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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자들-28화 (28/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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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자들 28화>

“으으…… 으…….”

신음 소리가 멈추지 않고 들려왔다.

그리고 그건 도저히 인간의 목에서는 날 수 없는, 쇳조각을 벅벅 비비는 듯한 소리였다.

세릴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정신 차리자.’

어둠 속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세릴은 미리 준비해 둔 발광석을 어둠 속으로 던졌다.

“끄으…….”

익숙한 얼굴들이다.

묘족의 동료들.

그리고 아버지.

‘이제…… 가족이 아니야.’

이제는 사람보다는 몬스터에 가까운 모습을 하게 된 자들.

피부는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동공은 확대되어 있었다. 살아 있는 생명의 냄새를 맡고 턱을 딱딱 부딪치지만, 땅바닥에 달라붙은 채 힘없는 반복 행동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악마들에게 마력을 한계까지 흡수당하고, 끝내 목숨을 잃어 죽음의 왕에 의해 거짓된 생명이 불어넣어진 몬스터들.

좀비라고, 여행자들은 이것을 그렇게 불렀던가.

터벅!

세릴은 천천히 좀비의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과거에 그녀의 아버지였던 사람의 목을 움켜쥐었다.

모든 일의 시작은 그녀가 했다.

도망친 것도 그녀였고, 살아난 것도 그녀였다.

그녀가 매듭을 지어야 했다.

딱, 딱, 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 * *

인한의 말에 리시피르의 전신에서 꿈틀대던 열기가 조금 흔들렸다.

“씨앗과 권세의 의미를 잘 모르는 거 같은데…… 아, 이건 말하면 안 되는 종류였던가? 어차피 돌아가면 손해 볼 거, 조금 더 보나 마찬가지겠군. ……자, 알기 쉽게 설명해 주지. 씨앗은 네 존재의 격을 높여 주는 물건이다. 또한 권세만 봐도…….”

“어떤 대단한 조건이라도 거절하겠다.”

“…….”

한동안 가만히 우뚝 서 있던 리시피르에게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유는?”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탑에 내가 있는 시점에서 더 대답이 필요한가?”

“그게 무슨 소리지?”

“이 검은 탑이 우리에게 어떤 짓을 했는데 내가 네가 좋을 일을 할 것 같나?”

“탑 때문이라고?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

“……?”

인한의 미간이 꿈틀댔다.

‘설마 왕과 탑 사이에는 관계가 없는 건가?’

성대한 헛다리를 짚은 것에 불과한 것일까?

인한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탑이 우리 세계에 나타난 것도…… 이 탑의 주인도 당신들이 아닌가?”

“그렇다. 탑은 우리들의 귀중한 보물이지. 엄밀히 말하자면 탑이 딱 이곳을 선택해 나타난 건 우리가 시킨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놈에게 탑을 맡긴 건 우리이니 그렇게 볼 수 있지. 그런데 그게 어떻다는 거지?”

대화가 엇갈린 듯한 느낌. 규격이 다른 나사를 억지로 끼워 넣는 기분이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면서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하겠다고 하는 건가?”

“모르겠다. 탑이 세워진 것과 내 제안을 거절한 것에 무슨 관련이라도 있는 건가?”

“무슨……!”

그 말에 인한은 전신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꽤 겸손한 왕이다. 저 거만한 놈들과는 다르지. 나는 감사마저 느끼고 있다. 수많은 세계의 수많은 존재들이 권태로웠던 나의 삶에 제법 괜찮은 유희 거리가 되어 주었지. 천 년을 내리 즐겼는데 매번 새롭더군. 생각보다 재밌었지. 그래서 고마웠다. 이런 좋은 유희 거리가 되어 줘서.”

“재미? 유희……?”

“이곳 최하위 위계인 3,784번도 기대하고 있어. 가지고 있는 힘 자체는 그야말로 하등하지만, 이 세계의 원주민들은 이상하리만큼 천문에 잘 적응한 모양이더군. 이유를 모르겠지만 높은 지능에 마력과의 친화도도 높고…… 의외로 상위 위계의 존재들보다 높은 곳에 도전할 수 있을 것…….”

“그만!”

인한은 참지 못하고 한 발자국 내디디며 외쳤다.

“탑 때문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그따위 개소리를 하는 거냐!”

“죽어서, 뭐 어떻다는 거지?”

전신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알았다.

이놈은…….

“난 계약을 거절하는 이유를 묻고 있다. 조건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인지 묻고 있는 거지.”

탑에 의해 나타난 그 수많은 비극이.

탑이 집어삼킨 그 수많은 목숨을.

길 가다 밟은 벌레처럼, 혹은 그것보다 더 아무렇지도 않게 느끼고 있다.

“……아마 넌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거다.”

[계약을 거절합니다.]

[‘악마의 왕’ 리시피르의 계약이 파기됩니다.]

“정말 계약을 거부할 줄이야.”

파삭!

그때 갑자기 리시피르의 오른팔 팔꿈치부터 손까지의 부분이 땅바닥에 툭 떨어졌다.

원래부터 모래로 만들어졌던 것처럼, 팔뚝은 떨어지자마자 회색 재가 되어 사방에 흩어졌다.

뿐만 아니라 몸의 균열에서 간헐적으로 번쩍이던 새빨간 빛과 살갗을 쿡쿡 찌르던 열기도 점점 사그라져 갔다.

“꽤 무리했는데 소득 없이 끝나 버렸군. 어쩔 수 없나.”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시작한 리시피르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단념이 빠르군. 원하던 것이 전부 실패했는데 말이야.”

“전부? 전부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뭐?”

“전혀 소득이 없는 것도 아니란 말이지.”

“그게 무슨 말이지?”

“곧 알게 될 테다. 내 사소한 복수를 기대하도록.”

리시피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리시피르의 몸은 이내 그 말단부터 빠르게 붕괴되어 갔다.

비로소 하체가 골반까지 무너진 순간, 리시피르는 땅바닥에 몸통만 남은 채 잿더미에 쓰러졌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신경이 쓰였던 것이 있었다.”

말없이 사라질 것 같던 리시피르에게서 돌연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오래전 나와 마주친 적이 있지 않은가?”

“뭐……?”

파삭!

그때 리시피르의 얼굴 부분이 결국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아주 짧은 찰나.

인한은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 그리고 핏빛의 눈동자를 지닌 청년의 얼굴을.

“조금 더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 말을 끝으로 리시피르는 잿더미로 변했다.

* * *

세릴의 손은 회색 가루로 범벅이었다.

세릴은 주저앉은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옆에는 퀴퀴한 냄새가 나는 토사물이 사방으로 퍼져 있었다.

세릴은 입가를 손으로 닦아 내고는 몸을 돌렸다.

“이제 마지막 하나만 남았어.”

많은 사람을 끌어들였고, 많은 비극을 만들었다.

이제 이 모든 것의 끝을 낼 차례였다.

차례일 텐데…….

-이제 네가 필요하구나.

먼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찝찝하다.

인한은 잿더미로 변한 리시피르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마주친 적이 있다고?’

마지막까지 목에 걸린 듯한 기분이다.

인한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극심한 피로와 전신을 덮치는 부상의 고통에 당장이라도 침대에 누워 잠에 빠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먼저.

‘이놈들.’

인한은 마른침을 삼켰다.

리시피르가 사라진 순간부터 바싹 말라붙었던 마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한의 마력도 미량이지만 회복되고 있는 만큼 보스 몬스터도 마찬가지일 테다.

제대로 공략하고자 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만 지금은 다친 사람도 죽은 사람도 너무 많다.

굳이 모험할 필요 없이 보스들을 정리할 수 있을 때 해야 했다.

인한은 인벤토리를 켜서 쭉 내렸다.

“결국 이건 안 쓰게 됐군.”

인한은 인벤토리에 있는 아이템 하나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목숨이 위험할 때 쓰려고 아껴 둔 아이템이었다.

효과는 말도 안 될 정도로 뛰어나지만 그만큼 후폭풍도 무서운 아이템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인한은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꺼냈다.

[리자드 본 소드]

[등급: D-]

소드라고 붙어 있지만, 꼬챙이에 가까운 뼈칼이었다. 다만 뼈라고 해도 어중간한 쇠보다는 탄성도 강도도 높은 아이템이었다.

인한은 칼을 쥔 채 쓰러진 보스들에게로 다가갔다.

‘잘 안 들어가는데?’

본 소드를 보스의 목에 대고 힘을 주었지만 잘 들어가지 않았다.

인한은 양손으로 칼을 역수로 쥐고 내리찍었다.

푹!

[보스 몬스터 ‘악마 룩’을 처치하셨습니다!]

[보스 몬스터 처치 보상이 지급됩니다.]

[데스 아머]

[보스 몬스터 ‘악마 튜러스’를 처치하셨습니다!]

[보스 몬스터 처치 보상이 지급됩니다.]

[파멸의 채찍]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전직도 안 했는데 결국 20레벨에서 또 레벨을 올려 버린 인한이었다.

레벨 업을 통해 마력과 체력이 회복되는 걸 느끼며 인한은 숨을 훅 내쉬었다.

“마지막.”

인한은 레이낙에게 향했다.

진정한 의미의 보스 몬스터.

놈을 잡으면 이제 이 던전은 공략이 끝이다.

이곳이 40퍼센트 구간이니 클리어 자체는 아직 한참 남았지만 보스 몬스터가 없는 던전이란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푸욱!

[보스 몬스터 ‘악마 주술사 레이낙’을 처치하셨습니다!]

[보스 몬스터 처치 보상이…….]

인한은 눈을 깜빡였다.

“……?”

눈을 벅벅 비비고 다시 천문을 바라보았다.

‘진’ 보스 몬스터 레이낙은 지금 죽었다.

그런데 왜 천문에는.

……그냥 ‘보스’ 몬스터로 나오는 걸까?

인한은 쓰러진 레이낙을 바라보았다.

타이틀 <시작하는 자>의 보상 선택 효과 역시 기껏해야 각석 정도가 제일 쓸 만한 보상이었다.

인한이 표정을 찌푸렸다.

‘보스가 바뀌었어.’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돈다.

인한은 고개를 휘휘 젓고 스테이터스 포인트를 마력에 분배했다.

특별히 정비할 거리가 없는 걸 확인한 후.

“일단 팀과 합류하도록 하고. 그 전에…….”

여전히 불길한 힘이 꿈틀대는 제단의 앞에 섰다.

그곳의 가장 위쪽에 흑색으로 물든 보석을 바라보았다.

[타락한 푸른 숲의 마석]

[등급 : S]

[종류 : 퀘스트 아이템]

[설명 : 푸른 숲의 성석이 악마의 마력에 의해 더럽혀졌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정화해야 합니다.]

“이거군.”

이것만 챙기면 퀘스트 완료다.

정화에 대한 부분도 짐작이 가는 바가 있다. 5층엔 없지만 7층에 숨겨진 아이템을 쓰면 된다.

하지만 의아하다. 비록 왕과 만나기는 했지만, 그건 정말 예외의 일이었다.

간단한 퀘스트였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인한이 아는 퀘스트가 전부 탑의 향방을 크게 바꾼 것을 생각하면 뭔가 시시한 감이 있었다.

인한은 보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파지직!

마치 정전기가 오르듯 검붉은 기운이 인한의 손을 후려쳤다.

핏방울 하나가 뚝 떨어지는 걸 보며 인한은 혀를 찼다.

“역시 쉽게 안 끝나 주는군.”

검붉은 기운은 다시 보석 안으로 스멀스멀 들어갔다.

‘지금은 어쩔 수 없어.’

인한은 몸을 돌렸다.

도망친 이정환 쪽이 걱정이다. 안전하긴 하겠지만 죽은 사람도, 부상자도 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합류한 후에, 정비를 위해 묘족의 마을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고 보니 안전지대의 앞에도 보스 몬스터 한 마리가 버티고 있을 터다.

“대충 10미터 정돈가?”

인한은 벽으로 가서 위를 바라보았다.

이 냄비 모양의 분지 같은 지형엔 계단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벽을 타야 했다.

인한은 인벤토리에서 단검 두 자루를 꺼내 벽면에 박았다.

무른 흙을 비집고 단검을 박으며 인한은 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끙…….”

별것 아닐 줄 알았는데 엄청나게 힘들었다. 대략 2, 3미터 남았을 무렵부터 팔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몸 상태도 최악이고 마력도 바닥이었다.

인한은 숨을 훅 내쉬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때였다.

툭!

위쪽에서 모래 알갱이가 굴러떨어졌다.

인한은 천천히 위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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