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자들-17화 (17/266)

# 17

<공략자들 17화>

“감사합니다!”

이정환은 허리를 푹 숙였다.

이정환은 거의 미라처럼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그나마 정상적인 얼굴도 여기저기가 터지고 찢어져서 피로 범벅이었다.

‘……그리운 얼굴이군.’

5층 정도 올라오니 익숙한 얼굴과 또 만났다. 인한이 아는 얼굴과는 상당히 앳돼 보이는 외모지만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었다.

인한은 그날을 조용히 떠올렸다.

쓰러진 자신, 몰려드는 몬스터들.

그리고 그 몬스터들의 앞을 가로막은…….

“어, 그, 저기요……?”

이정환은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인한에게 당황해 뒷머리를 긁적였다.

클라이머(Climber) 이정환.

랭킹 4위의 헌터, 혈맹의 맹주 신검(神劍) 리셴의 제자.

혈맹이 아무리 중국계 헌터들 위주의 길드였다고 하지만 모두가 중국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중 가장 유명했던 것이 이정환이었다.

그 자신도 랭킹 23위의 실력자였으며, 신의를 알고, 불의를 참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당신도 이렇게 풋풋했던 시절이 있었군.”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 한국말! 한국인이셨군요! 반갑습니다! 그건 그렇고 저기…… 괜찮으신 게 확실하십니까? 혹시 몸 상태가 안 좋다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놈들이 독 같은 걸 썼을지도 모릅니다. 칼에 베인 상처는 바로 치료하지 않으면 파상풍 같은…….”

인한이 생각에 빠진 걸 다쳐서 그런 걸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봐도 사람 좋게 생긴 이정환은 그 외모만큼이나 사람이 좋았다.

“괜찮습니다. 알고 있는…… 네, 알고 있는 분과 닮으셔서 순간적으로.”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하여튼……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위험했는데 말입니다.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별것 아닙니다. 저런 쓰레기들을 상대한 것 정도야.”

인한은 손을 휘휘 저었다.

그 말 그대로의 의미도 있지만, 사실 이 그룹을 이정환이 이끌고 있다는 걸 안 이상 보상을 받을 마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도왔다는 사실이 기쁠 정도였다.

“…….”

그런 생각을 하는 인한을 이정환이 힐끔 바라보았다.

전투하는 모습을 보며 알 수 있었던 내용이지만, 이렇게 앞에 서니 더 확실히 느껴졌다.

이 사람은 강자다.

그것도 엄청난.

나이는…… 아무리 봐도 자신과 비슷한 것 같은데, 정말 말도 안 되는 강함이었다.

그때, 인한이 한 마디 툭 던졌다.

“이놈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시죠?”

“아, 마을에 연락했습니다. 연합이 있거든요. 탑을 오르는. 그 연합에 아는 팀이 몇 개 있어서 연락했습니다. 잘 처리할 겁니다.”

이정환은 사람 모양의 나무 조각을 흔들어 보였다.

멀리 떨어진 상대와도 음성을 주고받을 수 있게 하는, 검은탑의 핸드폰의 역할을 해 주는 아이템 [드루이드의 인형]이었다.

인한은 눈을 돌리다 구석에 있는 커다란 크레이터 같은 구덩이를 바라보았다. 브라이언이 내리찍은 대검이 만들어낸 흔적이었다.

“최근에 이런 놈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조직을 결성했다는 소문도 있고요. 저희가 대대적으로 물자를 모으고 출발을 하니 그걸 노린 모양입니다.”

이정환이 분한 듯 이를 갈며 말했다.

인한은 씁쓸하게 말했다.

“놈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죄송하군요. 그런 조직이 정말로 있다면, 그놈은 간부였을 텐데 말입니다.”

“놈?”

“그 사이코…… 아니, 대검을 휘두르는 놈 말입니다.”

“아아,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그 녀석, 정말 대단하던데 말이죠. 내쫓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것보다 팀의 피해가 심각한 것 같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 으음, 솔직히 괜찮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군요.”

이정환은 주위를 살펴보며 한숨을 쉬었다.

기절하거나 중상을 입은 킬러들은 사지를 결박해 나무에 묶어 두었다. 그리고 묶이지 않은 사람들은…… 꽤 많이 상해 있다.

킬러들에게 사로잡혔던 사람들까지 풀어 주고 나니 이건 숫제 피난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사례는 이번 건도 포함해 분명하게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조금 서둘러 가면 내일쯤에는 마을에…….”

“아! 아뇨, 마을로 가는 걸 부탁드리는 게 아닙니다.”

인한의 눈이 갸름해졌다. 그 말은 즉 계속 필드 안쪽으로 이동하겠다는 의미였다.

“아실 텐데요. 비전투원을 데리고 가기에 필드는 너무 위험한 곳입니다. 거기다 킬러들이 억류하고 있던 사람까지 있으니.”

“그게…… 사정이 있습니다.”

“사정?”

이정환이 입을 열려는 순간.

“이젠 내가 설명할게.”

어느새 다가온 수인 소녀가 입을 열었다.

나이는 10대 후반 정도. 단발에 가무잡잡한 피부, 굵은 선의 이목구비는 아랍인을 연상시켰다.

“안녕, 여행자.”

여행자.

탑의 원주민들은 헌터들을 그렇게 불렀다.

“아까 전엔 고마웠다.”

“오히려 내가. 당신 덕에 더 큰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니까.”

수인 소녀가 인한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흑요석처럼 까만색의 눈동자.

거기에 묘한 기운이 서린다.

그 순간.

“그만.”

인한이 손을 뻗어 소녀의 눈을 가렸다.

“묘족의 능력을 알고 있다. 날 볼 생각하지 마.”

“어……?”

“은인이라 고마운 건 맞지만, 뜬금없이 능력을 사용하다니. 무례하군.”

인한이 손을 내렸다.

탑의 원주민들에게는 저마다 특별한 힘이 있다.

그중 묘족의 힘은.

‘본질을 보는 눈.’

인한은 소녀를 살폈다.

‘조금, 봤나?’

그녀가 능력을 사용하기 전에 바로 막았어야 했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수인들의 능력이 발휘된다. 너무도 오랜만에 만나는 수인이라 잊고 있었다.

소녀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입을 꾹 다물었다. 별다른 말이 없었다.

이정환이 놀란 듯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원래 이런 분은 아닌데…….”

“괜찮습니다. 큰일도 아니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수인을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운 좋게 한 번 교류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단하네요. 10층 최전선의 공략자들도 탑의 원주민들과 만날 일이 많지 않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거기다 묘족의 능력까지 알고 계시다니…….”

그때 소녀가 인한의 옷깃을 붙잡았다.

“여행자.”

“뭐지?”

“나는 푸른 숲 부족의 탈리의 딸, 세릴.”

소녀, 아니, 세릴이 마치 인사를 하듯, 무릎을 살짝 숙였다.

“당신에게 부탁이 있어. 당신의 힘이 필요해.”

[묘족 소녀 세릴이 의뢰를 합니다.]

인한의 눈이 번쩍 떠졌다.

퀘스트가 떠올랐다!

* * *

퀘스트.

탑에서의 퀘스트는 극도로 희귀하다.

퀘스트라 함은 본래 게임의 NPC에게서 얻는 것이지만 탑의 원주민들은 NPC가 아니다.

수인종이나 아인종에 의해 퀘스트가 주어지기도 하지만, 무조건 부탁을 받는다고 해서 그게 퀘스트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퀘스트는 히든 던전이나 유적에서 발견됐다.

그리고 그 퀘스트들은 모두 탑의 판도를 크게 뒤흔드는 것들뿐이었다.

‘예외도 있었지만.’

인한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90층의 악몽.

투귀(鬪鬼) ‘블러드 워커’.

탑의 원주민으로서 헌터들에게 극한의 시련을 내린 자.

유일하게 던전이나 유적, 원주민에게서가 아닌, ‘상황’에 의해 퀘스트가 주어진 사건이었다.

그 퀘스트를 클리어한 후 헌터들은 비로소 네 번째 클래스 업그레이드를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퀘스트를 위해 50명의 상위 랭커가 죽었다.

“일단 이야기부터 듣지.”

“수락부터 해 줘.”

“이야기부터다.”

말을 딱 끊어낸 인한의 말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한 발자국 물러난 것은 세릴이었다.

“사과할게. 맞는 말이야, 여행자.”

세릴은 양쪽 허공을 집게손으로 살짝 붙잡고, 우아한 커트시(Curtsy)를 보였다. 그리고 일어나서는 인한과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우리 푸른 숲 부족이 위험에 처했어.”

“위험?”

인한은 세릴이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

날렵하게 나무를 타고 다니며 킬러들이 손 쓸 새도 없이 숨통을 끊는 빠른 움직임.

웬만한 몬스터는 쉽게 제압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세릴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부족에서도 강한 편. 또 우리 부족의 전사들은 수가 적어. 거기다 현재 우리 부족은 지금 고립되어서 많은 게 부족해. 이 여행자가 옮기고 있는 것도 그런 것들이야.”

“어쩌다 그렇게 된 거지?”

“저주가 시작됐어. 몬스터들이 뛰쳐나왔지.”

저주.

수인족들은 던전을 저주라고 말하고는 했다.

“아시리라 생각하지만, 수인족들에게 저주는 던전을 의미합니다. 던전의 이름은 왕가의 비도(秘道).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스페셜 던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왕가의 비도.

들어본 적 없는 던전이었다.

그러나 새로 나타난 던전이란 건 말 그대로.

‘히든 던전!’

세릴이 설명을 더했다.

“저주는 많은 재앙을 동반해. 부족의 전사들이 힘을 합쳤어. 우린 저주에 도전했지만.”

세릴이 순간 말을 멈췄다.

무표정한 얼굴에 수많은 감정들이 떠올랐다.

“살아남은 전사는…….”

세릴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나를 포함한 몇 명뿐이야.”

던전은 새로 생성되기도, 없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던전의 주변에는 몬스터의 출현이 잦아진다. 던전 내부의 몬스터의 포화도가 높아지면 밖으로 뛰쳐나오기도 한다.

도망쳐 나온 전사라는 게 얼마 되지 않는다면, 현재 묘족은 커다란 위험에 처했을 수도 있다.

거기다 던전을 숨긴 이유도 이해됐다.

히든 던전이라는 타이틀.

헌터들의 눈이 뒤집힐 것이다. 그러는 중 그 주변에 묘족의 마을이 있다는 게 알려지면……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날 터다.

“난 여행자들을 알아. 여행자들의 속에는 괴물이 하나씩 숨어 있지. 그건 모든 걸 집어삼킬 거야.”

“그게 끝인가? 던전의 클리어가.”

“아니야. 하지만 여기서부턴 약속을…….”

그때.

“아……. 저기.”

이정환이 손을 들며 말을 멈췄다.

“말을 끊어서 죄송합니다만.”

이정환이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세릴과 인한도 함께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동해야 할 것 같습니다.”

“…….”

해가 진다.

인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밤.

밤은 탑의 존재들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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