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마지막 작전
18개월.
어쩜 숫자마저도 심정을 제대로 표현해주는 18개월 군 복무 동안.
같이 잠을 자고 어깨를 맞대고 훈련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작업하고.
고등학교 때도 야자다 뭐다 하며 오랜 시간 같이 공부하고 논 적은 있어도.
이 정도는 아닐 거다.
그러다 보니.
“어휴, 저 개새끼.”
싫어하는 사람도 생기기 마련이고.
“김 뱀! 피엑스 같이 가지 말입니다!”
친한 사람도 생긴다.
서로 부대끼고 지내다 보면 싫던 놈과 친해지기도 하고 친하던 놈과 서먹해지기도 하고.
많은 감정과 추억을 쌓아 나간다.
마침내 전역 전날, 모든 원한과 관계를 씻어 내는 행사.
깊은 밤, 생활관으로 속속히 모여드는 후임들.
“불 꺼.”
“모포 덮어!”
자고 있던 전역자를 모포로 덮고선 마구 덤벼든다.
강도는 어떤 선임이었는지에 따라 다르다.
원한이 많으면 아프게, 평소 친했으면 장난 정도.
가장 슬픈 건.
“아, 하지 말라고!”
“뭐라는 거야, 잠이나 잡시다.”
“…그래.”
아무도 오지 않는 것.
때로 어떤 선임들은 모포말이도 하지 않을 정도로 인기가 없거나 싫어했다.
분명 장건철이라면.
“어? 모포말이 해야 하는데.”
“이 기회를 놓치네!”
“말도 안 됩니다!”
“저도 가장 기다렸지 말입니다!”
모포말이 시간에 가장 인기가 많을 선임이었다.
물론 좋은 쪽으로.
다들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할 정도.
장건철도 그 사실을 알기에.
“제가 가겠습니다.”
강현의 사수로 당직 임무에 들어가고 싶다고 자처.
모포말이 기회조차도 없애 버렸다.
장건철의 자원에 서윤진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 전역 전날에 시키기 좀 그렇긴 한데.”
“선임으로서 아직 알려 줄 게 남았으니 괜찮습니다.”
다른 분대 선임에게 맡기느니 자신이 하는 게 백배 좋았다.
전 분대장으로서 그리고 강현을 신병 때부터 봐 왔던 그가 직접 한 결정.
“진짜 괜찮으십니까?”
서윤진도 강현도 좀 미안하단 얼굴이 되었으나.
“너 손가락 좀 살펴라, 강현아.”
장건철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강현이 든 검지가 가리키고 있는 사람도 바로 장건철.
다만 강현의 손가락보다 장건철의 입이 더 빨랐을 뿐.
어차피 데려가려 했으면서 미안한 표정은.
문득 자신의 속내를 들킨 강현이 멋쩍게 웃으며 서윤진에게 답했다.
“그럼, 상병 최강현. 오늘 당직은 장건철 병장이랑 들어가겠습니다.”
그런 둘을 보며 서윤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래, 오늘은 둘이 들어가. 잘 알려 주고.”
서윤진으로서도 전역 전날에 당직 세우는 게 마음이 편치는 않았으나.
저렇게 고집 피우는 이유도 짐작 갔다.
“또 하고 싶은 말들도 많을 텐데.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둘이 할 말이 얼마나 많겠는가.
강현을 신병 때부터 보아 온 장건철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같이 치열한 전투를 해 왔고.
위기들을 모두 이겨 내고 마침내 전역하는 날.
그녀 같아도 강현과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을 듯싶었다.
“충성! 최강현 외 아홉 명 생활관 복귀하겠습니다!”
곧 장건철 병장의 당직 소식이 막사 내부로 퍼졌고.
“아! 말도 안 돼! 오늘 삼대 중량 갱신하기로 했는데!”
“모포말이를 이렇게 피하네!”
“근데 모포말이 할 수는 있는 거냐?”
“아무래도 우리 주먹이 먼저 말이 당하는 거 아닙니까?”
“아, 그 사람이면 몸으로 주먹 패는 거 가능이지.”
3중대원들이 아쉬움을 삼켰다.
장건철 병장이야 워낙 다른 후임들과도 두루두루 친했으니까.
개인 정비 시간이 끝나고.
“강현아, 준비 끝났냐?”
어느새 군복에 탄띠를 착용한 장건철이 강현을 찾았고.
“마침 준비 끝났습니다.”
강현도 준비를 마치고선 장건철과 임무 투입.
“병장 장건철 외 한 명 대대 당직 임무 투입하겠습니다.”
중대 당직 사관에게 신고 후 막사를 나섰다.
“근데 오늘 대대 당직 사령 누구라디?”
“2중대장님이시랍니다.”
강현의 답에 장건철의 얼굴이 구겨졌다.
“아, 하필 그 인간이야? 뭐, 일은 확실히 배우겠네.”
“깐깐하게 굽니까?”
“깐깐하게 군다기보다는 오히려 너무 풀려서 문제지 뭐.”
“아, 그럴 거 같긴 합니다.”
강현이 장건철의 말을 대번에 이해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훈련 때도 그렇고 2중대장이 딱히 꼼꼼해 보이진 않는다.
병사가 일을 많이 배우는 경우는 두 가지.
하나는 간부나 선임이 엄청 꼼꼼하고 깐깐할 때.
자연스레 정석대로 할 수밖에 없으니 일머리가 늘어난다.
나머지 하나는 간부나 선임이 아무것도 안 할 때.
이때는 자신이 아니면 아무도 일을 하지 않으니 어떻게든 일이 손에 익는다.
2중대장은 후자인 경우.
“뭐, 그래도 엉뚱한 거로 시비는 안 거니까 편하긴 할 거야. 우리 할 일만 잘하면 되거든.”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강현과 장건철이 당직 임무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대대 지휘 통제실로 발걸음을 옮길 때.
빵빵!
“야! 오늘 너희가 당직이냐?”
마침 옆에 레토나 하나가 멈춰 서더니 2중대장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가 장건철을 보며 환히 웃다가 강현을 보고는 찔끔하길 잠깐.
“뒤에 타라! 가는 길에 같이 가자.”
강현과 장건철을 레토나 뒤에 태워 대대 지휘 통제실로 향했다.
“…….”
“…이건?”
막 레토나 뒤에 탄 강현이 장건철을 보며 고갯짓으로 물었고.
장건철이 레토나 뒤에 놓인 PX봉투 안, 가득 쌓여 있는 과자와 라면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 이래.
그의 소리 없는 대답에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치 당직이 아닌 놀러 가는 모양새.
그리고 이런 태도는.
“야, 당직 보고서 만들어서 올렸으면 라면이랑 냉동 좀 데워 와라.”
“건철아, 이거 화상 회의 어떻게 하더라? 내용이랑 일정은 다 체크했고?”
지휘 통제실에 들어가서도 이어졌다.
자신이 하는 일은 하나도 없고 모두 장건철과 강현에게 떠맡기는 중.
뭐, 덕분에.
“보고서 같은 경우는 이런 내용을 주로 넣고 마지막에 정리만 하면 되거든? 한번 해 볼래.”
“알겠습니다.”
일을 배울 기회는 충분하고도 넘쳤다.
물론 장건철의 설명도 훌륭했으나.
[새로운 고물 당직대 키보드를 수집했습니다! 이전 사용자들의 경험을 흡수합니다!]
[새로운 고물 당직대 마우스를 수집했습니다! 이전 사용자들의 경험을 흡수합니다!]
당직대에 있는 오래된 키보드와 마우스 등 장비를 만질 때마다 켜켜이 쌓여 있는 이전 당직병들의 경험을 흡수.
타다다다다닥.
그야말로 순식간에 장건철이 알려 준 문서 작성은 물론.
“어, 이것도 알려 줬던가?”
“아, 양식이랑 내용이 비슷해서 한번 해 봤는데 괜찮습니까?”
“완벽한데?”
외에도 서류들을 순식간에 작성해 나갔다.
장건철이 그런 강현을 보며 엄지를 치켜들 정도.
마치 원래 당직병 임무를 해 왔던 것처럼 능숙하지 않은가.
“야! 여기 냉동 먹고 해라!”
거기다 당직 사령이라는 2중대장은 이미 라면과 냉동에 심취한 상태이니.
“알겠습니다!”
“먼저 먹고 와. 내가 마저 하고 있을게.”
“금방 먹고 오겠습니다.”
장건철이 전역 전에 서는 당직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강현에게 당직 임무 인수인계를 이어갔다.
“충성! 초소 임무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
“당직 사령님?”
“컥, 크흥. 엉? 특이 사항 있냐?”
“없었습니다.”
“고생했다, 들어가 봐.”
크어어억.
방금 라면 두 개에 냉동 두 개를 처먹고는 후식으로 과자 세 봉지를 해치운 2중대장이 이젠 아예 대놓고 자기 시작.
교대 병력이 오든 말든 누가 나가든 무슨 소리가 들리든 대충 손을 휘젓더니 이젠 코까지 골며 잠들어 버렸다.
“…원래 저럽니까?”
강현이 어이없다는 듯 묻자.
“뭐, 익숙해져야 할 거다.”
장건철이 강현의 등을 툭툭 치며 위로했다.
시간은 어느덧 새벽.
“이게 마지막 파일이야. 여기까지 끝나면 아침때까지는 그냥 CCTV 보고 있으면 돼.”
“아, 그게 끝입니까?”
“뭐, 사령분들에 따라 다르긴 한데.”
장건철이 이젠 아예 혼곤히 잠든 2중대장을 턱으로 가리켰고 강현이 웃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 진짜 새끼들 졸라게 귀찮게 하네. 야, 당직아. 나 방 들어가 잘 테니까 애들 좀 봐 주고 5시쯤 깨워라.”
“알겠습니다.”
계속 왔다 갔다 하는 초소 투입 병력들이 귀찮았는지 결국 2중대장이 아예 지통실을 벗어나 따로 마련되어 있는 방에 들어가 버렸다.
드르르릉.
안에서 들리는 우렁찬 코골이 소리.
“충성, 근무 투입 신고하러 왔습니다.”
“아, 사령님 지금 자러 갔어요.”
“아, 그럼 총 시건하고 갈게요.”
“네, 고생하셨어요.”
장건철과 강현이 자연스레 당직 사령의 일까지 맡아 근무자 교대를 확인할 때.
“저.”
막 근무를 마치고 들어가려던 병사 하나가 문득 멈춰 서서는 강현을 빤히 바라보길 잠시.
“태극 훈련 때 고마웠습니다.”
감사 인사를 남기고는 재빨리 지통실을 튀어 나갔다.
아마 그 말을 하려고 방금 우물쭈물한 모양.
“아주 군단의 영웅이구먼.”
“아, 그런 거 아닙니다.”
장건철의 농담에 강현이 짐짓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놀리는 장건철도 이를 거부하는 강현도 올라간 입꼬리를 보니 기분은 좋은 모양.
침묵이 이어지길 잠시.
“고맙다.”
“아, 장건철 병장님은 또 왜 그럽니까.”
강현이 장건철의 인사에 장난을 친다 생각하곤 고개를 흔들려 할 때.
“진심으로 고맙다, 강현아.”
장건철이 진지한 표정으로 강현에게 재차 감사를 전했다.
장난이 아니다.
상대의 진심을 느낀 강현이 농담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고.
“아마 네가 아니었으면 이런 군 생활도 없었을 거고 이렇게 살아나가지도 못했겠지.”
장건철이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헌터가 뭔지도 모르고, 산군과 창연의 헌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 볼 기회 따윈 없었을 거야.”
그래, 강현이 오기 전까진 그의 군 생활도 다른 병사들과 다르지 않았다.
무미건조한 훈련과 작업의 반복.
그런데 강현이라는 신병이 오고 나서 모든 게 바뀌었다.
“죽을 뻔한 위기도 많았지만 결국 살았고 많은 사람을 구했지. 거기다 누구도 하지 못했던 경험을 한 덕에 더욱 강해졌고.”
누군가는 그가 겪었던 일들이 그저 끔찍한 위기였을 뿐이라고 하겠으나.
장건철에겐 이 모든 과정이 소중한 경험이자 자산.
분명 밖에 나가서도 이때 한 경험들이 도움 되리라.
그가 전역 전날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당직을 자처한 이유는 이런 말을 전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인생이 바뀌었어. 강현아, 넌 사람도 살렸지만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삶도 바꾸었다.”
비록 후임이지만 그로 인해 1분대가 바뀌었고 더 나아가 3중대가 바뀌었다.
그리고 이젠 1군단 특임대 병력들이 바뀌고 있다.
방금 인사했던 특임대 병력도 같은 마음일 터.
누군가는 해야만 했던 이야기를 장건철이 나서서 했을 뿐.
그의 진심 어린 감사에.
“그냥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강현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래 그 또한 할 일을 했을 뿐.
오히려.
“처음 전입 왔을 때부터 장건철 병장님이 도와주신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장건철에게 고마웠다.
신병인 강현을 믿어 주고 항상 옆에서 그를 도왔다.
계급이 높으니까 그냥 맘에 안 들어서 공을 가로채고 강현을 내리누를 수도 있건만.
그는 자신이 빛나지 않았어도 묵묵히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강현은 그런 동료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다.
“감사합니다.”
강현의 인사에 장건철이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인마, 마지막에는 건방 좀 떨어라.”
그가 강현을 향해 투덜거리던 중 문득.
“아까 그 병사 뭔가 이상했지?”
강현이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군단 정문에서 본 일병 이야기를 꺼냈다.
척하면 척.
장건철이 강현의 분위기를 보고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짐작.
“마지막 작전이니까 최선을 다해 도우마.”
당직을 자처한 것도 강현이 뭔가를 하리라 짐작했기 때문.
장건철이 단단한 가슴팍을 둥둥 두들기며 강현을 응원했다.
강현 또한 그런 선임을 보며 씩 미소 지었다.
그래, 이게 바로 전우지.
말하지 않아도 또 설명하지 않아도 믿어 준다.
장건철 같은 전우가 전역하는 게 아쉬웠지만.
지금만큼은 같이 있으니 괜찮다.
그리고 전역하는 사람이라 더 좋은 점도 있다.
“놀라지 마십시오.”
강현이 장건철 병장을 보며 씩 웃고는 손을 뻗자.
[2층 도플갱어 잔해를 이용합니다. 제작과 섬세함을 이용해 대상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합니다]
[광신적인 전우 장건철의 모습을 재현합니다! 연구자의 눈이 수집한 대상에 대한 데이터가 충분합니다. 대상의 데이터를 입력합니다]
[생명의 숲에서 생명력 일부를 가져옵니다!]
“어어? 어어어!”
장건철 병장이 한 명 더 생겨났다.
그가 놀라며 어버버할 때.
강현이 만들어 낸 도플갱어가 장건철과 똑같은 표정,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강현아, 나만 믿고 갔다 와라.”
“아니, 내가 할 말이잖아. 그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