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누구에게 죽었습니까
항상 사람들의 우러름만 받았다.
“엄마! 난 세상에서 제일 강한 헌터가 될 거야!”
“그럼 우리 태진이는 충분히 가능하지!”
부모님도, 주변 친구들도, 심지어는 때때로 만난 헌터들도.
김태진의 뛰어난 잠재력과 능력을 보며 감탄했고 항상 그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때로 시기, 질투하는 놈들이 있었지만 어차피 실력으로 누르면 그뿐.
그렇게 살아왔고 당연한 일이었다.
산군 길드에 들어갈 때만 해도.
“이제 내가 산군의 주인이 되겠어!”
언젠간 산군에서도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겠다 마음먹었다.
당시의 김태진은 그럴 자신감도 또 능력도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가 처음으로 만난 상대가 하필 강현.
그날 그는 씻을 수 없는 패배감과 굴욕감을 경험했고.
[강한 트라우마 상태에 빠집니다. 패배감이 당신을 감쌉니다. 모든 능력치가 20% 감소합니다]
이것만으로도 충격적인 소식이었건만.
[남자의 자존심이 꺾였습니다]
“아, 안 돼!”
마지막 알림에 절규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스물하나.
아직 앞날이 창창한데 남자의 자존심이 꺾이다니!
[중요 특성 우월감, 강한 자부심, 경쟁심, 투쟁심의 레벨이 낮아집니다. 트라우마 극복까지 특성 성장 속도가 하락합니다]
다행히도 소중한 물건이 기능을 잃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헌터로서는 엄청난 손해를 감내해야 했다.
실질적 능력 손실과 정신 특성 하락.
이런 사정을 모르는 남들이 보기에는 성장이 완전히 멈춘 것처럼 보였고.
김태진은 산군 길드의 중심에서 서서히 밀려났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능력과 특성을 예전처럼 회복하길 간절히 바랐다.
자존심 따윈 모두 버릴 정도로.
아무리 그래도.
“어휴, 저 새끼 뭐 하고 있냐?”
“산군 길드의 수치다 수치.”
“당신, 제발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그런 눈으론 보지 말란 말이야!
산군 길드 특별 팀이 강현과 김태진을 놔둔 채 먼저 길을 앞서 나갔다.
아무래도 혼자 뚫는 것과 여러 명이 합심하는 건 속도가 다를 수밖에.
가뜩이나 뒤처지는 것도 짜증 나는데.
자신을 향해 마구 몰려드는 적들을 보자 더욱 짜증이 몰려왔고.
“길 뚫는 게 느리네.”
강현의 말에 순간 뒷목을 잡고 쓰러질 뻔했다.
김태진이 달려드는 검귀들을 상대로 분투를 펼치는 동안.
강현은 그 뒤에서 뒷짐을 쥔 채 천천히 김태진이 뚫어 놓은 길을 걷고 있었다.
주변에서 검귀들이 소리를 지르든 뭘 하든 산책을 나온 모양새.
물론 강현이 손을 놓고 있었기에 김태진은 두 배 아니 세 배로 바빴고.
“…정말 그대로 있을 겁니까요?”
“어허, 말이 많네? 그래서 트라우마 극복할 수 있겠어?”
“…묵묵히 뚫겠습니다요.”
“그래 짐까지 들고 검 휘두르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뚫자?”
“…넵.”
눈치를 줘 봤으나 아무 소용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 약해졌다고는 하나 이런 대우는 처음이었다.
정말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화가 났지만.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만 있다면!’
능력을 다시 회복하고 특성도 예전으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참아 주리라!
그리고 그때가 되면 방금 자신을 욕한 저 산군 길드 놈들부터 조지리라!
그리고 최강현 네놈도!
김태진이 열 걸음 도약을 위한 한 걸음 후퇴를 각오했다.
복수할 순간만을 생각하며 양손에 쥔 검을 휘둘러 녀석들을 베어 내고 찌르는 동안.
“쓰읍……?”
“…….”
“허어…….”
“…빠드득.”
“…아, 그렇게 쓰는 거 아닌데.”
뒤에서 들리는 강현의 목소리가 김태진의 정신을 살살 긁었다.
김태진이 적을 상대할 때마다 묘하게 울리는 강현의 탄식.
‘진짜 해도 해도 너무했네!’
자신을 길잡이로 부려 먹는 것까진 이해했다.
그런데 뒤에서 들리는 저 탄식은 못 참겠다!
“야! 이 새끼야!”
김태진이 강현을 향해 버럭 목소리를 높이는 순간.
빠앙!
푸른 광선이 김태진의 코앞을 스쳐 지나갔고.
강현이 한 손에 든 데저트이글의 방아쇠를 연속으로 당겼다.
마나를 듬뿍 머금은 총알을 뿜어낼 때마다 달려들던 검귀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한진명에게 받은 커다란 짐 가방을 쥔 채로 얼마든지 싸울 수 있었던 셈.
‘짐 때문에 못 싸운다며! 잘 싸우네!’
김태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으나.
“성능이 생각보다 괜찮네. 왜? 불만 있어?”
“그럴 리가요. 전혀 없습니다요.”
자신을 향하는 총구를 본 순간, 순한 양으로 돌아왔다.
자존심도 화도 살아 있어야 부리는 거다.
“걸리적거리네. 이것 좀 받아 봐.”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직접 뚫으시는 겁니까요?”
“아니? 한 손에 짐들고 한 손에 검 들려니까 불편해서.”
“전 양손에 검을 들어야 하는데… 요?”
양손 검수인 김태진이 한 손에 짐 가방을 들고 검 두 자루를 휘두를 수는 없는 상황.
그러나.
“안 되면 되게 해야지. 그 끈 등에 메라고 있는 걸까 아니면 국밥 끓여 먹으라고 있는 걸까?”
“메라고… 있는 거겠죠?”
“이 정도 말하면 알아먹어야 하는 거 아닐까?”
“알아들었습니다요.”
강현의 단호한 태도에 김태진이 주섬주섬 철제 가방을 등에 메고는 검을 손에 꼬나쥐자.
“그럼 이제 다시 뚫어.”
“…네!”
김태진이 반쯤 썩어 가는 얼굴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덤빌 생각은 못 했다.
저 괴물 같은 인간을 상대하느니 차라리 진짜 괴물이 났지.
“허어, 음… 참 이상하다.”
역시나 뒤에서 강현의 탄식이 들려왔으나.
그거 묵묵히 길을 뚫었다.
강현이 그런 김태진, 아니 김태진에게 썰려 나가는 검귀들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분명 해파칠십이검… 맞죠?”
그의 질문에 옆에 있던 검성 이석천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몰라볼 리가 없지.”
강현이 탄식을 토해 낸 이유는 김태진의 검술 때문이 아니었다.
비록 능력치가 떨어졌다고는 하나 A급 헌터.
자신이 검성도 아니고 그를 보며 한심하다고 혀를 찰 수는 없는 노릇.
다만 김태진을 상대하는 검귀들의 검술이 너무나 익숙해서였다.
‘어설프지만 분명 해파칠십이검이다!’
마침 이 해파칠십이검을 창시한 사람이 바로 옆에 있으니.
“교본을 만들어서 뿌리기라도 했습니까?”
“그럴 리가! 나 돈 많았다.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얼마나 엄선해서 알려 줬는데.”
“그렇다면 이 녀석들은 뭡니까?”
잠시 고민하던 검성이 눈을 빛냈다.
“배운 사람이 다시 알려 주었을 가능성은 있지.”
“이 귀신들에게요?”
“…아마도.”
어두워지는 검성의 표정을 보며 강현이 미간을 구겼다.
검성 이석천이 직접 선택하여 검을 가르쳤다면 인성도 보았을 텐데.
검성의 검술을 검귀들에게 가르쳤다고?
어흐응!
마침 들리는 호랑이의 포효가 해답이 탑에 있다고 알려 주는 듯했고.
상황 파악을 마친 강현이 움직였다.
“안 되겠다, 이제 슬슬 속도 좀 내자.”
호흡을 조절하고는 김태진의 옆에 붙어 검귀들을 몰아치자.
김태진 혼자 길을 뚫을 때와는 달리 대로를 달리듯 시원하게 전진.
‘검사였어? 방금은 분명 권총 쐈잖아?’
한 손엔 권총, 한 손엔 검을 든 강현 덕에 검귀들이 후두둑 쓸려 나갔다.
대체 이 인간은 뭐란 말인가.
물론 강현에겐 김태진이 모르는 몇 가지 비밀이 있었으니.
[미완성의 해파칠십이검을 상대합니다. 당신의 검술이 완전히 우위에 있습니다. 검귀를 상대로 공격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우선 강현이 해파칠십이검의 계승자라는 사실.
거기다.
“이 녀석들 살짝만 검을 흘리고 다시 받아치기만 해도 쉽게 이길 수 있어.”
[해파칠십이검의 활용법을 조언받았습니다. 검법 경험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실제 창시자인 검성이 옆에서 놈들의 약점을 조언까지 해 주었고.
[고물 빼앗긴 달인의 검을 획득하였습니다. 이전 사용자의 경험을 흡수합니다!]
한진명에게 받아 온 검에서 경험치까지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역시나.
[달인의 검술 경험치를 해파칠십이검 경험치로 바꾸어 흡수합니다. 해파칠십이검의 경지가 새롭게 열립니다. 휘두를 수 있는 검격 횟수가 증가합니다!]
[검격 횟수: 34회]
해파칠십이검의 검격 횟수가 늘어났다.
지난 회색 숲에서의 경험과 빌런과의 전투로 인해 검격 횟수가 33회까지 늘어난 상태.
이제 한 호흡에 검을 서른여섯 번 뿌리기까지 남은 건 단 두 걸음.
“그래 봤자 반인가.”
강현이 잠시 손에 들린 검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더욱, 더더욱 강해져야 한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들은 김태진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직도 반이나 남았다고? 뭐가?’
방금 본 검술의 위력도 전율이 일 정도.
물론 상성상 강현의 검술이 압도적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나 김태진은 이러한 사정을 몰랐고.
강현의 능력이 강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반이라니?
‘잠재력이 반이나 남았단 말인가? 아니면 여력이?’
어느 쪽이든 놀라운 사실.
방금 보여 준 강현의 전투력을 생각하며 김태진이 서서히 납득하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자신보다 위다!
예전 같았다면 절대 인정하지 않았겠지만.
이미 오래전에 꺾인 그의 자존심은 강현의 강함을 인정했고.
[후임 김태진의 충성심이 올랐습니다. 이후 김태진의 능력과 특성을 대여할 수 있습니다]
서서히 강현에게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래, 이렇게 강하니까 내가 지지. 내가 못나서 진 게 아니야 절대로!’
물론 자신의 패배를 합리화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강현으로서는 오히려 이득이었다.
그렇게 둘이 전력으로 길을 뚫던 중.
갑자기 주변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1,046번째 수복을 시작합니다]
게이트 안이 또 한 번 원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 어어?”
김태진이 놀라 강현을 바라보았고.
강현 또한 심상치 않은 상황에 얼굴을 굳혔다.
분명 이번에는 탑이 무너지거나 주변이 박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수복이라니?
방금까지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검귀들이 사라졌고 검 부딪히는 소리가 잠잠해지자.
“끄아아악!”
“어억!”
누군가의 고통에 찬 비명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가자!”
“네? 넵!”
강현이 바로 달려갔고 김태진도 덩달아 뛰기 시작.
검귀들이 사라진 땅을 내달려 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뭐야? 뚫려 있잖아?”
강현이나 김태진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구조.
보통 탑 던전 같은 경우 층별로 각기 다른 함정이나 스테이지가 펼쳐지기 마련인데.
이 탑은 완전히 뚫려 있었다.
벽을 타고 이어진 원형 계단.
휑하니 비어 있는 바닥 중앙.
지붕이라도 부서졌는지 빛이 비치고 있었고.
옅은 빛이 점점 좁아짐과 동시에.
“끄으으윽!”
사람 하나가 다시 조각조각 붙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찢어진 몸통이 다시 부풀어 오르고 잘린 팔다리가 자라나듯 달라붙은 후.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지붕이 수복된 후 어둠에 빠진 공터.
“흐으으, 흐으으.”
공포 가득한 신음이 주변을 메웠고.
강현이 혹시 모를 공격을 경계하며 긴장할 때.
“공격 대장님?”
김태진이 그를 알아보았다.
그리고는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 빛을 비추자.
아까 강현을 위협했던 덩치 큰 남자가 몸을 둥글게 만 채 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빨까지 딱딱 부딪히는 모습이 완전히 공포에 질린 모양새.
“나… 나… 살아 있냐?”
“당연하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김태진의 대답을 듣고는 자신의 몸을 잠시 더듬더니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나 살아 있냐고!”
“살아 있다니까요?”
“그럴 리가, 방금 나는, 방금 나는 분명히 죽었는데.”
그의 알 수 없는 말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으억!”
“끼야아악!”
사람들의 비명이 탑 곳곳에서 울렸고.
강현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그를 향해 물었다.
“이 비명들 특별 팀의 겁니까?”
“마, 맞아 팀원들! 팀원들도 살아난 건가? 아니 죽은 게 맞았던 거야? X발 이게 대체 뭐야!”
그제야 팀원들의 존재를 기억해 낸 상대가 거친 욕을 뱉어 냈고.
강현이 그의 앞으로 다가가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정신 차려요. 당신은 죽은 게 맞았고 이 공간이 수복되면서 되살아났습니다. 죽은 것도 살아난 것도 맞으니까 이제 묻는 말에 답하세요.”
[언변, 신뢰, 감화, 불굴, 카리스마를 발동합니다. 상대가 느끼는 혼란함이 대폭 하락합니다]
강현의 말에 상대의 눈이 조금 맑아졌고.
뒤이어.
“뀨!”
구찌가 그의 머리통 위에 서자.
[피닉스 구찌가 상대의 혼란을 정화합니다!]
[상대에게 적용된 정신 이상 상태를 해제합니다!]
“태진이? 그리고 넌? 군인? 이제 도착한 거냐?”
공격 대장이라 불린 사내가 완전히 정신을 차린 듯 강현과 김태진을 알아보았다.
비록 혈색이 창백하긴 했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안정된 정신 상태.
그리고 강현이 잠시 숨을 고르고는 그의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당신들… 산군께 죽었습니까?”
“이런 미친,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강현의 물음에 김태진이 트라우마고 뭐고 버럭 소리를 질렀고.
“그래… 맞다.”
공격 대장이 고개를 떨구며 강현의 물음이 사실임을 시인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산군께선… 미치셨다.”
[1,046번째 수복이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