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외전 28화>
어둠의 가시가 솟구친다.
하나, 둘, 수십, 수백 개가 솟구쳐서 파도처럼 몰아쳐 어둠은 바다가 되었다.
이스마일과 올리버가 필사적으로 피해 봤지만 불가능.
끝내 심연의 바다에 휩쓸리고 만다.
심해 깊은 곳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이곳이 바로 그러했다.
어둠 속에서 어둠을 상대한다?
불리하다.
둘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올리버.”
“네.”
이스마일이 허공을 향해 검을 내지르자 계단들이 어둠 사이로 길을 만들어 냈다.
올리버가 이스마일을 안고 계단을 질주했다.
그 잠깐의 사이에도 가시들은 끊임없이 둘을 노리고 있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더욱 교묘해진 가시들.
둘은 이를 질끈 깨물었다.
방법이 없다.
돌파밖에.
이스마일이 검기를 별빛처럼 흩뿌리며 가시들을 잘라 낸다. 올리버는 계약을 이행, 몸으로 받아 냈다.
두 사람이 하늘로 올라서자 가시가 가득한 어둠 아래에서 뭔가 꿈틀대며 무언가 솟구쳤다.
한 짝의 다리, 한 짝의 손, 불길한 잿빛의 피부.
이족 보행에 완벽한 인간 형태의 몬스터.
‘마족’이었다.
마족이 하늘을 향해 소리치며 날개를 펼쳤다. 이를 시작으로 수천의 마족들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들의 목표는 이스마일과 올리버.
“징그럽네.”
“그러게요.”
까마득한 어둠이 몰려온다.
우리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
이스마일의 이마에서 또르륵, 땀방울이 떨어졌다.
“……지원은 없겠지.”
“생존자라도 보고 싶네요.”
“젠장.”
“지랄 났네요.”
사방이 캄캄하다.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스마일이 만든 계단을 따라 무작정 오르기만 했다.
“다른 애들은 무사하겠지.”
“역시 왕자님. 인정이, 넘치셔.”
기어코 따라잡은 마족이 창을 내질렀다. 올리버가 창을 잡아 끌어들이고, 이스마일이 검으로 마족의 목을 날렸다.
그래, 분명히 시원하게 날렸다.
그런데.
쐐액-!
어둠이 벌레처럼 꿈틀대며 날아가던 머리를 잡아챘다. 그리고 몸통이랑 다시 붙으려 했다.
“어딜.”
이스마일의 ‘성운’이 빛났다.
순백의 검이 ‘빙하’로 속성 변화, 형상 복제, 종국에는 냉기의 태풍이 일대를 덮쳤다.
마족들의 신체를 잇던 어둠 사이로 성에가 끼더니, 순식간에 빙하의 감옥에 갇혔다. 재생을 못 한 마족들에게 남은 건 죽음뿐.
생을 다한 마족들이 한 덩어리의 빙하가 되어 추락했다.
올리버는 ‘계약’을 덧입혔다.
자신이 아닌 ‘마족’에게.
자신과 함께 계약을 묶어 버리는, 이름 하여 ‘불공정 계약’이었다.
계약에 걸린 마족들의 몸이 어둠에서 드러난다.
‘몸을 숨길 수 없다.’
어둠의 요새 뒤에 숨어 공격할 때가 무서운 거지, 모습을 드러낸 마족은.
한 주먹거리다.
콰직!
올리버가 마족의 가슴에서 마석을 뜯어냈다.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들린다. 인간보다는 귀신에 가까운 소리.
하지만.
바다에서 물을 퍼 날라도, 바다는 줄어들지 않는다.
한 줌의 어둠을 덜어 냈음에도 아직 심연의 바다는 깊기만 했다. 두 사람이 맹렬히 저항해 보지만, 심연의 바다는 질식할 듯 몰아치며 둘의 목줄을 조여 왔다.
“하아.”
“후…….”
더 이상 탈출로는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빛의 계단도 길을 잃었다.
완전히 고립된 둘.
절체절명의 순간.
어둠이 갈라지며 누군가 기품 있는 자세로 인사했다.
백작.
마족의 백작이었다.
“Hello. 하시다.”
“……!!”
“……!”
백작은 놀란 둘의 반응에 신이 난 듯 계속 떠들었다.
“Human. 언어. 어렵습. But. 흥미 있다.”
“설마 했는데, 정말 지성체였어?”
“놀랍군요.”
마족과 상대하며 지성이 있을 거라고는 짐작했다. 몬스터의 전략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세련됐으니까.
그런데 인간의 언어를 습득할 만큼 지성을 가졌다니.
“Human. 강해요. 우리랑. with? 함께? 함께. right. 합시다.”
백작이 손을 펼치는 순간,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무언가.
그것은 인간의 얼굴이었다.
어둠이 촉수처럼 뒤덮인 얼굴들.
“We. 함께. 강해진다. 이 세상. We! 것이다!!”
백작이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외치고, 힘을 개방한다.
어둠이 조형된다.
사방을 조여 오던 가시는 늑대의 대가리로 변해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었다.
애초에 답은 필요치 않았다.
너희는 이 어둠의 일부가 되어 우리와 함께하게 될 것이다.
백작이 활짝 웃고.
어둠의 늑대가 달려들었다.
이스마일의 검이 한 자루씩 벗겨졌다. 올리버의 계약도 한 줄씩 삭제되어 갔다.
상처들이 늘어 갔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의지가 꺾여 간다.
그때.
둘의 품에서 반짝이는 무언가.
이스마일은 허리띠에, 올리버는 팔찌에 달려 있던.
해골 장식.
해골 장식의 눈에 귀기가 서렸다.
그리고 그 순간.
이스마일의 목을 노렸던 어둠의 늑대가 두 동강 났다. 올리버의 다리를 물고 있던 늑대는 으깨졌다.
사방을 조여 오던 어둠의 늑대들이.
전부.
일순간.
한 몸처럼…….
분해됐다.
비산하는 어둠의 조각 사이로 보이는 백작.
백작은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뭐어…….”
그리고 이형의 존재가 어둠의 파편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퍼억-!
백작의 가슴을 꿰뚫었다.
백작이 믿기지 않는 눈으로 뚫린 가슴을 바라본다. 거기에는 인간의 팔이 있었다.
시선을 올려 팔의 주인을 바라봤다.
“너, 넌…….”
“안녕.”
새하얀 이를 드러내고 있는 거구의 사내.
박기혁이었다.
“얘들아.”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푸른 귀기들.
마왕의 군세가 눈을 뜨고.
“밀어 버려.”
절규와 함께 심연의 바다가 갈라졌다.
마왕이 왔다.
이 전쟁을 끝내러.
* * *
전장에서 인간들이 어둠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어둠을 향해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쏜다. 온갖 속성을 담은 마법이 쏘아졌다.
그럼에도 어둠은 줄지 않는다.
오히려 더 몸집을 키워 나가 인간을 집어삼켰다.
“쿠쟌!!”
“사, 살려 줘!”
어둠에 삼켜진 인간은 그 즉시 오염된다.
오염된 인간의 미래는 두 가지다.
이지를 상실한 채 어둠의 일부가 되거나, 아니면 인간의 거죽을 벗어던지고 ‘마족’이 되거나.
여기 하이드는 후자였다.
“끝내주는군!”
하이드의 얼굴 위로 검은 혈관이 지렁이처럼 기어간다.
진화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버릴 준비가 돼 있던 하이드. 인간의 거죽 따위는 일찌감치 버린 지 오래다.
이런 그가 마족이 되지 않고 배기겠나.
힘을 준다는데!
하이드의 몸에서 신체들이 튀어나왔다.
팔과, 다리, 얼굴…… 인간의 신체들이 나와 저마다의 방법으로 수인을 맺고, 들불처럼 일어난 어둠이 촉수가 되어 주변 인간들을 집어 삼켰다.
콰득, 콰득.
뼈가 씹히는 소리와 함께 차오르는 생명력.
멋지다.
끝내준다.
“이게 진화지. 이게 진화야!”
하이드는 그토록 바랐던 진화를 이뤘다.
그러니, 복수해야지.
하이드의 시선이 박건을 향했다.
순간, 날이 선 촉수들이 쏘아졌다. 목표는 말할 것도 없이 박건.
“……!”
막 마족의 목숨을 거두려던 박건이 바로 몸을 젖혔다.
어둠의 촉수가 코앞을 스쳐 갔다.
몸을 뒤틀며 회피한다.
고개를 돌리자, 시야 가득 보이는 수십 다발의 촉수. 마족의 머리를 깨부수고는 양손의 단검을 고쳐 잡았다.
흑아와 백아가 고유의 색채를 뿜어내며 베어 간다.
절단된 촉수들이 바닥에서 파닥거렸다. 튀어진 피는 염산처럼 땅을 녹였고, 역한 악취가 독처럼 주변을 오염시켜 갔다.
모든 공세가 무위로 돌아간다.
촉수도, 마법도, 어둠도.
흑과 백의 궤적에 휘말려 자취를 감췄다.
“크큭. 역시 검호.”
하지만 하이드는 좌절하지 않는다.
자신은 진화를 이룬 존재. 겨우 저런 인간 따위에게 지지 않는다.
하이드가 의지를 발현하자, 그에게서 돋아난 시체들이 몸집을 키워 갔다.
그러더니.
마치 한 그루의 나무처럼, 시체의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났다.
하이드가 수인을 맺는다.
나무에 엮여 있던 시체들이 똑같이 하이드의 수인을 복제했다.
공명.
발현.
지진이 일어났다.
용암이 분출했다.
헤일이 솟아났으며, 태풍이 휘몰아쳤고, 벼락이 내리꽂혔다.
하늘과 땅.
천지가 진노했다.
그리고, 인간은 무기력했다.
갈라진 대지에 인간들이 빨려 들어가고, 넘쳐흐르는 용암에 녹아 간다.
무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해일을 보며 망연자실하는 남자, 태풍에 휘말려 살려 달라 절규하는 여자.
재앙은 공평하게 인간을 학살해 갔다.
그리고 하이드는 쓰러지는 생명을 갈취해 더욱 강해져.
깡-!!
기어코 박건의 마룡기, ‘프레데터’를 막아 내고 만다.
흑과 백의 섬광이 하이드의 실드 앞에서 멈췄다. 실드 한 장을 두고 서로를 마주한 박건과 하이드.
“잡았다.”
복수의 시간이다. 눈앞의 검호를 제물로 삼아 더 높은 곳으로 오르리라.
하이드의 입꼬리가 귀까지 찢어지는데……
그런데, 이상했다.
박건이 웃고 있다?
“누가 할 소리.”
순간.
일대가 고요해졌다.
대지를 부수던 지진도, 인간을 녹이던 용암도.
헤일도, 태풍도, 번개도,
빛과 어둠…… 모두.
모두.
멈췄다.
박건이 히죽 웃는다.
“어이, 인간을 넘어서고 싶어 했지?”
“……?!”
“잘 봐라.”
내 아들을.
진정 인간을 초월한 자다.
창공에 드리우는 육망성 마법진.
박기혁이 마법진 위에서 세상을 오시했다.
“멸하라.”
마나가 소멸한다.
부서졌던 대지가 다시 이어 붙여지고, 타오르던 용암이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뒷걸음질 치던 마족의 어둠 또한 잿빛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도주도, 저항도, 비명조차도.
그 무엇도 허락하지 않는 절망.
아포칼립스
(Apocalypse)
멸망이었다.
……
…
“이쪽도 끝.”
박기혁이 다시 어둠 속으로 몸을 감췄다.
* * *
챙-!
대검과 장검이 어지럽게 얽혔다.
대검의 검신은 백귀라는 이름답게 영롱한 빛깔로 물들었다.
반면 장검의 검신은 탁한 황색.
황금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빛이 바랜 색이다. 그래서 장검 이름도 ‘훼룡(이무기)’이었다.
채채채챙-!!
빗발치는 공방.
팽팽한 접전 같지만, 사실 훼룡이 근소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다.
박봄이 튕겨져 나간 백귀의 손잡이를 꽉 쥐고 다시 내려친다. 필사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담아, 내려치고 또 내려쳤다.
하지만 눈앞의 상대, 원은 여전히 평온했다.
“대단한 후배군. 그 나이에 이런 성취라니. 진심으로 감탄할 따름이다.”
“까득.”
‘날개’를 펼쳤다.
고유 마법 얼라이브가 그녀를 보호하고 있다.
‘혈족’을 총동원했다.
16종 혈족이 제각각 힘을 발휘하며 전장을 휘어잡고 있다.
‘마룡기’를 장착했다.
박포실은 그녀를 두르고 있는 모든 힘을 유기적으로 컨트롤, 가장 최적의 형태로 바꿔 주고 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아빠에게 물려받은 ‘검호’까지 각성했는데.
그럼에도.
대치가 고작이라니.
박봄은 이제껏 느껴 보지 못한 무력감에 이를 악물었다.
꽉 문 잇몸에서 흘러내린 비릿한 피 맛을 느끼며 백귀를 내려치고 있었다.
한편, 바로 건너편에서는 헤나가 요르문간드의 정예에게 붙들려 있었는데.
“어디 잡아 봐라.”
“하하하하하! 애송아! 아직 멀었구나!”
“네가 아무리 괴물이라도, 발을 묶는 정도라면 우리도 가능하다.”
요르문간드의 정예들이 진법을 사용해 헤나를 가둔 것이다.
“이것들이!”
헤나가 특유의 괴력을 발휘, 진법을 부숴 버리려 시도하지만 적들은 그들의 말을 증명하듯, 수세를 펼치며 발을 묶는 데 집중했다.
“이익!”
잡힐 듯 말 듯한 거리.
헤나의 얼굴에 초조함이 물든다.
바로 건너편에 박봄과 원이 충돌하는 게 보이니까. 봄이가 밀리고 있는 게 보이니까.
무기력함에 무기를 휘둘러 보지만 적들도 한때 TA의 넘버링이라 불렸던 최정예들. 절대 쉽게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혹시 헤나가 무리라도 하려고 하면.
귀신처럼 그 틈을 노리는 적들.
어둠을 뚫고 날아든 창이 휘어진다.
뱀의 아가리처럼 요사스럽게 날아들고, 박헤나가 철퇴를 휘둘러 부서뜨리자, 창이 폭발하며 어둠을 흩뿌린다.
그 순간, 어둠에서 쏘아지는 검은 가시들.
마족들의 기술이다.
“흐흐흐.”
“마족이라고 했지. 이거 편리하군.”
마족이랑 결합하며 마나 감응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적들. 그 증거로 그들의 얼굴에는 검은 실핏줄이 꿈틀대고 있었다.
박헤나가 먼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폭발에 휘말린 것치곤 멀쩡한 모습이지만, 사실 어깨와 등 쪽의 갑각이 복구 중이다.
“조금만.”
약간의 틈만 보여도 될 텐데.
아쉬움을 가득 품은 박헤나가 자신도 모르게 어딘가를 본다.
기간트와 에우리아, 두 수호령과 마족들이 싸우고 있는 곳이었다.
“기간트!”
“이이이이익!!”
에우리아의 줄기들이 만든 틈으로 기간트의 거신병이 주먹을 내려친다.
하지만.
“소용. 없다.”
“우리. 마왕님. 수족.”
“주인님의. 양분. 되라.”
공작.
마왕의 직속 친위대 다섯이 어둠을 일으키는 순간, 어둠의 거신병이 기간트의 거신병을 막아 세웠다.
“Fuck! Fuck!! 저깟 몬스터에게!!”
“흥분하지 말아요, 기간트. 9레벨 몬스터예요. 급수만 따지면 저희랑 동급.”
“몰라! 인정할 수 없어!”
기간트가 난동을 부리자 그녀의 위로 원형의 균열들이 생성, 거신병의 주먹이 곳곳에서 쏘아졌다.
결국 이에 맞춰 보조하는 에우리아.
하지만 이전과 달라진 건 없다. 마족의 공작들은 어둠을 조작, 수호령의 공세를 모두 무위로 돌리고 있었다.
박봄과 원.
박헤나와 정예 부대.
수호령과 다섯 공작.
어느 곳보다 치열하게 치러지는 접전.
먼저 균형이 무너진 쪽이 패배하는 데스 매치였다.
그때.
“후우…….”
박봄이 몰아치던 검격을 멈췄다.
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귀여운 후배가 하는 짓을 지켜봤다.
“인정할게요. 제가 흥분했어요.”
“호오…….”
“이제부터 집중하겠어요.”
오직 당신을 죽이기 위해.
맹수의 그것을 닮은 박봄의 눈이 깨끗해지며 원을…… 아니, 원‘만’ 담는다.
위기의 순간일수록 그 사람의 진가가 나온다.
원의 평소 지론이었고, 지금 박봄이 그러했다.
“적임에도 인정할 수밖에 없구나.”
박봄과 원.
두 사람이 서로에게 검을 겨눴다.
단지 검을 겨누었을 뿐인데 일순간 주변이 고요해졌다.
이전과는 다르다.
화려하지 않다.
격렬하지 않다.
그럼에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당신은 제가 상대한 최고의 적이에요.”
“영광이군.”
“그러니…….”
나도 내 모든 걸 걸겠다!
날개도, 혈족도, 기물도.
박봄을 감싸던 모든 힘들이 그녀의 머리 위로 집중됐다.
출력 해제.
‘이긴다!’
폭발이 터지며, 박봄이 거리를 접었다.
경이로운 속도.
원조차도 놀라움에 눈가 파르르 떨렸다.
과연, 모든 걸 건다는 말 그대로였던가. 박봄의 공세는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 있었다.
밀리고 있다.
버거웠다.
눈앞의 어린 괴물은 한 단계 진화하고 있다.
원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박봄을 이대로 놔둔다면 자신이 그토록 바랐던 경지에 도달하리란 것을.
원의 눈이 불타오른다.
“좋다. 나도 모든 걸 걸지.”
순간 원의 몸이 어둠에 휩싸였다.
근육을 타고 혈관들이 도드라지더니, 검은 피가 흘러들었다.
원이 검을 휘둘렀다.
인간임을 버렸다. 무인으로서 자존심까지 내던졌다.
그렇기에 내가 이겨야 한다.
원의 검이 박봄의 백귀를 파고들었다. 검신에 균열이 나며 깨져 간다.
박봄의 눈동자가 커져 가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백귀가 부서지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다.
패배였다.
처음으로 맞이한 패배.
원의 검은 박봄의 목을 노렸다.
“내가 이겼다.”
그때였다.
원의 훼룡이 박봄의 목에 닿을 그 순간.
번뜩이는 검날을 막아선 손.
콱-!
“……!!”
“……!!”
검날을 맨손으로 잡아낸 남자, 박기혁이었다.
박기혁의 두툼한 손바닥이 박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빠?”
“고생했다.”
봄이를 보고 웃어 준 박기혁이, 웃음을 지우고 마귀를 들었다.
“막아 봐.”
검호류 파괴
신살
신마저 멸하는 검.
원이 소멸한다.
적이 흩어지며.
어둠이 걷혀 갔다.
‘이제 마지막인가.’
박기혁은 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공간을 이동했다.
* * *
공간이 열리며 발을 내디뎠다.
걸음을 옮기며 생각한다.
새삼 내가 인간을 벗어났구나, 하고.
마왕이던 시절과는 또 다르다.
그때도 절대 강자였지만 지금은 정말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이를테면.
“신처럼 말이야.”
일생을 강함만을 쫓았다.
제일 천한 곳에서부터 아득바득 기어올라 절대자의 자리에 올랐다.
인간으로서 닿을 수 있는 최정점.
가로막힌 성장.
멈춰 버린 발전.
이제 더 이상 올라갈 곳은 없다.
평생을 위만 보고 올라온 내게 이건 그 자체로 고통이었다.
이걸 해결할 방법은 하나다.
인간이란 종을 벗어던지고 위로 가는 것.
그것뿐이다.
그리고 지금의 내게 그건 숨을 쉬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의지를 가지기만 하면 오를 수 있으니까.
지금도 봐라, 유혹하는 거.
내 앞에 있는 이 계단.
느낌이 아니라 실체하는 계단이다. 이 계단에 발을 얹기만 하면 신이 될 수 있다며 손짓하고 있다.
“이 와중에도 수작질이야.”
얄팍한 수작질이다.
비웃음이 나온다.
‘원한다면 신이 될 수도 있다.’라는, 저 위에 계신 놈의 시험인 것이다.
“적당히 해라, 좀.”
난 분명히 말했다.
인간으로 남아, 날 기다리는 이들 곁에 있을 거라고.
“애들이 몇인데. 가긴 어딜 가냐.”
여름이 샌드백도 해 줘야 하고, 가을이랑 인형놀이도 해 줘야 한다. 겨울이 마법 공부 봐주는 것도 잊으면 안 돼지.
큰놈들이라고 다를 거 같아?
봄이도 아직 배울 게 산더미다. 헤나도 엉성하기 그지없다.
이걸 마누라한테만 맡기면 그건 양심 없는 짓이지.
모른다고?
그럼 그렇지, 네가 가장의 삶을 알 턱이 없지.
그러니 이런 개수작을 부리는 거겠지.
“치워라.”
내 앞에 놓인 계단이 사라졌다.
곧이어 드러난 ‘고치.’
보니까, 이게 9레벨 게이트 같다.
“음, 취향 독특하네.”
거침없이 고치를 손으로 찢는다.
그리고 손을 집어넣어……
안에 있는 걸 끌어냈다.
콰드득-!
생체 조직들이 뜯겨 나가며 딸려 나온 것은 어둠.
인간의 형체를 갖춘 어둠이었다. 어둠이 나를 올려다보며 묻는다.
“너는. 누구.”
“나?”
말할 것도 없이.
“마…….”
마왕이라고 말하려다가 멈췄다.
생각해 보니 이제 아닌 것 같다.
이제 난.
“아빠, 애들 아빠야.”
주먹을 내리쳤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