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내 실험체가 되어라
“상태창과 함께 인생역전 시작된 거지. 그냥 운이야. 운. 너도 미래 모른다니까? 갑자기 길가다 돌 맞고 상태창 열릴지?”
상태창.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이자 현대 게이트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꿈.
사실 아직도 왜 상태창이 생기며 능력이 어떤 이유로 생기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저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듯 갑작스레 생긴 능력에 좋아만 할 뿐.
간혹 평소에 하던 일, 또는 쓰던 장비에 관련한 능력이 나온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기에 딱히 신빙성 있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냥 로또 같은 거야, 로또. 그것도 1등 나오면 대박이고 5등 나오면 쪽박 찰 수 있는 로또.”
그렇기에 사람들은 상태창을 복권처럼 생각했다.
우연히 능력을 얻어서 잘 긁으면 인생역전.
만약 F급 능력이라면?
능력 없는 사람보다 때론 더 위험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는 극단적인 복권.
그런데 개중엔 다른 생각을 하는 자들이 있었다.
“운? 고작 운 따위로 치부하기엔 너무 위대한 능력 아닌가? 원래 위에 서는 사람은 타고 나는 거야. 꼬우면 너희도 상태창 열던가.”
복권 아닌 특권.
능력자 중 자신의 능력을 그렇게 여기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그 많은 사람 중 상태창을 열고 수많은 능력 중 남들보다 특별한 힘을 얻은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특권 의식.
지금 강현을 바라보는 산군 길드 소속 A급 능력자 김태진이 그랬다.
분명 자신은 어중이떠중이 중에 선택받은 특별한 자.
그래서 산군 길드에까지 들어오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아저씨가 고작 이런 수준의 헌터를 관리하는 겁니까? 대체 누구길래요?”
턱끝으로 강현을 가리키는, 예의라고는 하나 없는 태도.
한진명도 순간 눈썹을 찌푸렸으나 우선은 담담히 답했다.
“알려 줄 수 없는 사항이야. 그리고 분명 마운틴 길드가 여기 던전을 처리하기로 했는데 김태진이 자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저 헌터라고요. A급 헌터. 산군 길드가 좋다는 소문 듣고 왔는데 맨날 지루한 이론 교육만 하는 거 문제 있는 거 아녜요? 현장 실습도 나오고 해야죠.”
“여기는 누가 알려 줬나?”
“그거야 신경 쓰실 거 없구요. 저도 좀 들어갑시다.”
“갑시다? 김태진, 정신 차리지?”
버릇없는 태도로 대답하던 놈이 한진명의 차갑게 굳은 얼굴을 보며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한진명이 속으로 혀를 찼다.
‘능력만 믿고 까부는 새끼. 여기 알려 준 놈이 누군지 찾아야겠군.’
길드엔 헌터들만 있는 게 아니다.
인사부부터 경영, 홍보, 게이트 관리부까지.
하나의 팀에 붙는 일반 직원만 수십 많게는 수백.
A급 헌터라면 이미 미래가 보장되어 있으니 일반 직원들이 얼마나 김태진을 치켜세워 주고 아부를 떨었을지 짐작이 갔다.
‘그러니까 저런 새끼들은 떨어뜨려야 한다고 그렇게 이야기했건만!’
한진명이 지난 인사 회의 때 좀 더 강력히 주장할 걸 하며 후회했다.
아무리 거대 길드에서 사람을 가려 받는다 해도 저런 쭉정이들이 꼭 있었다.
능력이 있다 해도 결국 저런 놈은 사고를 치는 법.
‘길드장님과 이야기를 해 봐야겠군.’
한진명이 자신에게 안 되자 마운틴 길드원 사이로 가서 잘난 척을 하는 김태진을 보며 마음먹었다.
그때.
“저 사람도 던전에 들어가는 겁니까?”
강현이 한진명에게 넌지시 물었다.
한진명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너가 이번 던전의 주인공인데 절대 안 되지. 걱정하지 마, 저 철없는 놈은 단독 행동으로 나중에 따끔하게 혼을 낼 테니까.”
김태진을 보다가 강현을 보자 한진명의 마음이 좀 풀어졌다.
어느새 던전의 주인공으로 격상된 자신의 위치에 강현이 실소했다.
자신도 저 재수 없는 녀석을 보고 싶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안으로 데려갔으면 합니다.”
“뭐?”
굳이 김태진을 데려가겠다는 강현의 말에 한진명이 눈썹을 찌푸렸다.
설마 도움이라도 받겠다는 뜻인가?
하긴 A급 능력자가 있으면 이번 던전은 쉽게 무력화할 수 있을 터.
그러나.
“재미없습니다.”
강현의 대답은 의외였다.
“재미?”
“이미 성장형 게이트 깨는 거 보여 드렸지 않습니까? 같은 거 보여 줘 봤자 소용없지요.”
[언변, 신뢰, 감화를 발동합니다. 조력자가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설득 가능성이 대폭 증가합니다]
“소용이 없다?”
“네.”
“그래서 뭘 하고 싶은 거지?”
“간단합니다. 저기 저 검 두 자루나 들고 다니는 검사인지 검 보관함인지 모를 친구와 저와 팀을 나누어 던전을 먼저 깨는 사람이 이기는 거로 하죠.”
“팀을 나누어서?”
“네, 미로형 던전이라면서요. 보자구요. 누가 진짜 애송이인지.”
사방이 조용했다.
주변에 있는 마운틴 길드 사람들과 심지어는 한진명마저도 입을 꾹 다문 채 강현을 쳐다봤다.
“저 새끼가…….”
특히 검 보관함이라는 모욕까지 들은 김태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저런 듣도 보도 못한 새끼가 어디서 감히!
그가 막 화를 터뜨리려 할 때.
“하시죠?”
대답은 한진명의 입이 아닌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장건철 병장보다 더 커 보이는 몸.
온몸을 둘러싼 갑옷.
진짜 산을 연상시키는 마운틴 길드의 수장, 김광규였다.
“어차피 미로형 던전은 한 팀이 아니라 여러 팀으로 나누어 공략하는 게 정석이니 크게 문제 될 일도 없지요.”
---
김광규
직책: 마운틴 길드장
나이: 53
호감도: 12
정보: 아무나 저 재수 없는 A급 좀 밟아 줘라.
---
‘꽤 솔직하시네.’
정보창에 떠오른 김광규의 솔직한 심정에 강현이 안도했다.
혹시나 허락하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마운틴 길드장이 직접 찬성까지 할 줄이야.
결국 한진명이 강현과 마운틴 길드장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마운틴 길드원들은 갑작스레 성립된 내기에 슬며시 미소 지었다.
마침 김태진에게 계속 무시당해 화가 났는데 잘되었다.
저 재수 없는 놈 좀 혼내 주었으면 하는 마음.
“대신, 저와 마운틴 길드장님은 각 팀 뒤에서 혹시 모를 위협을 대비하는 것으로 하죠. 그리고 강현아, 이런 위험한 내기는 이번뿐이다. 네가 방금 말한 것 또한 독단적인 결정이야. 이곳은 놀이터가 아닌 싸움터고.”
한진명의 엄격한 말에 강현이 고개를 숙였다.
강현도 퀘스트 때문에 자신이 과도한 고집을 부린 것을 알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마저 고개를 빳빳이 들 만큼 경우 없지도 않았다.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마운틴 길드장님.”
“그래, 알면 됐다.”
“뭐, 괜찮아요. 이미 벌어진 일이니까.”
그리고 이런 모습이 오히려 한진명의 마음을 움직였다.
방금 김태진은 자신이 잘못했음에도 인정하기보다는 도망치려 했다.
심지어 그거로도 모자라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 사이에 서서 구겨진 자존심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강현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알았고 태도 또한 당당했다.
자만심이 아닌 자신감이며 비굴함이 아닌 겸손함이다.
저기 있는 능력만 있는 쭉정이와는 수준이 다른 인품.
둘의 전혀 다른 태도에 한진명은 물론 마운틴 길드장과 길드원까지 강현에 대해 호감을 품었다.
[조력자 한진명의 호감도가 증가했습니다]
[마운틴 길드원들의 호감도가 증가했습니다]
방금 혼난 것 치고는 모두의 호감도가 올라 오히려 강현이 의아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강현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김태진이 성큼성큼 다가와 짓씹듯이 말을 뱉었다.
“내기? 그래서 넌 뭘 걸 수 있냐? 걸 건 있고?”
“뭐, 아무거나 걸지 뭐. 뭘 원하는데?”
강현이 김태진의 기세에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받아쳤다.
한진명과 마운틴 길드장이야 강현에게 호감을 보였고 자신의 실수도 있었지만, 눈앞에 있는 놈은 아니지 않은가.
강현이 겁먹을 이유도 기죽을 필요도 없었다.
그 당당한 태도에 놈이 입술을 말아 올리며 웃었다.
“글쎄 팔 한 짝은 가져가야겠는데?”
“가져가.”
너무 선선한 대답에 오히려 김태진의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마주 바라보는 강현의 눈이 시퍼렇게 번뜩였다.
“대신 너도 팔 한 짝 걸어. 분명히 말하는데 이거 농담 아니다. 자르고 병원 가서 붙이든 말든 그건 본인 자유고.”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에 김태진이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분명 자신보다 약해 보여 우습게 보았다.
그런데 이 미친놈은 뭐란 말인가!
지금껏 목숨을 건 싸움 한번 해본 적 없는, 그저 자신의 A급 능력만을 믿고 허세를 떠는 놈과 강현은 달랐다.
군대에 입대해서 많은 전투를 겪었고 죽을 위기에 놓인 적도 있었다.
심지어 그제까지만 해도 홀로그램이긴 하지만 수없이 패배하면서도 독기 하나로 버텼다.
김태진 같은 세상에 나와 본 적도 없는 화초와는 걸어온 길이 달랐다.
심지어 지난번 한진명이 자신과 특임대를 무시했을 때도 참지 않았던 그다.
“대답은? 그래서 팔 자를 거야? 아니면 다른 거 잘라?”
“그건…….”
슬금슬금 주변 눈치를 보던 김태진이 한발 물러섰다.
“그건 문제가 되니까. 다른 거로 할게.”
“그래? 뭐, 다리?”
“이번 던전 보상금 전액 걸어.”
“고작 돈을 걸자고?”
강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한진명을 바라보았다.
던전 보상금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하지 않은 상황.
한진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알아서 지급하겠다는 의미.
“좋아. 대신 난 다른 걸 받아야겠어.”
소중한 걸 하나 빼앗아라.
그게 뭐가 있을까?
그러다 문득 놈이 차고 있는 두 개의 검에 눈길이 갔다.
“돈은 됐고. 검 하나 걸어.”
“뭐? 이런 미친!”
“왜? 쫄려? 그럼 뒈지시던가.”
“이게 얼마짜리인지는 알고 하는 소리야? 걸려면 비슷할 걸 걸어야지!”
“얼만데?”
“이거 하나만 해도 30억이 넘는단 말이다!”
“오.”
그거 탐나는걸?
강현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보며 김태진이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뭔가, 뭔가 잘못 건드렸다.
저놈은 이상하다!
“이건 절대 안 돼! 그냥 내기를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상대의 강경한 반응에 강현이 입맛을 다셨다.
그때.
‘이 기업은 무료로 해 주거든.’
황세아 중사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대상의 능력을 복제하고 그대로 홀로그램으로 만들 수 있는 장치.
놈과 직접 싸우진 못하더라도 나중에 써먹을 곳이 있지 않을까?
“좋아, 난 다른 걸 받지.”
“검만 아니라면 뭐든지.”
“능력 그리고 자존심.”
강현이 정확히 김태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 실험체가 되어 줘야겠어. 아주 굴욕적으로.”
[서브 퀘스트 보상이 정해졌습니다]
[성공 시 – 홀로그램에 김태진 능력 추가 및 상대에게 페널티 적용, 스텟 스킬 레벨 추가권 1]
[실패 시 – 메인 퀘스트 32평 아파트 업그레이드 보상 취소]
“미친, 실험체라니! 그게 뭐야! 잠깐!”
김태진이 당황하여 마구 소리칠 때.
우우웅!
지하 주차장 한쪽에 검은 구멍이 생겨났다.
새까만 구멍에서 음침한 바람이 불어 나왔고 다들 그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자! 그럼 그렇게 하고 출발해 볼까!”
아까 무시당했던 걸 잊지 않았던 마운틴 길드원들이 몸을 돌렸다.
30억짜리 검을 빼앗기는 꼴을 못 보는 건 아쉬웠지만.
실험체라니 그건 못 참지!
저 잘난 체하는 놈이 곤란한 일이라면 어쨌든 환영이었다.
“이왕 실험하는 김에 사람으로도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네.”
한진명마저 강현의 등을 툭툭 치며 응원했다.
자리에 있던 모두가 김태진을 홀로 두고는 미로형 던전으로 진입.
마운틴 길드가 자연스레 두 팀으로 인원을 나누었다.
“그냥 단순히 1팀, 2팀 나눴어요. 아무래도 형평성의 문제가 있으니 제가 촤강현 헌터를, 팀장님이 김태진 헌터를 따라가도록 하죠.”
“좋습니다.”
기존에 던전 공략을 위해 나누어 놓았던 1팀, 2팀 그대로.
각 팀 선두는 강현과 김태진이 맡기로 했다.
앞에는 총 8개의 문.
“우선 이쪽으로 모두 따라와!”
김태진이 팀원들의 의견도 듣지 않은 채 무작정 그중 하나로 들어갔다.
어차피 하급 헌터들이다. 자신보다 나을 리가 없다.
A급에게 이런 시시한 던전은 쉽다.
“이 개새끼 넌 두고 보자!”
이미 강현에게 된통 당한 데다가 이를 보며 웃은 마운틴 길드원들에게도 화가 잔뜩 난 상태.
‘이 하급 헌터 새끼들! 내가 산군 길드의 주축이 되기만 하면 너희는 다 죽었어!’
그가 두 자루의 검을 뽑아 들며 미로형 던전에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반면.
“우선 탐지형 능력자 계십니까?”
강현은 지난번 성장형 게이트에서 보았던 탐지계 능력자를 우선 찾았다.
“전데요.”
손을 든 사람은 지난번 성장형 게이트에서 핵 위치를 찾아냈던 헌터.
그녀 또한 자신이 강현의 팀에 속해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저 재수 없는 놈을 이길 수 있게 반드시 길을 찾아 주리라.
그렇게 결심하며 능력을 개방하려 할 때.
“혹시 능력을 사용할 때 쓰는 물건이 있습니까?”
“네? 아, 이게 있기는 한데. 대단한 건 아니에요.”
상대가 손에 쥐고 있던 작은 나침반을 내밀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손때가 타고 오래되어 보이는 물건.
“꽤 오래되어 보이네요?”
“보통 탐지계 아이템은 비싸거든요. 그래서 중고 중 가장 성능 좋은 물건을 구했어요. 좀 오래된 물건이기는 한데 능력 증폭 및 방향 안내, 때로는 정확한 위치 거리를 알려 줄 정도로…….”
탐지계 헌터가 대단한 건 아니라는 말과는 다르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아까 30억원? 이 물건 원래 가격은 그딴 싸구려 검이랑은 비교도 못 할 정도로 비쌀걸요? 오래돼서 간혹 오류가 있어서 그렇지.”
“잠깐.”
강현이 상대의 자랑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몰라 말 허리를 자르고 들어갔다.
이 정도면 확인은 끝났다.
“잠시 그 물건 쥐어 볼 수 있을까요?”
“자, 잠깐이에요? 정말 잠깐?”
상대가 떨리는 손으로 나침반을 넘겨 주었고.
나침반이 강현의 손에 올라가는 순간.
[새로운 고물 구형 패스 파인더에 접촉하였습니다]
[탐지계 관련 능력이 없으므로 경험치 흡수가 제한됩니다]
[습득 조건: 장거리 시야 레벨 10]
지금 강현의 장거리 시야 레벨은 5, 아직 멀었다.
그러나 강현이 오히려 웃었다.
[강제 추출권을 사용합니다!]
[이전 사용자들의 경험치를 흡수합니다!]
[새로운 스킬 하급 길잡이를 습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