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공략자들 29화>
누군가 있었다.
새까만 어둠이 그자의 주변을 휘감고 있었다.
아니, 아니다. 어둠이 아니라 밀도 높은 마력이 스멀스멀 흘러나와 모습을 일렁이게 만든 것이었다.
인한은 언제라도 대처할 수 있게 긴장하며 그자를 살폈다. 곧 인한은 그 일렁임 뒤에 숨긴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세릴?”
“…….”
“세릴 맞지? 어떻게? 팀원들은 어쩌고.”
뾰족한 고양이 귀, 살랑거리는 꼬리, 무표정한 얼굴까지 분명히 세릴이었다.
세릴이 빛을 등지고 있기 때문에 눈이 착각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그런데 뭔가 상태가 이상한데?’
세릴은 얼굴에 그늘을 가득 드리우고는 우두커니 인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원래 인간미 없는 표정을 짓긴 하지만, 저 정도까지 무표정은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할 때쯤, 세릴이 서서히 손을 뻗었다.
도와줄 생각인 모양이었다.
“고마워.”
그리고 인한이 손을 뻗은 순간.
콰아아앙!
세릴의 손이 인한이 매달려 있던 벽면을 후려쳤다.
* * *
“크윽!”
낙법도 취하지 못하고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신음을 흘릴 새도 없다. 인한은 곧장 몸을 굴렸다.
쿠우웅!
머리 위로 덩치 큰 암석이 후드득 떨어졌다.
꽤 높은 곳에서 떨어졌지만 인한의 몸은 그 정도로는 까딱도 안 하게 된 모양인지, 타박상 덕에 조금 쓰라린 것 빼고는 움직임에 아무런 지장도 없었다.
세릴은 비척대면서도 일어서는 인한을 보고는, 마치 투신자살을 하는 사람처럼 허공에 발을 뻗어.
쾅!
그대로 떨어졌다.
화악, 모래 먼지가 피어올랐다.
고양이를 연상시키던 평소의 유연한 착지도 없이 꼿꼿한 자세로 떨어진 세릴.
천문이 떠올랐다.
[진 보스 몬스터 ‘계약자 세릴’이 나타났습니다.]
[‘추격의 저주’에…….]
[‘피의 저주’에…….]
[‘속박의 저주’에…….]
……
엄청난 개수의 천문이 순식간에 올라갔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모래 먼지가 걷히고 나타난 세릴의 머리 위엔 노이즈 낀 영상처럼 계속해서 흐트러지는 형상이 있었으니.
치직! 치직!
그것은 몬스터의 상징.
세 개의 뿔이었다.
인한은 혀를 찼다.
“이런 의미였나?”
의문을 남겼던 퍼즐이 맞춰졌다.
세릴이 계약자다.
이상하긴 했다.
세릴은 분명 던전에서 살아 돌아왔다고 한 묘족 전사는 세릴을 포함해 몇이나 있다고 했지만, 인한이 마을에 지내면서 볼 수 있는 생존자는 오직 세릴 한 명뿐이었다.
그때는 그럴 수도 있겠다며 넘어갔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묘하게 예의가 바르고 정중한 묘족이 한마디 말을 건네지 않았을 리 없다.
그래서 살아 돌아온 것이 세릴 뿐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다수의 보스 몬스터에게서 도망치는 건 만분의 일의 확률로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돌아오는 길에는 수많은 몬스터들이 있다.
끽해야 미노타우르스 두세 마리를 상대하는 게 한계인 세릴이 살아서 이 던전을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만약 가능했다면, 그것은 어떤 새로운 요인이 작용했을 때뿐이다.
“세릴. 나 인한이다. 최인한.”
인한은 차분한 목소리로 세릴에게 말을 걸었다.
계약을 했더라도 굳이 세릴이 인한을 적대할 이유가 없다.
씨앗, 마나 스킬, 권세. 거기에는 어디도 세릴이 인한을 적대할 만한 내용이 없다.
그때 세릴이 서서히 입을 열었다.
“마력…….”
“……?”
“마력, 필요해. 마력을…… 내놔……!”
동공이 풀려 초점을 알아볼 수 없는 그 눈이, 인한을 향해 끈적한 열기를 띤 순간.
‘제기랄!’
인한은 몸을 돌려 세릴에게서 벗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콰- 앙!
인한이 벗어난 곳에 세릴이 날아왔다.
인한은 몸을 비틀대면서도 중심을 잃어버리지 않고 계속 달렸다.
‘설마설마했는데.’
인한은 혀를 찼다. 계약 내용이 인한과 다른 모양이다.
인한은 달리면서 천문을 조작했다. 인벤토리를 열어 ‘그 물건’을 찾았다.
‘안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곧 인한의 손에 물처럼 투명한 액체가 들어가 있는 플라스크가 들렸다.
“씨발.”
인한은 플라스크를 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한없이 무색투명한 이 액체의 이름은 바로 마나 리프트(Mana Lift).
타워 스테로이드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약이었다.
회귀 전의 세계, 미국 제약회사에서 만들어 낸 것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마력 증폭제였다.
대략 마력량 5백 이하의 헌터들이라면 마시는 즉시 보유 마력을 1.5배에서 최대 세 배까지 뻥튀기시켜 주며, 5백 이상의 헌터들도 마력 회복이나 다소 증폭을 시켜 주는 효과를 지닌 약물이었다.
마나 리프트는 비밀리에 탑 안에 풀렸고, 3, 4시간밖에 가지 않는 효과에도 병당 최소 5백만 원이라는 엄청난 가격에 팔렸다.
이렇게 좋은 효과를 지닌 약물이 비밀리에 팔린 이유?
간단하다.
괜히 스테로이드라고 불린 게 아니다.
마나 리프트는 부작용과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정상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마력을 증폭시키고 손실한 마력을 회복시킨다는 것은 그만큼 마력로(魔力路)에 극심한 부하를 건다는 소리다.
한 번 마시면 족히 3일은 마력을 쓰지 못하게 된다.
그것뿐이면 목숨이 오고 가는 탑에서 귀여울 정도지만…… 마나 리프트의 주원료는 탑의 1층에서 채취되는 환각 작용을 가진 꽃, 앤디아다.
마력이 한순간에 차오르는 황홀감과, 그 뒤를 따라오는 환각까지. 마나 리프트는 약보다는 마약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탑의 뜻 있는 헌터들이 마나 리프트를 단속하기 위해 움직였지만, 그때쯤 탑 밖에서 마나 리프트의 제조사가 밝혀졌다.
제조사는 사회의 몰매를 맞고 회사 사정이 밑바닥으로 떨어졌고…… 사장이 홧김에 인터넷상에 마나 리프트의 제조법을 풀어 버렸다.
그 순간부터 마나 리프트가 우후죽순 퍼져 나갔다.
대부분이 최하층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이었고, 제조도 간단한 기구만 있으면 누구나 만들 수 있었다.
암암리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마나 리프트를 그 누구도 막지 못했다.
하지만 고작 3년 후, 마나 리프트의 부작용이 단순하게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것뿐 아니라 마력의 변질을 초래해 ‘탑의 주민’이 되게 만든다는 것이 알려졌다.
탑의 주민.
즉, 몬스터가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인한은 마나 리프트를 세 병 정도 만들어 뒀었는데…….
‘마시게 될 줄은 몰랐다!’
뽕!
인한은 달리기를 멈추고 플라스크의 마개를 열었다. 눈을 질끈 감으며 단숨에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도수 높은 양주를 마시는 듯한 느낌. 무미무취의 액체가 혀에 닿는 순간 기화되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다.
기체는 위장까지 내려가는 일 없이 전신의 마력로를 빠르게 채우기 시작한다.
아찔한 감각과 함께 전신에 충만감이 차오른다.
그것은 가득 채우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넘치고 넘쳐 전신을 변화시킨다. 감각이 한층 더 예리하게, 한층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하지 못했던 것을 할 수 있게 되고,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다. 부상과 피로로 처져 있던 전신에 힘이 차올랐다.
[마력 : 303 / 131]
본래 인한이 가진 마력 스테이터스는 131.
그 두 배가 넘는 마력!
“후우…….”
인한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감각이 열린다.
언제나 느끼고 있던 갈증이 해소되고, 피곤함에 절어 있던 육신에 활력이 불어 넣어진다.
할 수 없던 것의 한계점이 무너지고, 사지를 묶고 있던 제약이 풀리는 기분이다.
‘으윽…….’
하지만 곧 취한 것처럼 온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듯한 묘한 쾌감을 느꼈다.
인한이 휘청 몸을 흔든 순간.
콰앙!
세릴의 주먹이 휘둘러졌다. 흐릿했던 신경이 곤두서고 전투의 열기에 전신이 달아올랐다.
“덕분에 정신이 확 드네.”
인한은 가볍게 피하고는 다시 한 번 거리를 벌렸다.
고작 일격에 지면이 다이너마이트라도 터트린 듯이 파괴되어 버렸다.
계약의 조건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세릴은 말도 안 될 정도로 강해졌다.
꾸욱!
인한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인한의 마력이 올올히 풀려나왔다.
“어디 한번 해보자고.”
* * *
강하다.
세릴의 본래 실력을 알고 있던 인한이기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인한이 세릴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괴물 같은 마력인걸.”
인한이라 알 수 있다.
계약을 통해 세릴이 얻은 건 마력이다.
현재 세릴의 마력량은 낮게 잡아도 1천 이상.
약을 먹기 전에는 인한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게 느껴졌었으니, 스무 배 가까이 마력이 증폭된 것이었다.
“그래 봤자.”
휘둘러진 세릴의 팔을 쳐 내고 인한이 수도(手刀)를 휘둘렀다. 세릴은 급히 몸을 뒤로 날리는 것으로 간신히 피해 냈다.
세릴은 강해졌다.
하지만 우세를 점하는 것은 인한이었다.
세릴이 다시 달려들었지만.
퍼억!
마력도 실리지 않은 인한의 주먹에 팔이 튕겨져 나가고 땅을 굴렀다.
세릴의 마력은 확실히 엄청나졌다.
파워도 스피드도 경이롭다.
하지만 움직임이 단조롭다.
강함의 기준은 파워와 스피드뿐만이 아니다.
‘슬슬.’
인한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지금까지는 탐색전.
큰 상처를 입히지 않고 세릴을 제압하려면 힘 조절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제 마나 리프트로 늘어난 마력에도 충분히 익숙해졌고, 세릴의 공격에도 익숙해졌다.
이젠 끝낼 때다.
쐐액!
세릴의 공격에 바람이 비명을 질렀다.
인한은 고개를 옆으로 꺾는 것만으로 그 주먹을 피해 내고, 세릴의 품속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세릴은 반대쪽 손을 급히 뻗었다.
쾅!
하지만 이미 인한의 주먹이 뻗어진 후였다. 세릴의 몸이 기역 자로 꺾였다.
하지만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건지 눈을 번쩍 뜨며 다시 달려들었다.
“끝났어.”
퍼억!
인한의 주먹이 곧게 뻗어졌다.
손끝으로 느끼는 묵직한 감각. 세릴이 3미터 정도를 날아가 뒤편에 있던 제단에 부딪혔다.
제단에 쌓여 있던 잡동사니가 와르르 쏟아지며 먼지가 피어올랐다.
세릴이 한 번 꿈틀댔지만, 곧 힘없이 쓰러졌다.
[진 보스 몬스터 ‘계약자 세릴’을 처치하셨습니다!]
“후.”
인한은 숨을 훅 내쉬었다.
세릴을 챙겨서 합류를 해야 했다.
될 수 있다면 마나 리프트의 효과가 끝나기 전에 안전지대의 앞에 있는 보스도 처리하고 더 이상의 피해 없이 던전을 클리어하고 싶었다.
그때였다.
꿈틀!
세릴이 움찔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