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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자들-21화 (21/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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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자들 21화>

“여행자.”

세릴이 얇고 부드러운 손으로 인한의 주먹을 잡았다.

“……?”

세릴이었다.

그녀는 차갑게 식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인한의 주먹을 폈다.

“피, 나고 있어.”

그제야 인한은 손바닥이 기분 나쁘게 끈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먹을 너무 꽉 쥔 탓에 길게 자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아, 이런…….”

이렇게 될 때까지 눈치채지 못하다니. 인한은 멋쩍게 손을 뒤로 숨겼다.

세릴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인한의 손바닥에 덕지덕지 발랐다.

그녀는 까만 눈동자로 인한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

인한은 입을 꾹 다물었다.

지나간 과거다. 누구도 기억 못하는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과거로 왔다지만 정신만큼은 그대로인 모양이다.

그에 대한 트라우마와 살의가 똘똘 뭉쳐서, 조금이라도 건드리는 순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흘러나온다.

‘나도 정상은 아니구나.’

박철환이 옳지 않은 존재라면, 지금의 인한은 뭐란 말인가.

“하아.”

인한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뜨거운 열기가 빠져나가는 기분과 함께 몸의 긴장이 풀렸다.

“고맙다. 덕분에 진정됐어.”

“이해해. 당신은 나와 같아.”

뜬금없는 소리. 인한이 세릴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신에겐 짙은 분노를 느껴. 살기도, 허무함도, 좌절도, 절망도…….”

순간, 인한은 세릴의 목소리에 오싹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제야 인한은 알 수 있었다. 세릴이 인한에게 온 것은 단지 인한을 걱정하는 마음에서가 아니었다.

“나도 같아. 당신도 그런 거지? 나는 끝내야 해. 그들은 내가 속죄하길 원할 거야. 그러니까…….”

평소의 무덤덤한 표정에 인한은 희미한 광기를 느꼈다. 편집증적인 그 눈빛에 흠칫 놀란 인한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세릴의 손을 떨쳐 냈다.

“도대체 뭐야!”

“아…….”

세릴은 그 충격에 살짝 떨어지더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뭐하는 거지? 세릴, 너, 우리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게 있어. 맞지?”

“……없어.”

세릴은 고개를 저었다. 인한과 세릴 사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인한이 입을 열려는 순간, 세릴이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가 봐. 여행자. 당신은 정환과 사람들의 쓸데없는 대화를 끝낼 수 있을 텐데.”

그 말이 인한의 말문을 막아섰다.

그러고는 얼굴을 푹 숙인 채 도망치듯 걸음을 옮겼다.

‘뭐가…….’

인한은 세릴의 눈과 표정을 떠올리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표정을 모를 리가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후회만 가득했던 과거의 인한이 거울을 볼 때마다 보았던 표정이니까.

“일단.”

인한은 이제 회의라고 할 것도 없이 잡담을 나누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저 상태면 시간만 낭비한다. 워낙 사이가 좋으니 회의가 저런 식으로 발전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인한은 그쪽으로 걸어갔다.

* * *

이제 회의는 휴식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됐다.

인한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이제 슬슬 정하도록 하시죠. 벌써 2, 30분 정도 시간이 지났습니다.”

“아…… 벌써. 일단 도전하는 쪽으로 결론이 나긴 했습니다. 뭐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 그리고 지금은 지도를 보며 어떤 식으로 진행할지 이야기를 하다가…… 커흠.”

이정환이 부끄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인한은 씨익 웃으며 이정환의 말을 받았다.

“적어도 이 던전의 초반부에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도에 적힌 대로 가도록 하죠.”

지도가 있다. 한동안은 맵핑이나 길을 잃는 것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몬스터의 습성이나 종류도 들었다. 이미 한 번 정도 훈련 삼아 휴식을 하며 합을 맞추기도 했다.

“그것도 확실할지 어떻게 압니까. 무슨 함정이 있을 수도 있고요.”

“들어가면서 파악하도록 하죠. 난이도 건도 이유를 아직 모르니까요.”

“흐음, 그렇군요. 전 찬성입니다. 인한 씨의 말대로 지도도, 몬스터 습성도 파악이 된 상태니까요. 다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 반대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저도 팀장님만 찬성하시면 찬성입니다!”

* * *

미로였다.

정말, 말 그대로 벽돌로 만들어진 수많은 갈래의 길이 펼쳐져 있었다.

고대인의 도피처와 같이 발광체가 달려 있어서 어둡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어두컴컴한 것은 사실이라 팀의 몇 명이 LED 랜턴을 들고 앞을 비췄다.

“지도가 있어서 다행이네요.”

“그건 그러네요.”

이정환이 옆에서 말했다.

생각보다 갈림길이 많았다. 만약 지도가 없었다면 엄청나게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팀의 진형은 간단했다. 통로의 폭이 넓지 않아서 이정환과 인한을 포함한 고레벨 헌터 다섯이 앞을 서고, 그 뒤를 차례로 따라붙었다.

‘아직 탑의 초기라 원거리 스킬이 있는 사람도 없을 테고.’

대부분이 근접무기를 사용했기에 특별히 진형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정말 깜짝 놀랐어요.”

이정환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벽면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다니 말입니다. 의외로 과격한 성격이셨네요?”

“……될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이정환의 말대로 인한은 던전에 들어오자마자 벽면을 주먹으로 힘껏 후려쳤다.

미로형 던전의 경우 때때로 벽이 부서지는 경우가 있다. 그럴 경우 벽을 뚫어버리고 직선으로 가는 게 좋았지만…….

‘아쉽게도 실금만 조금 그어졌지.’

서커스 팀원들은 기겁했다. 갑자기 주먹으로 벽면을 인정사정없이 휘두른 것이다.

거기다 폭탄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는데 주먹에 상처는커녕 흠집 하나 없었다.

“안 부서지니까 엄청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셔서…… 흠흠!”

“원래라면 부서졌을…….”

“그쵸. 알죠, 당연히.”

인한은 한숨을 쉬려다 고개를 획 돌려 정면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만. 조용히.”

“알겠습니다. 조용히 할…….”

“조용히 해. 정환.”

세릴이 정환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크륵, 크륵.

정면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이정환의 표정도 굳었다.

“몬스터군요.”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네? 뭐하려고요?”

“잠시 보고 오겠습니다.”

인한은 손가락 관절을 꺾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인한 씨!”

콰아앙! 콰앙!

곧 폭음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 팀원들은 경직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곧, 무언가가 훅 튀어나와 정면에 떨어졌다.

“미, 미노타우르스?”

소의 형상을 한 이족보행형 몬스터. 흰자위를 보이며 쓰러져 있는 미노타우르스였다.

인한이 사라졌던 곳에서 걸어 나오며 말했다.

“레벨은 낮습니다. 대충 10레벨 중반이군요. 외곽이라 걱정 없을 것 같습니다. 4층 던전에 출현하는 몬스터급이네요.”

“…….”

이정환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니, 모두가 그랬다.

* * *

본격적으로 미로에 몬스터가 나오기 시작할 때부터 통로의 크기가 사람 열 명 정도는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어졌다.

“그쪽! 막아!”

미노타우르스가 대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정면에 선 탱커 클래스의 헌터들이 방패로 대검을 막아 내자마자 이정환이 달려들었다.

‘슬래쉬!’

서걱!

이정환의 검이 미노타우르스의 흉부를 정확히 파고들었다. 팀에서 가장 레벨이 높은 이정환이기에 그만큼 높은 공격력을 자랑했다.

쿵!

미노타우르스의 육중한 몸이 땅바닥에 쓰러졌다.

이정환은 땀을 닦으며 검을 늘어뜨렸다.

그리고…….

콰앙! 콰앙!

폭음이 울려 퍼지는 쪽을 바라보았다. 이정환뿐만 아니라 다들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인한이 단신으로 미노타우르스와 마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굉음의 출처가 인한에게서 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미노타우르스 쪽.

미노타우르스가…… 인한을 두들기며 내는 소리였다.

-푸후으으. 푸후으으.

미노타우르스가 뜨거운 콧김을 내뱉으며 헐떡거렸다.

대검을 축 늘어뜨린 채 덜덜 떠는 미노타우르스.

이정환은 처음으로 몬스터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이 방법 괜찮은데? 숙련도가 생각보다 잘 올라.”

인한은 어깨를 빙빙 돌리며 미노타우르스에게 다가갔다.

-크, 크르륵!

미노타우르스가 덜덜 떨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인한의 주먹이 크게 젖혀졌다.

콰아아앙!

인한의 주먹이 성대한 소리와 함께 미노타우르스의 몸통에 작렬하고.

-쿠오오오오!

미노타우르스는 처절한 절규와 함께 쓰러졌다.

그 강건한 미노타우르스의 몸이 몸통에서부터 박살이 나 있었다.

이정환은 그걸 보면서 착잡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누가 악당인 건지.”

“악당?”

세릴이 이정환에게 다가왔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몬스터들에 의해 자신들의 마을이 침략당했다. 세릴의 입장에서 이것들은 당연히 악이었다. 이정환은 경솔한 자신의 입을 탓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자자, 몬스터 해체합시다! 다시 준비하도록 하죠!”

이정환의 외침과 함께 길드원들이 움직였다.

처리한 미노타우르스는 총 다섯 마리. 인한이 한 마리를 담당했고, 나머지를 서커스 팀이 담당했다.

인한은 홀로 한 마리를 해체했다. 휴식을 취하던 사람들이 몇 명 다가갔지만, 곧 자신들이 있어 봤자 방해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너 명이 한 마리의 해체에 붙었는데 인한이 혼자 하는 속도가 더 빨랐던 것이다.

인한이 해체를 끝내고 인벤토리에 넣었을 무렵, 이정환이 다가가 손짓했다.

“저기, 인한 씨. 잠깐 괜찮겠습니까?”

“예. 왜 그러시죠?”

“잠깐 의견을 물어보고 싶습니다.”

“의견이요?”

“예. 그…… 이 던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정환의 말에 인한은 그 의미를 깨달았다.

“이상하죠.”

“역시, 그렇죠?”

이정환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꽤 들어왔는데 아직도 지도의 12퍼센트 정도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이 정도 몬스터면 필드 몬스터급이지, 절대 던전에서 나올 법한 놈들은 아닙니다. 물론 안전한데 보상이 좋으니 기분이야 좋지만…… 오히려 불안하군요. 지금껏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아니, 로우리턴이었으니까요.”

하하, 하고 농담을 하며 메마른 웃음을 짓는 이정환이었다.

하지만, 맞는 말이다. 탑의 던전이 이렇게 물렁할 리가 없다.

벌써 들어온 지 2시간 남짓이고, 몬스터와 부딪친 것도 몇 번이나 있었는데 아직도 진행도가 3퍼센트다.

이 정도가 히든 던전이라고?

1층의 히든 던전인 고대인의 도피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인한은 힐끗 세릴을 바라보았다. 이 중에서 던전에 들어가 본 경험이 있는 것은 세릴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인한과 이정환의 질문에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위험하다는 말뿐이었다.

‘뭔가 있어.’

나쁜 기분이다.

오른팔이 조금, 욱신대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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