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달라졌습니다.
깊은 참호 안.
이미 지금까지 쓰러뜨린 몬스터 홀로그램만 수백.
그러나 다시 거칠게 울리는 땅의 진동과 눈앞을 빽빽하게 채우며 달려오는 몬스터들.
강현을 빠진 3중대원 전체가 참호 안에서 놈들을 바라보았다.
“허억, 허억, 허억.”
거친 숨과 펄떡이는 심장이 이미 한계치에 달했으나.
“모두 전투 준비!”
자리에 있는 모두가 굳은 결의와 의지로 무기를 쥐었다.
“우리가 밀리면 이 뒤는 우리의 가족, 친구, 애인이 있다! 그들을 누가 지켜야겠는가!”
“특임대!”
“그중에서도!”
“우리!”
“가자 전우들이여! 무기를 들고 몸을 바로 하라! 몬스터들이 아직 몰려오고 있다!”
그 비장한 연설에 모두의 눈에 열망이 들어찼고.
3중대를 이끄는 남자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제5차 몬스터 웨이브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뒤에서 투지에 찬 눈빛을 빛내던 3중대원들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 갔다.
“대체 왜 저기서 저러신답니까? 저분은?”
“나도 몰라. 그냥, 그냥 죽고 싶어.”
“여기서 죽을 수 없습니다. 지금 뒤에는 우리의 가족, 친구.”
“고마해라. 마이 들었다 아이가.”
지금 3중대 선봉엔 원래라면 상상도 못 할 남자가 자리했고.
다들 그의 명령만을 기다렸다.
심지어 서윤진 대위마저 그에게 지휘권을 양보.
천하의 서윤진 대위가 선봉을 내주다니 기가 막힌 일이라 하겠지만.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
“원래 태극 훈련에 저런 거물들이 참가했던 겁니까?”
“그냥… 죽여 줘.”
“그럴 리가 있냐. 지금 뭔가 이상하다니까. 지금 정신 나갈 거 같다고.”
지금 3중대 선봉에 선 남자를 보면 다들 고개를 끄덕일 터.
다만 당사자인 3중대원들만은 눈을 껌뻑이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곧 3중대 가장 선두.
이 전쟁터 속에서도 새까만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무기를 치켜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전투에서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인 병사에게는 포상을 수여하겠다!”
“…….”
분명 군인도, 지휘관도 아니니 믿을 수 없는 약속이나.
우아아아악!
방금까지만 해도 죽을상을 했던 병사들이 일제히 고함을 질렀다.
저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다!
바로 창연 길드장 태풍 김도현이라면!
“죽인다! 몰려오는 몬스터 놈들 모두 죽여 버린다.”
“피와 전투, 광기 그리고 포상을! 태풍 김도현을 따르라!”
“크흐흐! 크하하하! 포상이다! 포상 덩어리들이 온다!”
“누구도 이 참호를 넘어가지 못한다! 지금만큼은 우리가 창연이다!”
그들이 반쯤 미쳐 버린 눈으로 몬스터 홀로그램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고.
쿠, 쿠르르르?
미취리리리린!
3중대원들의 광기를 마주한 홀로그램마저도 공포에 떨었다.
그러나 이미 입력한 대로 움직이는 놈들이 멈출 리 만무.
어느새 서로의 숨소리도 들을 수 있을 거리까지 접근.
“일제 돌격!”
“일제 돌격!”
남자를 선두로 3중대원 전부가 지금까지 몸을 보호해 주던 참호에서 뛰쳐나와 몬스터들을 향해 마주 달렸다.
태풍 김도현이 손에 익은 자신의 애병을 오우거를 향해 휘두르려는 순간.
파지지직!
후웅.
스파크가 반짝하더니 홀로그램이 마나로 화해 사라졌고.
그의 힘찬 일격이 참으로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어라?”
“어어?”
“사라졌습니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모두가 의아해하며 멈춰 선 채 서로를 바라볼 때.
“덤벼라! 내 목숨을 걸고 막아 주마!”
김대영 상병이 마치 주변의 몬스터가 사라졌단 사실마저 모르는 듯 미쳐 날뛰었다.
물론.
“기, 김대영 상병님?”
“뭐야, 왜 저래? 갑자기 미친 거 아냐?”
“몬스터 사라지니까 열심히 하는 척하는 거 봐, 저거.”
주변에선 방금까지만 해도 죽여 달라는 둥, 곧 병장인데 훈련이라는 둥 싫은 소리만 한가득하던 김대영이 왜 저러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된 걸 확인한 그가.
“몬스터가 없어도 있는 것처럼 막는다! 그게 훈련!”
지금껏 쌓아 온 짬에서 나온 군 생활력을 폭발!
“……!”
“저 포상에 미친 인간!”
“저게 군 생활 짬밥?”
“미쳤다. 강현이 옆에 있더니 저 인간도 미쳤어!”
주변에 있던 중대원들이 눈을 질끈 감았다.
미처 생각지 못했다!
“입 벌려! 포상 들어간다!”
김대영의 태도에 감동한 태풍 김도현이 포상을 주겠다 약속!
이를 본 다른 병사들도.
“몬스터다! 모두 방어!”
“으아아악!”
“오우거다!”
일제히 공중에 무기를 휘두르며 에어 훈련을 진행.
“그거다! 바로 그거야!”
3중대가 있는 곳에서만 이상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직 연락은 없나?”
최전선에서 모든 훈련이 멈춰 버린 훈련장을 바라보던 강준진 준장이 짜증스럽게 입을 열었고.
“현재 대연 시스템에 급하게 수리를 요청. 담당자가 온다고 합니다.”
“아니, 지원과는 대체 어떻게 준비를 했길래!”
강준진이 갑자기 멈춰 버린 대규모 마나 홀로그램 장치를 보며 벌컥 화를 내려다.
“후우, 뭐 이거야 실수는 아니니 어쩔 수가 없겠지.”
“죄송합니다.”
이들이 잘못한 것이 아님을 생각하고는 화를 내리눌렀다.
“1군단과 2군단은 어떻게 진행하고 있다던가. 그쪽 장치는 멀쩡하다고 하나?”
“네, 기존 홀로그램 장치에는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허참, 이번에 우리 군단에 새로 도입한 홀로그램 장치들만 나가 버렸다고? 아무래도 신제품이라서 그런 건가?”
“죄송합니다.”
강준진이 이 황당한 상황에 침음을 흘렸다.
본디 태극 훈련은 게이트 브레이크 시에 수도권 방어선을 유지하기 위한 훈련.
1군단, 2군단, 3군단 간의 긴밀한 연락과 훈련 진척 상황이 맞아 돌아가야 하는데.
“아냐. 새로운 장비니 만큼 자네들도 해결할 수 없는 거지. 그런데 고치기도 어려울 정도인가?”
“그게 새로운 장비다 보니 기존 수리 방법으로는 고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기껏 새롭게 도입한 새로운 훈련 장비가 망가졌다는 것도 불편했지만.
역시 가장 짜증이 나는 건.
“이번엔 진짜 재미있는 훈련 내용을 준비했는데 말이야.”
바로 이번에 새롭게 추가한 훈련 내용을 보여 주지 못할까 봐.
“더군다나 산군, 창연이란 귀중한 손님이 왔는데 이런 대접이라니.”
그들이 있기에 이번 새로운 훈련 상황을 더욱 기대했건만.
“얼른 대연 쪽에 언제나 수리 가능하냐고 물어 봐!”
“네, 알겠습니다!”
강준진의 명에 군단 지원과장과 작전과장이 부랴부랴 지휘소 텐트를 나섰다.
그리고 때마침.
“중령 선설민. 특별 임무 해결 후 복귀했습니다!”
특별 타격대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선설민 중령이 막사로 복귀.
그의 복귀 신고에 강준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참여한 길드장들과 준비한 네크로맨서가 있는 지역으로 이동. 단번에 제압했습니다.”
선설민 중령이 결과 보고를 시작했다.
“보니까 꽤 시끄럽게 움직이더군?”
“죄송합니다. 은, 엄폐에 실패했습니다.”
“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정이 밝은 것을 보니 뭔가 있긴 있었나 보구먼.”
“네, 한빛 길드 책임자 이성수 헌터가 실수를 저질러 몬스터들의 시선이 집중. 많은 난관이 예상되었습니다만.”
“다만?”
“최강현 상병이 직접 나서 상황을 정리. 이후 빽빽하게 서 있던 몬스터 벽 사이로 단 한 발의 총알을 발사하여 네크로맨서를 암살했습니다.”
“푸하하하하! 그랬단 말이지? 이거 최 장군이 또 한 건 해냈구만!”
강현이 활약했단 소식에 강준진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기분이 나빴건만.
“그래서? 한 발로 A급 네크로맨서를 죽여 버렸단 거야?”
“그렇습니다.”
“하하핫! 이거 이제 군단 최고의 스나이퍼 이름이 바뀔지도 모르겠네요? 주임 원사?”
“허어, 그러게 말입니다. 뛰어나단 소리는 들었는데 그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강준진의 기분이 좋아지자 옆에 있던 특임대 주임 원사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다른 길드보다 본대 병사가 활약했다는데 싫어할 지휘관이 어디 있단 말인가!
강준진이 웃고 나자 지휘소 내 분위기가 좀 풀렸고.
기분이 풀리고 나자 마침.
“아! 자네 대대에 그 대연 시스템 자제 있지 않아?”
“있습니다. 황세아 중사라고.”
강준진 준장의 머릿속에 잊고 있던 사람 하나가 떠올랐다.
서윤진이 산군 길드의 손녀라면 황세아는 대연 시스템의 자제이자 이번 새로운 홀로그램 장치 도입을 직접 추진했던 이.
“그래! 그 친구 좀 데려와 봐! 당장!”
덕분에 이번에 개인 홀로그램 장비부터 새로운 대규모 홀로그램 장치를 도입할 수 있었다.
선설민을 보자 황세아의 존재가 생각났고.
“중령 선설민! 바로 데려오겠습니다!”
선설민이 지휘소 밖으로 나가려 할 때.
“아, 가는 김에 서윤진 대위와 산군, 창연 책임자들이랑 헌터분들도 데려오게. 이후 훈련 상황에 대해 나누어야 할 이야기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마침 훈련이 멈춘 상태이니만큼 겸사겸사 이번 훈련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길드 책임자들과 작전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 강준진 준장이 이들을 불러오라고 명령.
선설민이 서윤진과, 황세아, 창연, 산군 훈련 팀을 소집했다.
그들이 모두 지휘소로 향해 자리를 비운 그 시각.
“이런 썅! 내가 그딴 취급을 받아야 했어? 대답해 봐! 내가 그딴 쓰레기 취급받으면서 참아야 했냐고?”
특별 임무가 끝나고 따로 떨어져 나온 이성수가 바락바락 성을 내자.
“…….”
옆에 있는 헌터가 침묵으로 답했다.
마음 같아서야.
‘정신 좀 차려라 이 멍청한 새끼야. 어찌 된 놈이 나아지질 않냐 나아지질.’
한바탕 따끔하게 혼을 내고 싶었으나.
“왜 대답이 없어!”
“맞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는 건 말이 안 되죠.”
길드 후계자에게 함부로 할 순 없는 법.
“반드시 복수한다. 반드시!”
자신의 잘못은 생각지도 않고 치졸한 복수심을 불태우는 길드 후계자라.
‘다른 길드를 알아봐야겠군.’
도저히 그려지지 않는 미래에 이성수를 따르던 훈련 팀 핵심 헌터가 다른 길드로 옮길까 생각할 때.
“어! 저거 뭐야!”
앞서 걷고 있던 이성수가 재미있는 광경을 발견하고는 눈을 빛냈다.
안 그래도 화가 잔뜩 나 있는 참.
그런데.
“이성민!”
마침 화를 풀 상대가 저기 있지 않은가!
그가 한빛 길드 주변, 막 임무를 끝내고 돌아가는 3중대 행렬을 발견.
대뜸 자신의 동생 이름을 불렀고.
이성민이 형을 발견했으나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야, 이 새끼야! 어딜 모른 척을 해!”
그러자 이성수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더욱 거칠게 이성민을 불렀다.
아깐 지네 선임이 자신을 무시하더니 이번엔 저 새끼가 날 무시해?
“그래, 너 잘 만났다.”
이성수는 어떻게 해서든 화를 풀어야 하는 성미.
강현에겐 화를 내질 못하니 이번엔 이성민을 타깃으로 잡은 것.
“너 이성민 이 새끼가! 이쪽 안 봐!”
그가 성큼성큼 3중대 행렬을 향해 다가갔고.
“어? 뭐야, 누구야. 아는 사람이냐?”
3중대원들이 그 거친 소리에 이성민을 보자.
“아, 저희 형입니다. 잠시만 인사 좀 하고 오겠습니다.”
이성민이 평소답지 않게 곤란하단 얼굴로 잠시 행렬을 이탈.
이성수가 3중대 쪽으로 더 다가오기 전에 얼른 형 앞으로 다가갔고.
“형, 오랜만.”
동생이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여는 순간.
퍼억.
이성수가 대뜸 이성민의 방탄모를 손바닥으로 거칠게 후려 갈렸다.
“야, 이 개새끼야. 형이 불렀는데 쌩을 까? 이 새끼가 정신을 어디다 빼놨나. 왜 군대로 도망가니까 보이는 게 없냐?”
이후에도 거친 폭언이 이어졌고.
“어어? 저거 말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3중대원들이 그 모습을 보며 당황했다.
처음에는 남의 집안일이기에 두고 보려 했건만.
“왜? 씨발 군대에 말뚝 박게? 하긴 너 같은 새끼가 길드에 돌아올 수는 있겠냐? 거기서 평생 있는 게 이득이지.”
형이라는 이성수의 폭언이 점점 수위를 높여 갔고.
“…….”
형이라는 사람 주변에 있는 인간들은 둘을 그저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중.
누구 한 명 나서서 말려 줄 법하건만.
저런 모습이 익숙한 건지 다들 피곤하단 얼굴로 참견하지 않았다.
계속 이어지는 화풀이.
결국.
“말려야겠습니다. 이건 아니지 말입니다.”
장만수 일병이 벌게진 얼굴로 성큼성큼 나섰고.
그가 자기 후임인 이성민을 감싸러 다가섰을 때.
“이제 그만하십쇼. 다들 보고 있지 않습니까.”
“뭐 하는 짓입니까.”
장만수를 비롯한 김대영, 장건철 등 1분대원 전체가 어느새 이성민의 주변에 섰다.
그리고 그 뒤엔.
“성민아, 본대 복귀해야지.”
“가자.”
3중대원 전체가 서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가족 간에 일이니까 빠지지? 다들?”
이성수가 입술을 삐뚜름히 올리며 3중대원들을 비웃었다.
“지금 가족 간의 일에 참견하겠다는 건가? 거기다 지금 이 모습은 뭐지? 설마 민간 길드를 위협하는 건가?”
3중대가 이성수를 둘러싼 모습에 그를 따라온 한빛 길드원들도 덩달아 그쪽으로 모여들었고.
“저기 무슨 일 있나 본데?”
“뭐야? 뭔데?”
마침 훈련도 멈췄겠다. 심심해진 사람들이 그쪽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이거 군인들이 민간 길드를 협박하는 거라고 봐야 하나? 너희들 지휘관 누구야. 가서 직접 따지게.”
지휘관이란 이름이 나오자 3중대의 얼굴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지휘관이면 중대장 대위 서윤진.
만일 상대가 정말 중대장님에게 따지면 어떻게 하지?
3중대원들이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고.
“누구냐고! 너희 지휘관이!”
이성수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
3중대원들과 동생 이성민을 더욱 몰아붙일 때.
“이성민.”
무거운 목소리가 현장을 내리눌렀다.
저절로 모두의 고개가 그쪽을 향했고.
“고개 들어. 군인이 어디서, 누구 앞에서 고개를 숙이나.”
“최강현 상병님.”
“고개 들어. 군인은 상대가 장군이라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비굴하게 굴지 않는다 배웠잖아. 어깨 펴고 차렷.”
“…….”
강현이 이성민에게 차려를 명령했고.
이성민이 자기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너 지금 뭐 하는.”
이성수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려 했으나.
“봐라. 눈치도 없고 능력도 없는 주제에 부모만 믿고 꺼드럭거리는 인간을. 너는 지금 어떻지? 저 인간이랑 같은 모습인가?”
강현의 말이 현장 분위기를 얼렸고.
“아닙니다. 달라졌습니다.”
이성민이 눈을 빛내며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