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안부인사
어둠의 신전 97층엔 각층을 보여 주는 화면들 말고도.
“그러니까 여기 올라서면 이동하는 거 맞지?”
“막 엉뚱한데 떨어지고 그런 거 아니지?”
“아, 맞다니까! 사람 말 좀 믿어라 좀!”
“아니, 우리가 두식이 네 말을 못 믿어서 그렇겠냐… 이 공간이 못 미더워서 그렇지.”
“그래, 너야 믿지 그런데 여길 못 믿어서 그렇지.”
각 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통로가 있었다,
주르륵 늘어선 96개의 원통.
어두침침한 통로 안으로 뛰어들면 된다는 소리에 모두가 망설일 때.
“맞습니다. 그곳으로 들어가면 각 층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강현이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강현의 확언이 있고 나서야 다들 안도하는 눈치.
“새끼들아! 진짜 너무했네! 왜 내 말은 안 믿고 강현이 말만 믿는 건데! 너희랑 같이한 세월이 몇 년인데!”
김두식이 기분 나쁘다는 듯 버럭 소리치자.
“아니, 예전에 게이트에서 독버섯 보고 버섯이라 그래서 네 말 믿고 먹었다가 위장 재구성했잖아.”
“그, 그건 나도 착각해서.”
“거기다 이쪽이 맞다고 박박 우겨서 거기 들어갔더니 보니까 함정투성이였지 아마?”
“윽.”
“그것만이냐. 예전에 자기가 좋은 아이템 만들었다 해서 쥐어 봤더니 저주템이었잖아 그거.”
“그땐 아직 실력이 없을 때였으니까! 그랬으니까-!”
“그래, 기억난다. 나중에 그거 해소하느라 꽤 고생했지 아마?”
김두식과 오랫동안 같이 활동해 온 산군, 태풍, 검성이 과거 이야기를 꺼냈고.
김두식의 얼굴이 벌게지기 시작할 즈음.
“큼, 크흠. 다들 준비되셨습니까?”
강현이 이대로는 김두식이 폭발할 것을 예상하고는 그들의 시선을 끌었다.
현재 별동대가 향할 곳은 치열하게 전투를 치르고 있는 층.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런데 강현아 정말 괜찮겠냐?”
“그래, 뜻은 이해한다만 몇 명이라도 같이 있는 게 좋지 않겠어?”
오히려 강현을 걱정했다.
97층을 제압한 후 산군과 태풍의 의견이 갈렸다.
산군은 우선 어둠을 죽이고 생존자들을 구하자는 쪽.
태풍은 먼저 생존자들을 구하고 그들과 함께 어둠을 죽이자는 쪽.
속도와 안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
그러나 강현을 둘 다 선택했다.
“전 둘 다 하겠습니다.”
강현이 처음 말을 꺼낸 뒤.
다들 침묵했다.
놀랐다기보다는 강현의 설명을 기다렸다.
아무 생각도 뜻도 없이 그냥 이런 말을 할 리가 없으니까.
강현이 그들의 절대적인 신뢰에 오히려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어느 쪽이든 리스크가 있습니다. 사실 안전한 게 가장 좋긴 하지만 그 안전도 우리의 예상일 뿐 놈이 어떤 함정을 준비했는지 모릅니다.”
“어느 쪽이든 함정이 있을 거란 거냐?”
“네, 함정이 있을 것이고 놈은 하나라도 걸리는 순간 우리를 약화하려 하겠죠.”
“그렇게 치면 둘 다 한다는 말은 모든 함정을 감내해야 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
선설민의 걱정스러운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위험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두 함정 모두를 피할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리곤 주변을 둘러싼 별동대를 하나하나 바라보며 의도를 설명했다.
“생존자들 또한 우리를 위해, 본인들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쉽게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죠.”
“그래, 생존자들이 지금까지 뚫어 놓은 덕분이라며.”
“그렇다면 지금의 전투 또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하는 이유가.”
“우리의 구조만을 기다리지 않은 이유?”
“네.”
“으음, 주도권 싸움인가? 더 많은 층을 점령해야 유리할 수도 있지.”
한 헌터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여기 오면서 보았던 메시지. 생존자들이 닦아 놓은 길을 타고 97층까지 올라올 수 있다 했습니다.”
“그럼 지금도 우릴 돕고 있다?”
“네, 어둠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싸우고 있단 뜻이겠죠. 실제로 생존자들이 지금 상대하는 몬스터들까지 밖으로 뛰쳐나갔다면.”
“버티기 힘들었겠지.”
“네, 그래서 둘 다 선택한 겁니다. 어느 하나에만 집중하면 분명 어둠은 그 빈틈을 파고들 겁니다. 하지만 양쪽에서 모두 승리한다면.”
“놈은 아무것도 못 하겠군.
”정답입니다. 별동대는 각자 가장 치열한 전장으로 향해 승리를 일궈 내 주십시오.”
여러분이라면, 제가 본 여러분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들이 강현을 믿었던 것처럼 강현 또한 그들을 믿었다.
여기까지 목숨을 걸고 와 준 이들.
이들을 믿지 않는다면 누굴 믿겠는가.
“그렇게 어둠의 힘을 약화, 저는 바로 어둠을 향해 나아가겠습니다.”
“위험도 하겠지만 확실히 나은 방법이야.”
그들이 강현의 말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루어 내기만 한다면 강현의 작전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다.
다만.
“실패했을 때는 모든 걸 잃겠지만.”
리스크가 크다는 게 문제.
“그거야 모두 마찬가지지 뭐.”
“그래 어차피 여기 들어온 이상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니까.”
“안전을 바라고 들어온 사람 없잖아? 여기?”
하나 어차피 어둠에게 패하는 순간 모든 게 끝장나는 건 마찬가지.
“이번에는 승부를 확실히 봐야지.”
지난번 같은 비극을 막으려면 물러나선 안 된다.
다들 알고 있다.
어설프고 어중간한 작전은 오히려 방해만 될 뿐.
생명을 다해 부딪혀야 한다.
그들이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곤.
이런 위험한 작전을 받아들인 가장 큰 이유.
강현을 바라보았다.
“강현이가 있으니까.”
“그래, 최강현 병장이라면 반드시 해낼 거라 믿는다.”
“강현아, 중대장은 믿는다. 실망할 일 없겠지?”
생존자들, 밖에서 싸우는 이들, 별동대.
모두가 각자의 짐을 지고 싸우고 있다.
그중 강현이 가장 커다란 짐을 맡았다.
무거울 법도 했으나 강현은 당연히.
“제가 모두 박살 내겠습니다.”
자신 있었다.
그의 장담에 다들 통로 앞에 섰고.
“안정화가 끝나는 대로 바로 97층으로 와 주세요. 제가 98층 뚫어 놓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대장!”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모두 이기고 보자고!”
“만일 너무 위기다 싶으면 다른 층 지원도 요청하도록 하고.”
“잊지 마! 우리의 진짜 적은 어둠이다!”
별동대가 각자 전투가 벌어지는 층으로 이동했다.
마지막.
“강현아, 직접 가지 않아도 괜찮겠냐?”
강현의 부모님이 싸우고 있는 67층으로 향하는 통로 앞.
이석천의 기억이 강현을 보며 물었고,
“가서 얼마나 잘 성장했는지 또 얼마나 많이 활약했는지 말씀해 주세요.”
“그래, 알았다. 내 과장 없이 확실하게 네가 얼마나 잘 컸는지 이야기해 드리마. 내 말빨 알지? 두식이네 애들도 내 말빨에 단번에 넘어갔잖냐.”
“웃기는 소리. 그게 강현이가 그만큼 대단하니까 그런 거지 그게 왜 네 공이냐? 그리고 두식이네는 뭐야? 조직 이름 같잖아.”
“응? 난 치킨집 이름 같은데?”
“그건… 나쁘지 않네.”
그렇게 이석천과 김두식이 서로 농을 하며 강현의 부모님이 싸우고 있는 층으로 이동했고.
텅 비어 버린 97층엔 강현 홀로 남았다.
물론.
“이제 슬슬 움직이지?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데?”
강현 혼자는 아니었다.
아까 부모님의 얼굴을 보고 화면에 손을 가져다 댄 순간.
[97층의 주인 신전 관찰자에 접속합니다!]
[수집할 수 없습니다. 아직 고물 상태가 아닙니다]
[97층의 권환을 획득하지 못했습니다. 아직 층을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떠오른 알림.
아까 분명 강현이 화면을 툭 건드린 순간 안에서 무언가 데룩 구르는 느낌이 들었다.
수하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도 가만히 있던 97층의 주인.
강현이 각 층의 화면 속 도착한 별동대를 바라보길 잠시.
적을 향해 살기와 마나를 터뜨리자.
-누가 날 깨우는 거냐.
화면이 껌뻑이더니 샛노란 눈알들로 뒤바뀌었다.
놈이 강현을 살피길 잠시 눈알들이 바르르 떨렸다.
-최… 강현? 네놈이 어떻게 여기에? 내 수하들은? 이 무능력한 것들은 도망친 건가?
화가 난 놈이 몸을 일으키자 이전 통로였던 발들이 우수수 솟아나 공간을 꽉 채웠다.
97층이 터질 듯한 크기.
놈이 발을 꿈틀거리며 생각하길 잠깐.
-크흐흐 결국 네놈 혼자냐? 하긴 누가 죽을 자리를 찾아오겠나. 어차피 죽을 목숨 혼자 죽는 것이 맞겠지.
강현을 보며 홀로 떠들어댔다.
-지구, 네놈들이 부르는 이름이라지? 똑같다. 같은 운명을 맞이할 거야. 이 층들처럼 말이야.
놈이 눈을 닫자 신전을 구성하는 아흔일곱 개의 층이 다시 비쳤다.
-보이는가? 네놈들도 이 층의 하나가 되어 영원히 어둠의 밑에서 놀아나리라. 나처럼! 그리고 다른 사도들처럼!
97층의 주인이 눈을 감고 한껏 강현을 비웃을 때.
뻐억!
-끄아아악!
강현의 주먹이 놈의 눈깔 중 하나에 깊숙이 박혔다.
콰지직, 그대로 마나를 뿜어내며 주먹을 돌리니 놈의 눈알이 부서졌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상대를 보며 강현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뭔 개소리야 문어 변종새끼가.”
-뭐, 뭐어?
“뭔 개소리냐고. 누구 마음대로 지구가 너희 신전에 포함돼? 그리고 나 혼자라고? 이 새끼 눈 감고 있냐?”
-하지만 분명 여긴 네놈 혼자……?
강현의 비웃음에 놈이 의아한 목소리를 낼 때.
“아, 진짜로 눈 감고 있구나? 그럼 내가 보여 줄게.”
강현이 바로 옆에 있는 눈을 통째로 뜯어서는 놈의 다른 눈앞에 가져다 댔다.
“똑바로 봐. 지금 이게 나 혼자 있는 건지.”
-이, 이게 무슨!
놈의 눈에 보이는 건 바로 생존자들이 층을 점령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모습.
그리고 그곳에 도착한.
“크허엉!”
“할아버지!”
“가자!”
백호 서대호화 혈호 서윤진의 모습.
그들이 생존자들을 도와 발톱을 휘두르는 장면이 생생하게 보였다.
“어때? 이제 좀 정신이 드냐? 이래도 혼자로 보여?”
강현이 들고 있던 놈의 눈을 뽑아 버린 뒤 격통으로 부릅뜬 나머지 눈알들을 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여긴 이제 내가 먹을 거니까 좀 죽어 줘야겠다.”
-감히! 감히! 네놈이 어디서 감히!
“눈알 모두 뽑으면 되는 거지?”
새까만 갑옷이 강현의 몸을 감싸더니 하얀 불꽃이 그 위를 내달렸고.
그가 만련신검을 쥔 채 놈을 향해 발을 박찼다.
* * *
“하압!”
“윤진아 먼저 가마!”
“네! 여긴 제가 처리할게요!”
서윤진과 서대호가 내려간 곳은 밀림으로 이루어진 19층.
그들이 이곳으로 온 이유.
호랑이에게 가장 맞는 전쟁터기에.
“[email protected]%^ &@#$%-”
“%^*()- [email protected]@.”
원주민 복장을 한 적들이 서윤진과 서대호를 찾아 죽이기 위해 이리저리 둘러봤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곧 스멀스멀 불길한 붉은 안개가 놈들을 휘감았고.
우드득.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길 잠깐.
숲엔 핏방울 말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19층 가장 깊은 숲속에선.
“잠깐! 모두 버텨! 어떻게서든!”
“다른 층은? 다른 층 지원은 없나?”
“다들 전투 중이어서 어렵다고 하는데요?”
“크윽! 다들 버티기만이라도 해!”
“우리 말고도 다른 사람들의 목숨이 걸려 있다!”
생존자들이 각자 무기를 손에 꼬나쥔 채 이를 악물었다.
이 빌어먹을 정글에 들어와 살아남기 위해 분투한 게 몇 년인가.
이제 와 포기할 수 없다.
“모두 목숨으로라도 지켜!”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마지막 기회를 잡기 위해.
19층 생존자들이 서로를 등진 채 수림 속에 숨어 다가오는 원주민들을 상대로 죽음을 각오할 때.
“크허헝!”
천둥과 같은 울음이 울리더니 서대호가 하얀 번개가 되어 떨어져 내렸다.
이어서 숲 전체에 붉은 안개가 스멀스멀 차오르니, 원주민들의 고함을 잡아먹었다.
이를 본 생존자들이 전율했다.
19층에 내려오는 전설.
“붉은 구름이 수림을 뒤덮고 하얀 번개가 칠 때.”
“숲이 열리고 절벽이 솟아나 대전사를 맞이하리라.”
“숲의 주인을 죽이는 자.”
“새로운 숲의 주인이 되리니.”
그들이 기다렸던 종말의 예언.
생존자들의 말이 끝나자 정말로.
수림 중앙이 열리며 거대한 절벽이 솟아났다.
그 위.
“도전하는 자가 누구인가!”
거대한 창을 든 수림의 대전사이자 층의 주인이 고함을 질렀다.
뿜어져 나오는 강한 기세.
최소 S급, 아니 그 이상이겠지.
서윤진이 안개로 화하여 놈에게 달려들려 했으나.
“전사는 호랑이를 맞이하라!”
그것보다 먼저 천둥이 다시금 정글을 울렸다.
바로 백호 서대호.
하얀 호랑이가 당당히 절벽을 향하여 모습을 드러냈고.
숲의 주인이자 사냥꾼을 보며 이빨을 보였다.
“누가 진짜 사냥꾼인지, 숲의 주인인지 겨루어 보자꾸나.”
곧 하얀 번개가 절벽을 향해 역류했고.
대전사의 날카로운 창이 폭풍이 되어 이를 맞이했다.
* * *
엘프와 드워프, 기사, 마법사.
이석천과 김두식이 소설로만 읽던 세계를 보며 놀라길 잠시.
이석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러니까. 하긴 이제야 말이 되네.”
“뭐가?”
“생각해 보면 오크나 오우거나 그런 게 다 어디서 나왔겠냔 말이지.”
“으음 각 층에서 보낸 몬스터들이다?”
“그래, 그것밖에 없지. 그리고 저기 봐 저 평원, 게이트에서 본 거 같지 않아?”
“맞네, 확실히.”
“게이트가 신전이랑 이어지는 통로고 놈들이 이를 통해 침입한 거라면?”
“그리고 실패하면 공간의 소유권이 넘어가는 거고?”
“그렇지.”
둘이 문답을 주고받길 잠시.
지금껏 그들을 괴롭혔던 게이트의 진실에 침묵했다.
모든 게 이 빌어먹을 어둠 그 새끼가 벌인 짓이었다니.
다만 한 가지 드는 의문.
그렇다면 능력은? 능력 따위 주지 않고 그냥 점령하면 되는 것 아닌가? 이렇게 많은 몬스터가 있는데?
그들이 왜 싸울 수단을 준 것인지 생각할 때.
“능력을 부여해야 해당 행성이 강해지고 강한 층을 먹어야 자신의 능력도 그만큼 강해지니까요.”
“특히 이번 지구가 마지막 100층을 완성하는 층이라 더욱 공을 들였죠.”
의문에 대한 대답은 다른 방향에서 들려왔다.
이석천과 김두식이 뒤를 돌자.
“덕분에 우리도 빈틈을 노려 능력을 넘겨줄 수 있었고요.”
“그래서 말인데 강현이는 잘 컸나요?”
강현의 부모님이 그들을 보며 아들의 안부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