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그러니까 하나만 더 뽑자
강현이 천천히 멈춰 가던 슬롯을 향해 분노할 때.
[특전에 강력한 행운을 적용합니다!]
차륵.
그 분노를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딱 한 칸 더 내려갔고.
라면 10봉 대신에 걸린 것은.
[무전기 사용 제한 해제 특전을 획득하였습니다!]
[회색 숲 안에서 무전기 사용이 가능해집니다! 외부와의 통신은 불가능합니다]
바로 무전기 사용 특전이었다.
치지직!
“어? 무전기 터진다!”
마침 무전기를 만지고 있던 장건철 병장이 이를 바로 확인해 주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먹통이었던 무전기가 작동하기 시작했고.
덕분에 인원 활용 방법이 늘어났다.
“조로 나뉘어서 움직일 수 있겠어.”
한데 뭉쳐서 생존자를 찾는 것보단 백화점에서처럼 조를 나누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터.
조금이라도 나아진 상황에 다들 만족할 때.
‘모자라.’
강현은 만족하지 않았다.
단순히 무전기 하나로는 모자라다.
숲의 크기가 얼마인지도 사람들이 어디로 흩어졌는지도 알 수 없다.
산에서 조난당한 한 명의 실종자를 찾기 위해 한 개 대대를 투입해도 모자랄 때가 많은 법.
‘지금 우리는 열두 명. 생존자는 일흔여섯, 거기에 지리도 모르고 생존마저도 보장되지 않는 숲속… 이거로는 모자라다.’
본능이었다.
이대로 안심해선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방법을 찾아야지.’
부정적인 상황만 생각하며 걱정할 시간이 없다.
어떤 상황에서건 방법을 찾고 대비하라.
부모님을 잃는 비극을 겪은 후.
하루하루 방법을 찾았고 대비했고 실행했다.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 따윈 없다.
누군가는 이런 강현을 보고 매정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랬기에 지금까지 버텼다.
감정보단 현실에 집중했기에.
그리고 이런 점은 강현의 강점 중 하나였다.
[남은 특전 뽑기권: 6개]
‘뽑기권 한 개 사용.’
강현이 연이어 특전 뽑기권을 사용했다.
무전기로 부족하다면 더 사용하면 된다.
어차피 이번 퀘스트를 위해 받은 특전.
망설일 것도 아낄 것도 없다.
‘사람들을 구하러 여기까지 온 거니까.’
강현이 결심을 굳혔다.
우선 제일 목표는 생존자들을 모두 구하는 것.
기다렸다는 듯 강현의 눈앞에 슬롯이 떠올랐고 촤르르륵, 경쾌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얼마 후.
[라면 10봉……]
다시 라면 10봉에서 멈추려는 슬롯을 보며 강현이 눈을 부라렸다.
‘쓰읍… 이럴 때 장난치면 뒈진다.’
후임한테도 안 하는 욕을 시스템창에 할 정도.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눈치 없게 장난질이란 말인가!
강현의 분노가 다시 한번 타올랐고.
[특전에 강력한 행운을 적용합니다……]
차륵.
슬롯이 멈추는 소리가 왠지 서글프게 들렸다.
[양방향 포탈 1개 특전을 획득하였습니다!]
[사용자가 원하는 곳에 거점 포탈을 연 뒤에 다른 포탈 하나를 마음껏 열어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이제 좀 말이 통하네!
지금 강현에겐 바로 이런 게 필요했다.
무전기와 포탈, 이 둘이라면 시간을 훨씬 단축할 수 있을 거다.
사실 포탈은 생존자를 발견하는 즉시 안전한 곳으로 옮길 수 있는 거의 사기적인 특전.
[단 거점 포탈은 한번 열면 닫을 수 없으며 이동 포탈은 사용 후 대기 시간 5분이 지나야 다시 사용 가능합니다]
비록 간단한 제한이 있었으나 이 정도면 큰 문제는 아니다.
‘뽑기권 한 개 사용!’
그러나 강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강현이 원하는 건 여기에 끌려온 생존자 모두를 구하는 일.
그러니까 하나만 더 뽑자.
아, 하나만 더!
누군가는 말이 안 된다고 쓸데없이 뽑기권 기회만 날려 버리는 것이라 할지 모른다.
만일 그렇게 묻는다면 강현은 되묻겠다.
‘남기면 뭐 할 건데?’
엿 바꿔 먹을 건가?
그리고 믿음도 있었다.
혹한기 훈련, 훈련 포인트 300점을 전부 투자해 구매했던 스킬 진화권.
당시에는 손해 보는 일 같았고 미련한 짓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 어땠는가.
그때 내렸던 과감한 결정 덕에 모두를 구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포인트 500점을 새롭게 얻으며 특상이라는 더욱 높은 보상까지 얻었다.
당장 눈앞의 이익보다는 더욱 멀리, 길게 봐야 한다.
그렇기에 일곱 개 뽑기권 중 세 개를 지금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것.
그냥 뽑기가 즐거워서 그런 게 절대로 아니다!
‘믿는다! 제발! 이번에 좀 도와주라!’
다만 이번엔 화를 내기보다는 부탁했다.
아니 기도했다.
강현에겐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퀘스트 성공, 특임대로서의 의무감, 능력에 대한 믿음과 사람들을 구하고 싶다는 마음.
그러나 그중에서도 그를 가장 간절하게 만든 것은.
“으아아앙! 아빠!”
회색 숲으로 들어오기 전에 보았던 어린아이의 눈물이었다.
서연이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여자아이의 눈물.
행복했던 주말 오후, 갑작스럽게 아버지를 잃은 아이.
그 아이는 어떤 표정과 감정으로 이 사건을 기억하고 삶을 살아갈까.
남겨진 부인은?
‘나와 서연이는 어땠지?’
강현에겐 그 울음이 가장 뼈아프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연했던 행복을 돌려주고 싶었다.
비록 서연이와 자신은 행복을 빼앗겼지만 다른 사람들마저 그리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간절히 기도했고.
[특전에 강력한 행운을 적용합니다!]
촤륵!
[특전 회색 숲의 지도를 획득했습니다!]
이번엔 라면 10봉지와 같은 장난 없이 바로 쓸모 있는 특전이 튀어나왔다.
아니 쓸모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바로 지금 강현과 1분대, 그리고 수많은 생존자가 있는 회색 숲의 지도!
어쩌면 앞선 두 개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할지도 몰랐다.
‘그런데 지도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지? 상태창에 나타나는 건가?’
강현이 지도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그때.
“어어? 이게 뭐야? 야, 여기 봐! 황세아 중사님! 여기 좀 보십시오!”
김대영 상병이 방금 황세아 중사가 무너뜨렸던 나무 주변을 수색하다 무언가를 찾아냈다.
검은 천으로 싸여 있는 무엇.
이를 펼치자.
“지도다!”
“지도야!”
“대박! 지금 여기를 나타내는 건가?”
군대에서 보던 것과 같은 작전 지도가 들어 있었다.
어떻게?
다들 이런 의문이 들었으나 이보다 중요한 점은.
“이거라면 좌표를 계산할 수 있겠어!”
“무전기도 되고 지도도 있으니 문제없습니다!”
이 숲속에서 헤매고 있을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는 것.
그들이 모두 즐거워할 때.
“이제 거점만 확보하면 구조 작업은 바로 시작할 수 있겠는걸? 그런데… 동선이 문제네. 다들 가장 시간을 아끼는 방법을 찾아보자.”
황세아 중사가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을 짚었다.
통신도 가능하고 지형도 알고 있다.
이제 사람들을 모을 거점만 준비가 된다면 얼마든지 구조 작업을 시작할 수 있다.
다만, 이 숲 전체를 샅샅이 뒤지고 생존자를 발견할 때마다 복귀하는 시간이 문제.
모두 지도를 살피며 어디에 거점을 확보하고 중간 캠프를 어디로 해서 어떻게 조난자들을 모을지 상의할 때.
“동선과 이동 시간을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강현이 모두를 보며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황세아 중사님.”
그전에 먼저 물어볼 게 있었다.
강현의 부름에 황세아 중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만일 거점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는 포탈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쿨타임은 약 5분. 거점은 이동 못 하지만 통로를 여는 건 어디서나 가능하다면? 사람들을 구할 가능성이 어느 정도입니까?”
강현의 말을 들은 황세아가 잠시 눈을 감고 계산을 해 보더니 씨익 미소 지었다.
그리곤 눈을 번쩍 뜨며 답했다.
“99% 가능!”
그 대답에 강현이 마주 웃으며 답했다.
“그럼 그 가능성을 100%까지 끌어올려야겠군요.”
[하급 길잡이 능력을 발동합니다. 현재 확보한 특전 회색 숲의 지도, 이동 포탈과 연결됩니다]
[거점 포탈을 개방 이후 원하는 지도 좌표에 바로 통로 포탈을 열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 * *
일상 속 비일상.
그렇다면 반대로 비일상 속으로 던져진 일상은 어떨까?
“미국 B급 공포 영화는 항상 대학생들이 차 타고 여행 가다가 어느 한적한 마을로 가잖아.”
“아니면 산장에 가던지.”
“그럼 꼭 비 온다고.”
“눈이 오던지… 차가 망가지지…….”
“…그래도 재밌겠지?”
“항상 재밌지.”
B급 공포 영화를 보면 꼭 비슷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차가 망가지던 비나 눈이 오던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간 대학생들이 이렇고 저런 짓을 할 때.
푸욱!
어디선가 나타난 살인마가 이들을 죽이고 또 죽인다.
이런 흔한 설정의 영화가 계속 쏟아져 나오고 인기를 끄는 이유.
비일상적인 환경을 보면 관객들은 무슨 사건이 벌어질지 기대한다.
곧 터질 피와 잔혹한 죽음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으와악!”
결국 사건이 벌어지면 놀라면서도 내심 만족한다.
스크린 속의 인물들이 비일상적인 공간에서 비일상적인 상황에 내몰려도 자신은 안전하니까.
이것이 영화 속에서 비일상적인 장소가 갖는 힘.
그러나 만일 본인이 진짜 그런 공간에 던져진다면?
“허억! 허억! 제발, 제발! 아무도 없어요?”
처음 보는 회색빛 숲속.
파스슷.
“으허헉!”
몸 닿는 곳마다 부서지며 잿가루가 되어 버리는 나무들.
소리라고는 자신의 숨소리와 비명밖엔 들리지 않는다.
마치 금방이라도 무언가 나타나 자신의 머리통을 쪼갤 것 같다는 공포감.
아까 백화점에선 평화로운 일상 속 갑자기 튀어나온 괴물이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켰다면.
“으악! 으아아악!”
회색 숲은 너무나 뻔한 공포로 사람들의 숨통과 정신을 조여 왔다.
그러나 B급 영화의 클리셰처럼 효과만큼은 확실했다.
처음 보는 공간, 숨 막히는 분위기, 막연한 위협 속에서 생존자들은 점점 이성을 잃어 갔고.
황세아 중사의 예상처럼 사방팔방을 뛰어다녔다.
그리고 그들의 혼란과 두려움의 냄새를 맡은 놈들이 서서히 다가들고 있었다.
-크르르르.
뒤틀린 이목구비, 이마에 돋아난 붉은 눈동자, 기다란 손톱.
백화점에서 보았던 어둠의 하수인과 같은 모습의 괴물들.
녀석들이 유독 짙은 두려움을 풍겨 내는 먹잇감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둠께서 좋아하시리라!
이지를 잃어버렸지만 머릿속에 심어진 씨앗은 그들에게 계속해서 제물을 바치라 외쳐 대고 있었다.
“사, 살려 줘!”
몰려드는 괴물을 보며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생존자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을 때.
푸확!
그의 앞으로 무언가가 뚝 떨어져 내림과 동시에 엄청난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서늘한 안광이 피어올랐다.
“하압!”
강현이 한 호흡을 멈춤과 동시에.
[해파칠십이검을 발동합니다. 거인의 강골, 세개의 폐, 능숙한 몸놀림, 강인한 팔뚝, 강인한 하체와 연계하여 위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정밀함, 연구자의 눈, 약점 파악을 발동합니다. 적의 약점을 베어 냅니다]
서른 번의 검격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위력은 서른 번이란 숫자를 넘어서는 수준.
한 번 한 번 마나와 호흡, 힘을 담아 적의 약점을 가르는 검.
마치 강현의 검이 파도와 같이 주변에 피어오른 잿구름을 일제히 몰아냈다.
이후 드러난 풍경.
“흐으으, 흐으.”
겁에 질려 있던 생존자는 보았다.
마치 그림과 같이 검을 들고 있는 강현의 넓은 등과 그 주변에 멈춰 선 괴물들을.
서로를 마주 보길 잠깐.
스르륵.
누군가 그림에 선을 칠하듯 괴물들의 몸에서 일제히 붉은 실선이 피어났고.
놈들이 일제히 무너졌다.
비현실적인 풍경에 생존자가 탄성을 터뜨리려는 찰나.
“우와! 역시 최강현 일병님 대단하십니다!”
자신의 뒤에서 먼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생존자의 뒤에서 오목교가 눈을 번쩍이며 강현을 보는 중.
“쓰읍, 인마 후방 경계하라고 했냐 안 했냐.”
생존자의 옆에서 방패를 들고 있던 김대영 상병이 인상을 쓰며 한마디 하고 나서야 녀석이 제 본분으로 돌아갔다.
그제야 생존자가 자기 주변을 점령하고 있는 특임대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강현이 괴물들을 몰살하는 동안, 김대영, 장만수, 오목교가 생존자의 주변을 감쌌고.
특히 김대영과 장만수의 보호막 덕에 피 한 방울 튀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그중에서도 유독 빛나는 건 강현이었다.
그가 손을 내밀어 생존자를 일으켰고 그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생존자를 만나지는 못하셨습니까?”
“저 혼자였어요.”
그러자 김대영이 인이어에 연결된 무전기를 눌러 교신을 시도했다.
“후, 후. 여기는 2조, 여기는 2조. 생존자 한 명 확보, 생존자 한 명 확보.”
곧바로.
-여기는 본대, 여기는 본대. 같이 복귀할 예정인가?
황세아 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질문에 김대영이 강현을 돌아보았고.
“저희는 계속 움직이는 거로 하겠습니다.”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후, 후. 여기는 2조. 2조는 계속해서 생존자를 수색하겠다. 포탈을 열어서 생존자를 보낼 테니 보호해 주기 바람. 이상.”
-수신 양호.
교신을 끝마친 김대영이 강현을 바라보았고.
[사용자의 마나를 사용하여 이동 포탈을 개방합니다]
강현이 손짓하자 푸른 포탈 하나가 입을 쩍 벌렸다.
“여, 여기로 들어가요?”
생존자가 불안한 듯 특임대를 보며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혼자서 들어가긴 불안한 모양.
그를 보며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마십쇼. 안전합니다.”
잠시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생존자가 어디든 여기보다 낫겠지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고
후웅.
잠시 몸이 붕 뜨는 듯하더니 금방 발바닥에서 딱딱한 땅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가 어지러운 기분에 감았던 눈을 뜨며 비틀거릴 때.
“잘 오셨어요. 이제 안전합니다.”
황세아 중사가 그의 팔을 붙잡으며 미소 지었다.
“허어! 이게 무슨!”
포탈을 통과한 생존자가 주변을 둘러보며 황당하다는 목소리를 냈다.
그 끔찍하고 음산한 회색 숲 어느 곳.
[회색 숲에 있는 총 생존자 – 76명]
[현재 구출한 생존자 – 46명]
생존자들이 와글와글 몰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