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빠른 사나이
오빠의 드넓은 가슴팍에 고개를 묻은 채 칭얼거리던 서연이가 무언가 떠올린 듯.
“오빠 내려 줘. 내려갈래!”
방금까지 신나서 안겨 있던 오빠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동생의 갑작스러운 요청에 강현이 의아해하며 서연이를 내려 주자.
착, 착.
“다녀오셨어요!”
양손을 배꼽 어림에 올려 둔 서연이가 강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작게 들리는 목소리.
“하나, 둘, 셋.”
학교에서 배운 대로 공손하게 인사한 서연이가 찬찬히 고개를 들었고.
그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며 강현은.
“푸하하하하하!”
자신도 모르게 크게 웃어 버렸다.
서연이 나름대로는 어른스러워 보이려고 뒤늦게라도 배꼽 인사를 했겠지만.
“왜 이렇게 귀여워!”
오빠로선 어린 동생이 귀여워 보일 뿐.
안겨 있다가 뒤늦게 배꼽 인사를 떠올린 것, 지금 했던 배꼽 인사와 더불어 칭찬을 바라는 눈망울을 보자 귀여움의 위력을 새삼 깨달았다.
“아앗! 귀여우려고 한 거 아닌데!”
서연이가 기대와는 다른 강현의 반응을 보고는 볼을 부풀릴 때.
“그래. 오빠 다녀왔어.”
강현이 웃음을 가라앉히곤 서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커다란 손에 쏙 들어올 만큼 작은 머리.
오빠의 따뜻하고 굳센 손에 서연이가 밝게 미소 지었고 강현도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헥헥헥헥!
구름이 둘 사이에 끼어들 타이밍을 엿보며 이리저리 몽글몽글거렸고.
뒤늦게 구름을 발견한 서연이가 양팔을 활짝 펼쳤다.
“구름아!”
이름이 정말 구름이었던 모양.
서연이의 부름에 구름이 얼른 서연이의 품에 뛰어들었고.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동생의 얼굴에 자기 몸을 비벼 대었다.
“아하하핫! 간지러워! 그만, 그마안.”
둘의 행복해 보이는 재회에.
“뀨우우우.”
강현의 머리맡에 앉아 있던 구찌가 시무룩한 소리를 내었다.
서연이는 자신의 친구였는데.
어느새 귀여운 친구들이 잔뜩 생긴 모습.
이제 자신이 설 자리는 없는 걸까.
구찌가 예전 서연이와 보냈던 즐거운 시간을 떠올리며 구슬픈 소리를 낼 때.
“구… 찌야?”
서연이가 얼핏 들린 구찌의 목소리를 듣고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방금 분명 구찌 목소리가 들렸는데?
드디어 서연이와 구찌의 눈이 마주쳤고.
“구찌야!”
“뀨우우우!”
서연이가 구찌를 향해 팔을 벌림과 동시에 구찌가 뛰어들었다.
“뀨우우우! 뀨! 뀨우!”
“아냐! 널 왜 잊어! 그럴 리가! 히이잉.”
구찌가 서연이를 그리워했던 만큼 서연이도 구찌를 그리워했던 것.
아무리 좋은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고 하나.
“우리 구찌가 최고지!”
“뀨우우!”
귀염둥이 포지션은 여전히 구찌의 몫.
동생과 구찌가 한바탕 재회를 나누고 있을 때.
“요즘 일은 어떠세요?”
“뭐, 평소랑 똑같지. 그래서 이번에도 엄청난 일 하나 했다며?”
강현과 한진명이 서연이와 구찌를 아빠 미소로 보며 대화를 이었다.
“벌써 들으셨습니까?”
“듣다마다, 보고서는 물론 이미 산군께서도 알고 계신 지 오래지.”
“그렇군요. 아마 들으신 그대로일 겁니다. 같이 있었으니까요.”
끝까지 잘난 척 한 번 하지 않는 강현을 보며 한진명이 혀를 내둘렀다.
“어쩌면 수십만 명을 구한 걸 수도 있다. 아니 분명하지. 그런데 그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는 참 뭐랄까.”
“뭐… 한 명이나 수십만 명이나 구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니까요.”
강현이 입 아프게 설명할 것도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고.
“여전하구나.”
“여전하죠.”
그래, 그래서들 널 좋아하는 거지.
한진명이 강현이 전과 같음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 한결같다.
그런데.
“너랑 만난 사람들은 항상 변해서 오니. 그것참 뭐라 해야 하나.”
강현과 만난 이들은 항상 무언가 변해서 왔다.
지난번 산군 특별 팀이 그랬고.
이번엔.
“서대천 그 친구가 아주 열심이더라.”
“그렇습니까?”
“그래, 이번에 아주 특별 팀 인원들이랑 같이 기존 팀까지 박차고 나와서 따로 팀을 만들어 달라더군.”
“어? 특별 팀까지요?”
“여기 이 신청서 좀 봐라.”
한진명이 손수 챙겨 온 종이를 본 강현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팀장 서대천, 팀원 누구, 누구, 누구…….
익숙한 이름들 아래.
새로운 팀 창설 이유.
따라잡아야 할 사람이 있어서.
한 줄로 쓰여 있는 황당한 이유.
그리고.
“팀명을 좀 봐.”
한진명의 말에 팀명을 살피자.
팀명: K. H. C 특별 팀
“케이 에이치 씨?”
의미를 모를 약자에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나마 떠오르는 생각은.
“뭐, 코리안 헌터 챔피언 그런 겁니까? 그 유에프씨처럼요?”
이런 일반적인 이유들.
그러나 한진명이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그래서 물어보니까.”
강현초이 특별 팀이라더구나.
강현이 진심으로 아파 오는 관자놀이를 짚었고.
그런 강현의 등을 한진명이 툭툭 두들겼다.
“힘내라.”
“설마 통과된 겁니까?”
불안에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한진명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산군께서 이걸 허락하셨다고요?”
설마 서대호 길드장이 이런 이름을 허락했겠냐는 물음에.
“녀석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내 친구잖냐!”
한진명 대신 검성 이석천이 자랑스럽게 외쳤다.
그러니까 왜 친구들이 모두 그 모양이야!
강현이 막 튀어나오려던 화를 가라앉힐 때.
“오빠 근데 해물비빔소스는 정말 그렇게 맛이 없어?”
“어엉? 응? 방금 뭐라고?”
구찌를 품에 소중히 안은 서연이의 순진무구한 물음에 강현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고.
“큼, 크흠. 난 갈게. 가족들이랑 즐거운 시간 보내고. 서연이도 오빠 말 잘 듣고 운동회 재밌게 보내렴.”
한진명이 다급히 자리를 피했다.
강현이 방금 들은 충격적인 말에 다급히.
“서연이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소고기! 소고기 먹으러 갈까?”
말꼬리를 돌리자.
서연이가 가족들이랑 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을 떠올리며 밝게 외쳤다.
“나 떡볶이!”
“그래! 오빠가 떡볶이 다 사 줄게!”
그러니까 제발 그 저주받은 소스는 잊어.
* * *
점심으로 떡볶이를 배불리 먹고 난 후에는 꽤 바빴다.
무릎이 아픈 할머니를 대신해 집 안을 청소하고 평소 입는 옷들도 새로 사고.
휴가지만 확실히 보내기 위해 이런저런 준비를 하던 중.
도로롱, 도로롱.
숙제한다더니 어느새 잠들어 버린 동생을 보고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머리맡에는 구찌가 잠든 모습.
한낮의 볕이 학습지를 넘어 동생의 몸을 담요처럼 덮은 풍경.
부유하는 먼지마저도 느릿느릿한 게 평화로워 보였다.
동생의 자는 모습을 계속 보고 싶은 강현의 마음을 알았는지.
“쉬이잇.”
강현과 함께 부산스럽게 청소하던 가구와 요정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고.
서서히 강현과 서연이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강현과 서연이를 둘러싼 채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모습.
둘의 유대와 평화를 깨지 않으려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중 요정 하나가 조심스레 다가왔고.
“저, 담요를 덮어도 될까요?”
강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자, 다들 깨지 않게 조심조심.”
“셋에 얹는 거다? 하나, 둘, 셋.”
서연이가 혹여라도 깰까 아주 조심스럽게 담요를 덮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안경 닦기 하나 가져와 볼래? 장롱에 많잖아.”
“여기 가져왔어.”
“어머, 딱 맞다.”
“오호호호.”
이번엔 어디서 안경 닦기를 가져오더니 구찌의 몸 위에도 덮어 주고는 좋아했다.
문득.
강현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옆에 있던 의자에 손을 가져다 대었고.
[새로운 고물 동생의 작은 소망에 접촉했습니다!]
[대상의 소중한 기억입니다. 이를 확인하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강현이 없는 동안의 이야기들이 주르륵 펼쳐졌다.
나이든 할머니의 몸은 점점 약해져 갔고.
서연이의 성장은 느렸다.
그래서 한가지 생각해 낸 방법이.
‘친구들을 더 만들 거야!’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는 방법.
그래서 구름이를 시작으로 나무, 산, 정원, 집 안에 있는 가구, 요정들까지 집 안팎에 친구들을 가득가득 만들었다.
서연이가 그린 그림과 그 안에 깃든 상상력 그리고 능력에는 그녀의 소망이 수백 갈래로 나뉘어 깃들었고.
집안 모든 것이 서연이와 할머니를 위해 움직였다.
‘할머니 어깨도 아프셨구나.’
구름이가 할머니의 산책을 위해서였다면 요정들은 어깨가 아픈 할머니의 외투를 받아 주기 위함.
돈으로도 능력으로도 막을 수 없는.
노화.
세월이 야속하게도 할머니는 늙어 갔고.
서연이는 그런 할머니를 돕기 위해 능력을 더욱 빨리 개발했다.
기특하면서도 슬픈 이유.
강현이 감았던 눈을 뜨자.
“…….”
자신을 바라보는 수십의 가구와 요정들이 보였다.
그리고 강현이.
“다들 고마워.”
진심을 담아 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서연이의 기특한 마음에도 또 군말 없이 옆에서 보조해 주는 이들의 헌신에도.
모두 고마웠다.
그런 그를 보며 다들 보람찬 미소를 짓길 잠시.
“아닙니다, 행님.”
“맡겨만 주십시오, 행님.”
“다 쓸어버리겠습니다, 행님.”
“천장이고 찬장이고 소파 밑이고 말씀만 하시면 쓸어버리는 건 순식간입니다, 행님.”
“닦는 거 담그는 거 다 맡겨 주십시오, 행님.”
녀석들이 참 분위기에 맞지 않는 험악한 말로 화답했으나.
그 말들마저도 속삭이듯 작아 서연이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말투가 좀 험하면 어떠한가.
“그래, 잘 부탁할게.”
강현이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서로의 유대감이 생겨난 순간.
[고물 동생의 작은 소망에 담긴 따뜻한 기억을 읽었습니다. 혈족 특성으로 최서연의 능력 상상의 나라와 당신의 능력 일부가 연결됩니다]
[사용자 호칭 훈련에 미친 남자, 전설적인 훈련병 및 튜토리얼 보상 경험치 두 배 효과를 동생 최서연과 공유합니다!]
[대상에게 맞는 호칭과 효과로 변경합니다!]
[기존 호칭을 한창 자랄 나이, 전설적인 상상력으로 변경합니다. 한창 자랄 나이 – 훈련 효과 두 배, 전설적인 상상력 – 상상을 자극하는 장소, 상황 돌입 시 성장 속도 두 배 증가 적용!]
강현과 서연이의 능력 일부가 서로 이어졌고 강현이 적용받는 훈련 효과가 서연이에게도 적용되었다.
거기다 서연이에게 맞게 변경되기까지.
모두가 축복하는 자리, 세상 행복한 얼굴로 잠든 동생과.
그 동생을 바라보며 더욱 나은 내일을 기대하는 오라비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머물렀다.
* * *
봄, 옅은 새싹들이 난 지도 꽤 지나 화려한 꽃이 폈고.
처음엔 여렸던 새싹들도 점점 짙푸르게 변할 즈음.
“청팀 이겨라! 청팀 이겨라! 청팀 이겨라!”
“청팀 응원 점수 100점 추가!”
“우와아아아아!”
많은 초등학교에선 봄 운동회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서연이가 다니는 학교도 마찬가지. 다만 좀 특이한 점이라면.
“자, 그럼 홀로그램 장애물 달리기 준비!”
땅!
선생이 총이 아닌 손가락에서 불꽃을 튕겨 냄과 동시에 아이들이 장애물을 향해 달렸다.
후우우웅.
아니 몇몇은 날았다.
얼음을 타고 또는 발에서 불을 뿜어내며.
강현이 아이들 앞을 막아선 홀로그램들을 보며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저게 운동회야 훈련이야?”
방금 분명 장애물이 아니라 거의 함정 수준의 홀로그램을 본 것 같은데 말이지.
강현이 이해할 수 없는 능력자의 세계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연병장, 아니 초등학교 운동장 한쪽.
“백팀, 백팀, 백팀 이겨라!”
한창 자신이 속한 팀을 응원하는 서연이가 보였다.
친구들과 함께 열심히 응원하는 동생의 모습에 강현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그런 오빠를 발견한 서연이가.
“오빠! 파이팅!”
강현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같이 학교에 도착.
“어머, 서연이 오빠분이세요?”
“네, 최강현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서연이 담임이에요.”
처음 서연이 담임 선생님과 인사를 할 때.
“우와 서연이네 오빠래!”
“반장 오빠? 대박!”
“정말? 정말로?”
강현을 처음 본 아이들의 시선이 모조리 그에게로 쏠렸다.
특히 여자아이들은 강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모습.
때론 어른보다 아이들의 시선이 솔직할 때가 있는 법.
강현이 다른 학부모들과도 인사를 나눈 후.
“자, 그럼 초등학교 1학년 학부모님들 모두 출발선에 서 주십시오.”
강현을 비롯한 1학년 반장 학부모들이 출발선에 섰다.
얼핏 얼핏 풍기는 기운을 느끼며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이게 능력자 달리기야 학부모 달리기야.’
아이들도 범상치 않더니 어찌 된 게 부모님들은 더 범상치가 않다.
그럴 법도 한 게 서연이가 다니는 초등학교는 바로.
창연 특수 능력자 초등학교.
창연 재단에서 세운 능력자 학교로 아이들의 능력도 비범하지만 학부모들의 능력이나 재력도 비범했다.
심지어 유명 길드 헌터인 경우도 왕왕 있으니.
“하하 이거 옛날 생각나고 좋은데?”
“이거 늙어서 무릎이 예전 같으려나 모르겠어.”
“장애물이라니 참 추억이 새록새록 하구먼.”
학부모 대부분이 서로들 아는 눈치.
그중 누군가.
“근데 젊은 친구는 괜찮겠어요? 보아하니 힘들어 보이겠는데?”
“그러게, 동생이 반장이라고 참가한 거 같은데 괜히 다치지 말고 기권해. 일반인이 함부로 덤볐다간 크게 다쳐.”
강현을 걱정했고.
몇몇이 동의했다.
강현이야 이번에 처음 얼굴을 비추었으니 그가 능력자인지 뭔지 모르는 게 당연.
“듣자 하니 군인이라며?”
“그래 괜히 무리하지 말고… 또 부대 가서 고생도 해야 하는데.”
다만 강현이 군인이라는 건 알고 있는지 그의 군 생활을 걱정해 주었다.
휴가 나와서까지 어린 동생 운동회에 와 준 군인 오빠가 기특해서 하는 걱정들.
아저씨들이자 아버지들이니 강현의 중압감을 모를 리가 없다.
그들의 말에.
“감사합니다. 하지만 할 수 있습니다.”
강현이 공손하게 미소 지으며 괜찮다 답했고.
“준비!”
준비 신호에 자세를 잡았다.
곧.
땅!
신호가 울림과 동시에.
파앙!
강현이 쏘아져 나갔고.
순식간에 지나치는 그를 보며.
“빠르네?”
“어, 빠르네.”
아저씨들과 아이들이 입을 쩍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