…….”
아나스타샤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한동안 눈치를 보던 그녀는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팀원분들은 어디 계세요? 그분들에게도 인사를 하고 싶은데.”
“팀원?”
“혼자 다니시진 않을 거잖아요. 올가릴도 혼자 잡으셨을 리가…….”
“아.”
인한이 가볍게 말했다.
“솔로로 활동합니다.”
“네?”
“일행은 없습니다. 딱히 어디 팀에 소속될 예정도 없고요.”
아나스타샤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들이란.’
솔로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5층이다, 5층.
1층이나 2층에서야 가끔 솔로 플레이어가 보이지만, 5층에서 누가 혼자 다니겠는가.
자신을 구하다가 떨어졌다든가, 주변을 둘러보는 중이었겠지.
그렇다고 해도 올가릴을 잡고도 ‘놈들’에게 잡히지 않은 채 도망친 걸 보면 제법 실력자인지도 몰랐다.
“그런 셈 치죠.”
“그런 셈?”
“알았다는 얘기예요.”
인한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다시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보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아, 네. 아직 여기저기 쑤시기는 하는데 이 정도면 많이 양호하죠.”
“그럼, 질문 하나 해도 됩니까?”
“무슨 질문을?”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나스타샤가 몸을 움찔 떨었다.
“……뭐가 무슨 일이라는 거죠?”
“쫓던 사람들 말입니다.”
아나스타샤가 눈을 피했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 준 사람인데, 이 정도 물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윽! 그, 그냥 말 돌린 거잖아요! 눈치도 없어요?”
“눈치가 밥 먹여 주진 않죠.”
“……당신 원래 그래요?”
“뭐가요?”
“얄미워요! 아니, 재수 없어요!”
“재수 없다니! 지금 목숨을 구해 준 은인한테!”
“흥!”
경계심 넘치던 아까와는 다르게, 굉장히 편안해 보이는 아나스타샤였다.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도울 수 없을 거예요. 당신으로는. 아, 무시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문제예요.”
아나스타샤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천천히 입을 뗐다.
“마피아예요.”
“마피아?”
“제 가족들이 위험지역에 있어요. 그들을 구하려고 헌터들을 고용했다가…… 돈이 엄청 들었죠. 안 그래도 남은 돈을 거기다 쏟아부었는데 부족해져서…… 결국 돈을 빌려야 했죠. 가족이니까.”
러시아는 두 번의 웨이브를 버텨 냈지만 그걸로 모든 게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몬스터들은 여전히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런 몬스터들이 다수 남은 지역을 위험지역이라 했다.
“사기였어요. 헌터들을 고용했는데, 거기다 위험지역을 탐험하는 영상이나 사진까지 받았었는데…… 제가 멍청했죠.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어요.”
아나스타샤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일이었어요. 사람을 고용해 놓고 일하는 걸 볼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어디에 호소할 수는 없었죠. 전 빚이 있으니까. 결국 놈들에 의해 헌터가 됐어요. 저랑 비슷한 사람들이 엄청 많더군요. 이미 탑을 오르고 있던 놈들의 감시 아래에서 우리는 탑을 오르게 됐어요.”
인한은 혀를 찼다.
‘저게 벌써부터 시작됐군.’
저 방식은 제대로 된 법이 제정되기 전까지는 뒷세계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방식이었다.
위험지역에 가족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 가족을 찾으려고 혈안이 될 것이다.
하지만 위험지역에 들어가려면 헌터가 필요하고, 헌터를 고용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그러나 돈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결국 돈은 ‘사람’을 담보로 빌리게 된다.
이제 창관에 팔거나 장기를 파는 것보다, 억지로 탑에서 사냥을 하게 하는 것이 더 돈이 된다. 이 방식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다.
“빚이 얼마나 있는 거죠?”
“5만 달러. 원금은 1만 달러 정도였죠. 고작 몇 년 사이에 몇 배가 늘더군요.”
“계약서를 보셨을 텐데.”
“하하! 친척이 소개시켜 준 사람이었어요. 인상도 굉장히 좋고 상냥한 사람이었거든요. 그땐 저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어요. 일이 있은 직후였으니까요. 근데 설마 마피아일 줄은.”
아나스타샤가 괴로운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가족이 죽고, 친척에게 배신당한 아나스타샤의 표정은 분노보단 슬픔이 더 짙어 보였다.
“은행을 찾아갈 생각은 안 했나요?”
“은행에서 나 같은 사람한테 돈을 빌려줄 리가 없잖아요.”
아나스타샤가 말을 이었다.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까?”
“다른 방법? 아, 하나 있긴 했어요.”
“네? 어떤 거죠?”
“제가 창녀가 되는 거죠.”
“……!”
“아무리 그래도 창녀가 될 순 없잖아요?”
훅 들어오는 말에 인한이 순간 경직했다.
역시 미래의 블라디 아나는 어디 가지 않는다. 이런 우울한 얘기를 안색 하나 안 바꾸고 해버리다니.
“벌써 몇 년 째지만…… 아무리 사냥을 열심히 해도 빚은 줄지 않아요. 하긴, 당연한 일이겠죠. 놈들은 우리를 소모품처럼 끊임없이 사냥만 반복하는 도구로 만들 생각이니까. 애초에 겁에 질려서 이곳에 들어오면 안 됐어요.”
“도망칠 생각은 안 했습니까? 감시가 아무리 많아도 힘을 모은다면…….”
“인간은 그렇게 강하지 않아요, 인한.”
아나스타샤는 부드럽게 내려와 있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놈들은 쉽게 사람을 죽이진 않아요. 중요한 돈벌이를 위한 도구니까. 다만 죽기 직전까지 폭행을 하죠. 굶기고, 고문하고, 공포를 심어 주고.”
“…….”
“그리고 저항하지 않게 되면 그제야 탑에, 그것도 자신들의 사람을 관리자로 내세워 들여보내요. 물론 탑에 들어와서도 도망치려고 하거나 반항하려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어요. 다 죽었을 뿐이지.”
거기다…… 라고 아나스타샤가 말을 이었다.
“빚도 있죠. 아마 지금 이 순간도 늘어나고 있겠죠. 탑 밖에도 안에도 제 자리는 없는 거예요.”
그 아나스타샤에게 이런 상황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럼 어떻게 도망친 거죠?”
“그건…….”
아나스타샤가 난처하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말하기 곤란하면 안 하셔도 됩니다.”
“아니, 아니에요. 인한을 믿을게요.”
결정을 내리고 아나스타샤는 허공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한 권의 책이었다. 세월이 느껴지는 적갈색 양장본이었다.
표지는 금색으로 치장되어 있었고, 그 위에 읽을 수 없는 문자가 적혀 있었다.
까딱하면 둔기로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두꺼운 책을 보며, 인한은 경악했다.
“스킬북……?”
* * *
스킬북.
누구나 동의할 이야기지만, 탑에서 스킬은 굉장히 중요하다.
돈으로도 살 수 없고, 적당한 기술을 갖고 있어도 얻을 수 없는 그런 존재.
하지만 몬스터와 대적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주는 도구이기도 하다.
때때로 보스나 몬스터를 처치할 때 보상으로 나오고는 하는데, 이때 얻는 스킬은 바로 천문에 추가되는 종류다.
그리고 천분의 일, 만분의 일 확률로, 아이템의 형태로 스킬북이 나온다.
그 가치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이건 스킬북이라고 해요. 이런 게 있는 것조차 몰랐는데, 스킬을 바로 익히게 해 주는 아이템이라더군요. 5층의 몬스터를 잡다가 나왔어요.”
아나스타샤가 씁쓸하게 웃었다.
“아는 건 없지만 스킬북이 희귀할 거라는 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죠. 그래서 뭐, 이렇게 됐네요. 들고 튀었죠. 사실 도망치면서도 제가 뭘 하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했어요. 몸이 그렇게 하게끔 움직인 것 같았죠.”
“용케 도망쳤군요. 그것도 필드 중반까지.”
“중간에 구구절절 사연이 많아요. 뭐, 사실 제대로 도망치지도 못했죠. 어떤 상냥한 동양인 청년이 도와줘서 산 거지.”
아나스타샤가 인한과 눈을 마주치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순간 미래의 아나스타샤와 오버랩되며 움찔 몸이 떨렸지만, 그 미소는 과거의 트라우마를 깨끗이 날려 보낼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나스타샤는 스킬북을 꼭 끌어안으며 인한을 노려보았다.
“사실 이거 보여 주기까지 굉장히 용기 냈어요. 부디 제 용기를 배신하지 말아 주세요, 인한.”
“처음 보는 사람을 너무 스스럼없이 믿는 것 아닙니까? 제가 나쁜 마음을 가진다면 어쩌려고.”
“그렇다면 애초에 절 구할 리가 없었겠죠. 아니면 제가 자고 있을 때…… 으음, 아니죠?”
“아닙니다!”
인한이 버럭 소리쳤다.
아나스타샤가 킥킥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