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호랑이와 거인
상태창과 능력.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를 신비이자 기적.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떤 이유로 상태창이 생기고 능력이 개방되는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단, 첫 게이트 사태 이후로 수많은 헌터가 나타난 이래.
1세대라 불리는 헌터들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고.
“엄마! 나 상태창 열었어!”
부모가 능력자면 자식 또한 능력자일 확률이 높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꽤 많은 사회적 파장을 낳았다.
“능력 세습, 중단하라! 중단하라!”
“중단하라! 중단하라!”
“금수저보다 능력 수저인 시대!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정말 황당하게도 능력자 간의 결혼을 금지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이야기.
또 누군가는 전혀 다른 궁금증을 표하기도 했다.
“얼음 능력자와 불 능력자가 결혼하면 나오는 아이는 무슨 능력을 얻을까?”
“다른 종류의 수인 능력자끼리 결혼한다면?”
실제로 부모의 능력과 비슷한 능력을 얻을 확률이 높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유전학과 능력 계승에 관한 연구가 계속되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었고 큰 범위 안에서 비슷한 정도.
위 법칙 또한 절대적인 것은 아니어서 때론 능력자 부모 아래에 태어난 아이가 상태창을 각성 못 하는 경우도 꽤 있었고.
아예 다른 능력을 개방하는 예도 있었다.
그런 중에 산군 길드는 유독 능력의 승계 현상이 뚜렷했다.
첫 백호, 산군 서대호를 시작으로 그의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까지 대부분이 백호 능력을 각성.
-산군 혈족의 능력 계승에 대한 분석과 미래전망 보고서
그 신비할 정도로 엄격히 유지되는 능력 계승에 세계 저명한 능력 연구자들이 관련 논문을 계속해서 내놓을 정도였다.
이렇듯 혈족 중 십중팔구가 같은 능력을 개방하는 경우는 한국, 아니 전 세계적으로 없는 사례였다.
그런 곳에서 서윤진은 붉은 털을 갖고 태어났다.
[능력: 혈호(피에 미친 호랑이)]
백호인 아버지의 능력을 받아 호랑이의 혈통을 이어받았으나.
어머니의 능력인 광전사, 즉 피에 미친 전사의 속성까지도 이어받았다.
차라리 일반적인 호랑이, 황호 정도만 되었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러나 핏빛의 털과 피를 보기 시작하면 피어나는 광증, 때론 적과 아군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심해지는 광폭화.
이러한 불길한 특성 덕에 서윤진은 산군 길드의 호랑이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었고.
많은 견제와 따돌림에 시달렸다.
“크르르!”
산군 길드에서 나와 군인으로 일한 요 몇 년간.
수인화를 해도 광폭화까지 몰린 적은 없었건만.
갑자기 닥친 위기와 중대원들이 얼어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녀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거기에 등 뒤에는 거대한 거인이 얼음을 깨고 나오려는 중.
어쩌면 모두가 죽을지도 모른다!
“크허엉!”
핏빛 호랑이로 화한 서윤진의 눈이 점점 붉어졌고 미친 듯이 눈을 파헤칠 때.
강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중대장님!”
순간 서윤진은 그를 향해 손톱을 휘두를 뻔했다.
간신히 날뛰려는 본능을 억제한 그녀가 핏빛 눈동자로 상대를 바라볼 때.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강현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서윤진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서윤진 대위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붉은 광기가 조금은 잠잠해졌다.
“…방법?”
그녀의 멍한 물음에 강현이 고개를 급히 끄덕였다.
지금의 서윤진 대위라면 말이 통한다!
“제게 눈을 녹일 방법이 있습니다!”
그녀가 날뛰려는 본능을 부여잡으며 강현의 확신에 찬 눈을 마주 보았다.
최강현, 고작 일병인 아이.
그러나 그는 항상 자신에게 무언가를 보여 주었다.
그날, 그림자 괴물 데론을 만났을 때도 그랬다.
그리고 그때도 지금도 저 결연한 표정과 단호한 목소리가 서윤진의 마음을 묘하게 안정시켰다.
“방법이… 있어? 정말?”
이젠 이성을 거의 되찾은 서윤진이 무엇이든 찢어발길 기세로 꺼내 놨던 발톱을 집어넣으며 물었다.
간절했다.
사실 마음 같아선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부탁하고 싶었다.
중대원들을 살려 달라고!
그만큼 서윤진 대위에게 자신이 맡은 중대는 소중했고 이들을 구하고 싶었다.
“그럼 당장!”
“단!”
마음이 급해진 그녀가 강현에게 달려들 듯 다가갈 때.
강현이 손을 뻗으며 그녀를 제지했다.
아직 할 말이 남았다.
“눈을 모두 녹이면 저놈도 바로 깨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
강현이 가리킨 곳은 바로 얼음 속에 갇혀 있는 거인.
열기 폭풍으로 눈을 녹인다면 분명 저놈을 감싸고 있는 얼음도 녹을 터.
서윤진 대위와 강현의 눈이 잠시 교차했다.
“설마…….”
서윤진 대위의 눈에 불안감이 서렸다.
설마 또 혼자만 희생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림자에 혼자 몸을 집어넣던 그때처럼.
그러나 이번에 강현이 할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부탁드립니다. 중대원들이 도망치는 동안 저 거인을 막아 주십시오. 중대장님.”
강현이 굳은 얼굴로 조력자, 서윤진에게 부탁했다.
어떤 부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어쩌면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
그러나 한정된 시간 동안 누군가는 중대원들이 도망갈 수 있도록 저 거인을 막아야 했고.
누군가는 마지막 일격을 준비해야 했다.
강현이 상태창이 조력자를 선택하라고 했던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누군가는 희생해야 하는 싸움.
그리고 강현은 지금 서윤진 대위를 희생양으로 던지는 선택을 했다.
“다행이야.”
그러나 서윤진은 웃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오히려 기쁘다는 듯이 웃었다.
“아이들을 살릴 방법이 있어서. 그거면 충분해.”
[조력자가 당신의 선택에 완전히 동의했습니다. 중대의 생존 확률이 증가합니다]
[조력자가 조력을 넘어 스스로를 희생하려는 결연한 각오를 품었습니다. 중대 생존 확률이 증가합니다]
그녀의 결연하며 담담한 표정을 본 강현이 무엇이든 보관함의 뚜껑을 꾹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얼마든지!”
딸깍!
강현이 목함 뚜껑을 열어 젖혔고.
[안에 담겨 있던 대량의 마나와 열기가 쏟아져 나옵니다!]
후끈한 열풍이 폭풍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러자 강현을 중심으로 두텁게 쌓였던 눈이 빠르게 녹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냉기를 머금은 눈은 쉬이 녹지 않았고.
강현이 급히 마나를 보관함 속으로 불어넣었다.
[마력지체, 하급 마나 운용법, 정밀함의 연계로 마나 공급이 원활해집니다]
[무엇이든 보관함에 마나가 차오릅니다!]
[마나 공급으로 인해 열기 폭풍의 위력이 증가합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눈을 녹여야 한다.
그런데 갑자기 피닉스의 알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너무 마나 급격한 마나 공급 때문일까?
강현이 불안한 눈으로 피닉스의 알을 바라보는 순간.
[피닉스의 알이 사냥감의 기운을 느꼈습니다. 더욱 강한 열기를 뿜어냅니다]
알림과 동시에 피닉스의 알이 미친 듯이 강현의 마나를 빨아들였다.
이전에 일정 이상 마나를 주입했을 때에는 오히려 튕겨 냈건만.
[마나 흡수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마력지체가 뿜어내는 마나의 양을 상회합니다! 마나가 고갈되었습니다!]
“으으윽!”
너무 빠른 흡수 속도에 지금껏 한 번도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던 마력지체가 마나 고갈을 호소할 정도.
대신 마나를 미친 듯이 삼킨 만큼 위력은 확실했다.
피닉스의 신비로운 열기를 머금은 바람이 눈을 모두 녹이기 시작했고.
“뭐, 뭐야? 살았어? 살았다!”
눈 속에서 밖으로 나오기 위해 허둥거리던 특임대 인원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피닉스의 알이 뿜어내는 열기의 효과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따뜻한 온기가 당신을 감쌉니다. 얼은 몸이 빠르게 회복됩니다]
만년설이 품은 한기로 인해 뻣뻣하게 얼었던 몸이 빠르게 녹았고 다들 금방 제 컨디션을 회복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다들 의아해할 때.
“중대 집중!”
서윤진 대위가 아직 어리둥절한 중대원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이어진 단 한마디.
“모두 뛰어!”
쩡, 쩌정!
그녀의 뒤, 얼음산이 쩌적 갈라지는 것이 보였고.
그 안에 있는 거인의 짙푸른 눈을 마주한 중대원들이 대번에 중대장의 말을 이해했다.
“중대, 뛰어!”
“죽어라 뛰어!”
중대원들이 일제히 뒤돌아 뛰었고.
“간부 전체 집합!”
서윤진이 간부들을 소집했다.
장교들과 부사관들.
직급은 모두 다르지만 나라의 녹을 먹으며 살아가는 이들.
“중대가 도망칠 때까지 이곳은 우리가 막습니다. 우리가 지위와 특권을 부여받은 이유는 바로 이럴 때 병사들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지금이 바로 이들이 받은 녹과 권리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할 때.
물론 반대하는 이도 있었다.
“말도 안 돼! 모두 죽자는 이야기입니까!”
바로 부사관들 중 최고참 행보관.
“지금은 위협 상황입니다. 마지막으로 경고하죠. 한 번만 더 상관의 말에 토 달면 군법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존중하는 건 이번뿐입니다.”
그러나 서윤진 대위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그의 의견을 뭉개 버렸다.
보통이라면 행보관도 자신의 짬을 들이밀며 서윤진에게 한마디 해 보려 했겠지만.
“전 함께 하겠습니다.”
“…저도요.”
소대장과 황세아 중사를 시작으로 주변 간부들이 서윤진의 말을 따랐다.
[조력자의 중대 장악력이 절대적입니다. 조력자의 명에 따라 간부 전체가 움직입니다. 조력자의 생존 확률이 대폭 증가합니다!]
‘좋았어!’
떠오른 알림에 강현이 주먹을 쥐며 좋아했다.
이전에 그가 받았던 퀘스트 보상인 중대 장악력이 지금에서야 위력을 발휘했다.
덕분에 가장 위험한 순간 간부들 간의 균열을 막을 수 있었다.
조력자 선택, 중대 장악력, 피닉스의 알과 열기 폭풍 모든 것이 강현이 하나하나 쌓아 올린 결실들.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살리고 있다!
그가 때아닌 희열에 잠시 기뻐할 때.
“허억! 허억! 미친, 강현아 정신 차려!”
그를 들쳐 멘 심 병장이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일시적인 마나 탈진 상태입니다. 마력지체, 강골, 불굴 특성으로 인하여 빠르게 몸 상태를 회복합니다.]
[상태 회복까지 남은 시간 1분]
피닉스의 알 덕에 눈을 모두 녹인 것은 좋았다.
그러나 강현이 너무나 많은 마나를 빼앗긴 탓에 마나 탈진 상태에 빠져 버렸고.
막 땅에 쓰러지려는 찰나.
어디서 나타났는지 심 병장이 그를 어깨에 메고선 뛰기 시작했다.
그의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강현이 물었다.
“심 병장님! 전역 얼마 안 남았지 않습니까?”
“이 X이이이발! 어떻게 생명의 은인을 버리고 가냐!”
“이기적으로 굴라고 하셨지 말입니다.”
“이 새끼야 닥쳐! 이기적으로 굴어서 지금 널 살리려는 거잖아! 내 마음 편하려고! 그러니까 살아! 같이 살자!”
마지막에는 거의 울부짖듯 소리치는 그를 보며 강현이 웃었다.
결국 심 병장도 후임을 위해 달려왔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으리라.
그가 말했던 병장과는 다른 결말을 맞게 할 것이다!
“차륜형 자주포! 차륜형 자주포가 있는 곳으로 가 주십시오!”
“방법이 있는 거야?”
“제가 없는 소리 하는 것 보셨습니까?”
“으아아악! 엄마! 아들이 미쳤나 봐요!”
심 병장이 미친 듯이 발을 놀리며 소릴 질렀고 강현이 고개를 들어 서윤진 대위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쩡, 쩌저정!
때마침 거인이 얼음을 부수며 몸을 일으키는 장면이 보였다.
공포스러울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와 온몸에서 떨어지는 위협적인 얼음덩어리들.
그러나.
“전투 준비!”
서윤진은 오히려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로 적을 맞이했다.
방금 그들을 몰아붙였던 자연재해와 비슷한 크기!
그러나 희생을 각오한 서윤진에겐 몬스터는 두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때처럼, 두고 보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앞서게 두지 않는다!”
미궁형 던전에서 데론을 만났던 날.
그림자로 뛰어드는 강현을 보며 결심했었다.
다시는, 다시는 다른 사람의 등을 보지 않겠다고!
강현이 그림자를 뚫고 나온 후 쏟아지는 뼈 무더기 아래에서 그를 품속에 안은 채 외쳤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다시는 혼자 감당하게 두지 않을게!”
드디어 그 말을 지킬 때였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 중대원들이 모두 살아나갈 때까지 버티는 것!”
“예!”
“전 간부 공격!”
첫 시작은 황세아.
눈이 녹은 물을 이용.
수십 개의 얼음 창을 만들어 거인의 무릎을 향해 쏘아 내었고.
그 뒤를 따라 달린 서윤진 대위가 온 힘을 다한 일격을 연이어 적중시켰다.
콰앙!
놈의 몸이 기우뚱 기울자 간부 십수 명의 공격이 거인을 향했다.
폭음과 마나, 고함이 뒤섞인 싸움터.
간부들이 하체를 집중적으로 공격해 놈을 넘어뜨리려 했다.
“저러다 잡는 거 아냐?”
뒤를 힐끔 쳐다본 몇몇 병사들이 희망을 품어보았으나.
“크크큭, 잔챙이들은 꺼져라!”
거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간부들을 비웃은 놈이 손바닥을 한 번 휘두르자.
“피해!”
간부들 전체가 공격을 멈추고 도망 다녀야 할 정도였다.
“이대로 도망쳐도 괜찮은 겁니까?”
“중대장님은? 황 중사님이랑 소대장님은!”
“이런 썅! 명령이잖아! 일단 뛰어!”
달리는 와중에도 특임대원들이 자신들의 상관을 걱정했고.
“빨리 달려! 금방 갈 테니까!”
서윤진 대위가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며 온 힘을 다해 몸을 부딪쳤다.
거인이 움직이려 할 때마다 관절을 공격해 멈추길 몇 번.
날파리들의 귀찮은 공격을 더는 못 참겠는지.
놈이 입을 쩌억 벌렸고.
우우우웅.
거대한 입에 검디검은 기운이 모이기 시작했다.
“중대장님…….”
모두 저 공격을 막을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간부 중 몇이 절망한 듯 무기를 놓았고.
“이곳은 이제부터 중대장이 맡는다. 간부들 전원 후퇴하라. 지금껏 버텨 주어서 고마웠다.”
서윤진이 죽음을 각오하며 나머지 간부들마저 후퇴시키기로 결심.
겁을 집어먹은 간부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다가 결국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옆에 남은 것은 소대장, 황세아 중사를 포함한 몇 명뿐.
그들이 마지막으로 서로를 향해 웃으며 마지막 결사의 항전을 준비했다.
“크르르르.”
“하압!
서윤진 대위를 시작으로 자리에 남은 헌터들이 거인의 검은 기운에 맞서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담은 일격을 내뿜기 직전.
삐이이익!
어디선가 유성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