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외전 26화>
치열했던 전장에 변화가 생겼다.
전미를 타격하던 요르문간드의 빌런들이 몸을 빼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활개를 치던 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인 것이다.
이에 미국의 반응도 갈렸다.
낙관론자들은 요르문간드가 후퇴하는 거라고 말했다.
“여력이 다한 거 아닐까요?”
“맞습니다. 단기전과 장기전은 전술의 난도가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는 저들이 빌런이란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정규군이 아니란 말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저들은 전미에 테러를 가해 화려하게 데뷔했어요. 빌런계의 정점에 오른 거죠. 저들 입장에서 이만하면 훌륭한 성과 아닐까요?”
비관론자들은 요르문간드가 다음 스텝을 위해 숨을 고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력이 다해? 말 다했습니까? 이거 보세요. 이 동영상에만 나온 빌런 숫자가 몇인지 압니까? 어디가 여력이 다한 겁니까.”
“단기전과 장기전의 전술적 난도가 다르다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르문간드의 준비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철저했다는 걸요.”
“요르문간드는 일반적인 빌런이 아니에요. 그들의 악의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단 말입니다! 우리는 아직 그걸 몰라요!”
의견은 많고, 누구의 말이 정답인지는 모른다.
자연히 의사 결정은 지연됐으며 어수선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한국이라면 비교적 선택이 빨랐겠지만, 여기는 미국이다. 수십 주의 지역이 모인 나라.
의사 결정이 느릴 수밖에 없다.
결정권자들이 이렇게 갈피를 못 잡자 실무진, 그러니까 일선에서 요르문간드와 싸우고 있는 전력들은 어찌 될지 뻔하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추격해야 합니까, 아니면 대기해야 합니까?”
“추격을 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지…….”
“하, 명령을 내려 주셔야 움직일 텐데.”
“한국 측에서도 이후 방침을 묻고 있습니다. 정 안 되면 저쪽 자의대로…….”
그 와중에도 소규모 접전은 여전했다.
달라진 건 딱 하나.
전에는 요르문간드가 공세를 진행하고 이쪽이 방어전을 펼쳤다면, 현재는 저쪽이 방어전을 펼치고 미국과 한국 측 병력들이 공세를 펼치고 있다는 거다.
“수상해…….”
“뭐가, 봄아?”
“쟤들 하는 짓 말이야. 생각해 봐, 헤나야. 후퇴를 할 거면 신속하게 해야지. 그도 아니면 뭔가 비장의 한 수로 파파박! 놀라게 한 뒤에 튀어야 생존율이 높잖아?”
“그렇긴 하지.”
“근데 쟤들 봐. 절묘하게 빼고 있어. 우리가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만큼. 아슬아슬하게.”
“하긴 그랬지. 조금 싸우다 빠지고, 싸우다 빠지고의 반복이야. 무슨 간 보는 것도 아니고.”
“내 말이! 수상해. 뭔가 있어.”
뭔가 꿍꿍이가 있다.
일선에서 접전을 펼치던 인원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그만큼 요르문간드가 보여 주는 행태는 비상식적이었다.
그 와중에도 시간은 흘렀다.
몸을 빼던 요르문간드의 빌런들이 어느 기점으로 합쳐지더니, 나중에는 네 덩이의 거대 전력으로 바뀌었다.
이쯤에 미국의 의사 결정이 통일된다.
요르문간드의 격퇴
- 우리는 상처 입었습니다. 우리가 자랑하던 도시는 짓밟혔고, 평화의 정신은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 미국은 테러와 절대 타협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추적해 잡아낼 겁니다. 그리고 복수할 겁니다. 이것이 저희의, 미국의 뜻입니다.
하지만 요르문간드는 앞서 말했 듯 전력의 집결을 마친 상황.
아무리 백악관이 공식 석상에서 복수를 운운할 만큼 분노했다지만, 태세를 갖춘 전력에 선공을 가하는 건 리스크가 컸다.
이미 대도시가 탈탈 털리며 책임을 피하기 힘들다.
이 이상의 피해가 가중되면 그때는, 여태껏 쌓았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지도 몰랐다.
“저 진형에 들이박는 건 부담스러운데…….”
“어차피 이곳은 우리 땅입니다. 도망칠 곳이 없단 말입니다.”
“시간도 우리 편이죠.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돌아온 인원들이 전력에 합류하면, 결국 우리가 이기는 게임입니다.”
“좋습니다. 지속적으로 압박해 저들의 퇴로를 유도하도록 하죠.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돌고 돌아 다시 시간 끌기.
근거도 충분했다.
게이트에 참여했던 인원들이 합류하면 무조건 우위에 설 수 있다. 그러다 미국의 최강 히어로 ‘무법자’ 타일러만 복귀하면 이 지겨운 싸움도 끝이다.
결정이 떨어지자, 움직임은 신속했다.
미국군을 중심으로 히어로들과 한국의 인원들이 포함된 전력은 요르문간드를 지속적으로 타격, 전력을 약화시키며 동시에 퇴로를 유도했다.
효과는 확실했다.
요르문간드의 빌런들은 그들의 의도대로 움직였다.
오른쪽으로 가면 오른쪽으로 가고, 왼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간다. 목줄이 걸린 개처럼…… 아니 요르문간드니까 목줄에 걸린 뱀처럼 미국은 저들을 손아귀에서 가지고 놀았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녀석들은 궁지에 몰렸고, 이제 남은 건 녀석들의 목을 비트는 일뿐이다.
하지만.
“수상해.”
박봄은 여전히 수상했다.
저들의 목적은 혼란이 아니었나? 혼란을 야기할 거라면 전력을 산개시켜 산발적인 테러를 이어 가면 된다. 실제로 그걸로 재미도 봤지 않나.
그런데 계속 모이고 있다.
지속적으로 몸집을 부풀리고 있다.
정면 대결을 하겠다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저들 입장에서 전혀 이득이 없는 정면 승부를 굳이 선택할 필요가……
사고가 여기까지 이른 순간, 박봄은 불현듯 깨닫는다.
“설마, 시간을 끌고 있는 거야?”
왜 시간이 우리 편이라고만 생각했을까.
저쪽도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지 않나.
그렇다면 왜? 무엇 때문에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시각.
전혀 의외의 곳에서 이 질문의 답이 나오는데.
한국이었다.
* * *
옵티멈 본관.
정보 통제실에 불이 켜져 있다.
서류 더미가 쌓여 있다.
여자가 고개를 치켜든다.
“으으으…….”
서류의 탑에 쌓여 기지개를 켜는 여자.
‘출구 없는 지옥’의 멤버.
아는 게 많고 말도 많아, 진유리가 시스터 TMI란 별명을 붙여 준 김하니였다.
그녀는 모두의 예상대로 옵티멈의 일원이 됐다.
박기혁이 이미지가 더러워서 그렇지, 자기 사람은 또 살뜰히 챙기잖나. 마왕네 신혼부부랑 인연이 각별한 김하니인 만큼 모두가 옵티멈으로 향할 거라 예상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이에 세간에서는 줄 살 서서 인생이 폈다며 쑥덕대기도 했지만, 그럴 때면 김하니는 코웃음을 쳤다.
몰랐어? 인생은 원래 줄이야. 줄도 못 서면서 성공을 바라는 건 너무 뻔뻔한 거 아니니? 그리고 줄도 능력이 있어야 잡는 거다?
그리고 이건 오해다.
설마 옵티멈 에이전트에서 인맥으로만 사람을 영입할까. 김하니의 영입은 100퍼센트 본인의 실력으로 이뤄진 것이다.
게다가 김하니는 선배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했다.
항상 만족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발전할 여지가 있으면 멈추지 않았다. 선배님들의 노하우를 어깨너머로 훔치고, 친한 언니인 진유리에게 염치 불고하고 매달리기도 하며 성장을 꾀했다.
그 결과 김하니는 무서운 속도로 성장, 옵티멈 내에서도 김하니의 이름이 심심찮게 들릴 정도가 된다.
그리고 이런 김하니의 노력에 보답하듯.
마침내 김연희의 눈에 띄게 되는데.
“이번에 성갑 기마대의 개편이 있을 예정이에요. 하니 씨도 아시다시피 성갑 기마대 맴버들 나이가 좀 그렇잖아요. 자연스럽게 후임자를 양성할 생각인데…….
“어때요. 생각 있으세요?”
생각만 있겠는가.
성갑 기마대다.
옵티멈의 ‘the 근본’.
엎드려 절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김하니는 김연희 대표의 제안을 수락했다. 단언컨대 인생을 통틀어 그때보다 빠른 수락은 없었을 거다.
그렇게 성갑 기마대에 들어선 김하니는 굴려졌다.
선배들은 오랜만에 들어온 후배들이 어찌나 귀여웠는지, 깨물어 죽일 정도로 격하게 아껴 줬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드디어 정식 대원으로서 선배들과 함께 질주할 기회를 얻게 된다.
미국.
곧 있을 미국 파병에 성갑 기마대가 참여하기로 승인이 난 것이다.
김하니가 며칠 밤낮으로 서류의 탑과 싸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막내로서 혹시나 실수할까,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 정보란 정보는 모조리 긁어모으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뭔가 찾은 것 같단 말이야.”
“뭘 찾아.”
“……!!”
뺨에 닿는 차가움에 김하니가 깜짝 놀라 뒤돌아보고, 거기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흔들고 있는 진유리가 있었다.
“선배에!”
“어허! 스탑! 안길 생각 멈춰. 너 냄새나거든.”
“헤헤. 어쩐 일이에요.”
“어머님 뵈러 온 길에 들렀어. 얘는, 꼴이 이게 뭐니.”
“에헤헤…….”
“웃지 마, 이것아.”
얘는 대체 이래서 언제 시집을 가려고. 틀렸어. 아주 틀려먹었어.
다다다 잔소리를 퍼부으면서도 클린 마법을 써 주는 진유리.
김하니는 생각했다. 역시 선배는 츤데레라니까.
“그런데 뭘 찾았다는 거야.”
“아, 선배! 마침 잘 오셨어요. 제가 엄청난 걸 찾은 것 같거든요. 보시면 깜짝 놀라실 거예요.”
“오랜만에 TMI 출동인가. 뭔데?”
김하니가 이걸 찾은 건 우연이었다.
혹시 공항 출입국 기록에서 적을 식별할 수 있을까 생각해시도해 본 건데.
이 부분에서 눈을 찡그린 진유리가 말을 끊었다.
“잠깐, 네가 말하는 공항은 미국 공항이지?”
“네!”
“전부?”
“네!!”
“하…… 혹시나 해서 말해 주는데, 걔들 정도 되는 실력자들한테 외모는 아무 의미 없어.”
“당연히 알죠!”
“그런데도 그 무모한 짓을 했단 말야? 선배들이 말리지 않든?”
“말렸죠.”
“그런데?”
“훗. 저는 대(大) 성갑 기마단의 싱싱한 막내니까요. 뿌뿌~.”
“하, 너도 참 어지간히 한다. 저리 떨어져. 그래서, 발견한 게 뭐야.”
“이거예요.”
김하니가 내민 것은 사진이었다.
이름 모를 히스패닉계 사내의 사진.
“이게 뭐?”
“귀, 귀를 보세요.”
사내의 귀에는 피어싱이 있었다.
올드한 분위기의 십자가 피어싱 말이다.
“뭔가 익숙하지 않아요?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
“음…… 모르겠는데.”
“저는요. 이걸 처음 봤을 때 뭔가 가려웠어요. 왜 있잖아요. 침낭에 모기 한 마리 들어온 것 같은 기분. 알죠, 선배?”
“벌써 가렵다, 얘.”
“찝찝하더라고요. 뭔가 알쏭달쏭하고. 그래서 이 감각이 뭔지 생각해 보다, 알아챘죠.”
“뭐였는데.”
“익숙함이었어요!”
다시 사진 한 장을 내민다.
그건 사진이었다. 파릇파릇했던 아카데미 시절, 김하니가 웃고 있는 단체 사진.
“선배, 아시죠. 치유계 초인들이 오전 수업하던 거. 이거 그 수업 마지막 날에 찍은 단체 사진이거든요. 자, 여기 보세요.”
“응?”
손가락을 따라가자, 호감형 외모의 청년이 빙그레 웃고 있다.
“기억 안 나세요? 서창현. 2학년에서 전도유망했던 사제였잖아요.”
“……이름은 모르겠고. 잠시만.”
진유리가 기억 창고를 열었다.
쓸모없던 기억에서 저 얼굴을 빼낸다.
“외모는 봤네. 쟤 우리랑 같은 게이트 들어갔지?”
“네, 맞아요. 7레벨 게이트 사마귀 여왕의 궁. ‘생태계 붕괴 현상’을 조사하러 갔죠. 킹메이커 작전. 기억나시죠?”
“응, 기억났어. 쟤 너한테 관심 있었잖아.”
“그런 건 좀 까먹으세요…… 여튼 보세요. 여기 피어싱이랑, 여기 피어싱.”
같다.
형태도 크기도 완전히 동일한 피어싱.
어떻게 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그냥 같은 종류의 피어싱이 하나 더 있는 걸 수도 있잖나?
하지만 진유리도 뭔가 느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꺼림칙한 뭔가를.
“얘는 어디 있대? 전도유망했다며.”
“제가 말할 부분이 그거예요. 얘가 2학년에 성지 순례를 한다고 휴학했는데, 그 뒤로 영영 보이지 않았어요.”
“영영? 실종됐어?”
“네, 실종.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원래부터 없었던 사람인 양.”
“이상하네.”
“이상하죠? 더 이상한 거는요. 서창현이 종적을 감췄을 때쯤 셀루티스가 날뛰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소문이 돌기도 했다. 서창현이 셀루티스의 일원이 아닌가, 하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른다.
왜냐하면 이후 서창현의 행적은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으니까.
“확실한 건 아니지만요. 만약예요. 이 사진 속 피어싱의 남자가 서창현이 맞다면요…… 선배, 저는 셀루티스 잔당이 요르문간드에 합류했다고 생각해요.”
만약 그렇다면…….
“그들이 노릴 건 뻔해요.”
셀루티스를 상징하는 참사.
우상과 광신의 종착역.
게이트.
요르문간드는 게이트를 노리고 있다.
* * *
미국의 황무지.
하이드와 원이 서 있었다.
“셀루티스가 게이트 오염에 관해서는 독보적이란 소문은 들었지만…… 생각 이상이야.”
“과연 자신만만했던 이유가 있군. 에밀.”
에밀은 둘의 시선에 빙그레 미소 짓는다.
“감사합니다만 저의 공이 아닙니다.”
버림받은 이 땅을 뒤덮고 있는 마나의 격류.
수십 개의 오염된 게이트를 강제 결합시킨 게이트.
9레벨 게이트.
“모두 그분의 뜻일지니.”
인류가 처음으로 마주한 대재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