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석탄과 돌멩이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헌터란 그저 이해 못할 초능력자에 가까웠지만.
헌터들 사이에도 분명한 서열이란 게 존재했다.
대표적으로는 F, E, D, C 등의 알파벳으로 표기하는 국제 표준 헌터 등급제가 있다.
능력의 우열을 나타내는 수치인 만큼 많은 헌터가 알파벳 등급을 올리고자 노력했고.
그렇게 노력하고 노력해서 올라가다 보면 마주치는 벽을 이렇게 불렀다.
하류 헌터와 상류 헌터.
“하류 헌터와, 상류 헌터 말입니까?”
“그래. F~C급 헌터들을 이르러 하류 헌터, C~A급 헌터들을 이르러 상류 헌터라 불러. 받는 대우가 차원이 다르거든.”
능력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는 순간.
연봉부터, 복지, 들어갈 수 있는 게이트와 길드까지 모든 것들이 달라진다.
원래도 각 등급마다 대우가 다르긴 하지만 하류와 상류의 경계선을 넘으면 사는 세상이 다르다고 할 정도.
물론 쉽지 않은 일이고 하류에서 상류로 넘어가는 벽 앞에서 좌절하는 헌터들이 대부분이었다.
“같은 등급인데 하류, 상류가 나뉘기도 하는 겁니까?”
“그래, 같은 C급 중에서 누군가는 상류 누군가는 하류로 취급받는 경우가 있거든. 뭐, 결국 필요한 능력의 차이랄까. 탐지계나 치유, 버프계면 상류, 일반 전투계면 하류 이런 식이지.”
“네.”
“그런데 하류에서 상류로 넘어가는 건 사실 별거 아니라고들 해.”
“그게 별거 아니란 말입니까? 방금 인생이 바뀐다고.”
“물론, 인생이 바뀌지. 같은 인간 수준에서는.”
“같은 인간?”
“그래. 세상은 넓고 뛰어난 사람들은 많은 법이거든. 그런데 그 이상의 무언가를 가진 자들이 있어. 그래… 그런 것들이 있지.”
“그럼 그건 뭐라 부릅니까? 최상류?”
“…신인류.”
하류, 상류 그리고 신인류.
국제 표준 헌터 등급제에 따르면 S급 헌터들은 같은 헌터들 사이에서도 규격 외의 존재.
아무리 탐지계, 버프계 같은 특수 능력이라도 A급은 들어갈 수 없는 그들만의 리그.
헌터들은 부러움, 질투, 두려움을 담아 신인류라 불렀고.
수많은 A급 헌터가 그 벽 앞에서 좌절했다.
보통의 노력, 보통의 각성, 보통의 발전으로는 불가능한 변화.
그래서 필요한 게.
“진화라는 겁니까……?”
“응, 일반적인 발전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필요하거든.”
강현의 물음에 서윤진 대위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좀 오해가 있었지만 오랜 설명 끝에 강현이 서윤진 대위가 한 말을 이해했다.
“그럼 지금 S급 진화를 앞두고 계신 겁니까?”
퍽 반가운 소식.
그러나 서윤진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진화는 그냥 바랄 뿐이지. 요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벽이 있거든. 그걸 깨고 싶어서…….”
서윤진이 말끝을 흐리며 강현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사실 그녀가 강현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었다.
이전에 의무 방어전을 했듯 그냥 훈련이란 명목으로 투덕거리면 될 일.
중대장이니만큼 명령이란 방식도 있을 터.
그러나.
“으음… 그리 쉬운 부탁이 아니라서 사실은…….”
서윤진 대위가 이번에는 유독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그녀 머릿속에는 강현 말고는 다른 답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난 혹한기 훈련 때.
“크르르!”
중대원들이 사라졌다는 충격과 강한 적을 앞에 둔 그녀가 혈호 특유의 광폭화를 자제하지 못했고.
하마터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할 뻔했다.
“쉬, 쉬… 괜찮습니다. 진정하십시오.”
그런 그녀를 유일하게 어르고 달래 가며 진정시킨 게 바로 강현.
그때 강현을 공격하려 했던 게 꽤 충격이었던 서윤진은 이후 광폭화를 이겨 내기 위해 여러 번 시도를 결심했으나.
‘만일 멈추지 못한다면? 누가 다치지 않을까? 차라리 포기하는 게…….’
매번 심리적 공포가 앞을 가로막았다.
목줄 풀린 미친 호랑이로 변하면 어떤 비극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녀가 속에 내재된 광기의 피를 떠올릴 때마다.
“방법이 있습니다.”
강현의 단단하며 부드러운 목소리가 서윤진 대위의 귓가에 맴돌았다.
어쩌면 강현이는 가능하지 않을까?
지금껏 어떤 상황에서건 생각지 못한 방법을 제시하고 이를 이겨 냈던 그라면 자신의 광폭화도 극복하게 해 주지 않을까?
‘하다못해 옆에 있어 주기라도 한다면…….’
작은 생각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점점 확신으로 바뀌었다.
강현이 옆에 있어 준다면 무언가 변화가 있을 거다!
심지어는.
“쉬- 중대장님, 이제 그런 거로 고민하지 마요. 내가 있잖아.”
깊은 밤, 목줄을 찬 서윤진 대위와 그녀의 턱을 잡은 채 천천히 교육하는 강현에 대한 꿈까지 꾸었다.
물론.
‘으윽! 들켰다간 사회적 매장 감이야!’
처음엔 거세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으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부탁이라도 해 볼까? 모, 목줄은 물론 빼고!’
꿈을 떠올리며 서서히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런데 이번에 할아버지를 구출하여 나오는 강현을 마주한 순간.
서윤진은 확신했다.
‘그래, 이 남자야!’
자신의 광폭화를 잠재워 줄 사람은 바로 강현밖에 없음을.
안 그래도 이번 남은 휴가 동안 할머니와 서연이와 지내며 강현에게 부탁해 볼 생각이었는데.
어떻게 먼저 알고 물어보다니.
‘역시 내 남자야!’
강현에 대한 믿음이 솟아나다 못해 콸콸 터져 나올 정도.
물론 서윤진 대위의 이런 생각은.
[조력자 서윤진의 신뢰도와 호감도 전부가 대폭 상승합니다! 긍정적인 감정 두 개가 일정 수준을 넘어 새로운 감정을 느낍니다!]
[지금까지 같이했던 경험들을 합쳐 새로운 인물 감정 전우애를 형성했습니다!]
[히든 조건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전우를 성공했습니다]
[보상으로 명령권 한 개를 획득합니다!]
새로운 혜택이 되어 돌아왔다.
[명령권을 발동 시 상대가 당신의 소원 하나를 무조건 들어줍니다]
[이전 쌓아 놓은 신뢰도와 호감도에 따라 명령의 범위가 결정됩니다]
‘명령… 권?’
강현이 새롭게 추가된 혜택을 보며 잠시 눈썹을 찌푸렸다.
명령이라…….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귓바퀴를 붉게 물들인 채 강현의 시선을 외면하는 서윤진의 모습을 보자니.
‘중대장님에게 명령을?’
무언가 아슬아슬한 상황에 놓여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단 명령권은 보관하기로 결정.
지금 써 봤자 아까운 명령권만 날아갈 것 같았다.
“어떤 부분에서 도움이 필요하신 겁니까?”
강현의 물음에.
“부끄럽지만… 좀 봐 줬으면 해…….”
서윤진이 얼굴까지 붉히며 답했다.
물론 앞선 생각은 오직 서윤진의 머릿속에서만 재생된 이야기.
서윤진이 봐 달라는 건 자신의 가장 부끄러운 모습, 광폭화였으나.
다른 사람들은 이를 알 리가 없었고.
“잘못… 들었습니다?”
“뭐… 뭐룰 봐아?”
“뀨… 우?”
“윤진아… 어른이 되었구나.”
강현을 비롯한 서연이, 구찌, 이석천이 대경실색했다.
물론 이석천은 다른 의미로 감탄.
그리고.
“봐 주다니! 뭘 부끄럽지만 보여 준다는 게야!”
마침 강현과 가족들이 잘 이주했는지 확인 겸.
집안에 들어간다는 서윤진을 잡아 올 겸.
안전 가옥에 방문한 산군 서대호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집안 대문을 들어오자 들린 손녀의 목소리.
“부끄럽지만… 좀 봐 줬으면 해…….”
그것만으로도 경악할 일인데.
앞에는 어린아이까지 있지 않냔 말이다!
“윤진아! 이 녀석아!”
산군 서대호가 말 그대로 후다닥 달려와 서윤진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리 마음이 급하다곤 하지만 체통을 지켜야지! 강현이는 아직 어리지 않으냐! 모든 일엔 절차가 있는 법!”
물론 그 말은 들은 강현은 황당함에 더욱 입을 벌렸다.
‘체통을 지키면 괜찮다는 겁니까? 뭐가요? 뭐가 괜찮은 겁니까?’
한국 5대 길드, 산군 길드인 만큼 부끄러운 걸 보여 주는 일에 절차라도 마련해 놨단 말인가.
강현을 따라 서연이와 구찌의 눈도 혼란함에 핑글핑글 돌기 시작했고.
“역시… 내 친우야.”
검성은 알 수 없는 부분에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 아니 할아버지 그게 아닌데요…….”
“먼저 모두 보여 주지 말고 작은 거 하나씩! 그렇게 다가가야 하는 법이야. 알겠느냐? 아니, 아니지. 확 잡아채는 것도 방법이긴 하지. 으음……!”
손녀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산군 서대호가 진지하게 연애 조언을 해 주려 할 때.
“저, 길드장님. 강현 군에게 선물 전달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강현 군과 가족분들 안전 가옥에 잘 들어왔는지 확인도 하고요.”
한진명이 은근슬쩍 본래 목적을 상기시켜 주었고.
그제야 산군 서대호가 정신을 번쩍 차렸다.
“그렇지, 이럴 게 아니지. 큼, 크흠!”
뒤늦게 정신을 차린 산군 서대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헛기침하길 잠시.
“안전 가옥은 마음에 드는가? 강현군?”
묵직한 목소리로 이미지 회복을 노렸으나.
“자, 작은 거 하나씩…….”
“뀨, 뀨우우…….”
서연이와 구찌의 혼란스러운 목소리에 서윤진이 화들짝 놀랐다.
“아, 아냐 애들아, 서연아! 그런 게 아니야!”
물론 그녀의 변명이 귀에 들어올 리 만무.
강현이 작게 한숨을 쉬며 서연이를 안아 올렸고.
“인사해, 서연아. 한 팀장님은 이미 알지? 옆에 계신 분은 호랑이 누나네 할아버지셔. 여기 집 선물해 주신 분이야.”
“…집? 선물?”
“하하, 반갑구나. 서대호라고 한단다.”
서대호가 서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사했고.
“…산타 할아부지! 안녕하세요!”
서연이가 산군을 향해 활짝 웃었다.
아마 집을 선물해 주었다는 말에 산타 할아버지라 생각한 모양.
어린아이의 순수한 생각에 노인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핫! 그래, 산군이니 산타 할아비라는 별호도 딱 맞구나!”
덩달아 서연이와 강현, 한 팀장이 웃었고.
“하, 하하, 하하하하!”
서윤진 대위가 뒤늦게 따라 웃을 때.
서대호가 한 팀장을 향해 웃으며 눈짓하자.
“하하하! 가시죠, 아가씨! 하핫!”
“어어? 어어! 잠시만요. 가, 강현아!”
한진명이 분위기를 헤치지 않게 노력하며 자연스레 서윤진을 끌고 나갔다.
“부대에서 마저 이야기하면 될 듯합니다. 하하핫!”
“아앗! 너마저! 강현아, 나 중대장이야!”
“충성! 휴가 끝나고 뵙겠습니다!”
두고 보자아아!
서윤진 대위가 별로 무섭지 않은 대사를 마지막으로 끌려 나갔고.
“저녁이라도 드시고 가시겠습니까?”
그 모습을 보던 강현이 산군을 향해 물었다.
게이트에서 아들을 잃는 아픔을 겪은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돌아다니다니.
“마음은 고맙지만 미래를 위해 할 일이 많아서 말이야! 저녁 먹을 시간도 없구먼! 하하하!”
산군이 자신의 두꺼운 팔뚝을 자랑하며 괜찮은 척을 했으나.
“…괜찮으십니까?”
“…티 나나?”
“…꽤요.”
“후우, 내일 중요한 자리가 있는데 이거 큰일이군.”
얼굴에 덕지덕지 낀 피곤과 슬픔을 지울 순 없었다.
게이트 안에서 느꼈던 아들의 죽음이라는 정신적 충격, 거기다 빌런과 불순 세력 축출 등 사후 처리까지.
일반 사람이었다면 모든 걸 포기할 만큼 어려운 상황.
그러나.
“이 정도의 위기야 수십 번 넘겨 왔지. 그러니 괜찮아, 치열하게 싸우다 보면 이겨 있겠지.”
산군이 금방 피곤한 기색을 지우며 신색을 회복했다.
그래, 백전노장인 그에겐 이 정도의 싸움은 익숙했다.
이번에도 이겨 낼 터.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마지막으로 자네들이 걸어야 할 길을 닦아 놓아야겠지.’
강현과 같은 훌륭한 헌터들을 위해 미래를 준비하려 한다는 것.
그래도 자신을 걱정해 주는 후배 하나 있다는 게 싫지는 않았다.
“참, 내 선물을 좀 준비했네. 집들이 선물이야.”
산군이 거기까지 생각하며 강현을 위해 준비한 선물을 내밀었다.
[이전 죽어도 죽지 않는 퀘스트 성공 보상을 획득합니다! 산군 서대호의 생존으로 보상이 강화됩니다!]
‘아, 특임대 흑복.’
마침 강현이 첫 휴가 때 산군에게 선물로 받았던 흑복을 떠올렸고.
“그때 주신 흑복 감사히 받았습니다.”
“이번 선물도 그에 못지않을 거야.”
산군의 확신 어린 음성에 안을 살펴본 강현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석탄이랑… 돌멩이로군요?”
고급스러운 가방 안에 들어 있는 건 주먹만 한 석탄과 돌멩이.
그런 강현을 보며 산군이 씨익 미소지었다.
“그 자네 어깨에 있는 친구, 피닉스지?”
“…맞습니다!”
“예전 친우 중 한 명이 피닉스를 데리고 다녔지.”
“앤서니 데이비스 말인가요?”
“그래! 잘 알고 있구먼!”
오랜만에 듣는 친구의 이름에 활짝 미소 지은 산군이 좀 부끄럽다는 듯 말을 이었다.
“돌멩이는 신수 능력석, 석탄은 킹피닉스의 신체일세.”
킹피닉스 이 불쌍한 녀석.
지난번 특임대장 창고에서도 그렇고, 대체 어떻게 지냈길래 곳곳에서 시체가 나온다는 말인가.
마침 산군의 말을 들은 검성 이석천이 코를 쓱 비비며 감동적이라는 듯 입을 열었다.
“역시 내 친우……!”
아니, 그런 거에서 우애를 느끼면 안 되지 이 똥 검성아!
강현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는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이려 할 때.
“아니야, 오히려 내가 감사해야지.”
산군이 먼저 강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주 깊게, 머리가 땅에 닿을 듯 고개를 숙였다.
“아들과 아비의 아픔을 풀어 주어서… 녀석의 마지막 검술을 보게 해 주어서 고마웠네……!”
아버지.
예전 거미에게서 병사를 구해 낸 후.
병원에서 만난 그의 아버지가 강현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었다.
서대호의 등도 그와 닮아 있었다.
평범한 아버지나, 헌터계의 거두라는 아버지나.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마찬가지.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강현이 담담히 웃으며 산군의 어깨를 잡아 올렸고.
그런 강현을 보며 산군이 마주 미소 지었다.
“그래, 가 보겠네.”
“들어가십시오. 선물은 잘 쓰겠습니다.”
산군이 뒤돌아 가던 중.
“자네가 자기 일을 했던 거처럼 나 또한 내 일을 훌륭히 해내야겠지.”
“네?”
“부대에 가서 도움이 필요하면 바로 연락하게.”
산군이 알 수 없는 말을 끝으로 마당을 나섰다.
[산군 서대호가 당신을 전우로 여깁니다. 대상의 호감도와 신뢰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당신이 도움을 요청하면 그가 당신을 위해 움직일 겁니다]
[다음 부대 퀘스트 진행 시 산군 서대호의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썩은 살은 단호히 쳐내야 합니다. 모두를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