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물수집으로 무한성장-163화 (163/277)

163화 새로운 훈련장

예전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나왔던 클리셰.

섬에 갇힌 연인, 끊긴 배, 여인숙에 남은 방은 단 하나.

어색하고 멋쩍은 표정으로 앉은 연인.

남자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연다.

“오빠… 믿지?”

“오빠…….”

“오빠 손만 잡고 잘게.”

“응, 알았어. 정말 손만 잡고 자야 한다?”

부끄러워하는 여자와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

이불을 펴놓고 나란히 누운 연인 사이에 도는 묘한 기류.

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다음 날.

‘미친놈이 진짜 손만 잡고 잤네.’

번쩍 눈을 뜬 여자가 드르릉드르릉 코를 골고 있는 남자를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길 잠시.

“오빠, 오빠!”

“드릉, 컥 커헉! 응? 왜?”

남자가 깜짝 놀라 잠을 깨고선 주변을 둘러보다가.

어느새 날이 밝은 걸 보고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아, 아냐. 정말 잠깐 잠만 자는 척하다가 움직이려고 했어. 정말로.”

“흥, 됐어! 무슨 코 골면서 잘 자더만! 내가 매력이 없다 이거지? 평생 여기서 잠이나 자!”

여자가 나가려는 순간.

“자기야!”

남자가 뜨거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왜, 왜에. 갑자기 왜 이래.”

여자가 얼굴을 붉히는 순간.

역사는 밤이 아닌 아침에 이루어졌다.

‘역사는… 병실에서……?’

서윤진 대위가 심심할 때마다 읽었던 로맨스 소설의 한 장면을 생각하고는 차오르는 군침을 꿀꺽 삼켰다.

강현이 방금 했던 말.

“저 믿으십니까? 손만 잡겠습니다.”

분명 그거다 그거!

“오빠 믿지? 손만 잡고 잘게.”

이 대사를 군인 버전으로 바꾼 것 아닌가!

강현의 굳건한 눈빛과 내리깐 목소리에 서윤진의 목덜미에 식은땀이 슬며시 배어 나왔다.

‘어, 어떻게 하지? 어떻게 답해야 하지?’

그러니까 지금 고개를 끄덕여야 하나? 아니면 한번 튕길까?

아냐, 튕겼다간 이 기회가 영영 사라질지 몰라.

서윤진 대위의 망상 회로가 맹렬히 돌아가며 뜨끈뜨끈해지기 시작.

강현이 멍하니 있는 그녀를 보며 추가 설명을 이어가려 할 때.

“침대가 좀 좁지 않을까?”

“……?”

서윤진의 깊은 생각 끝에 나온 한마디.

그 말을 들은 강현의 표정이 아득해졌고.

침묵 속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은 서윤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하필 해도 이딴 말을!

“…아니 그게. 그게 아니라! 그냥 침대가 좁다고! 내, 내 몸이 좀 크잖니. 그래서 그래! 다른 뜻이 아니라!”

“아, 그렇… 습니까?”

서윤진 대위의 황급한 변명에 강현이 슬쩍 뒤로 물러나며 그녀를 경계했고.

그런 강현의 모습에 서윤진 대위가 울상을 지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아니 먼저 손잡는다고 했잖아! 자기 믿냐며?”

분명 이상한 말을 꺼낸 건 강현이 먼저였지 자신이 아니다!

서윤진의 억울함이 듬뿍 묻어나는 말에 비로소 강현이 충격에서 벗어나 본래 목적을 떠올렸다.

“아, 그게…….”

“거봐! 강현이 네가 먼저 했잖아! 아주 상병이라고 군기가 빠졌어! 요즘?”

“전 진짜로 손만 잡겠다고 한 겁니다.”

설마 손만 잡겠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서윤진 대위의 표정이 이번엔 시무룩해졌다.

그렇고 그런 게 아니었어?

물론.

‘대체 무슨 생각을 하셨던 거야?’

강현으로선 서윤진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도 모른 척해야 하기에 애써 시선을 피했다.

[전우의 생각을 보여 드립니다. 지금 서윤진 대위는 당신과 이렇고 저렇고 아주 그런 짓을]

‘그, 그만!’

강현이 눈앞에 떠오르는 알림 메시지를 보고는 얼른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이런저런 짓을 생각한 게 아니었는데.’

강현이 거칠게 뛰는 심장을 안정시키고는 입을 열었다.

그가 서윤진에게 그런 말을 한 진짜 목적.

“중대장님, 그 광폭화. 해결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강현의 말에 서윤진 대위가 퍼뜩 고개를 들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어왔다.

얼마나 염원했던가.

지난 혹한기 이후부터 방법을 백방으로 찾아왔지만 결국 모두 실패.

마지막엔 강현에게 부탁해 볼까 했던 자신의 가장 큰 약점 광폭화.

“정말 해결할 방법이 있다고?”

할아버지도 아버지, 어머니도 심지어 본인도 포기한 이 저주와 같은 능력을?

서윤진의 물음에 강현이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생각보다 쉬울지도 모릅니다!”

강현의 발언에 서윤진의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현이 떨리는 중대장의 손을 바라보며 자신이 보았던 알림을 다시금 확인했다.

이전 서윤진 대위가 안전가옥에 찾아왔을 때 떠오른 알림.

[인물 진화를 시작하시겠습니까?]

[이전 인물 퀘스트 호랑이 길들이기 퀘스트를 강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분명 상태창은 인물 퀘스트를 강화하여 인물 진화를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다.

이후로 한동안 말이 없길래 잊고 있었건만.

싱크홀에서 나온 뒤 병원에서 검사를 받는 도중.

[전우 서윤진을 묶고 있던 저주의 사슬이 약해졌습니다]

[인물 퀘스트 호랑이 길들이기를 강화합니다. 강화된 인물 퀘스트 ‘호랑이 힘이 솟아나요’를 시작합니다!]

잊고 있던 인물 퀘스트의 강화 소식이 떠올랐고.

[성공 조건 – 서윤진의 약점 광폭화 스킬을 제거하라]

분명한 목표 또한 제시되었다.

서윤진의 광폭화 스킬을 제거하라.

그리고 그때 강현의 머릿속에 떠오른 장소 하나.

‘검탑.’

아까 도플갱어들을 이용해 외관을 복구하자 떠오른 알람.

[검탑이 제 모습 일부분을 되찾았습니다. 기능이 강화됩니다!]

[정수연의 인격 일부가 검탑을 제어합니다! 기능이 강화됩니다!]

[기능 강화 보상으로 당신 외에 1명의 의식을 검탑으로 데려올 수 있습니다!]

이를 어딘가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마침 고민하던 중.

서윤진의 인물 퀘스트가 떠올랐고.

강현이 또 다른 가능성 하나를 떠올렸다.

‘검탑에 갈 수만 있다면.’

서윤진 대위를 검탑에 데려간다면 광폭화를 제거할 실마리를 찾지 않을까.

강현이 고민보단 행동이라고 판단.

마침 같은 병실에 있는 서윤진에게 말을 꺼내 본 것.

그 과정에서 좀 오해가 있었으나.

“시도는 해 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강현의 물음에.

“믿어, 이 중대장은 우리 강현이 믿어.”

서윤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확답에 강현이 손을 내밀었고.

서윤진이 살포시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런 둘을 보며.

“그럼 거기서 보자.”

이석천이 인사를 한 뒤에 스스륵 모습을 감추었다.

[검탑주 최강현 접속 확인. 검탑에 의식을 보내시겠습니까?]

‘네.’

[의식을 전송합니다. 옆에 있는 전우 서윤진의 접속을 허락하시겠습니까?]

[의식 접속 가능한 인원 검탑주 최강현 외 1명]

‘허락합니다.’

상태창의 질문에 강현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자신의 의식뿐 아니라 서윤진의 의식을 검탑에 데려가려는 시도.

[탑주 최강현, 전우 서윤진의 의식을 검탑으로 이동합니다!]

곧 정신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검탑에 진입했습니다. 검탑주 최강현 접속 전우 서윤진 접속. 안전한 상태입니다]

강현이 눈을 뜨자 이전과는 달라진 검탑의 모습이 보였다.

“여, 여긴 어디니?”

서윤진의 물음에 강현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검탑을 가리켰다.

“새로운 훈련장입니다.”

“훈련장?”

“따라오시면 알 겁니다.”

강현이 아직 어리둥절한 서윤진 대위를 데리고 검탑의 입구에 서자.

- 검탑주 최강현 입장. 전우 서윤진 입장.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가 울리며 문이 열렸다.

강현이 그 목소리를 듣고는 잠시 멈칫했다.

‘어머니.’

바로 어머니 정수연의 목소리.

[정수연의 의식 일부분을 검탑에 정착시킵니다!]

전에 보았던 알람대로 어머니의 일부분이 이 검탑에 머무르는 모양.

비록 강현을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또 따뜻하게 안아 주지도 못하지만.

- 환영합니다

부드러운 어머니의 목소리와 이 탑 안에 은은히 도는 온기가 마치 아들의 복귀를 환영하는 것 같아 감정이 요동쳤다.

“…….”

강현이 잠시 울컥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힌 후.

“중대장님.”

“응?”

“광폭화 스킬은 결국 중대장님의 정신을 앗아 가는 것 아닙니까?”

“그렇… 지?”

“가장 걱정되는 점이 주변 사람들이 다칠까 봐, 맞지 않습니까?”

“응, 아무래도 주변에 해가 될까 봐 어떻게 조절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강현의 질문에 서윤진 대위가 지금껏 마음속에 쌓아 두었던 걱정거리들을 쏟아 놓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에 이르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내가 점점 강해질수록, 광폭화를 사용할수록 주변 사람들이 다칠까 겁이 나.”

“…실제로 그런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래서 산군을 나왔으니까.”

서윤진 대위가 자신의 과거를 고백했다.

사실 산군 길드에서 나와 군대에 입대한 후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

그런데 강현 앞에서만은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라면 괜찮을 거 같다.

“화가 나는 일이 있었고 상대를 공격했어. 광폭화 때문에 상대가 크게 다쳤거든. 원래라면… 대가를 치러야 했지만 할아버지랑 한 아저씨 덕에 길드를 떠나는 거로 그쳤지.”

“그랬습니까.”

“좀 징그럽지?”

서윤진이 자신의 잘못을 떠올리며 물었고.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중대장님이 아무 이유 없이 화를 낼 분이 아니라는 걸 압니다.”

강현이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자책을 잘라냈다.

전우였기에 그녀가 그리 쉽게 남을 해칠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안다.

강현의 얼굴에 서린 신뢰를 본 서윤진이 말을 멈추었고.

[전우 서윤진의 전우애가 상승했습니다! 전우애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당신에 대한 믿음이 깊습니다. 이후 어떤 상황에도 당신의 말을 믿고 따를 것입니다!]

강현에 대한 믿음으로 보답했다.

그래, 이 일은 믿음이 필요한 일이니 오히려 잘 되었다.

강현이 서윤진의 무한한 신뢰를 이용해서 할 일.

“그렇다면 아무리 화를 내도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면 어떻습니까?”

“으응?”

“정말 미친 듯이 화를 내고 또 내고 또 내서 더는 화를 낼 수 없을 정도로 낸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건… 해 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 해 보면 됩니다.”

“여기서?”

“네, 여기서라면 중대장님이 아무리 화를 내고 발톱을 휘둘러도 다치거나 죽지 않습니다.”

강현의 장담에 서윤진의 얼굴이 멍하니 풀렸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물론 그런 의문을 품을 법하다.

죽거나 다치지 않는다니 그런 꿈같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강현은 그런 곳을 알았다.

아무도 죽지 않고 다치지 않는.

‘지옥.’

산군 서대호의 정신을 앗아 갔던 곳.

지금 서윤진과 강현이 서 있는 이 검탑이 바로 그 장소.

수천 번을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검탑.

“그런 곳이 어디 있어. 지금 거짓말하는 거지?”

서윤진의 물음에 강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가 바로 그런 공간입니다. 그래서 중대장님을 데려온 겁니다.”

“…그런.”

“물론 광폭화에 대해 모든 걸 알지는 못합니다. 어떻게 제거할지 어떻게 제어할지 완벽한 계획은 아닙니다만.”

강현이 이번엔 서윤진의 얼굴을 보며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전우이기에 또 저를 항상 도와주셨기에 저 또한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전에는 할아버지의 정신을 무너뜨렸던 장소라면 이번에는 손녀의 정신을 온전하게 만들기 위한 장소가 되리라.

“그러니, 절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광폭화를 제어할 수…….”

강현이 마지막 말을 끝내기도 전.

푸화하학!

빛이 번쩍임과 동시에 강현의 목이 잘려 나갔고.

“강현아악!”

서윤진이 그 모습에 경악하며 소리 질렀다.

자신을 위한다던 강현의 죽음.

너무나 허망하고 황당해서 미처 반응하지도 못했다.

쿠웅.

쓰러지는 강현의 몸 뒤.

“…….”

얼굴 없는 검사 하나가 검을 들고 있는 모습.

그의 검에서 떨어지는 강현의 피.

이를 마주한 서윤진의 얼굴이 살벌하게 일그러졌고.

“크르렁!”

두말할 것도 없이 수인화 하여 달려들었다.

이미 시뻘겋게 물든 눈을 보니 광폭화에 접어든 상태.

서윤진이 죽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상대를 향해 미친 듯 발톱을 휘둘렀고.

거세고 무시무시한 기세에 얼굴 없는 검사의 몸이 곧 찢길 것 같았으나.

채채채챙!

상대가 너무나 쉽게 서윤진의 공격을 막기 시작.

그리고 그럴수록.

“크허어엉!”

서윤진의 광폭화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몸에서 붉은 땀이 배어 나왔고 새빨개진 눈동자에선 핏빛 광망이 폭사되었다.

지금껏 그녀가 보여 준 무력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전신전력을 터뜨리는 모습.

강현, 자신의 소중한 중대원을 죽인 놈을 죽이기 위한 중대장의 분노!

그러나.

“크르르.”

상대는 서윤진의 공격을 너무나 쉽게 받아넘겼고.

결국.

서걱.

얼굴 없는 검수의 검이 서윤진의 몸을 갈랐다.

서윤진 대위가 쓰러져 숨을 헐떡이며 눈물을 흘렸다.

‘난 왜 아무것도 지켜내지 못하는 걸까.’

후회와 자책을 마지막으로 그녀가 눈을 감는 순간.

“후우. 생각보다 훨씬 무섭네요.”

멀쩡한 모습의 강현이 나타났다.

그가 서서히 사라지는 서윤진의 모습을 바라볼 때.

“후우, 꼭 이런 나쁜 역할을 맡겨야만 했냐?”

방금까지 강현과 서윤진을 공격하던 얼굴 없는 검수.

이제는 검성 이석천의 얼굴을 한 도플갱어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만난 아이를 이렇게 몰아붙여야 한다니.

마음이 편치 않았던 탓.

그러나.

“입꼬리 너무 올리고 말씀하시는 거 아닙니까?”

“으음, 나도 모르게. 오랜만에 싸움이 너무 즐거웠나 보다.”

강현의 핀잔에 검성 이석천이 올라간 입꼬리를 손으로 내리며 무표정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전우 서윤진의 복구를 끝마쳤습니다]

“롸?”

서윤진이 멀쩡한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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