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공략자들 13화>
인한은 마을에 있는 여관을 향해 걸어갔다.
인한은 걷다 말고 힐끗 상점을 바라보았다.
또 하나의 익숙한 얼굴.
검은탑 초창기에도 있을 줄 몰랐는데, 벌써부터 지부장 달고 있다.
검은탑 지부장이면 거의 실장급일 테니…… 저 나이에 실장이면 엄청난 클래스다.
‘같은 길드원이셨지.’
언뜻 보면 후더분한 30대 후반의 아저씨일 뿐이지만, 사실 그는 엄청난 인맥의 소유자였다. 그 인맥을 통해 여러 방면에서 해태 길드를 도왔다.
해태 길드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지원하고 공략에서 얻은 부산물을 대신 처리하는, 동료애보다는 비즈니스적인 관계기는 했지만, 그는 분명 해태 길드와 같이했던 동료였다.
‘설마 이때부터 바가지 씌우나 했더니.’
인한은 킥킥 웃었다.
저래 봬도 대단한 수완가다. 오성 그룹 지부장이란 직함을 고작 서른 언저리부터 지고 있는 것부터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 * *
4층 필드, 거미굴.
열 명의 헌터 팀이 몬스터를 도축하고 있었다. 그 중 한 한국인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내며 말했다.
“아, 무슨 초상집도 아니고, 다들 뭐라고 말 좀 해봐.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조용하니까 아주 죽을 맛이구만!”
“자네는 말이 너무 많다니까.”
선이 굵은 외모의 백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따 이 코쟁이 쉐끼가. 원래 우리나라에서는 일을 할 때 힘드니까 노래도 부르고 말이야…….”
도축하던 중 중국인 하나가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흠. 그러고 보니까 내가 재밌는 이야기 하나 있지.”
“에이 이 짱깨 자식. 너 또 소설 쓰려고 그러지?”
“아니! 이번엔 꽤 유명한 소문이네!”
“뭔데, 들어나 보자.”
“바로 무공을 익힌 고수가 탑에 들어왔다는 소문이지!”
“바란 내가 병신이지.”
“그자는 세상의 혼란을 보다 못한 은거기인이자, 선인의 제자라 하더군. 지닌 바 공부가 이미 하늘에 닿았기에 저 마수들의 이빨이 통하지 않는 금강불괴의 몸을 지녔고, 그 주먹은 능히 산을 무너뜨리니 그야말로 일권진산이라 하여…….”
“또 또 헛소리하네. 짱꼴라 새끼.”
한국인은 숨을 팍 쉬었다. 하지만 중국인은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거기다 누구와 함께 힘을 합치지 않고 혼자 다니는 모양이더군. 탑에 들어온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4층 보스존 근처까지 도착한 모양이야.”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한국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도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걸린지 모르나? 그것도 우리끼리 힘을 합쳐서 이 정도지 말이야.”
“그건 그렇군.”
백인도 동의했다.
“아니, 다들 들어보게. 그, 얼마 전에 튜토리얼 클리어했다는 알람이 떴지 않았나?”
“아! 그거! 자랑스러운 우리 한국인이 해낸 거지! 아직도 클리어 방법 안 알려졌다며? 이게 다 우리…….”
“그 사람이라는 소문일세.”
“응……?”
한국인과 백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중국인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중국인의 어깨 너머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중국인은 자신에게 집중이 모아진 줄 알고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그 사람은 정말 몬스터의 공격을 그대로 몸으로 받아내는 데다…….”
쾅!
어디선가 폭음이 들렸다. 중국인은 또 어떤 팀이 몬스터를 사냥하고 있으리란 생각에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저, 저……!”
그에 비해 한국인과 백인은 달랐다.
그들은 입을 쩍 벌렸다.
한 체격 좋은 청년이 4층의 몬스터 ‘블랙 오크’와 마주하고 있다.
블랙 오크는 일반 오크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가진 몬스터로 웬만한 성인의 몸통만 한 몽둥이를 휘두르는 걸로 유명했다.
블랙 오크가 휘두르는 몽둥이는 아름드리나무를 단번에 부러뜨릴 정도일 텐데…….
콰앙!
청년은 그걸 맨몸으로 받아 냈다. 멈추지 않고 몽둥이를 미친 듯이 휘두르는 오크였지만, 사내는 튕겨져 나가거나 짓눌리기는 해도, 상처 하나 없었다.
“거기다 내공을 익혀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그의 주변에 맴돌고…….”
한동안 몽둥이질에 맞던 청년은 질린다는 듯이 주먹을 움켜쥐며 팔을 뒤로 당겼다.
우웅!
꽉 움켜쥔 주먹에 새하얀 기운이 넘실대며 피어오른다.
“그 주먹을 뻗으면! 마치 폭탄처럼……!”
콰앙!
폭음과 함께 블랙 오크가 포탄에 얻어맞은 듯이 블랙 오크의 거구가 뒤편으로 날아가 암벽에 처박혔다.
“아이 씨. 이거 어르신이 얘기 중인데 정말 매너가 없군! 어떤 팀인지는 몰라도!”
청년은 블랙오크의 뿔을 단검으로 베어 인벤토리에 저장했다.
각석이다. 지금 청년은 각석을 얻은 것이었다.
“야, 야! 짱깨! 뒤, 뒤! 저거 뒤 봐!”
“아 거 참, 지금 얘기 중인데…….”
“빨리 뒤를 보게!”
“아직 말 안 끝났어, 양키야.”
“야이 씨발! 뒤 보라고!”
“뭐? 씨발?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뭐! 뭔데! 뒤에 뭐가 있다고!”
중국인이 돌아보았을 때, 이미 청년은 이동한 뒤였다.
“블랙 오크? 언제 저걸 잡았대? 그래서, 저거 보라 그런 거냐?”
“네놈이 말한 그 은거기인인가 뭔가 하는 게 지금 저기 있었다고! 저거 잡은 게 그 사람이야!”
“뭐어? 어허! 이 사람아. 그건 그냥 소문이야! 그런 걸 믿어? 장난이 심해! 블랙 오크를 어떻게 혼자서 잡나? 우리도 블랙 오크는 피해서 다니잖아.”
“아니, 정말 있었다네!”
중국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친구끼리 너무하네. 내가 아무리 어수룩하게 굴어도 그렇게 바보는 아니라니까.”
중국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힐끗 블랙 오크의 시체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알게 됐다. 블랙오크의 시체를 바라보는 것은 그와 친구 둘만이 아니었다.
같은 팀의 나머지 일곱 명도 잔뜩 놀란 표정으로 블랙 오크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정말……?”
한국인과 백인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있어! 있다니까!”
“저기! 방금 저기까지 있었네!”
중국인은 블랙 오크의 사체를 바라보았다.
블랙 오크의 명치며 얼굴에 움푹 함몰된 상처들이 있었다.
도저히 검이나 창과 같은, 탑에서 흔히 사용되는 무기로 낸 상처는 아니었다.
* * *
[극체술<1단계> Lv.6(92.12%)]
“극체술의 숙련도 상승이 꽤 괜찮은데.”
블랙 오크를 혼자서 때려잡은 자.
누구는 은거기인이라고 하고, 누구는 일권진산이라 하고, 누구는 하늘이 내려준 성인(聖人)이라고 하는 자.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최인한이었다.
인한은 극체술의 숙련도를 쌓기 위해선 매우 간단한 방법을 떠올렸다.
‘얻어맞으면 되잖아?’
……누구도 간단히 떠올릴 수 없는 방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시작한 인한이었다.
마력을 써서 얻어맞고, 좀 괜찮다 싶으면 맨몸으로 얻어맞았다. 육체에 자극이 있을 때마다 극체술은 빠르게 숙련도가 올라갔다.
“블랙 오크는 슬슬 상대하기 쉬운데.”
인한은 주변 숲을 쭉 훑어보았다.
4층에서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몬스터인 블랙 오크가 슬슬 쉽게 느껴졌다.
거기다 워낙 닥치는 대로 사냥을 하고 다녔더니 인한이 사냥하던 숲 주변에 놈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인한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걸음을 옮겼다.
1층의 히든 던전 ‘고대인의 도피처’를 클리어한 지 세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 후로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1층의 보스, 오크 족장.
2층의 보스, 빅 스파이더.
3층의 보스, 킹 보어.
그야말로 휴식 한 번 없는 강행군인 셈이었다.
고대인의 도피처를 클리어한 직후, 인한은 그 뒤로 고대인의 도피처를 세 번 정도 더 도전해 레벨을 높였다.
그러고는 곧장 1층 메인 던전을 클리어, 곧장 2층으로 향했고 다시 사냥, 레벨업, 사냥, 레벨업을 반복했다.
4층의 필드에 돌입하기 전에 1층에 잠깐 들려 만춘 형님과 거래를 한 것을 제외하면 오직 공략과 훈련에만 전념했다.
‘원래라면 더 빠르게 오를 수도 있었겠지만…….’
하지만 그조차도 인한에게는 느린 편이었다.
인한은 그냥 쓰러뜨리는 걸로는 넘어가지 않았다. 같은 종류를 수십, 수백 번을 사냥했다. 쉬운 것을 넘어서 매너리즘을 느낄 때쯤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인한보다 훨씬 강한 몬스터가 나타나도 마찬가지였다. 쓰러뜨릴 때까지 도전하고, 쓰러뜨릴 수 있게 되면 완벽하게 압살할 수 있을 때까지 도전했다.
“아직 조금 애매한데, 몇 마리 더 상대해 봐야겠어. 거기다 힘이 세서 그런지 극체술 숙련도도 많이 올려 주는군.”
인한은 옷깃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인한의 모습도 처음 탑에 들어왔을 때와 사뭇 달라져 있었다.
탑 밖에서부터 입고 있던 셔츠는 잔뜩 찢어져서 버리게 됐다. 인한이 지금 착용하고 입는 것은 3층의 보스 킹 보어를 쓰러뜨린 후에 얻은 가죽 갑옷이었다.
비록 모양은 좀 떨어지지만, 무려 보스급 아이템이었다.
그리고 그 갑옷 안쪽에는 딱 달라붙는 재질의 두꺼운 옷이 한 벌 더 입혀져 있었다.
인한은 그 옷에 직사각형 모양으로 불룩 튀어나온 부분을 툭툭 두드렸다.
“슬슬 익숙해지긴 했지.”
딱 하고, 소리가 났다. 옷을 친 것 같지 않은 둔탁한 소리였다.
1층에서 주문했던 물건이 바로 이것이었다. 옷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이상한 그 옷은 오직 무겁게 만든 데에만 초점을 뒀다.
누가 보면 미친 짓이라고 욕할 게 분명하다. 목숨이 오고 가는 탑에서 강해지기 위해서라지만 수십 킬로그램짜리 쇳덩이를 짊어지고 싸우다니.
‘이제 슬슬 스테이터스 상승이 더디네.’
처음에는 초반의 마력 스테이터스 투자로 인한 힘, 민첩, 체력 등의 기본 스테이터스가 낮아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었는데, 몸이 익숙해지고 나자 거의 소용이 없었다.
‘일단 4층은 빨리 뚫고 클래스를 얻자.’
현재 인한이 가장 목표로 잡고 있는 것이었다. 5층에서 진행하는 1차 클래스 획득. 헌터로서의 방향성이 정해지는 첫 번째 발자국이다.
인한은 필드의 깊숙한 곳으로 더더욱 들어갔다.
-크르르!
그때 인한을 노리고 레드 하이에나 무리가 천천히 다가왔다.
이놈들의 상대는 벌써 며칠 전에 끝냈다. 인한은 곧장 달려들었다.
-깨갱!
전투가 끝날 때까지 10분 정도가 걸렸다. 레드 하이에나의 도축을 느긋하게 끝낸 뒤, 인한은 숲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 언저리일 텐데…….”
인한은 땅바닥의 수풀이 꺾인 위치나 발자국을 되짚으며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보통 헌터들은 몬스터를 잡고자 할 때, 무작정 필드를 돌아다니고는 한다. 그렇게 해도 인간의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몬스터가 많기 때문.
하지만 인한은 몬스터의 습성을 알고 있다.
22년.
몬스터와 탑에 대한 얼마나 많은 것들이 연구되었을까? 생존을 위해, 돈을 위해 얼마나 많은 헌터들이 그 연구에 관심을 가졌을까?
너무 하층 몬스터는 세세한 것까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오크는 종류와 층수에 관계없이 성향이 대부분 동일하다. 인한은 능숙하게 숲길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숲을 뒤지기를 1시간.
“빙고.”
인한은 산의 중턱에 자리 잡은 투박한 통나무집들을 발견했다.
블랙 오크. 놈들의 군락지였다. 아니, 군락지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작은 곳이다. 암컷까지 끽해야 15마리 정도가 모여 있었다.
딱 적당한 숫자.
극체술의 숙련도를 올리기 아주 딱이다.
인한은 군락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취이익!
-취익! 쿠엑!
인한보다 키가 두 배는 커다란 블랙 오크들이 망치를 휘두르며 다가왔다.
인한이 씨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