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좌표의 흔적
“어어?”
강현이 눈앞에 떠오른 알림을 보고는 입을 벌렸다.
갑작스럽게 검탑 응원단장이라니.
그리고 검탑주의 응원단장이라니.
응원이 싫다거나 한 게 아니라.
“혜원아, 혹시 뭐 떠올랐어도 신경 쓰지 마.”
싸움에 휘말릴까 걱정이었다.
다른 이들이야 헌터로서의 사명감, 적을 이기겠다는 일념, 세상을 지키겠다는 숭고한 정신.
그 외에도 지금껏 많은 전투 경험이 있기에 별다른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혜원은 말이 헌터지 일반인에 가깝다.
서연이도 1층에 상상력만을 더하고 결전의 날에는 못 들어오게 할 생각.
강현이 걱정 어린 눈으로 이혜원을 바라보자.
“응? 허락이고 뭐고 이미 그렇게 됐는걸?”
이혜원이 태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한 미소.
어깨를 으쓱이며 이젠 무를 수 없다는 듯 잔망스럽게 구는 모습에 강현이 뭔가를 물어보기 전.
“지금껏 그렇게 도움받았는데 모른 척할 순 없잖아?”
이혜원이 지난 며칠간을 떠올렸다.
* * *
얼마 전 콘서트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
오랜만에 멤버들끼리 술 한잔하자는 이야기에 이혜원의 집에 모여 홈 파티를 하던 중.
“얘 이야기 좀 해 봐.”
“그래요. 언니 진짜 이야기 좀 해 줘요.”
“그래 어떻게 됐어? 잘되고 있어?”
술이 좀 들어갔는지 맏언니가 살짝 풀린 눈으로 이혜원에게 은근히 물었다.
한쪽 눈썹을 들썩이는 게 뭔가 시커먼 꿍꿍이가 있는 모양.
“응, 뭐가?”
이혜원의 순진한 물음에.
“엄머머. 너 자꾸 모른 척할 거야? 그 군인, 강현 씨 그 사람 어떻게 됐냐고.”
“그러니까. 그때 그렇게 달달한 분위기 내놓고선 아무 일 없다고 하진 않겠지?”
“맞아, 요즘 핸드폰 확인하는 횟수도 많아지고. 이거 이거?”
언니들이 연애에 대해 조언을 해 주겠네, 너는 우리만 믿으면 되네하며 이혜원을 꼬시길 한참.
결국.
“후우 먼저 연락도 없는 걸 뭐. 기다리고 기다려도…….”
이혜원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진심을 토해 냈다.
끝까지 참으려고 해 봤는데 술이 들어간 탓일까.
“군대에 있어서 못하는 건 알지만… 저번에 휴가도 나왔다던데. 우음… 잘 모르겠어어…….”
“휴가 나왔는데 연락을 안 했어?”
“카톡도 없디?”
“아니, 카톡은 했는데.”
“했는데?”
“그냥, 일상적인 이야기만 하고 뭐 특별한 건 없으니까.”
“하긴 그때 보니까 좀 무뚝뚝해 보이긴 하더라.”
“그래도 동생한텐 그렇게 따뜻하다며?”
“혜원이가 유명인이라 좀 어렵나?”
이혜원의 솔직한 고백에 언니들이 그녀를 위로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넸다.
아직 군인이니까 그럴 수 있다.
이번 휴가에는 연락할 거다.
술을 한 잔 두 잔 마시길 잠깐.
“아니, 그래서 내가 실수인 척 사진 보내면서 이 옷이 이뻐여, 저 옷이 이뻐여? 이렇게 보냈거든?”
“응, 그래서?”
“근데 있지? 아, 실수로 보내셨군요. 삭제하겠습니다. 그러는 거 있지! 진짜!”
“너무했네!”
“그러니까 진짜 최강현! 가만 안 둬!”
어느새 술자리는 최강현 성토 자리로 변했다.
아마 지금 여기에 강현이 있었다면 몬스터 웨이브를 마주했을 때보다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으리라.
그렇게 강현이 얼마나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지 쏟아내던 이혜원이.
작게 한숨을 푹 내쉬고는.
“어쩌겠어. 좋아하는 사람이 을이지.”
이번엔 또 어떻게 실수인 척 카톡을 보내 볼까 고민할 때.
“근데 온늬.”
아직 학생 신분이라 홀짝홀짝 무알콜 음료를 마시던 막내가 붉어진 얼굴로 이혜원을 불렀다.
“진짜 그 오빠 좋아해요?”
“응?”
“진짜로 그 오빠 좋아하냐구요오오.”
분명 알코올 없는 음료인데?
언니들도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막내를 말리려 했으나.
“안 취했어요오. 한 가지만 묻게요. 진짜 좋아해요? 진짜루? 진짜루우?”
막내의 거듭된 물음에 이혜원의 입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열릴 줄 몰랐다.
계속 강현이 맘에 든다는 티를 냈었지.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는 걸까.
흔들리는 이혜원의 눈동자를 보며 막내가 푸흐흐 웃더니.
“좋아하면 먼저 솔직하게 다가가도 되잖아여? 난 그럴 수 있는데? 언니 그러다 나한테 뺏긴다아?”
“어머, 얘가 미쳤나 봐! 너 조용히 안 할래?”
“무알콜 먹고 취했나 보다. 혜원아 막내니까 그냥 모르는 척해 우리가 데리고 들어갈게.”
“너 취했어, 얼른 자빠져 자.”
“취하긴 뭘 취해여. 무알콜인데.”
“그딴 개짓거리하는 걸 취했다 하는 거야 이것아.”
“언니들은 맨날 혜원 언니 편만 들고!”
“으휴! 지금 너 살려 주려고 하는 거잖아!”
“혜원이 날아차기에 갈비뼈 우수수 나가고 싶니?”
언니들과 막내의 투닥거림에 이혜원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같은 멤버 옆구리를 털어먹겠는가.
“언니 관심 없으면 내가 가져 버린다구아아악! 꼬집지 마여! 아파!”
언니들이 막내의 반란을 진압하는 사이.
‘먼저 솔직하게 다가가라고? 너는 할 수 있다고?’
이혜원이 방금 막내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마음 같아서야 수십 번 했지.
아니, 수백 번도 했지.
그런데.
“어떻게 하는 건데 그거…….”
무대에서 사람들을 휘어잡고 사랑받는 법은 알았어도.
사랑하는 법에는 서툰 자신을 탓하며 이혜원이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켤 때.
[디바의 고민, 당신의 선택은?]
눈앞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마치 그녀의 고민을 해결해 주겠다는 듯한 알림.
[선택에 따라 이후 능력의 진화 방향이 달라집니다. 중요한 선택입니다. 신중히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이 메시지를 끝으로 상태창은 침묵했다.
시간이 흘러 그녀가 오늘 울고 있는 강현을 만났을 때.
[최강현을 돕는다, 안 돕는다.]
[돕는다 선택 시 검탑 응원단장 지위 획득 및 검탑주 응원단장 지위 획득]
[안 돕는다 선택 시 강현의 마지막 싸움에 관여할 수 없습니다]
선택 내용이 떠올랐다.
물론 이혜원의 선택은.
‘최강현을 돕겠습니다.’
[한번 내린 결정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정말 돕는다를 선택하시겠습니까?]
‘네.’
강현을 돕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서글픈 울음이 이혜원의 마음을 움직였고.
[디바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선택한 대상과의 운명이 더욱 긴밀히 연결됩니다]
[선택 효과 발동 조건 - 그에게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러 주세요]
이 긴 과정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이혜원이 아직 답을 구하는 강현의 눈을 보길 한참.
그냥 얼버무리기로 했다.
그대로 말했다간 마음을 모두 이야기해 버릴 거 같아서.
“그냥- 아이돌한테 응원받을 기회라잖아. 설마 차 버리려고?”
“…….”
“왜, 뭐 왜. 나 구해 줄 때는 맘껏 구해 주더니 난 왜 응원 못 하게 하는데? 나도 응원해 주고 싶었어!”
“…….”
“나도 응원하고 싶어서 그런 건데… 안돼?”
“…….”
“아이돌이 응원해 주겠다는데! 그것도 안 된데! 동네 사람들! 여기 배부른 인간 좀 보세요! 우리 팬들한테 이를 거야! 아, 아니지 그럼 내가 죽나?”
왜 저러는 걸까?
아직 한마디도 안 했는데 왜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탈춤까지 추는 걸까?
강현이 목까지 차오르는 물음을 꿀떡 삼켰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지금 허튼소리를 했다가는 두고두고 힘들어질 것 같다.
강현이 한참 뒤 입을 열어 꺼낸 말은.
“고마워.”
그게 전부였다.
그러나 그 간단한 한 마디에.
“정말? 그렇게 말해 줘서 나도… 고마워.”
이혜원이 이제껏 보였던 어떤 미소보다 따뜻한 미소로 강현에게 답했다.
고마워 한 마디에 이제껏 쌓인 모든 섭섭함이 눈 녹듯 녹는 기분.
그녀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배시시시 웃고 있을 때.
“검탑이 어딘지는 봐야겠지?”
강현이 이혜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혜원이 먼저 다가가길 잘했다 생각하며 냉큼 그의 손을 맞잡은 순간.
[탑주 최강현, 응원단장 이혜원의 정신을 검탑으로 이동시킵니다!]
강현이 이혜원을 검탑으로 데려갔고.
“어? 새언니다! 새언니!”
“여긴 어쩐 일이셔요?”
마침 검탑에서 놀고 있던 서연이와 요정들 나무들이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곤 몰려왔다.
“어머, 서연아!”
이혜원도 서연이를 발견하고 서로 반가워하는 동안.
“오빠! 오빠! 내가 언니 안내해 줄래!”
서연이가 이혜원의 옷깃을 잡아끌며 환히 웃었고.
“그래? 그럼 우리 서연이가 안내해 줘. 오빠가 뒤에서 따라갈게.”
강현이 둘의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언니! 여기가 1층! 요것 봐. 이거 모두 내가 그린 거다?”
“와, 전부 서연이가 그린 거야? 그런데 뭔가 익숙하네?”
서연이의 말에 이혜원이 문득 강현을 돌아보았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에도 각 층을 돌며 소개해 주길 꽤 오래.
분명 검탑 최고층은 6층 흑백산까지가 끝.
그런데.
[7층에 진입하시겠습니까?]
“어, 오빠? 7층, 7층 새로 생겨났어!”
“서연아, 혜원이랑 같이 가서 1층에서 놀고 있을래? 옆에 꼭 붙어 있어 줘야 한다?”
“웅웅! 맡겨만 줘!”
“아, 아니 내가 그래도 어른인데…….”
“언니! 구찌 보러 가요”
“그럴까? 같이 갈까?”
이혜원이 서연이의 손에 이끌려 내려간 후.
[7층 – 통로의 씨앗이 담긴 방에 입장하시겠습니까?]
[머나먼 곳, 적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통로의 가능성을 품은 장소입니다]
강현이 7층 설명을 보길 잠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게 씨앗이라고?”
씨앗치고는 너무 커다란 것을 마주했다.
휘몰아치는 불과 그림자, 검고 붉은 것들이 한곳에 모여 꿈틀대는 풍경.
방을 꽉 채우고 있는 거대한 기운.
하나 아직 갈 곳을 정하지 못한 듯 서로 뒤엉켜 혼잡하게 돌고 있을 뿐.
강현이 이를 잠시 쳐다보자.
[연구 책임자의 눈으로 대상을 분석합니다. 대상의 상태를 확인합니다]
[좌표 설정이 되지 않아 발동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분석 결과를 확인한 강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좌표? 놈이 있는 곳의 좌표를 어떻게 알아내지?
대주교의 지식 속에 들어 있나?
하나 놈의 지식 속에는 좌표 따위 없었다.
과거 놈이 살려 달라며 어둠에게 안내해 주겠다던 말은 거짓.
“나쁜 새끼.”
강현이 슬쩍 놈에게 욕을 날리고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할 때.
“어? 마침 왔네?”
때마침 김두식과 이석천이 7층 문을 열고선 등장했다.
아마 아래에 있는 이혜원과 만난 모양.
“혜원이 저 친구도 데려왔네? 강현이 저 녀석 은근히 능력 있다니까? 내 제자답게.”
“제자답게? 스승은 그러지 못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가 인기가 얼마나 많았는데? 네가 몰라서 그렇지.”
“내가 모르는 인기가 있었어? 이상하다? 그랬으면 내가 찾아서 박살 냈을 텐데? 머리채 잡았을 텐데?”
“오우… 그건 좀? 굳이?”
“인기 있었을까, 없었을까?”
“없었나 보다. 없었나 봐. 없었네.”
“그래, 잘 떠올렸네. 기억을 왜곡하면 안 되는 거야. 재구성 당하기 싫으면.”
“으음, 설마, 만에 하나 말이지. 인기 없던 이유가 따로 있었다거나? 누군가의 의도였다거나?”
“어땠을 거 같아?”
점차 은빛으로 변해 가는 김두식의 머리카락을 본 이석천이 어깨를 으쓱이곤 슬며시 강현의 뒤로 숨었다.
“행복해 보이십니다?”
“행복, 그래 행복하지.”
너도 꼭 찾길 바란다. 그 행복.
검성이 강현의 농담을 저주로 맞받아치고는.
“저건 뭐냐? 안 그래도 보자마자 몸이 근질근질한 게 딱 보기에도 불길해 보이는 거다만.”
“통로입니다. 아직 씨앗이지만.”
“통로? 씨앗? 어디로 가는? 뭐 이세계라도 가게?”
“어둠에게로 향하는 통로.”
“…….”
강현의 답에 이석천이 턱 근육을 물며 침묵했고, 김두식의 두 눈이 침침하게 가라앉았다.
검성이 힘겹게 다시 평온을 회복하며 입을 열었다.
“진짜 끝이 다가오는군.”
“준비는 어떻습니까.”
강현의 물음에 이번엔 김두식이 답했다.
“무기를 받았던 아이들 전부를 만났어. 살아… 있는 아이들 전부라 해야겠지만 어쨌든.”
“오겠다고 했습니까?”
“응, 의외의 수확도 더 있었고.”
“수확이라면?”
“석천이의 친구들이 내 친구들이기도 한데. 걔들도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더라고. 실종자 가족들도 마찬가지고.”
“문제는 데려오는 방법이지 뭐. 그 누구냐. 킹피닉스, 앤서니 그 녀석 딸도 올 거다. 구찌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정보를 들을 수 있을 거야.”
“그거 반가운 소식이네요.”
“근데 석천이 말대로 데려오는 방법이 문제긴 해. 다들 국가 전력 급이니 움직이는 순간 모두의 시선이 집중될 거야.”
“그건 천천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차피 씨앗을 발아시켜야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조건이 뭔데?”
“놈에게로 가는 좌표를 찾으라더군요. 대체 가 본 적 없는 좌표를 어떻게 찾으라는 건지.”
강현의 답을 들은 이석천의 얼굴이 찬찬히 굳었다.
“있지. 너 이전에 갔던 사람이. 아니 들어갔던 장소가.”
짐작 가는 곳이 있는 모양.
그가 우울한 얼굴로 강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들어가서 실패했던 게이트.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곳. 거기라면 좌표가 담겨 있을 거다.”
“거기라면…….”
강현도 아는 곳. 다만 가본 적 없다.
강현의 얼굴도 이석천의 얼굴처럼 어두워지길 잠시.
“아무래도 갔다 와야겠네요. 이야기는 나중에 더 하도록 하죠.”
“다녀와 강현아. 내가 혜원이? 그 친구랑 인사하고 있을게. 뭐라도 하나 만들어 줄까?”
“나도 오랜만에 인사 좀 해야겠다. 아 그 친구는 나 모르겠구나.”
“이석천 네가 그 아이를 왜 만나?”
“왜? 제자 친구라는데 스승이 만나면 안 돼?”
“검성 얼굴 달고 누구한테 인사를 해! 이제 아주 검성이라고 자랑하고 다니게?”
“…으음. 아녜요. 두 분 다 그냥 여기 계세요.”
“강현아?”
“강현아, 나 스승이다?”
왜 만물제작자가 부끄러워? 검성이 부끄러워? 우리가 부끄러워?
그들의 불만을 뒤로한 강현이 그림자를 개방.
[그림자 왕의 능력을 사용합니다. 모든 그림자에 접속 권한을 갖습니다!]
[그림자의 범위: 대한민국 전국, 목표하는 위치를 찾습니다]
[날개의 전당으로 이동합니다]
감았던 눈을 뜨자.
검성 이석천을 비롯한 실종된 이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기념관이 보였다.
그 안쪽.
-검성 이석천을 비롯한 원정대가 들어갔던 현장입니다.
[좌표의 흔적을 찾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