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지구의 사도들
[88층의 소유권을 상실했습니다! 소유권을 다시 찾았습니다!]
강현이 98층으로 걸어가는 와중에도 메시지는 끝없이 치열한 싸움의 결과를 알렸다.
놈들 또한 호락호락하게 져 줄 수 없다는 듯 악착같이 생존자들과 별동대를 압박했고.
팽팽한 싸움이 이어졌다.
하지만 강현의 소환수들이 참전하고 나자 균형의 추가 기울어지기 시작.
곳곳에서 들려오는 승전보.
-여기는 제니퍼! 11층 점령 완료! 지금 97층으로 출발할까요?
“우선 근처 층까지 정리하고 모이기로 하죠. 다들 각 층 정리가 끝나면 주변 층 확인하고 생존자들의 안전까지 확보한 후에 올라오시면 됩니다.”
-알겠어요!
-금방 끝내고 올라가마!
-잠깐 누가 여기 좀 지원해 줘! 45층! 45층 지원 바람!
당장은 이겼어도 또 어떻게 상황이 변할지 모른다.
우선 해당 층은 물론 주변까지 확보해야 한다.
생존자들의 안전 확보 또한 중요한 문제.
별동대도 강현과 같은 생각이었기에 명령을 이행.
강현은.
“여기는 강현, 98층 통로 확보, 우선 진입하겠다.”
98층 진입 소식을 알렸다.
잠시간의 침묵.
-우리도 곧 따라가겠다
-곧 갈 테니까 그때까지 버티도록
신전을 금방 정리하고 강현의 뒤를 따르겠노라 답했다.
강현을 믿으니까.
강현이 생존자들과 별동대의 믿음을 짊어진 채 안으로 향했고.
“…뭘 이런 환영식을 다.”
자신을 마중 나온 듯 주르륵 늘어서 있는 자들을 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는 자들이 수십 명.
연기처럼 일렁이는 후드 안, 살기를 담은 붉은 눈동자 수십 쌍이 강현을 향했다.
한 명, 한 명 기운이 범상치 않다.
‘주교? 아니 대주교 이상.’
강현이 만났던 주교나 대주교보다 훨씬 강한 기세와 살기.
그리고 그들 뒤에 있는.
“신전인가?”
검은 기둥이 가득한 신전.
그리스 신화에서나 볼 법한 모양새.
안에는 검은 불꽃이 타올랐고.
깊은 곳에 마련된 제단.
새까만, 검정보다 더욱 검은 공간의 틈이 보였다.
강현이 이를 바라본 순간.
[원흉의 조각입니다. 신전의 주인이 틈을 열고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강렬한 악의와 살의가 당신의 정신을 침범하려 합니다]
깊고 깊은 심연에 의식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주 깊고 깊어 다시는 나오지 못할 것 같은 어둠.
본능적으로 몰려오는 공포와 피부를 스멀스멀 타고 오르는 혐오감.
심연이 몸을 타고 강현의 정신으로 들어오려 할 때.
[정신 관련 특성을 발동하여 악의와 적의, 심연의 유혹을 뿌리칩니다]
지금껏 단단해진 강현의 정신이 이를 거부.
멍해졌던 강현의 눈빛이 원래 빛을 되찾았다.
“되도 않는 짓을.”
끝까지 비열한 수를 사용하는 어둠.
강현이 잠시 놈을 노려보고는.
“그래서 계속 앞에서 폼만 잡고 있을 거냐?”
이번엔 아직도 신전 앞을 막아선 사도들을 향해 기세를 피워 올렸다.
어둠으로 향하려면 놈들을 쓰러뜨려야겠지.
“비키던가 죽던가 선택해,”
강현이 만련신검을 들어 올리며 선택을 강요했고.
놈들이 자연스레 한 발 앞으로 나서며 강현을 향해 무기를 겨눴다.
대답으로 충분했다.
강현이 만련신검에 마나를 불어넣으며 흑갑을 둘렀다.
검을 비켜 세우며 무릎을 굽히자.
우우우웅-.
[쉐도우 체인지 하위 스킬 흑갑을 발동합니다! 구찌 스킬 초고속 이동과 백염을 발동 순간 가속을 준비합니다]
그의 등과 발뒤꿈치에 백염이 하얗게 타오르더니.
간결한 폭음과 함께 하얀 불꽃을 피워 내며 앞으로 돌진.
적들이 그의 움직임을 포착해 내기도 전.
맨 끝에 있는 사도에 도달.
‘가장 약한 놈부터 벤다.’
놈이 무기를 휘두르기도 전에 강현의 만련신검이 번뜩였다.
튀어 오르는 어둠과 피.
그제야 강현을 포위하려 움직이는 사도들.
그러나 멍청하게 서서 잡혀 줄 생각 따위 없다.
‘빠르게 더 빠르게!’
강현의 의식이 강렬히 더욱 빨리 움직이기를 소원했고.
[이전 경험한 블러드 체인지 궁극기 블러드 보일을 변형, 쉐도우 체인지에 적용합니다. 새로운 스킬 쉐도우 보일을 획득하셨습니다]
[백염으로 달아오른 그림자가 끓어오릅니다!]
흑갑 위로 점멸하던 백염이 점점 더 빨라지며 선을 이루자.
강현의 몸을 단단히 감싼 그림자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안에서부터 시작된 열기가 이내.
갑옷의 이음새, 헬멧의 숨구멍으로 뿜어져 나오니.
짙은 증기가 헐떡이듯 흩어지길 몇 번.
강현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끓어오른 그림자와 백염이 길게 늘어졌다.
‘더 빨리!’
강현이 제어를 풀어 버리고는 마구 날뛰었고.
적들의 형체를 베어 냈다.
어둠의 망토를 찢어 버리고 사도들의 육신을 벤다.
놈들이 강현을 잡기 위해 능력을 뿜어냈으나 소용없다.
잡을 수 없으니 공격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강현은 만족하지 않았다.
‘얕아.’
속도는 빨랐으나 검의 깊이가 얕다.
놈들을 베어도 부상에 그칠 뿐 죽이지 못했다.
어둠 깊은 곳 숨어 있으니 그곳까지 검이 닿지 않았다.
그렇다면.
‘닿을 때까지.’
놈들의 육신을 완전히 가를 정도로 깊이 베면 될 뿐.
강현이 이번엔 그림자를 검에 둘렀다.
만련신검 위로 백염과 그림자와 마나가 뒤섞여 흐르니.
더욱 거대해진 검.
반동이 그만큼 거세지긴 했으나.
푸욱.
놈들이 두른 어둠의 은혜를 깊이 가르고 들어가 적들의 육신까지 닿으니.
이젠 목숨을 취할 수 있다.
“이젠 못 도망친다.”
강현이 당당히 말을 뱉음과 동시에.
놈들이 긴장했다.
다시금 사도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달려들 때.
화아악!
신전 전체에 붉은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불이 피어올랐다.
더 나아가 사도들과 강현이 있는 곳을 감쌌다.
강현의 움직임을 제한하기 위한 수.
상대의 의도대로 막 속도를 내려던 강현의 발이 멈췄다.
그러나 사도의 불꽃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그가 멈춘 이유는.
“피닉… 스?”
지금 자신의 주변을 감싼 불꽃을 보곤 익숙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
비록 정화의 능력이 담긴 신성한 불꽃은 아니었으나.
검붉은 불꽃에선 익숙한 온기가 느껴졌다.
“꾸우?”
이는 강현의 싸움을 보조하던 구찌도 마찬가지.
자신의 불꽃과 빼닮은 불을 본 구찌가 급히 날아와 강현의 옆에 섰다.
그리고는 마주 불꽃을 내뿜었고.
[구찌의 사멸의 불꽃이 당신을 잡아먹으려는 화기를 밀어냅니다!]
[비슷한 권능이 담긴 불꽃입니다. 서로를 잡아먹습니다!]
구찌의 불꽃과 적의 불꽃이 서로를 살라 먹었다.
이로써 더욱 확실해졌다.
지금 자신을 둘러싼 불은 피닉스가 뿜어낸 것이다.
설마 신전에 존재하는 층 중에 피닉스가 있던 것일까.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자그마치 96층이나 되는 신전, 96개나 되는 세계 속에 피닉스 한 마리 없겠는가.
그러나 강현의 본능과 예감은 생각하기 싫은 가설을 자꾸 떠올리게 했다.
아닐거라 생각했지만.
“이런 제기랄.”
점차 불안감이 확신으로 바뀌었고.
이를 확인이라도 해 주려는 듯 사도들이 자신의 얼굴을 덮은 어둠을 거뒀다.
“왜, 어째서 지금 당신들이.”
강현이 그들을 보며 침음을 흘렸다.
아니길 바랐는데, 이런 식으로 만나지 않기를 바랐는데.
“왜 당신들이 적의 편에 서 있단 말입니까!”
강현이 그들의 얼굴을 보며 외쳤다.
못 알아볼 리가 없다.
부모님이 게이트 안으로 끌려 들어간 후.
혹시라도 누구 하나는 살아 나와 소식을 전하지 않을까.
하염없이 뉴스를 보며 익혔던 얼굴들.
“검성과 함께 게이트를 점령하겠다 들어간 당신들이 왜, 왜 이런 모습으로. 하필 지금, 이 순간에.”
강현이 검을 내렸다.
세상을 구하겠다며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던 영웅들.
그들이 어둠을 두른 채 공허한 눈으로 강현을 바라보았다.
눈에 가득한 살기와 적의, 절망.
이어서 구찌와 치열하게 영역을 다투는 검붉은 불꽃 속,
익숙한 피닉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킹피닉스.
지구의 사도들 사이.
마지막, 그들을 이끄는 자가 어둠을 거두었고 얼굴을 드러냈다.
강현이 무언가를 말하기도 전.
“아… 빠……?”
강현의 뒤에서 제니퍼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현이 마주하기 싫은 현실에 눈을 꾹 감았다.
앤서니 데이비스.
킹피닉스의 조련사이자 검성의 친우.
그리고 지금 막 98층에 도착한 제니퍼 데이비스의 아버지.
그가 사도가 되어 강현과 제니퍼를 맞이했다.
* * *
어둠의 신전 밖.
블러디 독이 마지막 구찌활명수를 목으로 넘겼다.
찢어지고 뒤틀렸던 몸이 원래 모습을 회복했고 얼마 가지 않아 컨디션을 되찾은 그가.
텅 빈 물약 병을 던졌다.
그의 발아래.
“…….”
갈가리 찢긴 갑옷이 깔려있다.
물약병에 맞은 놈이 움찔 몸을 떨었고.
“이제 좀 정신이 드냐? 새끼야?”
블러디 독이 입을 쭉 찢으며 미소 지었다.
거검의 기사.
분명 압도적인 적이었으나 결국.
“내가 이겼다. 이 검쟁이 새끼.”
놈을 쓰러뜨렸다.
비록 구찌활명수 다섯 병을 마시고 강현에게 배운 가르침을 더해 이겼으나.
“마지막에 서 있는 놈이 이기는 거야.”
어쨌든 이겼다는 게 중요했다.
블러디 독이 어깨를 들썩이며 놈을 비웃다가.
“그래서 마지막으로 할 말은?”
놈을 보며 유언을 물었다.
그래도 자신을 이렇게 고생시켰으니 마지막 말이라도 들어 보자는 심보.
물론 비웃음은 덤이다.
놈이 이미 갈가리 찢어져 형체도 알아보기 힘든 거검의 기사를 보며 심술궂은 자비를 베풀 때.
“…너희는.”
지금껏 침묵하던 거검의 기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우리처럼 되지 마라.”
그게 끝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거검의 기사가 숨을 거두었고.
“이런 미친 그게 끝이야? 이봐! 이 새끼야 다시 말해! 그게 아니라 다른 말도 많잖아!”
블러디 독이 자신이 기대한 것과는 다른 반응에 고함쳤으나.
이미 죽은 놈은 답이 없었다.
“시발… 적한테 동정받는 것만큼 찝찝한 게 없는데.”
그가 죽어 버린 거검의 기사의 갑옷을 단정히 정리해 주며 전황을 둘러보았다.
곳곳에서 구찌활명수를 쏟아부은 S급 헌터들이 사도들에게 힘겹게 승리를 거두는 모습.
방어선은 아직 굳건했고 모두가 훌륭히 제 역할을 해내고 있다.
전투만 알고 전쟁은 모르는 블러디 독이 보기에도 유리한 상황.
그런데 왜 이렇게.
“그딴 눈으로 보지 말란 말이다. 패배자 주제에.”
거검의 기사가 했던 마지막 말이, 그의 눈동자에 비친 공허한 하늘이 자신의 불안감을 콕콕 찌르는 걸까.
그가 마지못해 감지 못한 놈의 눈꺼풀을 덮어 주고 나서야 자리를 떠났다.
놈이 불쌍해서가 아니다.
“그냥, 싸웠으니까 예의를 차린 것뿐이야.”
괜히 홀로 변명을 대며 다시금 전장터로 뛰어들려 할 때.
덜그럭, 덜그럭.
바로 뒤에서 갑옷 소리가 들렸다.
그가 급히 뒤돌자.
죽었을 거검의 기사가 움직였다.
“뭐야, 죽은 거 아니었어?”
블러디 독이 의문을 표할 때.
기사의 갑옷들이 시체는 그대로 두고 어디론가 날아갔고.
한창 전투를 벌이던 데스나이트에게 달라붙었다.
이윽고.
“후우-”
새로운 거검의 기사가 눈을 떴다.
아니, 이전과 같은 놈이었으나 더욱 강한 몸을 부여 받았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어어? 뭐야!”
“잠깐 분명 죽였다고!”
전선 곳곳에서 벌어졌다.
죽였음에도 죽지 않고 새롭게 태어났다.
심지어.
“더 강해졌잖아! 다들 우선 물러나!”
더 강해져서.
이전에는 인간의 몸이었다면 지금은 S급 몬스터의 몸을 타고 태어나니.
가뜩이나 간신히 이겼던 적이 더욱 강해졌다.
블러디 독이 거검의 기사를 보며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괴물 새끼가 더 괴물이 되면 어쩌자는 거야.”
거검의 기사가 깃든 몬스터는 데스나이트 변종.
S급 블러디나이트.
새빨간 피를 뒤집어쓴 죽음의 기사가 다시금 검을 들어 올렸고.
“씨발 이건 사기잖아.”
검끝을 마주한 블러디 독이 죽음을 직감했다.
S급 헌터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고통스러운 한숨들.
더는 견디기 어렵다.
구찌활명수는 다 떨어졌고 적은 더 강해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죽는 건 두렵지 않다.
그러나 자신이 죽고 나면 방어선은 깨질 거고 병사들은 물론 놈들이 모두를 죽인 뒤 밖으로 뛰쳐나가겠지.
밖에 있는 헌터들이 막을 수 있을까?
이 재앙과도 같은 존재들을?
“모두 버텨! 죽어서라도 놈들을 막아!”
없다.
이러한 사실을 S급 헌터들과 현장 지휘관들이 모를 리가 없었고.
다시금 닥쳐 온 위기에 그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S급 헌터들만으로 막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지만.
“드디어 때가 왔군.”
강준진은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웃었다.
곧 그가 무전기를 들어.
“전체 방진 강화! 무기 연결로 마나를 증폭할 것! 다시 알린다 전체 방진 강화! 무기 연결로 마나를 증폭할 것!”
병사들을 비롯, 김두식에게 무기를 받은 헌터들에게 방진 강화를 요구.
이어서.
“싸움 중인 S급들에게 알린다. 당장 방진 안으로 복귀할 것. 다시 알린다 S급들은 당장 방진 안으로 복귀할 것!”
그가 방진 바깥에서 사도들을 상대하고 있던 S급들의 복귀를 명령.
몇몇 S급이 당장 물러나면 병사들이 다친다고 항변하려 할 때.
“폭격에 휘말리기 싫으면 당장 복귀할 것 이상.”
강준진의 마지막 무전을 들은 그들이 일제히 방진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때마침.
-이거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간이 왔구먼!
미 항공모함 함대사령관의 무전이 울림과 동시에.
파지지직.
바다 한구석, 겹겹이 펼쳐 놓았던 홀로그램 위장막을 거두자.
“전 함포! 포격 준비!”
새파란 마나를 머금은 함선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함대사령관이 의아해하는 적들을 살피며 푸근하게 웃었다.
지금껏 전투에 참여하고 싶어 얼마나 근질근질했는지.
강현이 지난 훈련 동안 마나를 잔뜩 집어넣은 함선들의 위력을 시험해 보고 싶어 미쳐 버리는 줄 알았다.
“자 그럼 미스터 초이의 축복을 받은 함포의 위력을 맛봐라. 이 망할 새끼들아.”
포격 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