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자들-7화 (7/266)

# 7

<공략자들 7화>

인한의 눈은 차갑게 식었다.

‘이게 내 공포라고?’

그래, 맞다.

몇 날 밤 악몽을 꿨나.

몇 년을 고통스러워했나.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제 찾아오지 않을 광경에 불과해!’

인한이 눈을 부릅떴다.

이 광경을 떠올리며 후회와 자책만 반복했던 과거의 인한이 아니다. 이제 인한에게는 미래가 있다.

그 순간 시야가 변한다. 마치 고속재생을 누르듯 풍경이 선이 되어 훅훅 지나가다, 어느 순간 우뚝 멈췄다.

콰아앙!

그리고 인한은 자신의 굳은 의지가 얼마나 손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태호 형님, 장훈, 철준, 제이슨, 다이치, 션 리…….’

전투의 최전선.

익숙하고도 익숙한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가족과 같았던, 아니, 가족 이상의 사람들.

그리고…… 놈도 보인다.

주변을 둘러보며 몸을 뺄 순간을 재고 있는 녀석.

이 악몽의 원흉.

‘박철환.’

울컥, 살의가 치솟는다.

몸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박철환이 한순간, 전면에서 몸을 뺐다.

‘안 돼!’

인한은 외쳤다. 분명 외쳤을 테지만…… 그 소리는 성대를 통과하지 못하고 공허하게 메아리칠 뿐이었다.

-끼아아아악!

박철환이 빠진 틈을 몽마왕의 스킬이 파고든다. 피가 튀기고 사람이 날아다녔다. 몽마왕의 마력이 진형의 심층부까지 푹 들어온다.

‘…….’

인한은 그것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급격한 피곤을 느낀다. 움직이지 않는 몸의 답답함과 눈앞에서 재현되는 악몽이 인한을 괴롭혔다.

화악!

또다시 광경이 바뀌었다.

모든 게 끝났을 무렵이다.

몽마왕의 스킬이 작렬했고 수많은 동료들이 깨지 않는 잠에 빠져 땅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인한은 손에 묘한 무게가 느껴지는 것을 눈치챘다.

‘……제길.’

무게의 정체를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결코 고개를 돌려선 안 된다. 안 된다. 안 되는데…….

코끝에 은은한 수선화 향기가 스쳤다.

인한의 고개가 서서히 내려갔다.

‘아.’

그녀가 있다.

차갑게 식은 채, 전신이 피로 범벅이 된 채.

인한은 그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그녀가 갈라진 입술로 무언갈 말하려는 순간.

화악!

또다시 풍경이 변했다.

“…….”

이번엔 몸이 움직인다. 인한은 손을 들어 움직여 보았다.

-히히!

웃음소리가 들린다.

인한이 등 뒤로 거대한 그늘이 드리워진다.

인한은 차가운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몽마왕 큐베리아다.

십 미터가 넘는 거대한 덩치의 놈이 인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이 ‘공포’라는 것은 이 상황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다.

무력했던, 평범했던, 바보 같았던, 그래서 동료도 연인도 전부 잃어버린 ‘자신’에 대한 공포.

인한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폐부의 공기를 모조리 다 내뱉으려는 듯 한동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숨을 한순간에 들이마시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고맙다.”

인한은 놈과 마주했다.

웃는다.

웃기로 했다. 웃어야 해, 라고 들었다.

“각오를 다시 한번 다질 수 있었다.”

몽마왕이 점점 다가온다.

인한은 놈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이것들은 전부 환상.

하지만 동시에 일어났던 과거.

그리고 결코 일어나지 않을 허상이 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거야.”

인한은 주먹을 뻗었다.

퍼엉!

인한의 주먹과 몽마왕이 부딪친 순간, 몽마왕의 모습이 안개가 흩어지듯 펑 터져 사라졌다.

[시작의 신전 4단계를 클리어했습니다.]

[보상이 주어집니다.]

[경체술……]

[투검술……]

1단계부터 3단계를 다 합친 것보다 4단계가 더 피곤했다.

인한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번쩍 눈을 뜨며 외쳤다.

“5단계에 도전한다!”

마지막 단계.

알려진 것은 하나도 없고, 상위 랭커만이 도전할 수 있었던, 최상위 랭커 10명만이 클리어한 단계.

[시작의 신전 5단계 시련이 시작됩니다.]

서서히, 천문이 떠올랐다.

[자신을 이기십시오.]

“뭐?”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공간이 변화했다.

툭!

인한은 누군가가 어깨를 치는 것을 느끼고 몸을 돌렸다.

“……!”

그곳에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있는 최인한이 있었다.

* * *

“왜 그래. 준비하라고.”

최인한은 자세를 낮추고 팔을 들어 올렸다.

자세도, 습관도 똑같다.

어딜 봐도 자신이다.

인한은 헛웃음을 지었다.

“나 자신을 이기라니…….”

어처구니없는…….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했지?”

“…….”

생각도 읽는단 말인가?

이런 만화나 영화에서나 보던 상황이…….

“만화나 영화에서나 보던 상황이 현실이 되다니 말이야.”

“내 생각을…….”

“네 생각을 읽는 거냐고? 아니, 말했잖아. 난 너라고. 정확히 표현하자면, 난 내 생각을 말한 것뿐이지.”

인한은 순간 울컥했다.

자신이 저렇게 얄미운 성격이었단 말인가?

“그것보다 언제까지 혓바닥만 움직일 거지?”

놈은 인한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리고.

“큭!”

화악!

인한의 코앞에 주먹이 날아들었다.

‘큭!’

주먹을 막음과 동시에 반격한다.

그 반격을 피하고 놈이 다시 반격.

회피, 공격, 방어.

모든 게 균등하다.

‘이건……!’

당황스러웠다.

똑같은 스타일, 똑같은 실력, 똑같은 움직임.

중국 쿵푸 영화에서 나오는 배우들처럼 짜고 치는 듯이 움직임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이길 수 없다!’

당연히 질 수도 없다.

놈도 인한도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있었다.

인한은 힘과 맷집으로 전투에 임하는 인파이터 스타일. 당연히 놈도 같다. 상체를 주로 사용하는 것까지 똑같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이니,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지지부진한 견제만 계속하고 있었다.

‘뭔가 방법이 있어.’

그렇기에 그들도 4단계를 완료했을 터였다.

생각이 이어지기 전, 놈이 먼저 움직였다.

“정신이 딴 데 가 있군!”

“컥!”

퍽!

놈의 주먹이 옆구리에 틀어박힌다. 막으려고 자세를 취하는 게 반 박자 느렸다.

인한은 땅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털썩 쓰러졌다.

“크, 윽.”

놈이야 고작 환상에 불과하지만, 인한은 꼭 승리해야한다.

그 여유의 틈이 일격의 차이를 만들었다.

‘제기랄!’

자신과 똑같은 얼굴의 사람이 자신에게 비아냥대는 게 아니 꼽다. 그야말로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제대로 하자고. 최인한.”

놈이 씨익 웃었다.

자신의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본다.

인한은 이를 악물었다.

“오냐, 그래!”

이번에 달려든 것은 인한이다. 포탄처럼 땅바닥에서 튀어 오르며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주먹과 주먹이 교차하고, 정확히 서로의 얼굴에 꽂혀 들어간다.

“크윽!”

밀려난 상태로, 다시 달려들어 일격.

퍽! 퍽! 퍽!

스텝이고 뭐고 없는, 그야말로 난타전이 시작됐다.

서로가 서로에게 최적의 거리에서, 쓸 수 있는 모든 부위를 사용해 상대를 가격한다. 피가 튀기고 살에 멍이 들었다.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삐걱댔다.

“크아아악!”

“우오오오!”

싸움은 계속됐다.

* * *

“허억. 허억.”

인한은 몸을 추욱 늘어뜨린 채 놈을 노려보았다.

서로가 피투성이 멍투성이였다. 피칠갑을 해서 살색을 찾기가 힘들었다.

‘못…… 이긴다.’

인한은 좌절했다.

이길 방법이 없다. 견제만 계속하든, 본격적으로 싸우든 결과는 똑같았다.

무승부…… 아니, 첫 유효타의 충격이 아직 남아 있을 테니 인한이 조금 손해를 봤을지도 모른다.

‘시발.’

인한은 금이 간 것 같은 주먹을 힘들게 말아 쥐었다.

포기하는 버릇을 아직도 못 버렸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 자신을 이겨라. 놈은 나 자신. 즉 그걸 뛰어넘으면 된다. 한계를 넘어서라는 것이 이 단계의 성공조건이리라.

……그게 말이니까 쉽지.

넘고 싶다고 넘어지는 게 한계란 말인가?

‘몰라! 오기로라도 넘어주마! 까짓거!’

뿌득! 뿌득!

인한은 주먹을 꽉 쥐었다.

주먹에서 기분 나쁜 소리가 났다.

‘날아간 팔 한쪽도 제자리에 있다. 죽었던 목숨까지 제대로 붙어 있다.’

놈이 달려들었다.

‘포기할 이유가 없어!’

빠드득!

인한이 이를 꽉 문 채 주먹을 뻗었다.

주먹을 뻗는다. 피가 튀긴다.

전신의 관절이 비명을 지른다.

피부가 찢기고 무릎에 고통이 내장까지 파고든다.

하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쓰러지려고 하면,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주먹을 휘두를 뿐이었다.

퍼억! 퍼어억!

인한과 인한이 서로를 향해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둘렀다. 샌드백처럼 둘의 몸이 사방팔방으로 튀어 오르고 그만큼의 피가 주변에 뿌려졌다.

서로 멀어졌다 다시 달려들고, 달려들다 튕겨 나가 땅바닥을 뒹굴었다.

이쯤 되면 기술이라든지, 싸움의 양상이라든지, 수 싸움이라든지, 그딴 건 뭣도 없는 그냥 개싸움에 불과했다.

“허억, 허억!”

다시 부딪쳤다 튕겨 나간 둘.

인한의 복제가 숨을 헐떡이며 의아해했다.

“지독한 새끼…….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냐.”

입술이 터지고 입안이 까져서 어눌한 발음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인한이 씨익 웃었다. 피로 범벅이 된 얼굴에 고르게 나 있는 치아만 하얗게 빛났다.

“왜, 왜 웃지?”

“나도 그 생각을 했었거든. 참 구현이 잘되어 있는 환상이야.”

“무슨 말……?”

중얼거리던 복제가 한순간 표정을 팍 일그러뜨렸다.

“알아챘지? 넌 나라며. 그 말한 순간 넌 이미 진 거야.”

인한이 뛰쳐나갔다. 아니, 마음만은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데 다리가 안 움직여서 질질 끌며 느릿느릿 앞으로 갔다.

“크윽!”

놈도 숨을 헐떡이며 주먹을 들었다.

주먹과 주먹.

똑같은 자세.

공중에서 두 인한의 주먹이 교차해 서로를 향해 날아갔다.

퍼어어억!

그것은 정말 간발의 차였다.

인한보다 복제의 주먹이 아주 조금 느렸고, 인한의 주먹이 조금 일찍 놈의 얼굴에 틀어박혔다.

“크허어…….”

인한은 주먹의 관성을 이기지 못해 놈과 함께 땅을 뒹굴었다. 헐떡이며 내뱉는 숨에 핏물이 팍 튀어 올랐다.

하지만 이대로 누워 있을 생각은 없었다. 인한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우뚝 일어섰다.

“크, 으…….”

인한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서늘하게 식은 눈빛이 번쩍 빛났다.

그리고 떠오른 알림.

[시작의 신전 5단계를 클리어하셨습니다.]

인한은 그 천문이 떠오름과 동시에 쓰러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