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사도가 된 이유
강현의 해파칠십이검으로 펼쳐 낸 파도.
푸른 마나로 이루어진 바다가 무너진 신전과 죽은 사도들의 몸 위를 덮었고.
붉은 화염을 뒤집어쓴 검들이 그 사이를 뛰놀았다.
[공간 소환 완료. 해파칠십이검과 제왕제검을 발동합니다! 구찌와 시야를 연결합니다. 의식의 지평이 넓어집니다]
지난번 검왕과 검성의 싸움 이후, 검왕의 새로운 깨달음인 제왕제검과 검성의 검법 해파칠십이검을 같이 펼쳐 얻은 결과.
강현이 오른손으로 해파칠십이검을 펼쳤고 왼손으로 제왕제검을 조종하니.
남은 사도들이 일제히 힘을 잃고 쓰러졌다.
거기에 더해.
“해태! 안으로 들어가!”
제니퍼가 본능적으로 강현이 펼친 바다의 위력을 이해하곤 해태에게 도울 것을 명령.
“아르릉!”
해태가 강현이 만든 바다에 뒤섞였고.
“뀨우우!”
구찌 또한 그런 해태를 따라 수많은 불꽃으로 나뉘어 검들 속에 뒤섞였다.
마나로 이루어져 있던 바다에 진짜 물이 차오르며 위력을 더했고.
붉게 물든 검들이 이젠 활활 타올랐다.
처음엔 서로를 거부했으나.
[새로운 연합 스킬 태극을 발동합니다! 상극의 힘이 조화를 이룹니다!]
[스킬 합심을 발동합니다. 주변의 모든 기운을 조율합니다!]
강현의 수십 개로 나누어진 의식이 이를 조율했고.
수십의 의식을 하나처럼 움직였다.
그러자.
따로 뛰놀던 검들이 강현의 의지를 따라 한곳으로 모여드니.
마치 모여 다니는 물고기 떼 같이 세력을 형성했고.
이어 구찌의 불꽃이 서로 이어지며 붉은색 거대한 고래가 되어 바다 위로 솟아올랐다.
푸우우-!
해파칠십이검은 해태의 능력을 빌려 파도가 가득한 바다가 되어 고래가 뛰어놀 장이 되었다.
그 신비로운 풍경.
태극의 묘리.
푸른 바다와 붉은 고래가 서로를 희롱하며 떠도는 공간 중심.
“고통은 여기까지입니다.”
강현이 일으킨 파도와 고래가 사도들을 휩쓸었다.
그 압도적인 힘에 한 명씩 한 명씩 능력을 잃고 쓰러지는 와중.
캬아아악-!
킹피닉스가 마지막 발악으로 모든 불꽃을 뿜어내 보았으나.
태극 앞에선 불완전했기에 이길 수 없었다.
다시 부활하려는 순간.
해태의 물에 휩싸인 킹피닉스를 고래가 꿀떡 삼켜 버리니.
“…….”
이제 남은 건 앤서니 데이비스뿐.
모든 사도들과 자신의 신수마저 힘을 잃었다.
분노할까? 아니면 안타까워할까? 사도가 되어 버린 영웅은 어떻게 이를 받아들일까.
강현이 그의 목숨을 취하기 직전.
앤서니가 미소 지었다.
자신의 딸 제니퍼를 보고 따스히.
예전에 그렸던 것과 같은 미소.
“아빠!”
순간 제니퍼의 마음이 흔들렸고, 주인의 감정에 감응하는 해태도 흔들렸다.
[일시적으로 태극의 묘리가 흔들립니다! 빈틈이 노출됩니다!]
“이런, 제니퍼!”
강현이 순간적으로 깨진 결속을 붙잡으며 제니퍼를 불렀으나.
이미 아버지의 미소를 마주한 그녀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
그런 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는 아버지와.
끝에 맺히는 검은 기운.
이를 발견한 강현이 재빨리 앤서니의 목을 베려 할 때.
“잠깐! 우리 몫이다!”
익숙한 목소리가 울리길 잠깐.
앤서니의 손끝에서 번쩍 검은 빛살이 튀어 나갔고.
은빛 막이 이를 막아서며 제니퍼를 감쌌다.
악의를 흩어 내는 사이.
싸움에 끼어든 이들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앤서니의 가슴에 각자의 무기를 박아 넣었다.
“끄으윽.”
앤서니가 고통에 찬 신음을 내며 몸을 떨자.
“쉬이, 쉬이. 괜찮아. 이제 괜찮아졌다네. 자네가 할 일은 모두 끝났어.”
그를 둘러싼 산군, 태풍이 앤서니를 위로했다.
“자네는 자네 딸을 죽이지 못했어. 그리고 누구도 죽이지 못했지. 이루었네, 이루었어.”
“업을 짊어지느라 고생 많았지? 이제야 편안함을 주어서 미안하네, 정말 미안해.”
“우리가 좀 더 일찍 왔어야 했어.”
그들이 앤서니의 죽어 가는 눈을 보며 사죄를 건넸다.
산군과 태풍 사이.
“어떻게?”
지금껏 침묵하던 앤서니마저도 질문하게 만든 존재.
앤서니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은 검성 이석천의 기억이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답했다.
“이제 구하러 들어가야 하네. 난 진짜가 아니야.”
“그렇군…….”
“하지만 이 눈물은 진짜라네. 미안해, 정말 그리고 고마워, 진심으로.”
검성의 미안하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에 앤서니가 서글프게 미소 지었다.
마지막 순간 친우들의 손에 죽어 다행이다.
하지만 아직 궁금한 게 더 남았다.
“딸은, 우리 이쁜 딸은 잘 있지?”
그가 아버지로서 유언 대신 자식의 안부를 물었다.
방금까지 싸웠던 적이 제니퍼임을 모르는 눈치.
“꿈을 꿨어. 내가 선물한 해태를 데리고 나타난 제니퍼를 보았네. 잘 자랐더군, 해태와 함께. 손을 뻗어도 닿을 수가 없어서 슬펐다네…….”
“그랬구먼, 그랬어. 딸은 잘 있네. 아주 잘 자랐어.”
“그래, 그 꿈이 거짓이 아니길 바랐는데 다행이군.”
어둠에 먹혀 이성을 잃은 와중에도 얼핏 제니퍼의 모습을 보았다.
아버지의 부성애인지 아니면 어둠의 고약한 장난질인지 모르겠으나.
“다행이야, 차라리 다행이야.”
그가 마지막 추한 모습을 딸에게 보이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길 때.
“아빠!”
들려서는 안 되는 딸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아니 않았다.
아버지의 생이 끝나기 전에 다급히 달려간 제니퍼가 앤서니의 손을 잡고는.
“제니퍼? 어째서 여기에……?”
“아빠, 나 여기 있어. 죽지 마. 제발 죽지 마. 왜 아빠가 죽어. 왜 하필 아빠야. 난 아빠를 구하러 왔는데 왜 아빠가 죽어야 해. 여기 이거, 이거 마셔 봐!”
급히 구찌활명수를 꺼내 얼굴에 갖다 대며 눈물로 애원했으나.
앤서니는 고개를 저었다.
“살면 또다시 어둠에 먹힐 거란다. 의미가 없어.”
“말도 안 돼! 해 봐야지 아는 거야! 제발 아빠! 놈을 죽이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러면 벗어날 수 있어? 그런 거야?”
“…….”
“대답해 봐! 이제야 만났는데 왜 이렇게……!”
자신을 떠나지 말라며.
오랜 기다림 끝에 이제야 만났는데 왜 떠나는 거냐며.
제니퍼가 깊고 슬프게 울었다.
마치 8년 전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처럼.
그런 딸의 눈물을 느낀 앤서니가 손으로 그녀의 볼을 쓰다듬으며 처연히 웃었다.
“여전히 눈물이 많구나. 그래, 문에 부딪혀서 이가 빠졌을 때도 그리 울었지. 얼마나 귀여웠는지.”
“아빠!”
“울지 말렴. 헌터란 그런 거란다. 남들을 위해 희생할 줄 알아야 하는…….”
“아빠가 할 필요는 없었잖아!”
“…….”
제니퍼의 절규에 앤서니가 잠시 떨리는 숨을 가다듬고는.
“우린 때로 사명을 감당해야 한단다. 수만을 위해 한 명이. 그러기 위해 받은 능력이야.”
“아빠 제발 죽지 마요, 제발…….”
“해태, 제니퍼를 데려가 다오. 안전한 곳으로.”
“끼이잉.”
“어서.”
안 돼! 멈춰 해태! 당장!
제니퍼가 화를 내며 거부했으나 해태가 그녀를 데리고 다른 안전한 층으로 이동했고.
“나도, 나도 살고 싶었다. 딸아!”
딸이 사라지고 나서야 앤서니가 지금껏 참았던 감정을 분출했다.
산군과 태풍의 팔뚝을 강하게 부여잡은 그가.
“나도 살아서 너를 보고 싶었다! 같이 살고 싶었다! 죽기 싫었다! 끝까지 버티고 버텨! 버텨서!”
같이 돌아가고 싶었단 말이다!
고함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친우의 발작에 산군과 태풍은 그저 눈물을 흘리며 견딜 뿐.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지난 후.
“하지만 결국 미래를 위해 내 생명이 필요하더구나. 미안하다, 미안하다 제니퍼. 그리고 모두를 부탁한다, 미래를…….”
마지막 말을 끝맺지 못하고 숨이 다한 그의 고개가 툭 꺾였고.
그의 공허한 눈이 강현을 향했다.
의도인 건지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반드시 구하겠습니다.”
강현이 혹시라도 들릴까 그의 부탁에 답했고.
“미안하다, 고맙다.”
“잘 견뎌 주었구나.”
그의 친우들이 앤서니의 시체를 붙잡은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때.
“자네가 남긴 선물 잊지 않겠네. 고맙네.”
검성이 아직 눈을 부릅뜬 앤서니의 눈꺼풀을 내려 주며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선물?
“이런 빌어먹을.”
곧 떠오른 알림을 본 강현이 의미를 깨닫고는 이를 악물었다.
[구찌가 마지막 다섯 번째 용, 화룡 블랙 피닉스를 흡수했습니다!]
[현재 사냥한 용: 뇌룡, 독룡, 백광룡, 천안룡, 블랙 피닉스]
[피닉스 퀘스트 오룡 사냥을 완료했습니다!]
마지막 용, 블랙 피닉스.
사도가 되어 가면서까지 남긴 선물.
“설마 이걸 위해 사도가?”
강현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묻자.
“그 외에도 많은 이유가 있다더구나. 다른 생존자들을 살리기 위해. 미래를 짊어진 헌터들에게 능력을 주기 위해.”
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패배했기에 어둠의 사도가 된 것이 아니다.
자신이 희생해서라도 다른 이들을 살리고 희망을 이어 가기 위해.
때로는 생존자들을 보호하고 층을 점령할 씨앗을 심기 위해.
더 나아가.
“블랙 피닉스도 목적 중 하나였겠지.”
마지막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이전 회색 숲에서 만났던 경찰관 부부가 그랬듯.
강현과 맞섰던 사도들도 그랬다.
남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들이 죽었다.
강현의 부모님과 다른 생존자들은 이를 알기에 검성과 산군, 태풍에게 사실을 전했다.
“숭고한 희생에 묵념을.”
그들을 원망하지 말아 달라고.
그들에게 작은 위로라도 전해 달라고.
이석천의 말에 산군과 태풍이 고개를 숙이며 그들을 향해 묵념했고.
“…….”
강현 또한 깊이 고개를 숙였다.
세상을 지키기 위해 어둠에게 먹혀 가면서까지 스스로를 희생했던.
끝까지 영웅이었던 자들을 향한 묵념이 끝난 후.
“어떻게 할 거냐. 지금 바로 갈 거냐?”
산군이 살기를 번들거리며 갈라진 틈을 노려보았다.
태풍 또한 몸에서 바람을 일으키며 전투를 준비.
그러나.
“아직 못 들어갑니다.”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어둠은 틈을 보여 주며 들어오라 유혹했으나.
[연구 책임자의 눈을 발동합니다! 구찌 스킬 천통안과 결합하여 사물의 진실을 꿰뚫어 봅니다!]
강현의 눈에 비친 틈은 악의와 살기만이 가득한 곳.
저곳으로 들어가는 순간 놈의 함정에 놀아날 거다.
그래서 기다렸다.
“선물을 주셨다면 이유가 있을 겁니다.”
앤서니 데이비스가 킹피닉스를 블랙 피닉스로 만들어 가며 사도가 된 이유.
오룡사냥을 완성시킨 이유.
미래를 강현에게 맡긴 이유.
슬프고 분했으나 지금은 참아야 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겁니다.”
강현의 말에 모두가 자리에서 기다렸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특히 검성, 산군, 태풍은 침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의 친우들이었고 게이트를 파훼하기 위해 직접 나선 용맹한 전사들.
그런 그들이 어둠에게 먹혀 사도가 되었다는 사실이, 모두 죽었다는 사실이 지금도 믿기 어려웠다.
마지막 싸움을 앞두고 이런 분위기는 안 된다.
강현이 무슨 말이라도 하려 했으나.
“…….”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껏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언변 스킬도 지금만큼은 답을 찾지 못했다.
그때.
작은 허밍이 그들의 귓가에 들려왔고.
[검탑 응원단장 이혜원의 위로의 노래가 들립니다]
후회와 미안함으로 가득한 그들의 마음을 감싸 안았다.
[상처받은 이들의 정신과 감정을 치유합니다. 억울한 영혼들을 정화합니다]
이혜원의 노랫소리는 그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것뿐만 아니라.
죽어 버린 사도들의, 이전에는 위대한 헌터였던 이들의 영혼마저도 치유했다.
허밍이 이어지길 얼마나 지났을까.
[피닉스 구찌의 능력 흡수가 모두 끝났습니다!]
구찌가 블랙 피닉스, 마지막 화룡의 능력을 모두 흡수했고.
[피닉스가 새로운 종으로 변화합니다! 신화 속 대붕(大鵬)으로 진화합니다!]
신수를 넘어선 신수가 되었다.
구찌가 영롱한 울음을 뿜어냄과 동시에 펼친 날개가 끝을 모르고 뻗어 나갔다.
신전을 넘어, 틈을 넘어, 하늘을 덮어 버릴 정도로.
그 거대한 날개에.
태풍도, 산군도 모두 놀라 말을 잊었다.
“이거였군요, 오룡사냥의 결과. 위대한 진화.”
끝없이 뻗어 나가는 날개를 보며 강현이 감격했고.
“그래, 희생이 헛된 게 아니었구나.”
검성 이석천의 기억이 강현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광활한 날개를 모두 펼친 구찌가 이내 강현을 바라보았다.
영롱한 눈동자에 펼쳐진 우주.
빙긋 웃은 대붕이 날개를 펄럭이는 순간.
[대붕(大鵬) 구찌가 붕정만리(鵬程萬里)를 발동합니다! 상대의 악의와 함정이 가득한 공간을 찢습니다!]
어둠이 준비한 모든 함정이 산산이 깨져 나갔고.
마침내.
“이곳이.”
어둠이 존재하는.
[99층 어둠의 안식처에 도착하였습니다]
마지막 층에 도착하였다.
그들이 주변을 둘러볼 새도 없이.
“왔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
모두의 시선이 향한 그곳엔.
“꽤 늦었군, 한참 기다리고 있었다네.”
이석천이 있었다.
“친구의 시체를 넘었더니 또 친구가 서 있다니 참으로 잔혹한 운명이지?”
이석천이 어두운 기운을 풍기며 씨익 웃는 순간.
그의 목이 떨어졌다.
산군, 태풍, 김두식, 이석천의 기억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검을 휘두른 건.
“기만하지 말아라, 어둠.”
강현.
만련신검을 든 그의 눈이 뒤에 선 대붕과 같이 찬란하게 빛났다.
그의 눈에는 보였다.
장막 뒤, 진짜 이석천의 모습이.
강현이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고.
찌이익, 어둠이 가려 놓은 장막을 갈라내자.
“석천아!”
“이석천!”
끔찍한 몰골의 이석천이 보였다.
눈을 잃고 등에는 수백 개의 말뚝이 빽빽하게 꽂혀 있다.
손목과 발목도 마찬가지.
그가 피와 눈물이 섞여 흐르는 고개를 들어 그를 부르는 이들을 마주했고.
“김… 두식? 두식아? 산군?”
갈라진 목소리로 그들을 부르자.
“이 개새끼 죽여 버린다!”
자리에 있던 그의 친우들이 분노하며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