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손이 가요 손이 가
번쩍.
“…….”
이등병 첫 휴가 특징.
아침에 기상나팔 없어도 아침에 바로 일어남.
강현이 잠시 깊은 한숨을 쉬며 시계를 보니 시간은 6시 28분.
‘아직 2분 남았다.’
동절기 기상 시간은 6시 반.
기상나팔이 울리려면 아직 2분 남았으니 잠깐이라도.
“아, 지금 휴가 중이지…….”
강현이 문득 자신의 상황을 깨닫고는 피식피식 웃었다.
물론 군대에 물들어 버린 자신의 생체 리듬이 웃기기도 한 것이었지만.
“더 잘 수 있네.”
더 잘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이대로 늘어지게 늦은 아침까지 잠이나 자야겠다.
강현이 다시 눈을 붙였고.
“…이런.”
결국 상체를 일으켰다.
이놈의 몸이 국방부 시계에 맞춰진 탓에 잠이 오질 않았다.
“우웅, 차돌바기…….”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통에 잠시 깬 서연이가 손, 발을 꼬물거리며 잠꼬대를 했다.
차돌박이라.
‘오늘 아침은 차돌박이 된장찌개다.’
덕분에 아침 메뉴를 정한 강현이 서연이가 걷어찬 이불을 덮어 주고는 방을 나섰다.
잠시 냉장고를 뒤진 강현이 휴가 첫날 산 소고기와 두부, 된장 등을 꺼내 능숙하게 요리를 시작했다.
[하급 요리 스킬을 사용합니다. 요리의 감칠맛이 증가합니다]
바글바글 끓어 가는 된장찌개 소리를 들은 할머니가 거실로 나왔다.
“아이고, 강현아. 왜 이리 일찍 일어났니. 이 할미가 하게 두지.”
“아녜요. 피곤하실 텐데 더 주무시지 않고요.”
“아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새벽잠이 없구나.”
강현이 찌개를 마저 끓이는 동안 할머니가 밑반찬과 밥을 푸며 아침을 준비했다.
참 오랜만이었다.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힐링 되는 듯한 기분.
“아침에 제가 짐 정리해 놓을게요. 언제 이사할지 모르니까. 준비해 놔야죠.”
“할미도 도우마. 자잘한 물건 따로 싸 놓으면 되지?”
“네.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오늘 오후부터는 좀 바빠질 것 같아요.”
“집에 안 들어오니?”
할머니의 걱정 어린 눈에 강현이 씩 웃었다.
“집에는 꼭 들어와야죠. 어제 서연이랑 약속했거든요.”
서연이가 때마침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비척비척 걸어 나왔고.
“어? 차돌바기 된장찌개! 꿈에서 봤어!”
좋아하는 음식 때문에 기분이 좋았는지 도다다 달려와 탁상 앞에 자리 잡았다.
“…….”
“…….”
자신이 밥 한술 뜨기를 기다리는 손자와 손녀를 보던 할머니가 웃으며 식사를 시작했다.
아침 식사 후 약속 시각 전까지 짐 정리 시작.
[장비 관리, 정리 정돈 스킬을 발동합니다. 정리 속도와 완성도가 증가합니다.]
“아이고 요즘 군대에서는 대체 뭘 알려 주길래 저리 빠른고?”
“헤에.”
집을 구하면 바로 이사할 수 있도록 짐을 정리하기로 하긴 했는데.
너무나 빠른 강현의 정리 속도와 움직임에 할머니와 서연이는 그저 멍하니 그의 움직임을 바라볼 뿐이었다.
강현의 움직임은 체력, 근력, 민첩 스텟의 향상으로 인해 이미 일반인의 범주를 벗어났다.
거기에 스킬까지 적용되자 강현이 지나간 자리는 빛이 날 정도로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흐음!”
각까지 완벽하게 맞춘 것을 보고 나서야 강현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이거지.
휴가 나온 이등병 특징 두 번째, 정리에 집착함.
물론 자신은 이런 점을 몰랐다.
‘아침 정리 작업 끝냈으니까 오후엔 훈련을 나가 볼까.’
아아, 그렇다.
강현은 이미 뼛속 깊이 군인이 되어 버렸던 것.
아직도 멍하니 서 있는 할머니와 서연이에게 인사를 건넨 강현이 그제 산 새 옷을 챙겨 입고선 대문을 나섰다.
-30분 후 버스정류장 도착합니다.
슬슬 도착할 시간이었다.
* * *
강현이 휴가 첫날 내렸던 버스 정류장 앞으로 향했다.
그제 백화점 직원의 추천으로 산 옷이 제법 잘 어울렸다.
바짝 깎은 머리만 아니라면 군인인 줄 모르지 않을까?
‘이 정도면 사회인 아닌가?’
사실 주머니에 어색하게 꽂아 넣은 손과 어색할 정도로 바르게 잡혀 있는 강현의 자세를 보면 누구나 군인임을 알아보겠지만.
강현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오랜만에 주머니에 넣은 손을 꼼지락거릴 때.
휴가 첫날 보았던 검은 세단 하나가 강현 앞으로 부드럽게 멈춰 섰다.
“타시죠.”
지난번 보았던 중년 남자.
강현이 조수석에 타자.
“맡은 일에 관한 서류입니다.”
그가 지난번과는 다른 사무적이고 담담한 태도로 서류철을 내밀었다.
뭔가 비밀스러운 일이라도 하는 것 같은 기분에 강현이 조심스레 서류철을 보자.
-마운틴 길드에서 인정받아라. 방식은 자율.
날카로운 글씨로 단 한 줄만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이런 쪽지를 전달하는데 왜 이렇게 화려한 서류철을?’
무슨 임명장이나 비밀스러운 지령이라도 전달하듯 두꺼운 서류 봉투에다가 그거로 모자라 금박까지 박은 서류철이라니.
강현이 황당한 눈으로 그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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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명
직책: ???
나이: 47
호감도: 0
정보: 산군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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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만 봐도 알겠다.
첫날도 산군, 산군 거리며 신경질을 내더니 충성심이 엄청난가 보다.
“정보는 이게 끝입니까?”
“산군님의 명은 절대적입니다. 별다른 설명은 필요 없지요.”
“그건 알겠는데 정보라도 좀 주셔야지 않겠습니까.”
“산군님의 명은 절대적.”
“그 절대적인 명을 잘 수행하기 위해선 충분한 정보도 필요한 법입니다.”
강현에 대답에 잠시 불만스럽게 침음을 흘린 그가 입을 열었다.
“마운틴. C급 길드로 산군 길드의 산하 길드입니다. 오늘부터 강현 씨는 그곳에서 일하게 될 겁니다.”
“일이요?”
“길드 쪽엔 사정을 설명해 두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본인 입으로 산군님과 관계가 있다는 말은 삼가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인정받으라는 뜻은 대체?”
강현의 물음에 한진명이 입술을 말아 올렸다.
“첫걸음부터 어찌 산군의 산을 밟을 수 있을까요. 처음엔 작은 걸음부터 하는 것이 맞지요. 그리고 남들에게 인정받는 방법은 본인이 찾아야 하는 법.”
알려 주지 않겠다는 뜻.
11박 12일 동안 마운틴 길드에서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
물론 강현의 곤란해하는 얼굴을 기대하며 한 말이었지만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한진명이 강현의 표정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허세일 뿐이겠지.’
어제도 그랬다.
존경하는 길드장님의 명령에 따라 모시러 왔건만 대번에 거절하는 맹랑함.
거기다 이 일에만 집중해도 모자를 판에 다른 일까지 맡겠다며 부린 배짱.
‘아무리 어린아이라지만 너무 철이 없군.’
자그마치 국내 5대 길드의 주인 산군 서대호가 보이는 호의다.
다른 헌터들이라면 넙죽 엎드려서라도 받고자 하는 기회.
그런데 강현은 오히려 무덤덤하고 무관심해서 한진명의 속을 긁었다.
‘아직 자신의 현실을 모르는 애송이이니 이해를 해야겠지.’
저 나이에는 그러기 쉽다.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고, 무엇이든 해낼 것 같은 기분이 들 거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은 법.’
현실에 깨지고 괴물 같은 인간들을 만나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평범한 사람 중 한 명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아이는 어른이 된다.
서대호에게 아무 정보도 듣지 못한 한진명의 입장에선 길드장의 의도를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반면.
[산군 서대호 퀘스트 우선은 작은 봉우리부터를 시작합니다]
[성공 조건 하위 퀘스트 세 개를 완수하십시오]
[첫 번째 하위 퀘스트 이미 경험해 본 재미를 시작합니다]
한진명의 의도완 다르게 강현은 침착했다.
어차피 퀘스트라면 상태창이 먼저 무얼 해야 하는지 알려 줄 것이다.
이미 입대 이후부터 놀랄 일을 자주 겪은 강현에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불안해할 이유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강현은 자신이 할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기만 하면 될 뿐.
그리고 그럴 자신이 있었다.
침묵 속에서 달린 차량이 멈춰 선 곳은.
“도착했네.”
바로 게이트 앞.
마침 앞에 모여 있는 헌터들을 보니 막 게이트 안으로 진입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한진명을 따라 내린 강현이 게이트 근처로 다가가자.
“오셨습니까? 한 팀장님. 아, 이 친구가 현장 실습한다는 그 친구입니까?”
“그렇다네. 아직 실력이 여물지 못해서 좀 구경이나 시켜 주려고 왔지.”
“좋지요. 이름이 뭔가요?”
“최강현입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중년인이 강현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기회를 얻은 거야. 외부인이 길드 공격대가 게이트 무력화하는 걸 현장에서 볼 일은 별로 없거든.”
이미 게이트 무력화를 겪어 본 강현이었으나 별말 하지 않았다.
“이미 1대는 안으로 진입한 상태입니다. 이제 2대가 진입할 것이니 같이 들어가시죠. 2대 진입!”
한진명에게 공손히 보고를 마친 그를 선두로 마운틴 길드 2공격대 인원들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한진명이 그들을 뒤따라 안으로 들어간 후.
느긋하게 주변을 살피던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게이트가… 커졌어?”
분명 방금 한진명이 안으로 들어간 후 게이트가 한 뼘 정도 커졌다.
이거 알고 있다.
첫 작전 때 겪었던 성장형 게이트.
강현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안으로 들어서자.
“이게 대체!”
마운틴 길드 2공격대 대장이 방금까지 서글서글하게 웃던 표정을 완전히 굳힌 채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막아! 저 새끼들 뭐야!”
“2대! 2대는 언제 오는 거야!”
선발대인 1대의 임무는 안으로 진입해 입구를 뚫고 2대가 올 때까지 현장을 파악하는 것.
그러나 지금 그들은 몰려오는 몬스터를 막느라 급급한 모습이었다.
그 이유는 선발대의 외침으로 알 수 있었다.
“성장형 게이트입니다!”
“이런 제기랄! 왜 대체 미리 보고 안 한 거야!”
“방금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방어진 구축하고 자리 사수해! 탐지팀! 게이트 핵 위치 찾아내!”
분명 1대가 돌입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평범한 D급 게이트였다.
손쉽게 입구를 확보한 채 2대를 기다리던 중.
갑자기 몬스터들이 몰려오기 시작했고.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2공격대가 성장형 게이트란 걸 파악할 새도 없이 안으로 진입해 버린 것.
참 기막히고도 재수 없는 불운.
어중이떠중이였다면 지금 몰려드는 홉고블린 무리에 휩쓸려 큰 피해를 보았겠지만.
C급 길드인 만큼 대처가 빨랐다.
마운틴 길드원들은 처음 보였던 당황한 기색과는 다르게 재빠르게 방어선을 형성하며 홉고블린들을 막아 내기 시작했다.
‘E급에선 고블린부터 시작이었는데 여기선 홉고블린부터인가.’
강현이 전입 첫날 겪었던 성장형 게이트를 떠올렸다.
등급이 높은 만큼 강한 몬스터부터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숫자도 훨씬 많아 주변을 빼곡하게 채울 정도.
확실히 등급이 높으니 나오는 몬스터의 숫자와 수준이 달랐다.
‘총이 있었으면 좋았을걸. 총이 없네.’
M-60H 정도면 놈들을 쓸어버리고도 남았을 텐데.
강현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실 때.
“헌터란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 어쨌든 너무 겁먹지 마. 이래 봬도 산군 길드의 산하 길드인 만큼 마운틴 길드도 강하거든, 특임대와는 비교도 못 할 만큼 말이야.”
한진명의 마지막 말이 강현의 성격을 자극했다.
그가 아무리 산군 길드의 일원이라지만 예의에 어긋나는 말.
여기 이들보다 등급은 낮을지 몰라도 함께 밥 먹고 훈련하고 목숨을 걸고 같이 싸우는 전우.
그들을 무시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강현의 눈썹이 구겨졌다.
그리곤 그가 한진명을 보며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 말 사과하셔야 할 겁니다.”
강현이 한창 방어진을 구축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마운틴 길드 공격대 근처로 다가갔다.
“검 좀 빌릴 수 있겠어요?”
팔에 상처를 입은 채 후방으로 빠진 사람에게 묻자.
“누가 본인 돈으로 산 검을 줍니까. 저 예비용 보급품에 싸구려 있으니 써요.”
게이트 공략을 위해 쌓아 놓은 보급품 무더기를 가리켰다.
그중 아무 검이나 한 자루 뽑아 들자.
[새로운 고물 마운틴 길드 기본 보급 검을 수집했습니다]
[이전 사용자들의 경험치를 흡수합니다]
역시나 알림이 울렸다.
강현이 검을 뽑아 들며 싸움터로 뛰어들었고.
달려드는 홉고블린을 향해 온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이병 최강현의 사회에서의 첫 사냥!
[칭호 고블린 학살자가 적용됩니다. 고블린을 대상으로 공격력이 30% 증가합니다]
“끼에!”
서걱!
홉고블린이 소리를 지르기도 전, 단칼에 놈의 몸을 잘라 버렸다.
강현이 잠시 멍한 표정으로 검을 내려다보았다.
전입 처음 왔을 때만 하더라도 홉고블린, 강해 보였는데?
“뭐야, 너희 약하네.”
물론 강현이 너무 강해진 거지 홉고블린이 약한 게 아니었다.
군대에 입대하고 특임대 활동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강현은 자신도 모를 정도로 강해졌던 것.
실제로 몰려드는 홉고블린 때문에 마운틴 길드원 중에도 부상자가 나올 정도였다.
“키루룩!”
“캬르륵!”
“저 쾨물루루룩!”
강현을 앞에 둔 다른 홉고블린들이 항의라도 하듯 소리 질렀으나.
“눈깔아.”
서걱, 서걱, 서걱!
모두 한칼 컷.
그리고 강현은 새로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검은 총과 다른 손맛이 있구나.’
으음, 더 느끼고 싶은데?
마침 앞에 맛 좋은 괴물들이 넘쳐 났다.
강현의 몸이 마나를 머금고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