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자들-19화 (19/266)

# 19

<공략자들 19화>

마을은 난장판이었다.

통나무로 지은 집들은 성한 것이 단 한 채도 없었다. 대부분 무너졌고, 개중에는 타오른 것인지 잿더미로 변한 것도 있었다.

서커스 팀이 마을에 들어서자, 그리고 세릴이 가장 앞에서 ‘냐아아아!’하고 큰 소리로 외치자 곳곳에서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무와 나무 사이, 무너진 건물의 안쪽, 수풀의 밑에서 몸을 숨겼던 묘족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귀와 꼬리를 가진 수인들. 피곤과 두려움 같은, 어두운 기색이 가득한 수인들이었다.

‘들었던 것보다 심한데.’

인한은 힐끗 세릴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무표정이었던 세릴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묘족의 중앙에서 지팡이를 짚으며 머리카락도, 수염도 덥수룩한 덩치 큰 노인이 걸어 나왔다.

“오오, 세릴아…….”

“할아버지.”

비틀거리는 노인에게 세릴이 달려가 부축했다.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됐어? 숨어 있으랬잖아. 사람들도 왜 이렇게 다친 거야.”

“몬스터들이 생각보다 거세게 쳐들어 왔단다. 많은 일이 있었다. 그보다 드디어 도와주실 분들을 구해 왔구나. 감사한 일이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야.”

“정환, 부탁할게.”

세릴이 이정환을 바라보았다.

“예! 인벤토리에 넣은 물품을 풀고 부상자는 따로 모아 치료해 주십시오!”

이정환의 외침에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부분 길드원들은 휴식을 취했지만 몇몇 길드원과 비전투원 중 가무잡잡한 피부의 사내가 마을을 돌아다니며 노인이 이정환에게 한 발자국 다가섰다.

카를은 피곤한 얼굴에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푸른 숲의 임시 족장을 맡고 있는 카를이라고 하네, 여행자여.”

“이정환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을 이끄는 사람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정환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카를은 고개를 갸웃하며 손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손을 잡고 흔드는 게 여행자들의 인사. 신뢰의 증표.”

세릴의 설명에 그제야 카를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정환의 손을 쥐었다.

“여행자들 중에 그대와 같은 영혼을 지닌 자가 있다니 말이야. 부족을 도와주어 감사하네.”

“의뢰받은 일을 할 뿐입니다.”

“그래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터. 고맙네, 고마워.”

카를은 이정환의 손을 꽉 움켜쥐고는 인한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탑의 원주민들은 꽤 폐쇄적인 걸로 아는데, 의외로 카를의 부족은 그렇지도 않은 걸지도 몰랐다.

“카를이라네.”

“최인한입니다.”

손을 맞잡은 순간, 카를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허어.”

“……?”

“여행자여. 그대는…… 그대는 정말이지 강한 자로구나. 그대의 기운이 내게 느껴진다네. 그대는 여기에 있는 누구보다 강하겠지?”

“그건…….”

“고맙네. 자네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마음이 든든하겠어.”

“할아버지. 일단 쉴 곳.”

“응? 아아, 그렇구나. 자자, 이쪽으로 가도록 하지. 저분들은……?”

“아 견적 좀 뽑는다고 했으니까 내버려 두면 됩니다.”

“견적? 뽑아?”

“무너진 마을의 상태를 좀 보는 겁니다. 생각보다 더 심하군요.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저희들이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싱긋 웃는 이정환에 카를은 또다시 감사하다며 한참을 고개를 숙였다.

* * *

마을에서 조촐한 잔치가 벌어졌다.

마을의 중앙에 있는 넓은 공터에 장작을 쌓고 불을 붙였다. 서커스 팀이 인벤토리로 가져온 식량이 요리되고, 묘족은 귀한 손님들에게만 대접하는 귀한 과일주를 풀었다.

묘족 소녀들은 춤을 추고 청년들은 노래를 불렀다. 헌터들은 그들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마을을 지배하는 음울한 분위기는 음식과 술로 들뜬 분위기로 바뀌어져 갔다.

그리고.

축제의 열기에서 조금 떨어진 곳, 마을의 외곽.

인한과 이정환, 세릴과 카를이 모였다.

“묘족은 노래 솜씨가 좋나 보군요.”

노랫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우는 듯 웃는 듯 어딘가 아련한 곡조였다.

카를이 미소를 지었다.

“자네들의 연주도 일품이구만. 저건 무슨 악기라고 하나?”

“아, 기타하고 드럼…… 뭐 그런 이름입니다. 저희들의 세계에선 굉장히 대중적인 악기입니다.”

“신기하구만.”

그때쯤 노래는 하이라이트를 향해 올라갔고, 묘족의 아름다운 곡조가 대미를 장식했다.

카를은 잠시 노랫소리를 음미하다 중얼거렸다.

“……우리 푸른 숲 부족의 노래 솜씨는 최고라네. 우리 세릴이도 노래를 참 잘 불렀고.”

“세릴 씨가 말입니까?”

세릴은 여전히 무표정인 채 땅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정환이 세릴을 바라보자, 세릴은 긴 속눈썹을 슬쩍 들어 올리며 이정환과 눈을 마주쳤다.

“안 불러. 이젠.”

세릴은 그 말을 툭 던지고 다시 땅바닥을 바라보았다.

이정환이 뒷머리를 벅벅 긁자 카를이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이 아이도 원래 이런 아이는 아니었다네. 그날 이후 많은 일들이 있었지. 부디 이해해 주시오, 여행자여.”

이정환은 허공에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어우, 아닙니다. 제가 이해하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자자, 내가 직접 담근 과일주를 한 병 가져왔네. 한 잔 받게나.”

“아, 예. 감사히 받겠습니다.”

묘족에는 건배 문화가 없다. 마시고 싶으면 마시는 것이었다.

카를이 허허롭게 웃으며 먼저 잔을 비웠다.

“맛있구먼, 맛있어.”

카를은 잔에 새 술을 따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슬슬 이야기를 시작해 봄세.”

카를은 품에서 조약돌 세 개를 꺼내 늘어놓았다.

조약돌에는 각각 기이한 문자가 적혀 있었다.

“우리가 파악한 몬스터의 종류는 총 셋.”

툭, 조약돌을 검지로 건드린 카를.

조약돌에서 빛의 실들이 올올히 풀려 나오기 시작했다.

‘이건…… 주술이군.’

주술.

탑에 있는 능력의 일종.

‘그러고 보니 주술이 있었다.’

잊고 있었다.

주술의 존재를.

주술은 문자와 말로써 힘을 발하는 스킬이다.

마법 카테고리의 스킬처럼 큰 힘을 발휘하지는 않지만, 범용성이 넓고 실용성이 높아서 많은 상황 많은 곳에서 사용됐다.

인한도 주술을 쓸 줄 안다. 아니, 탑을 오르는 헌터라면 대부분 필드에서 휴식을 취할 때 몬스터가 다가오는 것을 알려주는 ‘알림의 술’ 정도는 익혔다.

“헉!”

주술에 대해 인한과 달리 이정환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이, 이게 도대체 뭡니까? 홀로그램입니까?!”

“호, 호르그? 흠흠, 그게 뭔가?”

“아, 바깥 세계의 기술입니다. 그게 아니라, 어떻게 이런 걸 만드신 거죠?”

“이거 말인가? 이건 주술일세. 아아, 그렇군. 여행자들은 주술을 쓸 줄 몰랐지, 허허. 하긴, 우리도 고향에서 익힌 것이니.”

“고향?”

인한이 그 단어를 끊어냈다.

“탑이 고향이 아니란 말입니까?”

“당연하네.”

“그럼 그 고향은 어딥니까.”

혹시 아발론을 말하는 것일까.

카를은 말없이 인한을 바라보았다. 인한도 숨을 죽이고 그 시선을 마주했다.

“어째서 우리들의 고향이 궁금한 겐가, 여행자여.”

“제가 알아보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는 곳이…… 아니, 곳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한의 눈에 굳센 힘이 서렸다.

아직 아발론도, 왕에 대한 것도, 씨앗도 아무것도 모른다.

분명 아발론과 그 왕은 100층의 보스가 말한 ‘그들’일 것이다. 하지만 인한은 그런 추측 외에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이 빌어먹을 탑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다.

“우리들은 말할 수 없네. 돌려 말하는 것도 할 수 없다네. 그런 ‘규칙’이지. 고작 고향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게 한계라네.”

또.

또다시 규칙이다.

도대체 그 규칙이 무엇이란 말인가.

“…….”

“자네는…… 자네는 정말 대단하군. 어떻게 여행자에 불과하면서 그것을 알 수 있는 게지? 천문에조차 떠오르지 않았을 것을.”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카를이 말하는 곳, 그들의 고향은 아발론이다.

혹시.

과거, 상위 랭커들은 아발론과 왕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

모르겠다.

그들은 정보를 뿌리지 않았다.

‘상관없다.’

알아 가면 될 일.

인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해해 주니 고맙네.”

이정환은 인한과 카를을 보며 조용히 있었다.

‘수인들의 고향이라.’

궁금하긴 했다. 그런데 왠지 끼면 안 되는 분위기라 조용히 있었다.

‘그러고 보니, 탑은 도대체 뭐지?’

과거에는 가지지 않았을 의문.

아니, 가졌었더라도 구체적인 방향성이 없었던 의문이 이정환의 속에 생기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씨앗이 되어 이정환을 움직일 이정표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순간.

화악!

돌에서 반짝 빛이 빛나며 하나의 상이 만들어졌다.

인간과 소를 섞은 듯한 모습의 괴수.

미노타우르스였다.

“미노타우르스라네. 초반부에 나타나는 괴물이지. 무기는 도끼, 혹은 대검으로서…….”

카를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히든 던전 왕가의 비도는 지하에 펼쳐진 미로형 던전이다.

몬스터의 종류는 알려진 바로는 총 세 종류.

미노타우르스, 골렘, 가고일이며, 아마 더 있을 것으로 예상이 된다고 했다.

카를은 세 종류의 몬스터의 형상을 떠오르게 한 주술을 멈추고는 다른 조약돌을 하나 더 꺼냈다.

“이건 우리 푸른 숲 부족의 전사들이 만든 지도라네. 자, 받아가시게. 이 글자를 손가락으로 건들면 발동될 걸세.”

카를이 조약돌을 이정환에게 건넸다.

[‘왕가의 비도의 지도(40%)’의 정보가 새겨진 주술 도구를 획득했습니다.]

“팀에 지도 제작 스킬을 C-등급까지 익힌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를 통해 지도를 제작해 뿌려야겠군요.”

인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한도 지도 제작을 익혔지만 그 정도의 숙련도는 아니었다.

게임과 달리 탑에서는 지도 제작을 지닌 사람이 직접 지도를 만들어야 맵으로 활용할 수 있다. 만들어진 지도를 획득함으로써 맵 기능을 사용하게 된다.

인한은 지도를 훑어보았다.

‘무지막지하게 넓군.’

미로의 구조도 복잡하고, 도저히 한 던전의 40퍼센트 정도에 달하는 지도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넓었다.

“그건 그렇고, 미로형이라…….”

비도라는 단어에서 눈치를 챘지만 역시 미로형 던전이었다.

미로형 던전은 던전 중에서도 가장 성가시다.

지도를 제작하는 데 한참 걸리기에 진행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고, 함정도 종류의 수가 많다.

거기다.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어느 정도의 전투 인원도 남아야 해.’

인원이 빠지는 거야 상관없다. 인한은 솔로 플레이어를 목표로 하고 있고, 실제로 현재 홀로 던전을 클리어하기에 마땅한 무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한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다.

‘됐어.’

인한은 술을 목 뒤로 털어 넘겼다.

이리 재고 저리 재다 보면 끝이 없다.

무려 퀘스트다. 그것도 히든 던전이 섞인.

이정환이 입을 열었다.

“지도 감사합니다. 그럼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던전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최대한, 가능한 만큼 빨리 부탁드립니다. 부족은 슬픔과 좌절에 잠겼습니다. 그들에게 여행자분들은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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