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공략자들 33화>
불편한 정적이 흘렀다. 세릴이 인한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 눈빛에 그릇된 갈망이 있는 것을 본 인한이 혀를 찼다.
“죽이지 않아.”
“그럼 도대체…….”
“사과부터 해라.”
전신을 붕대로 칭칭 감은 상태였던 인한은 상태가 꽤 좋지 않은 건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댄 상태였다.
“우리가 듣고 싶은 건 사과야. 그따위 소리 말고. 묘족은 예의란 걸 모르나? 그냥 죽여 달라고 하면 끝인가?”
“내가, 내가 한 짓은……. 내가…….”
“네 죽음 따위 누가 바란다고 했지? 네 목숨 받고 좋아할 사람 없어. 뒷맛만 찝찝할 뿐이지.”
“그럼, 어떻게.”
“사과, 하라고.”
“……?”
“잘못을 했으면 사과부터 해야지. 죽은 석환이한테 사과하고, 팔과 다리를 못 쓰게 된 애들한테 가서 사과나 해라. 그게 도리지.”
“…….”
“혼자 끌어안고 죽여 달라고? 죽고 싶다고? 너 편하자고 우리 손을 더럽히려나 보지? 웃기지 말고 앞으로 나서서 마을 사람들에게도, 우리에게도 사과를 해.”
인한은 그 말을 끝으로 훌쩍 떠나 버렸다.
이정환은 인한이 앉아 있던 의자에 털썩 앉았다.
“화, 안 나……?”
세릴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정환은 세릴의 새까만 눈동자를 한동안 보다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했다.
“납니다. 많이.”
빠드득, 이를 악무는 소리가 들렸다.
“동료가 죽었다니까요. 말 그대로 죽었어요. 시발…… 그 새끼 요리 진짜 맛있었는데…….”
“…….”
“웃기죠? 걔 요리부터 기억나는 게. 그거 알아요? 세릴 씨. 사람이 죽으면 거창한 추억이나 공유했던 감각들은 별로 기억이 안 나요. 몸짓, 체취, 말투…… 사소한 것들이 쉴 새 없이 떠오릅니다.”
“…….”
“그리고 팔 못 쓰게 된 놈. 그놈 밖에 있을 땐 음악 하던 놈이었답니다. 탑이 끝나면 다시 음악 하겠다고 인벤토리에 기타며 드럼이며 넣고 다녔는데……. 걔가 연주 얼마나 잘하는지 세릴 씨도 들어 봐서 알잖아요? 다리 못 쓰는 놈? 걔 운동했었어요. 우리 세계에서 한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였죠. 그런데…….”
이정환은 깊게 숨을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세릴 씨는 분명 거짓말을 했죠. 사기를 쳤어요. 솔직히 화가 나지만…….”
“……?”
“우린 세릴 씨 탓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 사람들은 세릴 씨가 죽이고, 불구로 만든 게 아니에요. 우린 다중 보스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고, 석환이는 무리하게 상대했습니다. 싸울 때도 다가가지 말라고 했는데 다가갔죠.”
그랬다.
싸움이 있었을 때, 석환의 죽음은 명백하게 석환의 잘못이었다.
팀원들 중 대부분이 세릴에게 분노했지만, 그건 석환의 죽음에 대해서가 아니었다.
“분명 팔과 다리를 다친 팀원은…… 세릴 씨가 죽기를 원했습니다.”
“그럼!”
“근데 그러면요? 걔네가 하고 싶다고 제가 세릴 씨를 죽여 주길 원합니까? 전, 전…… 그런 짓 하기 싫습니다. 그런 화풀이? 그 화풀이가 시발, 해 봤자 얼마나 화가 풀릴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
“그들도 자신들의 실수로 팔다리를 잃은 겁니다. 모든 근원을 따져 보면 예, 확실히 세릴 씨죠. 말해 줬으면, 좀 더 준비를 확실히 하고 던전에 들어갔을 겁니다. 우리가 미끼가 되지 않고 보스 몬스터를 확실히 끌어낼 방법을 써서 처리했을 겁니다.”
말을 하던 이정환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이내 쥐어 짜듯이 말했다.
“하지만…… 제가 더 강했다면 아무도 안 다쳤을 거예요. 인한 씨가 들어가자마자 전신에 둘렀던 쇳덩어리를 벗었다면……. 이런 건 어차피 만약입니다.”
“…….”
세릴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니, 사과하세요. 용서받기 위해 노력해야죠. 죽을 정도의 죄를 지었으면, 죽을 정도로 사죄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걸 전부 건너뛴 채 죽여 달라고요? 그건 그냥 포기하는 것 아닙니까? 정작 피해를 입은 우리들은 큰 상처를 입었는데, 화풀이도 안 되는 살인 한 번 했다고 기분 좋을 것 같습니까?”
이정환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쇠사슬. 혹시 몰라서 걸어 둔 겁니다. 마음먹고 풀려고 하면 풀 수 있을 거예요. 저희는 마을에 있을 겁니다.”
이정환은 그 말을 끝내고 나가 버렸다.
무너진 토굴 같은 감옥 터에는 정적만이 맴돌았다. 촛불의 노란 불빛이 비추는 세릴의 고운 얼굴에서.
똑!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 * *
인한은 벽에 기대서 이정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정환은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진짜 너무하네요. 너무해…….”
이정환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이정환이 세릴에게 했던 이야기 중 반은 거짓말이고 반은 사실이었다.
같이 살을 부대끼며 몬스터들과의 전투를 넘나들었던 동료가 죽었고, 두 명이 사지 중 한 부분을 쓸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다들 말은 않지만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성적으로 판단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팀원들이 세릴의 탓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거짓말이었다.
팔과 다리를 잃은 팀원을 제외하고 세릴을 죽이자고 한 사람은 없지만, 그 분노와 원망은 당연히 세릴에게로 향했다.
세릴은 팀을 속이고, 보수를 빌미로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거기다 대놓고 사람들을 미끼로 사용했다. 분노하는 게 당연하다.
이정환도 화가 났다. 고작 한 명이 죽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주먹을 날릴 것이다.
목숨의 무게를 누가 판단한단 말인가. 한 명이나 죽은 것이다.
죽으면 더 이상 볼 수 없다. 말도 나눌 수 없다. 감정을 나눌 수도 없다. 팀원들의 우울함과 비참함은 엄청났다.
거기다 탑이 나타난 이후로는 탑 안쪽이나, 바깥쪽이나 사후 3일 이내에 화장하지 않으면 언데드로 다시 일어난다.
그렇기에 가족들의 품에 안겨 줄 수 있는 건 고작 의미를 잃어버린 유품과 잿빛의 가루뿐인 것이다.
하지만 분노로 눈을 가리면 안 된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원하는 대로 하면, 그건 짐승이나 마찬가지다.
탑을 오르는 이유가, 꿈이 있다.
처음 탑에 들어온 것은 탑을 향한 복수심이었지만, 이제는 이 세계를 다시 사람 냄새 나던 과거로 돌리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사람이길 포기해서 어쩌겠나.
“시발…….”
이정환은 그답지 않게 욕을 내뱉었다.
세릴도…… 피해자다. 그녀에게 찾아온 것도 탑의 비극이었다.
묵묵히 이정환을 보고 있던 인한이 쓴웃음을 지었다.
‘강하구나.’
이게 오르지 못할 곳을 바라보고 오로지 옳은 길만 걸었기에 클라이머란 별명이 붙은 자의 과거였다.
“정환 씨는 지금도 강하군요.”
“강하다……? 아뇨. 전 약합니다. 강했으면…… 적어도 인한 씨만큼만 강했더라도…….”
이정환은 분하다는 듯이 말을 뭉그러뜨렸다.
“죄송합니다. 비아냥댄 것은 아니었습니다.”
“압니다.”
“이번 건 제가 좀 예민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인한은 어딘가 먼 곳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중얼댔다.
“하지만 정환 씨는 강합니다. 정환 씨 같은 사람, 많이 없거든요, 나중에는, 아니,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겠죠. 지금보다 더 없어질 뿐이지.”
“칭찬 맞죠?”
“예, 맞습니다.”
“풋, 고맙습니다. 무슨 말씀인진 모르겠습니다만. 덕분에 기분이 좀 풀리네요.”
이정환이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말과 달리 우울한 표정은 사라지질 않았다.
인한은 하늘을 바라보다 툭 내뱉었다.
“그래도 올라가야죠.”
“예……?”
“올라가야…… 끝도 있겠죠.”
결국.
모든 것은 탑으로 귀결된다.
세릴도, 죽은 석환도, 다친 팀원도, 인한과 이정환이나 이 탑에 들어온 모든 사람도.
결국 탑의 비극에 휘말린 사람들.
거기엔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다.
“그렇죠. 그렇습니다. 네, 올라가야죠.”
이정환은 어딘가 시원해진 듯한 모습으로 기지개를 쭉 펴더니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인한을 바라보았다.
“가끔 보면 인한 씨는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인단 말이에요. 아, 늙어 보인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그냥 느낌이…… 뭔가 달관한 듯하다는 의미입니다.”
그 말에 인한이 이정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이정환은 뒷머리를 벅벅 긁더니 벌떡 일어섰다.
“괜한 말을 했네요. 이제 슬슬 마을로 갈까요? 부축해 드릴까요?”
인한은 씁쓸하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네, 부탁드립니다.”
* * *
처음 묘족의 마을에 들어온 후로 보름이 지났다.
왕가의 비도 공략 후 인한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할 부상을 입었다.
극체술을 통한 회복도, 마나 리프트의 부작용 때문에 거의 이루어지지가 않았다.
다행히 임시로 족장이 된 카를이 마을의 보물 중 하나라며 선물한 묘족의 비약이라는 아이템 덕분에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묘족의 비약은 무려 A급 아이템으로, 그것을 섭취하고 3일쯤 지나자 거짓말처럼 외상이 치료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때쯤엔 마력도 돌아와서 극체술을 통한 회복도 이루어졌다.
몸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부상이 회복되자마자, 인한은 던전에 돌아왔다.
이정환은 환자를 혼자 보낼 수 없다는 이유로 따라붙었다.
인한이 향한 곳은 40퍼센트부터 50퍼센트 사이, 보스 몬스터들이 활동하던 구간.
그중에서도 특히 제단이 있던 그 냄비 형태의 분지였다.
“…….”
한때 리시피르가 현현했던 이곳에 남은 것은, 무너지며 한층 더 오컬트한 모습으로 변한 제단의 잔해와 몬스터의 시체로 인한 악취뿐이었다.
인한은 무너진 제단을 우두커니 내려다보았다.
이것이 퀘스트의 끝일까?
일단 카를을 통해 퀘스트를 종료했다. 내려온 보상은 총 세 가지.
1. 던전의 소유권.
2. 묘족의 대장장이가 만든 수십 종의 C-급 방어구.
3. 묘족이 지금껏 모아 온 각석 다섯 상자.
또한 퀘스트의 일등 공신이었던 인한에게는 특별 보상이 주어졌다.
<액티브 스킬>
[추격의 저주]
[등급 : B]
[숙련도 : Lv.1 (00.00%)]
[효과 : 100m 안에 있는 10명 이하의 적에게 표식을 겁니다. 표식이 5㎞ 내에 있으면 위치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인한이 던전에서 보스 몬스터들에게 당했던 그 스킬이었다.
‘좋은 스킬이긴 해.’
하지만.
‘좀 애매하지.’
인한은 전체적인 보상에 시큰둥했다. 그 고생을 하고 받은 보상이 이 정도?
이정환은 여전히 팀원을 잃은 우울함에서 벗어나진 못했지만, 다소 기뻐하며 보상을 받았다.
각석은 대부분 높은 순도였고, 묘족이 바친 방어구도 탑 밖에서 만들어지는 기성품에 비해 효과가 월등히 뛰어났기 때문이다.
거기다 던전의 소유권을 통해 어떤 이익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합당한 보상’에 불과하다.
퀘스트는 언제나 탑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클리어가 어려운 만큼 보상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들뿐이었다.
가장 쓸데없는 퀘스트의 보상이 S급 스킬이나 히든 클래스일 정도였다.
그런데 고작 이 정도라니. 인한은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어 이정환과 함께 던전에 돌아온 것이었다.
어쩌면 묘족의 부탁이 퀘스트로 설정될 만큼의 것이 이 던전에 있을지도 몰랐다.
‘일단 여기는 아무것도 없나.’
인한은 제단에서 몸을 돌렸다.
[부서진 제단]
[상세 설명 :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제단이다. 흑마법이 걸려 있었지만, 작동이 안 될 정도로 부서졌다.]
이정환은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조사 중이었다.
‘애초에 이상한 던전이지.’
보스존 입장에 대한 천문도 떠오르지 않았고, 보스도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거기다 애매하게 40퍼센트 부분부터 나타난 보스 몬스터까지.
인한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이상한 걸 다 떠올려 봤지만, 그게 이 찝찝함과 이어지지 않았다. 그냥 그 정도에 불과한 퀘스트였던 것일까?
하지만 직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분명 뭔가가 더 있다.
뭔가가…….
“……?”
번뜩, 무언가가 뇌리를 스친다.
“던전 클리어……?”
인한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왜 그러세요? 인한 씨?”
“던전이 아직 클리어되지 않았습니다.”
“클리어요?”
“네. 제가 세릴을 제압하고 떠오른 알람은 보스를 쓰러뜨렸다는 것뿐이었어요. 보통 보스가 쓰러지면 클리어가 되죠. 다중 보스라서 난이도가 불명이었던 게 아닙니다. 여기, 아직 뭔가 더 있습니다.”
“……!”
“오늘은 일단 돌아가고, 내일부터 던전을 한번 둘러봐야겠네요. 난이도도 적당하니 노가다하기도 좋아요. 정환 씨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정환이 씨익 웃었다.
“같이 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