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자들-30화 (30/266)

# 30

<공략자들 30화>

인한이 망연히 외쳤다.

“말도 안 돼……!”

후드득!

제단의 잔해를 비집고 세릴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처치를 알리던 천문에도 지직거리며 노이즈가 섞이더니 글자가 변했다.

[진 보스 몬스터 ‘계약자 세릴’이 부활합니다.]

인한이 경악했다.

세릴을 움직인 것은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제단.

제단의 그 불길한 마석이 두둥실 떠올라 인형에 실을 매달 듯 세릴을 일으켜 세웠다.

웅웅!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마석이 돌연 물처럼 녹아 세릴에게 흡수됐다.

직후, 세릴의 전신에 검붉은 색의 마력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실타래처럼 올올히 풀려나가던 마력의 선이 뭉치고 뭉치며 수를 불려 가더니, 곧 전신을 휘감을 정도로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설마 저건……!”

인한은 그 현상을 보며, 멍하니 중얼댔다.

고작 마력의 분출만으로 주변의 대기를 들끓게 만드는 막강한 기파.

저것의 모습을 인한이 잘못 볼 리가 없었다.

“오러……?”

훅!

인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릴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눈앞에 검붉은색 빛이 번쩍인다.

“큭!”

어느새 나타난 세릴의 팔. 날카롭게 손날을 세운 손톱의 끝에 오러가 머물러 있다.

인한이 다급히 몸을 꺾었다.

푸욱!

세릴의 팔이 뒤편에 있는 벽을 두부처럼 파고든다.

곧장 반대쪽 손을 휘두르는 세릴. 대충 휘두른 것 같지만 말도 안 되는 속도였다.

콰드득!

손이 휘둘러지기도 전에 백스탭으로 거리를 벌렸음에도, 어느새 두르고 있던 장비의 앞부분이 뜯겨 나갔다.

세릴은 천천히 벽에서 팔을 빼냈다.

다섯 손톱으로부터 안개 같은 검붉은 예기(銳氣)가 시퍼렇게 빛났다.

“하, 이건…… 상상도 못 했는데.”

마른 웃음이 흘러나왔다.

절망적이다.

마나 스킬 4단계에 비로소 얻을 수 있는 힘, 오러.

마력의 축적과 축적된 마력을 사용하는 1단계.

마력에 흐름을 부여하며, 기감을 확장하는 2단계.

마력의 흐름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신체를 강화하거나 사물에 주입해 성질을 바꿀 수 있게 되는 것이 3단계.

그리고 그다음.

마력을 응집시켜 실체화시키는, 탑의 3, 40층대나 되어야 나오기 시작하는 단계가 바로 오러의 단계, 4단계였다.

마력이야 계약을 통해 어떻게 얻었다고 치자.

하지만 오러라니. 오러는 단순히 마력의 많고 적고가 아니라 기술적인 숙련이 따라야 하는 것 아닌가.

치이이익!

그 무렵 갑자기 세릴의 몸 곳곳에 있던 자잘한 상처들에서 새하얀 김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김이 멈췄을 때, 상처들은 언제 있었냐는 듯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치료까지…….’

오러의 힘 중 하나다.

오러를 처음 발현하면 그 가능성을 모르는 채 공격에만 사용하는데, 세릴은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곧바로 오러를 회복에 활용했다. 의식이 없는 와중에 하는 것을 보니 의외로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닐까.

세릴이 갑자기 몸을 낮추고 다리를 쭉 뻗었다.

퉁, 하고 바람이 갈라짐과 동시에 세릴의 몸이 나타났다.

좌절할 시간도 없다. 일단 지금은 집중이다. 팔에 집중한다. 공격 직전에는 필연적으로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으니, 휘둘러질 팔에…….

‘……속도를 안 줄여!’

콰앙!

폭탄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둔기에 얻어맞은 듯한 둔중한 충격과 함께 벽면에 충돌했다.

세릴은 거리를 좁힌 게 아니었다. 몸통으로 들이받았다.

평소라면 그 가녀린 몸으로 들이받는다고 얼마나 큰 충격이 있겠느냐마는, 지금 그 몸은 1천대의 마력과 오러라는 가공할 힘으로 제련되어 있다.

몇 초…… 아니, 초 단위 이하로 내려가는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인한은 그 가공할 충격에 정신을 잃었다.

“큭!”

인한은 바로 정신을 차렸다.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지만 기절한 여파에 몸이 굼떴다.

그런 인한의 앞에 세릴이 있었다.

후욱!

세릴은 인한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인한의 정수리를 향해 세릴의 손이 떨어졌다.

‘이건……!’

늦었다. 피할 수 없다.

인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카앙-!

쇳소리가 들려왔다.

* * *

“다들 조금만 더 힘냅시다!”

“우오오오!”

“으아아!”

인한이 살며시 눈을 떠 보니, 시끌벅적한 외침과 함께 만신창이가 된 사람들이 보였다.

익숙한 얼굴들.

서커스 팀이다!

“인한 씨! 괜찮으십니까?!”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뭘 어떻게예요? 보스 잡고 왔죠.”

이정환은 짐짓 한 건 했다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부상자도 많았을 텐데 괜찮았습니까?”

“안 괜찮았습니다. 다들 만신창이죠.”

이정환이 씨익 웃었다.

“하지만 한 명도 안 죽었습니다. 20번 정도쯤? 이거 사실 기업 비밀인데. 이 탑, 천문만 게임과 비슷한 게 아닙니다. 몬스터들도 그렇죠. 굉장히 복잡하지만 분명 ‘여기선 이렇게 한다’, ‘저기선 저렇게 한다’라는 패턴이 있습니다. 20번 동안 그걸 분석하고, 철저히 진형을 짜 쓰러뜨렸습니다.”

인한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패턴에 대한 부분을 벌써 눈치챘다니?

아니, 사실 눈치야 누구나 챘다.

하지만 그 패턴이란 게 거의 야생동물의 행동 양식과 비슷할 정도로 불규칙하다. 한데 이정환은 거기에 어떤 규칙성을 발견해 낸 거다.

“보면 아시겠지만, 그래 봤자 여기 온 건 저까지 일곱 명입니다. 다들 안전지대에서 쉬고 있어요.”

“충분합니다.”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그건 그렇고…….”

이정환이 세릴의 머리 위에 솟은 뿔을 바라보았다.

“세릴 씨가 몬스터였다니…….”

인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몬스터가 아니에요.”

“예? 그럼 도대체……?”

“저도 잘 모릅니다. 그러니까 자세한 건 직접 들읍시다.”

인한은 인벤토리를 조작했다.

인한의 손에 들린 것은 특별할 것 없는 작은 단검.

맨손으로는 무리가 있으니 무기를 든 것일까?

푹!

하지만 인한은 그것을 자신의 팔뚝에 찔렀다.

“인한 씨!?”

이정환이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거기서 피가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을 끔뻑였다.

인한은 팔뚝에 살짝 파고든 단검을 쭉 당겼다. 가죽 찢어지는 듯한 투둑, 투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양 팔뚝, 허벅지와 종아리……. 몸통 쪽은 이미 세릴에 의해 다 잘렸다.

인한은 칼질을 끝내고 처음 칼을 대었던 팔뚝부터 부욱 찢어 던져 버렸다.

쿠궁!

엄청난 소리와 함께 모래 먼지가 확 솟아올랐다.

이정환이 놀랐다.

‘저 정도의 무게를 몸에 두르고 있던 거야?’

무언가는, 인한이 몸에 두르고 있던 모래주머니, 아니, 철 주머니였다.

언뜻 보아도 묵직해 보이는 가죽 덩어리가 그곳에 떨어져 있었다.

인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 더 일찍 벗을 걸 그랬다.’

사람이 다치고, 죽었다.

죽은 사람의 얼굴이 눈앞을 스친다. 이럴 줄 몰랐다는 말은 변명이다.

인한이 조금만 더 빨랐다면, 조금 더 서둘렀다면…… 아니, 그래도 죽었겠지.

이런 생각은 이어 가다 보면 끝이 없다.

‘이미 재사용 대기시간은 다 찼군.’

아이템 ‘바람의 장화’의 액티브 스킬 바람의 가호.

신발에서부터 시원한 바람이 전신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크륵. 크르르…….”

그때 가만히 인한과 다섯 명의 팀원을 바라보던 세릴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평소의 고운 미성은 사라지고, 짐승이 그르렁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던 한순간, 입을 쩍 벌렸다.

인한이 다급히 외쳤다.

“귀 막아요!”

인한이 귀를 틀어막았다. 조금 뒤늦게 이정환도, 나머지 팀원도 귀를 막았고.

꺄아아아아아아아악!

사람의 목에서 나올 수 없는 고음역대의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귀를 막고 있어도 손을 뚫고 그 소음이 고막을 울렸다.

곧 세릴은 소리를 멈췄다. 그 목소리는 메아리치며 던전의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이정환이 귀에서 손을 떼며 중얼거렸다.

“저게 도대체……?”

“피어입니다.”

인한의 표정이 굳었다.

일정 층 이후부터 보스 몬스터들이 내뿜는 외침. 듣는 사람에게 각종 해로운 효과를 준다. 귀를 막아도 그건 조금 덜 받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지금 인한은 아무런 해로운 효과가 떠오르지 않았다. 기껏해야 귀가 조금 아픈 정도.

그렇다면 이 피어의 효과는…….

-크륵, 크륵!

-취익!

-캬아악!

-쉬이익!

먼 곳에서 소음이 다가왔다.

막대한 숫자의 몬스터들이 꾸역꾸역 분지 안쪽으로 굴러떨어지고 있다.

“몬스터!”

그 수는 족히 열, 아니 스물, 서른…… 점점 늘어난다. 미노타우르스, 가고일, 골렘, 홉고블린……. 이곳까지 오면서 보지 못했던 종류의 몬스터까지 나타났다.

인한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환 씨.”

“……예.”

“피어는 보스 몬스터를 잡으면 효과를 없앨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몬스터들을 부탁합니다.”

“그럼 세릴 씨는……?”

“제가 하겠습니다.”

이정환이 입을 꾹 다물었다가 곧 입을 열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인한은 씁쓸하게 웃으며 세릴에게 다가갔다.

“해 보는 거죠, 뭐.”

세릴과 마주 서는데 피부가 찌릿찌릿 울렸다. 적어도 여기보다 10층은 높은 곳의 보스 몬스터로 만날 법한 상대였다.

‘리시피르…….’

계약 한 번으로 이렇게까지 강해질 수 있단 말인가.

왜일까. 놈이 이걸 보고 있다면, 인한의 후회하는 모습을 기대할 것만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압도적인 마력량, 거기다 오러라는 히든카드를 손에 쥐고 있으니까.

‘그 표정을 뭉개 주지.’

질 생각은 없다.

여기서 공략을 멈출 생각은 추호도 없다.

* * *

투확!

세릴이 달려들었다.

뻗어지는 왼손.

‘이건 맞는다!’

쾅!

오러가 인한의 팔뚝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피가 후드득 튀었지만 극체술의 방어를 완전히 뚫지는 못했다. 인한은 세릴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중요한 건 후속타.

쐐액!

세릴이 반대쪽 손을 창처럼 곧게 편 채 찔러 왔다.

맞을 수는 있지만, 노리는 위치가 다친 어깨 부분이었다. 피해야 한다.

인한이 세릴의 손을 향해 손바닥을 확 펼쳤다. 세릴의 손은 인한의 팔의 밑쪽을 긁으며 뻗어졌다.

인한은 세릴의 팔뚝을 움켜쥐고 겨드랑이 사이로 꽉 잡았다.

두 쪽 팔 모두 봉인된 상태.

인한이라면 여기서…….

부웅!

세릴의 몸이 순간적으로 회전하며 거센 기세의 발차기가 휘둘러졌다.

‘지금이다!’

이걸 노렸다.

큰 기술 뒤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커다란 틈!

인한이 팔을 놓아 버리고 주저앉았다. 세릴의 발차기는 허공을 가른다. 그리고 그 발이 다시 땅에 닿기 전에.

퍽!

인한의 발이 세릴의 몸을 지탱하던 나머지 발을 걸었다. 세릴의 균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됐다!’

인한은 가능한 마력을 쥐어짜서 주먹을 휘둘렀다.

터엉!

타이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인한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지만, 멈추지 않고 주먹을 꽂아 넣었다.

터엉! 터엉! 터엉!

도저히 사람의 몸과 몸이 부딪칠 때 나는 소리가 아니다.

“끝났다!”

이정환이 힐끗 이쪽을 보고는 기쁘게 외쳤지만, 인한의 표정은 급격히 일그러졌다. 인한은 훌쩍 뒤로 뛰어올랐다.

콰아아아!

인한이 몸을 띄운 직후, 세릴의 팔이 거센 파공성과 함께 휘둘러졌다.

인한은 자신의 공격에도 전혀 타격이 없는 듯한 세릴을 보며 혀를 찼다.

‘도대체가…….’

주먹이 얼얼했다. 주먹의 살이 전부 터져 버려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또다시 오러다.

공격, 치유에 이어, 이제는 방어까지 능력의 범위를 넓혔다.

‘괴물…….’

그리 대단할 건 없는 기초적인 오러의 사용법이지만, 범인(凡人)이라면 오러의 한 가지 응용법을 익히는 데 3, 4년은 가볍게 걸린다.

아니, 천재라도 고작 몇 분 만에 하나씩 사용법을 익히는 건 일단 말도 안 되는 거고.

‘빨리 끝내야겠어.’

오러는 그 엄청난 능력만큼이나 마력을 많이 소모하기 때문에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 이기는 건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다.

더 늦어지면 아예 상대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진다.

시간은 인한의 편이 아닌, 세릴의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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