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최고의 루키
“최강현 헌터요? 그는 제가 본 루키 중 최고였어요.”
회식이 끝나고 다들 집으로 돌아간 후, 한진명을 앞에 둔 마운틴 길드장이 강현의 이야기를 꺼냈다.
“확인하라고 하셨죠? 그가 등 뒤를 맡길 만한 인재인지 말이죠.”
본래 산군 서대호와 한진명이 마운틴 길드장에게 했던 요청 사항.
최강현이라는 헌터를 알아보라.
판단은 전적으로 마운틴 길드원들과 길드장에게 일임했다.
힘으로 마운틴 길드를 누르든 또는 이들 앞에서 힘을 과시하든 그것은 강현의 자유.
산을 어떻게 점령할지는 이제 막 발을 디딘 호랑이 마음인 법.
다만 서대호와 한진명은 어린 호랑이를 처음 맞이한 산의 의견을 들어보려 했다.
그런데.
“뒤를 맡긴다는 말은 틀렸어요.”
마운틴 길드장의 말은 너무나 의외였다.
“제가 그 친구의 앞에 서고 싶은 거죠.”
마운틴 길드장의 깨끗한 미소가 그의 진심을 보여 주었다.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미로에서 무얼 보았길래?”
김태진 뒤를 따라갔던 한진명은 강현의 활약을 보지 못했기에 궁금했다.
대체 어떤 이유로 이런 말까지 하는가?
심지어 마운틴 길드장은 강현을 성장형 게이트에서 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미궁형 던전에서 단 한 번 본 것만으로 뒤를 맡기는 게 아니라 앞에 서고 싶다고?
마운틴 길드장의 말은 그를 따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빠른 판단력과 과감한 행동, 그러면서도 주변 길드원을 잊지 않는 세심함. 거기다 그의 검은…….”
마운틴 길드장이 잠시 미로형 던전에서 보았던 강현의 검을 떠올렸다.
가장 앞에서 모두를 지키며 싸웠던 검.
거칠었고 빠르게 몰아쳤지만 때로는 무거웠고 부드러웠다.
기존 해파칠십이검과 방어형을 섞어 쓰며 싸웠기에 그 검법이 무엇인지는 알아채지 못했으나.
강함만은 선명하게 전달되었다.
“놀라웠어요. 그리고 강하더군요. 사실 이유를 대자면 수십 가지를 댈 수 있겠지만.”
마운틴 길드장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었다.
“그분을 모시는 우리는 알지 않습니까? 타고난 자들의 위대함을… 강현이란 친구는 분명 타고났더군요.”
이유는 필요 없다.
아무리 수백 가지 이유가 있어도 사람이 싫으면 인정하기 싫고 이유 하나 없어도 사람이 좋으면 따를 수 있다.
비이성적이었지만 인간의 판단이란 감에 의존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마운틴 길드장이 보기에 강현이라는 친구는 이성적으로도 직감적으로도 지금껏 봐 온 어떤 호랑이들보다 마음에 들었다.
“절대적인 무력은 떨어질지 몰라도 앞을 지키고 싶은 사람이라는 게 중요하죠. 마운틴 길드는 최강현 헌터에 대한 확인을 끝냈음을 알려드립니다. 다음 과정은 필요 없습니다.”
“…오랜만이군요. 마운틴 길드에서 과정을 생략한 경우는.”
“아마 8년 전쯤 있었지요? 지금은 군대에 계시지만요.”
“그러게요.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모르겠군요.”
한진명이 문득 강현 이전에 자신이 모시던, 가장 촉망받던 호랑이를 떠올리고는 씁쓸한 웃음을 감추었다.
* * *
“파하하하!”
다음 날 보고서를 받아든 서대호가 한진명을 앞에 두고 쩌렁쩌렁한 웃음을 터뜨렸다.
“윤진이 이후로 처음이로구먼. 이런 경우는 정말 오랜만이야. 그렇지 한진명 팀장?”
“맞습니다.”
한진명의 얼굴을 보던 서대호가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윤진이가 군대로 떠난 걸 아직도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고 있나?”
“네.”
“…자책하지 마. 그 아이의 선택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의 산을 선택한 거지. 영영 떠나 버린 게 아니야. 그 아이 나름 새로운 산을 꾸리고 있는 거지.”
서대호의 단호한 말에 한진명이 하고 싶은 말을 억지로 삼켰다.
혈호. 백호 능력이 혈통으로 내려오는 산군 길드에서 유일하게 붉은 털을 가진 호랑이.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차별과 공격에 지쳐 산군 길드를 떠났다.
산군 서대호도 능력이 뛰어난 서윤진을 아꼈으나 모든 공격을 막아 줄 순 없었다.
“그 선택을 존중해야겠지. 그리고 혹시 아는가. 그 아이가 다시 이곳에 돌아왔을 때는…….”
그는 기다렸다.
산군 길드라는 산의 주인인 자신을 몰아내고 새로운 우두머리가 될 호랑이를.
그리고 서윤진이 만약 군대에서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다면.
“내 자리를 위협할지도 모르지.”
산의 주인이 바뀔지도 모른다.
잠시 심란한 표정으로 창밖을 보던 산군이 손뼉을 쳤다.
“어쨌든 강현, 그 친구가 생각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였단 말야? 하하하하! 등을 맡기고 싶은 게 아니라 앞을 지키고 싶다라. 극찬이구먼. 극찬이야.”
“네. 싸우지도 억누르지도 않고 모두의 신뢰를 얻어 냈습니다.”
“그렇지. 그 점이 가장 놀라워… 어쩌면 그 아인 정말 그 이름을 계승할지도 모르겠군.”
“검성… 말씀이십니까?”
“뭐, 그 친구가 케케묵은 구시대의 이름을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한진명으로도 놀랄 수밖에 없는 발언.
자신의 친우이자 한국 헌터계의 전설인 검성의 칭호를 이을 만한 인물로 평가하다니.
“그럼, 자네가 보기엔 어때 보이던가?”
서대호가 이번에는 한진명의 의견을 물었다.
사실 이번 휴가 동안 가까이 있었기에 그의 의견이 가장 정확할 터.
한진명이 잠시 고민하다 말을 꺼냈다.
“당당하고, 건방지기도 하며, 뒤끝 없고, 강하면서도 겸손하고, 사람들을 챙길 줄 알고, 승리하는 방법을 아는.”
“그래서?”
한진명의 말이 길어지자 서대호가 말을 끊으며 결론을 종용했고.
“멋있는 친구였습니다.”
한진명이 한 문장으로 강현을 평가했다.
그래, 한진명이 요 며칠간 본 최강현이란 사람은.
“멋있더군요.”
멋있었다.
이미 마흔이 넘은 그가 강현을 보며 멋짐을 떠올리다니.
“저보다 한참 어린 친구가 멋있어 보인다니. 참 웃긴 소리지만… 진짜입니다.”
한진명이 자신이 꺼낸 말이지만 어이없다는 듯 웃었고.
서대호가 그와 같이 따라 웃으며 답했다.
“내가 검성을 보았을 때도 그리 생각했지. 나보다 한참 어렸지만 참 멋있다고 말이야.”
서대호가 잠시 자신이 처음 검성을 만났을 때를 기억하며 예전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군인이었지.”
“검성이… 군인이었습니까?”
대부분은 모르는 이야기.
게이트 사태가 터지고 얼마 후.
서대호가 산군이라는 이름을 얻기 전 이야기였다.
혼란스러웠던 시절, 게이트 등급조차 정해지지 않았을 때.
그 안에서 산군과 검성은 처음 만났다.
“군복을 입고 있었어. 그때도 검 하나는 기가 막히게 휘둘렀지.”
“같이 게이트를 깨신 겁니까?”
“아니? 싸웠는데?”
“아…….”
자존심 강한 두 강자는 게이트를 두고 싸웠고 나중엔 서로를 인정했다.
라이벌이면서도 친구.
서로의 좋은 자극제이자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비록 지금은 없어졌지만 말이다.
“어쨌든 국방부에서야 인정하지 않겠지만, 헌터 특임대를 처음 만든 것도 그 친구였지.”
“그건 또 새로운 사실이군요.”
“대부분은 모르는 사실이지. 굳이 이야기하고 다니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지금 왜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진명의 의문을 표했다.
꽤 오랜 시간 산군을 모셔 왔지만 검성이 군인이었다는 것과 특임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오늘 처음 해 주었다.
“이제 앞으로 자네 홀로 강현이를 도와야 하니까.”
“네?”
“나 혼자 당분간 길드를 떠나 있을 거야. 좀 긴 여정이 될지도 모르지.”
“설마 실종자들과 관련된 무언가 찾으신 겁니까?”
“어쩌면. 그래서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만은 자네가 계속 강현이의 뒤를 봐주어야겠어.”
“맡겨 주십시오.”
“클클, 싫다는 소리 한마디 없는 것 보니 어지간히 그 아이가 맘에 들었나보구먼. 이러다 그만두는 거 아냐?”
“잘 도우려면 계속 남아 있어야겠지요.”
“이거… 호랑이를 키웠어.”
한진명이 짐짓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고 서대호가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응접실 바로 뒤, 가장 커다란 몬스터의 대가리 아래에 있는 서랍장에 손을 뻗었다.
가장 소중한 물건들을 보관해 놓은 곳.
헌터 특임대라 적힌 검은 군복 하나가 놓여 있었다.
“헌터 특임복. 흔히 흑복이라 부르는 것이지. 검성이 함께 작전 나갔을 때 필요할 거라며 나에게 선물해 준 거야. 그 친구가 군대에 있는 동안에는 나도 종종 이걸 입었었지.”
산군 길드를 세우기 전, 혼란스러운 세상을 구하기 위해 둘은 같이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산군도 잠시 헌터 특임대 소속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친우가 선물해 준 초기 특임대 군복.
그 색이 마치 빛을 빨아들이듯 너무나도 새까매서 신비롭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림자 괴물로 만든 군복이지.”
“데론 말씀입니까?”
“음, 그렇게 부르기도 하는데 놈은 이름이 따로 있었어. 꽤 강했지. 검성 그 친구가 놈을 검으로 잘게 잘라내 죽이고는 공방에 특별히 부탁해서 직물을 짠 뒤 군복으로 만들었지.”
“설마 검성께서 죽인 그림자의 왕으로 만든 옷이란 말입니까?”
“흥, 왕은 무슨. 그냥 이름 있는 괴물일 뿐이지.”
“어쨌든 특별하고 귀한 물건이군요.”
그림자의 왕, 그라임.
데론이라 불리는 그림자 괴물 중 가장 강력하며 당시 세상에 처음 등장한 네임드 보스 몬스터.
검성이 녀석을 죽인 공적은 한국 헌터계에서 전설로 내려왔다.
그런데 그 그라임의 그림자로 만든 군복이라니!
아마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보물일 터.
“딱 두 벌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양이었지. 그래서 한 벌은 그 친구가 나머지 하나는 내가 가졌지.”
잠시 서대호가 자신에겐 깊은 추억과 의미가 있는 옷을 거친 손으로 소중히 쓰다듬었다.
이젠 더는 입을 일 없는 옷.
“가져다 주게나. 이번 일의 보상이라고 하면 될 거야.”
“소중한 물건 아닙니까?”
“추억을 더듬는 것보단 새로운 미래를 위해 양보하는 것이 좋겠지.”
그래, 자신보다는 지금 헌터 특임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강현에게 더 도움이 될 거다.
추억은 추억이고 실용은 실용.
군인인 강현에게 돈을 줄 순 없으니 이게 가장 큰 보상이 될 거다.
서대호가 한진명에게 옷을 넘겨 주기 전에 잠시 멈췄다.
“참, 그런데 이거 돈으로 치면 얼마나 하겠나?”
“…안 들으시는 게 나을 겁니다. 진심으로요.”
“이래서 내가 자네를 좋아해.”
“손 놔주십시오. 옷 상합니다.”
서대호가 비로소 손에서 오랜 추억을 놓았다.
한진명이 옷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어 상자에 넣고는 깊이 인사했다.
“무탈하게 다녀오시길.”
“또 봄세.”
서대호와 미소로 인사를 주고받은 그가 건물 밖으로 나왔고 세단에 타려다가 문득 한 가지를 떠올렸다.
“집들이 선물은 잘 도착했으려나?”
* * *
그리고 그 시각 강현을 비롯한 할머니와 서연이는 당황하고 있었다.
“파랗지오. 108동 1701호 맞죠? 주문하신 소파, 침대, 식탁 배달 왔습니다.”
“네에?”
“안녕하세요. 대연 전자에서 나왔습니다. 주문하신 냉장고, 세탁기, 식기세척기, 청소기 배달왔습니다.”
“네에에?”
황세아 퀘스트와 마운틴 길드 퀘스트를 둘 다 성공적으로 끝마친 후.
건설사에서 입주에 차질이 생기기 전에 게이트를 빠르게 없애 준 마운틴 길드에게 선물로 32평형 아파트 입주 권한을 주었고.
이는 자연스레 강현의 몫으로 돌아왔다.
돈 한 푼 안 들이고 집을 얻은 셈.
‘어쨌든 싸게 구하면 더 좋지.’
본래 가장 낮은 층 비어 있는 집을 받았는데 거기에 웃돈을 얹어서 산도 보이는 좋은 위치로 집을 분양받았다.
거기까진 좋았다.
마침 퀘스트도 모두 끝냈겠다, 여윳돈도 많이 남았겠다, 이삿짐센터에 연락해 당장 이사하기로 맘을 먹었고.
바로 이사를 시작했다.
사실 변변한 짐이 없었기에 이사는 금방 끝났고 이제 집안에 새로 채울 가구와 가전제품을 사러 가려는 때.
“저희 구매한 적 없는데요?”
“최강현 씨 댁 아닌가요?”
“맞기는 한데요. 그러니까 주문한 적이 없는데요?”
“아, 걱정 마세요. 이미 계산 모두 된 제품이구요. 한진명이라는 분이 주문하셨습니다.”
“가전제품도 마찬가지로 다 계산 끝났고요. 황세아라는 분이 주문해 주셨네요.”
“아.”
그제야 강현이 영문을 깨닫고는 황급히 전화를 들었다.
잠시 신호가 울리길 잠시.
“여보세요? 황 중사님 이거 다 뭡니까?”
그런데 엉뚱하게도 답변이 현관문 쪽에서 들려왔다.
“응? 집들이 선물인데.”
그리고 도착한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이사한다는 데 능력 있는 꼰대가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한진명도 자연스레 황세아 뒤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강현이 무언가 말을 꺼내기도 전.
“안녕하십니까. 강현이와 같이 일했던 사람입니다. 강현 군 할머니시죠?”
“안녕하세요.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얼른 할머니 앞으로가 공손하게 인사했다.
“아이고, 그러셨구나. 이거 경황이 없어서 손님을 제대로 대접도 못 하고 어찌하나? 그래도 강현이 손님인데 이렇게 세워 두어서야 예의가 아니지요.”
할머니가 갑작스레 찾아온 손님을 보며 기쁘게 웃었다.
차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이사 중이라 뭘 할 수도 없는 상황.
오랜만에 맞는 손님에 무언가라도 찾아보려 할 때.
오히려 한진명과 황세아가 할머니를 말렸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잠시 물건 잘 왔나 확인도 할 겸 강현이에게 직접 전해 줄 게 있어서 왔어요.”
“저도 강현 군에게 직접 줄 게 있어서 왔습니다.”
둘이 동시에 손에 든 상자를 강현에게 내밀었고.
[산군 퀘스트 보상 최초의 특임대복을 획득했습니다]
[황세아 퀘스트 보상 소형 마력 홀로그램을 획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