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자들-3화 (3/266)

# 3

<공략자들 3화>

처음 탑에 들어오자마자 오는 곳이다. 잊을 리가 없었다.

‘내가 왜 이곳에? 아니, 그것보다 튜토리얼존에서 왜 도망치고 있는 거지?’

인한은 기억을 되짚었다.

99층의 공략.

100층 보스의 등장.

데스파티의 전멸.

100층 보스와의 대화.

그리고…….

기억이 끊겼다.

거기서 자신은 분명 죽었다.

아니, 정말로 죽었나?

“큭! 너 때문에 따라잡혔잖아, 새끼야!”

임태호가 뒤를 바라보며 외쳤다.

인한도 뒤편을 바라보았다.

‘슬라임.’

푸른색을 띤 투명한 젤리가 꿈틀대며 인한과 임태호를 향해 미끄러지듯 빠르게 다가왔다.

“그새 늘었어!”

임태호가 경악했다.

족히 열 마리는 넘어 보이는 슬라임들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아니, 그래서 열 마리가 뭐?’

인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상황이 파악되지 않아 답답해 죽겠는데 고작 슬라임에게 도망 다녀야 한다니.

“왜 도망칩니까?”

“뭘 그런 걸 물어봐! 너무 많잖아! 놈을 잡으려면 놈의 안에 들어가야 하는데 나오자마자 다시 먹히고, 나오자마자 다시 먹히고 하다 보면 죽을지도 모르잖아! 빨리 이거 놓고 튀어!”

임태호가 인한의 팔을 뿌리치고 땅을 박찼다.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다. 저건 탑의 초창기에나 쓰던 방법 아닌가.

인한은 오히려 몸을 돌려 슬라임에게 다가갔다.

임태호가 뜨악하며 멈춰 섰다.

“돌았냐? 뭐하는 짓이야! 너도 빨리 와!”

“보고 계십시오.”

“뭔 소리야!”

“저놈, 잡기 쉽잖습니까.”

“그거야 한 마리일 때지!”

“한 마리만 잡으면 됩니다.”

“너! 뒤, 뒤에!”

콰득!

인한에게 다가온 슬라임이 인한을 집어삼켰다. 임태호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가장 앞에 있는 슬라임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자연히 나머지 놈들은 그놈에게 막혀 넘어오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꿀렁거렸다.

‘한 마리만 잡으면 된다니?’

임태호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면서도 인한을 잡아먹은 슬라임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인한의 표정이 정말 무언가를 알고 있는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태호의 고민은 아는지 모르는지 인한은 한없이 태연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슬라임이라.’

튜토리얼존에 나오는 몬스터답게 연약하기 그지없는 놈이다.

잡는 방법도 간단하다.

인한은 몸의 근육을 이완시켰다.

슬라임에게 먹혔다면 빠져나가려고 무작정 발버둥 쳐서는 안 된다. 그럴수록 놈은 먹잇감을 더 강하게 감싼다.

‘여기 있군.’

인한의 손에 물렁물렁한 것이 잡혔다.

‘슬라임의 핵.’

파란빛의, 5백 원짜리 크기의 구체.

이것이 놈의 몸을 구성하는 근간이다.

인한은 핵을 움켜쥐었다. 순간, 슬라임이 부르르 떨며 빠르게 굳기 시작했다.

‘기다려 줄 생각 없어.’

인한은 핵을 잡아 뜯었다.

펑!

슬라임을 구성하던 액체가 터져 나가며 인한이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러기가 무섭게 뒤따라오던 슬라임이 인한을 덮쳤다.

인한도 움직였다. 득달같이 땅을 박차 벽에 걸려 있는 횃불을 잡아 뜯어 불 속에 슬라임의 핵을 집어넣었다.

퍼어엉!

횃불의 화력이 한순간 강해지며 파랗게 타올랐다.

인한은 파란 불을 슬라임에게 겨눴다.

슬라임이 움찔댔다.

인한은 흥, 비웃음을 흘렸다.

“꺼져.”

슬라임들이 두렵기라도 한 듯 몸을 부르르 떨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 * *

‘뭐, 뭐가 일어난 거야?’

임태호는 슬라임의 사체를 모으고 있는 인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선이 굵은 이목구비. 자신 정도는 아니지만 키도 꽤 크고 몸도 날렵해 보였다.

호감 가는 외모이기는 하지만 별로 특별해 보이는 것은 없었다. 길 가다 가끔 마주칠 법한 그런 청년의 모습이다.

하지만.

‘무슨 눈이…….’

눈.

눈이 다르다.

저게 혈기왕성한 20대 청년의 눈이라고?

눈만 보면 죽은 사람 같다. 공허하고 흐릿하다. 눈만 따로 떼어 놓았으면 인형의 눈이라고 해도 넘어갔을 정도다.

“됐습니다.”

인한의 말에 임태호가 정신을 차렸다.

임태호와 인한은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인한은 슬라임의 잔해를 모아 불을 지폈다.

이게 탈 동안은 다른 슬라임은 다가오지 않는다. 탑의 현자라 불렸던 중국인 리 쉔펑이 알아낸 것이었다.

인한은 힐끗힐끗 자신을 쳐다보는 임태호를 바라보았다.

조금 진정되자 상황을 냉정하게 볼 수 있었다.

임태호의 모습이 젊다. 그것도 엄청.

거기다 임태호는 정말 인한을 모르는 기색이었다.

“이, 이게 타기도 하는 거였냐? 너는 어떻게 이런 걸 아는 거냐.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임태호는 놀란 듯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슬라임을 쫓아낸 것도 그걸 태울 수 있다는 것도 임태호는 처음 봤으니까.

아니, 애초에.

‘탑을 오르는 헌터들도 예비 헌터들에게 슬라임이 세 마리 이상이면 도망치라고 했는데 말이야. 거기다 슬라임은 조금도 쓸데가 없다고 했고. 그런데 이놈은 이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인한은 임태호를 멍한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람인데.

인한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별거 아닙니다. 운 좋게 놈을 불로 태워 죽인 적이 있어서요. 그때 알게 됐습니다.”

“그럼 나머지 놈들을 쫓아낸 건?”

“놈들의 몸은 보다시피 불에 잘 탑니다. 그중에서도 놈들의 핵은 더 잘 타더군요. 그런데 이 핵이 탈 때는 슬라임들이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도망쳤고요.”

“그렇군. 그럼…… 한 가지만 더 물어도 되겠냐.”

“예.”

“넌 분명 날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난 널 처음 봤다. 넌 누구지? 날 어떻게 알고 있지?”

이 질문이 왜 안 나오나 했다.

인한은 미리 생각해 두었던 답을 떠올렸다.

“처음 탑에 들어왔을 때 당신이 주변 사람들과 대화하는 걸 봤습니다. 그때 옆에 있었는데, 제가 아는 형님과 이름이 똑같더군요. 그래서 엉겁결에 그렇게 불렀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 임태호가 말한 적 있었다.

처음 탑에 들어온 것은 부하 둘과 함께였다고. 하지만 슬라임에게 쫓기며 흩어졌다고.

인한은 그 사실을 떠올려 둘러댔다.

“허, 참.”

임태호는 조금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그의 외견은 사람들의 기억에 자주 남는다. 인정하긴 싫지만 워낙 험악하게 생겼어야지.

하지만 인한은 이상한 말도 읊었다.

“죽었다느니, 꿈에서 깨어났다느니 했던 건 뭐지?”

“그때 제가 정신이 없어서 되는 대로 말을 해 댄 모양입니다.”

“허.”

가관이다. 그런데 따질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듣지 못해서 말은 못했지만, 언뜻 형님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하도 형님 소리에 귀가 익은 세계에서 살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하여간 이상한 분위기의 청년이었다. 임태호는 가만히 인한을 바라보다 콧바람을 훅 내뱉었다.

“이것저것 물어봐서 미안하게 됐다. 워낙 당황스러워서 말이지. 난 좀 쉬마.”

임태호는 인한을 등지고 털썩 누웠다.

인한은 임태호의 등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젠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내가…… 과거로 오기라도 한 건가.’

인한은 이번에는 오른팔을 살폈다.

평생 못 쓸 줄 알았던 팔.

피가 흐르지만 죽어 있었고, 신경은 통하지만 감각이 없었던 팔.

영원한 잠에 빠졌던 손이 움직인다.

인한은 손등을 꼬집었다.

아팠다.

이 감촉, 꿈은 아니다.

이 상황, 꿈은 아니다.

‘나는, 과거로 돌아온 걸까?’

“하아.”

인한은 숨을 길게 내쉬며 벽에 등을 기댔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일렁이는 불빛 탓에 벽돌로 이루어져 있는 길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느껴졌다.

‘탑……. 대체 내게 뭘 바라는 거냐.’

아니, 정말 탑 때문에 일어난 거긴 한 걸까?

어떤 것도 알 수 없다.

과거로의 회귀.

그것도 탑을 본격적으로 오르기 직전의 상황.

“윽.”

화륵!

불똥이 손등에 튀겼다. 화끈한 느낌에 정신이 곤두섰다. 손등에 붙은 슬라임 조각은 뜨거움을 느끼기가 무섭게 재도 남기지 않고 다 타올랐다.

인한은 발갛게 달아오른 손등을 멍하니 바라보다, 억눌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망…… 칠까.”

무릎을 끌어당겨 얼굴을 파묻었다. 다시 탑을 오르라니…… 이건 저주나 마찬가지였다.

탑에서의 삶은 떠올리기도 싫은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니까 헌터를 포기하고 일반인으로 살아가도 누가 뭐라고 못할 거다.

몸은 건강하고, 몬스터 웨이브 이후로 일자리도 많아졌으니까 적당히 하나 구해서…….

-일어나.

인한의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렸다.

‘…….’

참 엄청난 걸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그 한 마디가 인한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주었는데.

-네놈들이 이룬 모든 것들은 쓰레기였다.

100층의 보스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 단어 하나하나, 그 문장 하나하나가 뇌리에 새겨졌다.

빠드득!

주먹에 피가 고일 정도로 강하게 잡았다.

인한은 일렁이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서서히.

현실과 환상이 오버랩된다.

불길은 어느새 모닥불로 변했고, 모닥불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자리한다.

한때 동료였던 사람들.

해태 길드의 길드원들.

미소가 가득한 그들이 꿈을 이야기하고 희망을 노래한다.

한순간.

그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인한을 바라보았다.

인한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어쩌라고, 나보고.”

동료들은 여전히 인한을 바라본다.

인한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이게 네놈에겐 유희나 오락처럼 느껴지나?’

그들에게, 인한에게 탑은 현실이었다.

그 누구도 이 세계의 운명을, 그렇게도 많은 사람의 비극을 마음대로 할 자격은 없다.

그래, 알고 있다.

탑을 오르기 싫다는 마음. 그건 거짓말이다. 무섭고 힘들고 지쳐서 자신을 속인 거다.

만나고 싶다. 옛 동료들을. 살아 있는 동료들과 함께 이 장면을 또 한 번 두 눈에 담고 싶다.

-웃어야 해.

아련한 수선화 향이 코끝을 간질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참 상냥한 사람. 아마 혼자 남겨질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한 거겠지.

‘그러면 차라리 도망치라고 말해 주던가.’

참 얄미운 사람.

인한은 핀잔을 주면서도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미소라는 게 어색하게 느껴져서 볼과 코끝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결국 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또 한 번 이 빌어먹을 곳을 올라 주지.”

인한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젠 미소보다는 비웃음에 가까운 표정이 되어 버렸지만…… 어찌 됐든 웃음이었다.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르겠지만.’

이왕 오르기로 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의 비극은 사양이다.

오픈엔딩도, 배드엔딩도 싫다.

분에 넘치더라도 해피엔딩을 꿈꾸겠다.

그제야 동료들이 허상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흩어진다.

‘얄미운 놈들.’

인한은 피식 웃었다.

‘곧 다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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