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멋진 사나이
그러니까.
“할머니?”
다시금 불러 보는 그리운 호칭.
보통은 그렇지 않은가.
집에 휴가 나온 손주.
대문을 열며 할머니를 우렁차게 외치면.
“아이고, 우리 강아지 왔구나!”
안방에서 아침 드라마를 보며 혀를 끌끌 차시던 할머니가 방금까지 깎아 드시던 사과마저 놓고선 일어나 반가운 얼굴을 맞이하러 나가는 모습.
약간 탄, 그리고 좀 더 커진 늠름한 손주건만.
“우리 강아지, 왜 이리 말랐어? 어여 와서 밥 먹어라.”
할머니들 눈에는 왜 항상 말라 보이는지.
아직 점심시간도 아니건만 냉장고에 있는 반찬 주섬주섬 챙겨 고봉밥까지 올려 주고 나서야 그네들의 마음이 풀리는 법.
그래, 강현이 보았던 모습도 항상 그랬는데.
“왕할머니 등장하십니다. 모두 차렷!”
어느새 집안에서 우르르 몰려나온 가구와 생활품 일체가 정렬했고.
나무들이 가지를 빳빳이 세웠다.
웅장하다면 웅장하고 이상하다면 이상하다고 할 수 있는 풍경 속.
“우리 강아지, 얼굴 좀 보자!”
강현을 가장 당황하게 한 건 바로 할머니의 모습.
아니, 모습이야 여느 때와 같았다.
평소 입으시는 편한 꽃무늬 몸빼바지와 조끼.
분명 지난번 좋은 옷도 사드렸건만 본인이 편하다고 저것만 입으셨다.
거기에 자외선 차단을 위한 짙은 선 캡.
여느 때와 같은 옷차림.
문제는.
“근두운……?”
할머니가 타고 있는 저 구름.
그래, 사람이 평범하면 무엇하겠는가.
지금 빽빽이 서서 할머니를 기다리는 집기들과 나무들 사이.
구름을 타고 유유히 내려오니.
사람 빼고는 일반적인 게 하나도 없잖아!
할머니가 탄 구름이 찬찬히 땅에 도착하자.
“산책은 즐거우셨습니까! 왕할머님!”
가구들을 비롯한 뒷동산 나무 전체가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고.
“아이고, 그런 것 좀 하지 말라니까.”
할머니가 녀석들을 향해 손사래를 치고는.
“아.”
느린 걸음으로 강현에게 다가왔다.
강현도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느린 걸음.
할머니 또한 반가운 손자에게 얼른 다가가고 싶은 마음에 반해 따라 주지 않는 몸이 답답했는지 잠시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보았고.
“저 왔어요, 할머니.”
강현이 먼저 성큼 걸음을 옮겨 할머니의 앞에 섰다.
“응? 아이고, 우리 강현이 왜 이리 말랐니?”
할머니가 훈련 때문에 검게 그을린 손주의 볼을 어루만졌다.
어째 예전보다 더욱 말라 보이는 얼굴.
방금까지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아팠던 당신의 무릎은 잊어버렸는지
“군대 가서 먹을 것도 못 먹고 고생만 하는 거니?”
할머니가 손주의 끼니부터 걱정했다.
자신의 아픔보다는 손주가 먼저인 할머니의 마음을 알았기에.
“아니에요. 완전 잘 먹어요.”
강현이 애써 방금 본 모습에 관해선 이야기 않고 밝게 미소 지었다.
할머니 또한 강현이 힘든 걸 티 내지 않는 성격이라는 걸 알기에 손주의 삐쩍 마른 팔뚝을…….
“아이고 두껍네…….”
전혀 삐쩍 마르지 않은 팔뚝을 만지고는 화들짝 놀랐다.
“무슨 나무통을 달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얼굴은 말랐는데 팔뚝은 무슨 장사 저리 가라 수준.
할머니의 놀란 얼굴을 본 강현이 더욱 밝게 미소 지으며 팔뚝에 힘을 주었다.
“오히려 지방은 빠지고 근밀도가 올라간 완벽한 몸이 되어 돌아왔다구요!”
“뭐가 빠져? 뭐가 올라가?”
물론 체단장에 상주하는 근육 덩어리들이나 알 법한 말에 할머니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들어가요. 제가 맛난 거 해 드릴게요.”
강현이 할머니와 보폭을 맞춰 걸으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왕… 할머니… 어서… 오십시오.”
들어가는 둘의 등 뒤에서 그제야 뒷산이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덩치가 커서 꽤 느린 모양.
물론 집안에서도.
“왕할머니 오셨습니까! 오늘 아주 화끈하게 튀겨 드리겠습니다!”
“한 놈 담그면 되겠습니까? 어느 놈을 담글까요? 열무, 총각, 동치미?”
프라이팬과 김치냉장고가 할머니를 살벌하지만 반갑게 맞이했고.
“자, 줄 맞춰 입장!”
“왕할머니께 경례하며 입장!”
“충-성!”
숟가락과 젓가락들이 할머니에게 인사하고는 풍덩풍덩 물속으로 몸을 담구는 모습.
“꺄르르륵! 할머니 오셨어요?”
“옷 저희 주세요.”
그나마 비교적 멀쩡한 요정들이 할머니의 외투를 받아 들어 방으로 날아갔다.
“뀨우우우.”
요정들을 보며 구찌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의 귀염둥이 포지션이 빼앗겼다고 생각한 모양.
강현이 그런 구찌의 기를 살려 주기 위해 머리를 쓰다듬으며.
“음, 그러니까. 이게.”
집안에서도 이어지는 별세계에 평정심을 유지하려 말을 고를 때.
할머니가 강현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서연이가 요즘 학교에 가더니 취미를 붙였지 뭐니.”
대략적인 사정을 설명했다.
강현도 예상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그때 보았을 때가 겨울이었으니 이제 몇 달 흘렀을 뿐.
그런데 이 정도의 성장 속도라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어쩌면 서연이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요?”
강현이 이렇게 생각할 법도 했고.
“그렇지? 강현아, 서연이가 재능이 있는 게 맞지?”
손자의 말을 들은 할머니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아니, 글쎄… 안 그래도 서연이가 보는 시험마다 백 점을 맞아 오는 통에. 거기다 학교에서도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이번에 반장이 되었다지 뭐니? 우리 서연이가 말이야. 응? 거기다 우리 서연이가 마음씨도 얼마나 고운지.”
평소 서연이 자랑이 얼마나 하고 싶었는지.
아니 아끼는 손자에게 아끼는 손녀의 소식을 얼마나 전하고 싶었는지.
할머니가 강현이 없는 동안 있었던 자랑거리들을 마구마구 풀었고.
강현 또한 동생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던 중.
잠자코 있던 알람 시계가.
“서연이 하교 시간! 서연이 하교 시간!”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할 일을 알려 주었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오랜만에 본 반가운 손자와 서연이 이야기하느라 시간도 까먹은 탓.
서연이 하교 시간이라는 말에 놀란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려다가.
“아윽.”
무릎을 짚으며 멈추었다.
보아하니 급하게 움직이려다가 탈이 난 모양.
“왕할머니!”
“괜찮으십니까!”
“어머나! 급히 움직이지 마시라니까요.”
주변에 있던 가구들과 요정들이 할머니를 향해 우르르 몰려왔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뀨우우!”
강현과 구찌도 놀라 다가갈 때.
“아이고 괜찮다, 괜찮아.”
할머니가 손을 휘저으며 주변을 안심시켰다.
“늙으니 작은 거에도 멈칫멈칫할 때가 있어요. 참 세월이 빠르지?”
너는 군대에, 서연이는 학교에 들어갔다니 말이다.
할머니가 아픔으로 인해 얼굴을 찡그린 와중에도 어느덧 훌쩍 성장한 강현과 이제 막 피기 시작한 서연이의 재능을 생각하고는 억지로 미소 지었다.
그래 이렇게 행복한데 이깟 것쯤이야.
“제가 갔다 올게요. 집에서 쉬고 계세요.”
“그래 주겠니? 오랜만에 이 할미가 점심 준비하마.”
“아녜요. 밥도 제가 할게요. 쉬고 계세요. 갔다 올게요.”
강현이 집을 나서 동생을 데리러 가려 하자.
“모두 가즈아!”
“전쟁이다!”
“행님! 제가 아주 박살을 내 버리겠습니다요!”
“오늘은 어디 팝니까? 대명 놀이터 파? 아니면 꿈에 그린 가로수파?”
그의 뒤로 나무들을 비롯한 집기들이 우르르 뛰쳐나오니.
마치 어디 싸우러 가는 듯한 말투에 강현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이건 무슨 컨셉……?”
“…뀨우.”
아무래도 오늘 서연이를 만나면 좀 깊은 대화를 나누어 봐야 할 것 같다.
“다들 집에 있어. 따라 나오지들 말고.”
“알겠습니다 행님…….”
“그리고 행님이라 부르지 말고.”
“네, 형님.”
“그래. 갔다 온다.”
강현의 단호한 답에 다들 시무룩한 표정을 할 때.
헥헥헥헥.
“…….”
강현이 자신의 옆에서 몽글몽글거리는 구름을 보고는 잠시 콧잔등을 긁적였다.
발밑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몸을 부비는 게 마치 애교를 떠는 모양새.
강현이 그냥 나가려 하자.
끼이이잉.
녀석이 축 처지며 몸을 바닥에 낮게 깔았고.
“…구름은 와.”
강현이 어쩔 수 없이 허락하자 신나서 따라붙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다들 기억해 둬라. 큰형님은…….”
“귀여운 걸 좋아하신다.”
지금껏 형님 거리던 녀석들이 새로운 정보를 머릿속에 각인.
“드디어 우리의 시대!”
“요정하면 귀여움이지!”
요정들이 큰형님의 사랑을 받을 생각에 작은 주먹을 앙 쥐었다.
* * *
“서연아! 떡볶이 먹고 가자!”
“반장 떡볶이 먹자!”
막 1학년 수업이 모두 끝난 시각.
서연이를 둘러싼 친구 몇몇이 하굣길 매콤달콤한 간식, 떡볶이를 사 먹자고 유혹했으나.
“우음.”
서연이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흔들었다.
“미안, 오늘 안 될 거 같아!”
“아, 반장은 맨날 안 먹는데!”
“그럼 우린 먹으러 간다!”
“안녕~.”
“잘 가 서연아~.”
서연이가 친구들과 막 인사를 나누고는 학교 주차장에 도착하자.
그녀를 기다리던 한 팀장이 서연이를 향해 번쩍 손을 들었고.
“한 아조씨!”
“그래, 서연아.”
“안녕하세요~.”
서연이가 오도도 달려오다 문득 양손을 앞에 모으고는 공손히 인사했다.
그 귀여운 모습에 한진명이 함박웃음을 짓고는.
“갈까?”
“네!”
서연이를 차에 태워 교문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헤…….”
조수석에 앉아 창밖을 보며 입을 벌리는 서연이를 발견하곤 힐끗 옆을 보자.
“왜, 같이 떡볶이 먹지 않고?”
학교 친구들이 모여 떡볶이를 먹는 모습이 보였다.
한진명의 물음에.
“우움.”
잠시 흔들리던 서연이가 고개를 파다닥 흔들었다.
“안 돼요!”
“응? 왜? 친구들이랑 먹으면 맛있을 텐데?”
서연이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한진명이 의아해할 때.
“오빠눈… 군대에서 맛있는 거 못 먹는다고 했어요.”
서연이가 따르는 어른과 만나서 그런지 자신의 본심을 이야기했다.
“막 화장실 칸에서 초코파이 울면서 먹고… 이상한 똥국에 맛없는 해물비빔소스 먹는다고 했어요. 서연이는 오빠 올 때까지 먹는 거 참을 거예요.”
오빠가 군대에서 고생하고 맛없는 거 먹을 동안 자신도 맛난 건 먹지 않으리라.
어린 동생의 참으로 기특한 마음이 갸륵하고 어여뻤으나.
“그런 건… 어디서 들었니?”
문제는 그런 정보의 출처.
한진명도 가끔 서연이가 만들어 낸 환상이나 때로 하는 말들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고.
마침 이번이 기회다 싶어 물어봤다.
“우음, 국방거탑! 너튜브! 거기서 그렇게 보여 줬어요!”
“아… 그럼 가구들한테는 대체 뭘 보여 준 거야?”
“신세계! 대부!”
한진명이 비로소 밝혀진 진실에 이마를 짚었고.
“그건 대체 누가 보여 준 거야? 혼자 찾아볼 수도 없을 텐데.”
그 원흉을 찾아내려 했다.
그리고 그 원흉은 바로.
“혜원 언니랑 세아 언니!”
이혜원과 황세아.
사실 둘이 위층에서 낄낄거리며 본 너튜브 시청 목록을 서연이가 어쩌다 발견했던 것.
영화는 서연이가 잠들고 나서 봤다지만 가구들은 잠들지 않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건 분명하기에.
“이 여자들이 진짜.”
한마디 해야겠다고 마음먹을 때.
사실 밤새 영화를 본 자리엔.
“아! 지윤 언니도 있었어요!”
바로 한진명의 딸 한지윤도 있었다.
충격적인 소식에 한진명이 순간 입을 다물었을 때.
“그런데요. 있잖아요. 아조씨.”
서연이가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보며 다른 용건을 꺼냈다.
사실 떡볶이를 못 먹은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우리 이번에 봄 운동회 하는데…. 반장들은… 학부모 달리기가 있거든요…….”
며칠 후 있을 봄 운동회.
문제는.
“와 주실 수 있어요? 달리기만이라도요.”
서연이를 위해 달려 줄 학부모가 없다는 점.
그래서 그나마 가장 의지하는 한진명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평소라면 당연히 가겠다 했을 한진명이 어쩐 일로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집에 가서 이야기할까?”
“네에…….”
그의 말이 완곡한 거절이라 생각했던 걸까.
서연이가 침울한 표정으로 내밀었던 가정 통신문을 슬그머니 가방에 다시 집어넣었고.
그 모습을 보며 한진명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분명 섭섭할 텐데, 떼를 써도 될 텐데 투정 하나 없는 모습.
이윽고 차가 집 근처에 도착했고.
“어? 어어? 어어어!”
차 안에서 밖을 바라보던 서연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집으로 향하는 골목 앞에 서 있는 건 바로.
“오빠다!”
군대에서 눈물 젖은 초코파이와 해물비빔소스를 먹으며 고생하는 강현.
물론 사실이 아니었으나.
“오빠아아!”
어린 서연이가 알기론 그러니 강현이 더 반가울 수밖에.
그녀가 차에서 내리기 전부터 눈물을 글썽거렸고.
“이제 봄 운동회 갈 사람이 생겼네?”
“……!”
한진명이 서연이의 고민을 단번에 해결.
탈칵.
차 문이 열리자마자.
“오빠아! 오빠!”
서연이가 강현을 향해 오도도도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강현도 달려오는 동생을 향해 양팔을 뻗었고.
단번에 서연이가 강현의 품속으로 골인.
아까 한진명에게 했던 배꼽 인사는 이미 반가움에 잊어버린 상태.
서연이가 강현의 품에 안겨 울먹울먹한 얼굴로.
“오빠 왜 이제 왔어. 보고 싶었는데.”
“그래, 미안. 많이 기다렸지? 오빠도 서연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히이잉.”
한껏 투정을 부릴 때.
[긴급 퀘스트 ‘멋있는 사나이 많고 많지만 바로 내가’ 퀘스트를 발동합니다]
[성공 조건 – 봄 운동회에서 그 누구보다 멋진 오빠가 되어 주세요!]
‘그건 자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