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공략자들 20화>
밤이 깊어질 무렵.
축제가 끝이 나고 헌터들은 중앙 광장에 텐트를 치고 수면에 들어갔다.
인한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인벤토리.”
[몬스터 캣의 보주]
[비스킷]
[생수]
[철검]
[단검]
……
인벤토리를 쭉쭉 내리던 인한이 한곳에 멈췄다.
[월광초 가루]
[월광초 가루를 사용하시겠습니까? 효과 시간은 2시간입니다.]
[Y / N]
“사용.”
화악!
인한의 손에 반짝이는 가루들이 나타났다.
인한은 가루를 땅바닥에 흩뿌렸다.
순식간에 은은한 빛이 공중을 물들였다.
월광초의 세 번째 비밀.
달빛을 받아 빛을 발하는 월광초의 특성은 간단한 가공을 통해 [월광초 가루]라는, 주변을 잠시 동안 밝히는 아이템으로 만들 수 있다.
눈이 부실 정도의 광원이 되지는 않지만 환해질 정도의 빛은 만들어냈다.
달빛이 가득한 공간에서 인한은 자세를 잡았다.
“후우…….”
인한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주먹을 뻗었다.
퍼엉!
인한은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체술을 사용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체술을 사용했습니다!]
그것들은 이미 가지고 있는 체술이 아닌, 인한이 언젠가 가질 체술의 움직임.
아직 얻지 않았지만, 머릿속에 새겨진 것들.
‘조금 더 정확하게 움직이자.’
펼치는 것은 1차 클래스 업그레이드, 즉 권사 클래스로 전직하면 얻게 되는 스킬인 C등급 체술 스킬 [폰 체술]과, 2차 클래스 업그레이드 보상인 B등급 체술 스킬 [아이언 크래쉬].
스킬의 보조 없이 펼치는 아이언 크래쉬는 자세가 엉망이었다.
왜 지금 얻을 수도 없는 스킬을 수련하는 것일까.
인한이 새로운 생각 하나를 하게 됐기 때문이다.
스킬의 존재 때문에 자신의 한계를 규정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분명 스킬의 보조를 받으면 기술은 강해진다. 하지만 그 강함 덕에 사람들은 스킬에 기댄다. 스킬에 의해 정해진 길만 걷는다. 스킬이라는 틀에 갇힌다.
그런데 과연 그게 옳은 것일까.
어느 순간부터 헌터들은 ‘시스템의 강함’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스킬의 숙련도와 레벨을 그저 노가다로 올릴 뿐이었고, 기술의 본질에 대한 이해나 인간으로서의 강함은 등한시했다.
예를 들자면 이러했다.
지금으로선 풀 수 없는 수학 공식을 주고, 그것이 왜 공식으로써 성립하는지를 이해하기보다 무작정 많이 풀어서 몸에 익히는 식이다.
그게 먹히기는 했다.
하지만 만약, 자기가 가지고 있는 공식에 맞지 않는 답을 도출해야 할 때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만약 더 효율적인 공식이 있는데 가지고 있는 공식으로만 해결하고자 한다면?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부터 인한은 여러 스킬을 훈련하기 시작했다.
‘이러다 무협 소설 주인공처럼 되는 건 아닌가 모르겠어.’
인한은 후우, 길게 숨을 내쉬며 자세를 풀었다.
[패시브 스킬 ‘체술’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아무리 스킬을 얻지 못해도 숙련도는 오르는 모양이었다.
파검식은 몸의 훈련이 덜 돼서 버티질 못하기에 생략했고, 가지고 있었던 체술 중 바탕이 되는 폰 체술과 아이언 크래쉬를 번갈아가며 펼쳤다.
인한은 의아해했다.
‘왜 C등급일까.’
C등급 스킬 폰 체술.
정말 간단한 체술뿐인 스킬이지만, 그 간단한 것들은 체술에서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기술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인지 권사 클래스를 얻은 사람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데다, 상위 스킬인 아이언 크래쉬를 얻은 후에는 누구도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에 폰 체술은 그런 홀대를 받을 만한 체술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폰 체술은 뭐랄까. 표현하자면 단단한 토양과 같은 체술이다.
폰 체술을 수련할수록 패시브 스킬인 체술처럼 몸의 움직임이 좋아진다.
움직임이 단단해지고 몸놀림이 자연스러워진다. 그야말로 ‘기본’이라는 느낌이었다.
‘폰 체술을 한 번 더 해 볼까.’
인한의 몸이 움직였다.
쐐액!
뻗어낸 주먹이 호쾌한 바람 소리를 냈다.
* * *
휴식을 취한지 5일 정도 지났다.
그 사이 마을은 몬스터의 침입을 두 번 정도 겪었다.
위험한 상황은 오지 않았지만, 안전해야 할 부족의 마을이 그만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커스 팀은 던전 공략을 나서기로 했다.
레벨이 높은 몇 명의 팀원과 부상자들이 마을에 남았다. 마을에 침입해 오는 몬스터를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출발을 위해 마을에 모인 무렵.
묘족의 무리에서 누군가 나섰다.
“나도 가.”
세릴이었다.
모습이 조금 달랐다. 긴 머리를 끈으로 질끈 묶었고, 천으로 된 옷을 입고 있던 평소와 달리 가죽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을의 안전은 어떻게 하시고…….”
세릴을 포함, 남아 있는 묘족 전사는 총 여섯 명. 그것도 최근에 전사가 된 햇병아리인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적은 수의 전사들인데 세릴이 나서다니.
이정환은 당황하며 카를을 바라보았다. 카를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저희야 감사합니다만…….”
“가.”
“예?”
“갈 거야.”
세릴은 그 말을 끝으로 먼저 마을을 벗어나 버렸다.
이정환이 한숨을 폭 내쉬며 외쳤다.
“출발!”
* * *
돌 더미가 가득한 길이었다.
묘족의 마을에서 벗어났을 때는 숲이 이어지나 싶었는데 곧 풀 하나 자라지 않는 돌길로 이어졌다.
“이거, 자연석이 아니네요.”
이정환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인한도 고개를 끄덕였다.
유적의 잔해로 보이는 것들이다. 그것도 엄청 거대했으리라 예상될 정도로 광범위한 잔해가 퍼져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에 없다.’
인한은 왕가의 비도에 대해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22년 전의 일이기에 단순히 기억에 없는 것일까.
‘하지만 이 타이밍에 이정환이 퀘스트를 받았다는 것은 왕가의 비도가 발견됐다는 것. 아니면 설마 나로 인해 미래가 바뀌었나?’
나비효과라도 된다는 것인가. 별로 영향을 끼치게 움직인 적은…… 없다고 할 수 없다.
인한은 오히려 영향을 끼치게 움직였다.
1층부터 4층까지, 인한은 가지고 있는 지식들을 은근슬쩍 상인들을 통해 흘렸다.
1층의 히든 던전도 그 출현 조건에 대해 퀴즈처럼 뜻을 꼬아서 풀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헌터들의 성장을 위해서다.
성장은 즉 생존. 탑의 모든 것은 미지에 감싸여 있다. 탑에서의 미지는 죽음이었다.
헌터들이 생존을 하기 위한 정보가 조금이라도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이건 내가 알 수 있는 종류가 아니군. 이정환이 숨겼다는 쪽이 가능성이 높은데.’
인한은 이정환을 바라보았다.
인한의 기억에 따르면 이정환은 길드의 이익을 따지지 않고 발견한 히든 던전이나 정보들을 무료로 뿌렸다.
사비를 털어서 중상층의 헌터들 육성에 투자까지 한 그가 가장 중요한 초반부의 히든 던전을 숨길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인한처럼 풀었을 것이다.
‘만약 숨겼다면?’
혈맹의 중국인들에게 대협으로까지 불렸던 그가 숨겼다면, 그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여기.”
앞장서던 세릴이 우뚝 멈춰 섰다.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은 첨탑. 고작 첨탑임에도 빌딩에 가까운 그 크기가, 과거의 이 유적의 크기가 얼마나 거대했을지 연상시켰다.
“이곳의 밑.”
인한은 첨탑을 바라보았다.
문은 열려있는 상태였다. 해가 중천에 떠 있건만 문의 건너편에는 어둠만이 있을 뿐이었다.
[히든 던전 ‘왕가의 비도’를 발견했습니다.]
[왕가의 비도]
[아발론의 고대 제국 쿠란의 황족들이 만든 지하 미로입니다.]
[난이도 : C ~ ???]
[클리어 적정레벨 : Lv.20 ~ Lv.35]
“왜 난이도가 물음표지? 이럴 수가 있어?”
클리어 적정레벨이 있음에도 난이도 불명이다.
이정환이 아연해했다.
“이건 조금 회의를 해야겠는 걸요.”
긴장한 이정환에 비해 인한은 꽤나 평화로웠다. 그도 그럴 것이, 난이도 불명은 꽤 흔한 수치인 것이다.
보통 난이도는 파티의 평균이나 도전자의 능력치로 계산되어 천문에 나타나기 마련인데, 천문의 능력치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던전이 아닐 때면 종종 불명이 뜨곤 했다.
‘미로형이라고 했으니 말도 안 되게 어려운 미로라던가, 정해진 문제를 푸는 것, 특정 업적을 완수하는 게 성공 조건이겠군.’
단정 지을 수도 없다. 탑은 정해진 걸 뒤트는 데 도가 튼 장소다. 인한도 난이도가 불명인 부분이 심히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것보단…….’
인한은 천문을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발론이라. 여기서도인가.”
어디에 가도 어떻게든 만나게 되는 아발론이라는 단어. 그게 오히려 더 신경이 쓰였다.
“예?”
“던전 설명을 읽었을 뿐입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정환은 인한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고 던전의 설명을 읽었다.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지하 미로입니다.]
뭐, 확실히 의아해할 만하다고 생각하며 이정환은 팀을 불러 모았다.
* * *
회의는 지진부진 평행선을 이뤘다. 난이도가 불명이란 것은 그동안 한 번도 없었던 일인 만큼 당연햇다.
일단 마을로 가자는 의견이 나오고, 먼저 들어가자는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좀처럼 하나로 모이질 않았다. 애초에 무언가를 판단할 조건조차 없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분위기가 험악해지지 않는 것은 이 팀이 정말 좋은 팀이란 걸 가르쳐주었다.
인한은 어디까지나 외부 사람이다. 그래서 회의에서는 빠졌다.
이정환과 사람들은 괜찮다고, 오히려 같이 있어 달라고 했지만 사람의 마음은 혹시 모르는 일이다. 팀을 위해서 인한은 뒤로 빠졌다.
“좋은 사람들이야.”
인한은 주변에 널려 있는 암석 중 하나에 등을 기대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꽤 친해졌다. 음식 잘하는 석환, 탑에 오기 전에는 랩을 했다던 자칭 갱스터 딕, 초밥집 사장이었다는 쿄스케…….
인한도 자신이 음울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말을 많이 하는 편도 아니고, 농담도 잘 할 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자신을 원래부터 알았던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대해 준다. 표정이 굳으면 농담을 건네주고 말을 안 하면 말을 걸어준다.
인한은 빙 둘러앉아 의견을 주고받는 사람들을 지그시 응시했다. 문득 미소가 지어졌다.
“…….”
그 모습은 과거의 일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잔잔하던 감정에 큰 파장을 만들어냈다.
100층의 보스존 앞에서의 일. 누구의 의견도 듣지 않고 홀로 결정을 내린 데스파티의 길드장, 박철환.
그때처럼 수많은 층, 수많은 시련에서, 그는 그의 독선과 오만으로 수많은 헌터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자신 이외의 사람을 도구로밖에 사용하지 않았으며, 결과를 위해서라면 과정은 어떻게 되더라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이름 위에 수많은 절망이 쌓였고, 수많은 죽음이 쌓였다.
거기에는 가족과 같았던 해태 길드도, 그녀도 있었다.
‘박철환.’
저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졌다. 몸의 깊은 곳에서 활활 타오르는 무언가가 전신으로 퍼져나간다.
박철환, 그를 떠올린다. 그의 모습, 그의 말투, 그의 행동.
‘네놈만은.’
죽인다.
박철환과 똑같게 될 뿐이라고 비난해도 상관없다. 그의 강함이, 그의 재능이, 하늘이 그에게 내려준 운명이 탑에서 손에 꼽을 정도라 하더라도 상관없다.
박철환만은, 오직 그만은 죽어야 한다.
그때였다.
무언가가 손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