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외전 21화>
진화단(進化:Evolution)과 TA(The top of Arena).
한때 셀루티스와 함께 세계를 위협하던 3대 빌런 집단. 현재에도 빌런을 거론할 때 맨 앞줄에 거론되는 빌런계의 거두들이다.
중국이 대전쟁을 일으키며 세계가 혼란에 빠지고, 이 혼란의 틈바구니 속에서 한 푼의 이득을 얻으려 여러 빌런들이 몸을 일으킬 때.
세계는 우려했다.
세계가 혼란에 빠진, 이 치명적인 시점에 진화단과 TA가 몸을 일으키지 않을까. 만약 움직인다면 그건 또 다른 2차 재앙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었다.
놀랍게도 진화단과 TA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수많은 빌런들이 난립할 때도, 각종 이권을 두고 대립할 때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이상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공교로운 점은 그뿐만이 아니다.
두 집단이 활동을 멈춘 시기도 겹친다는 것.
영국의 국토 절반이 짓밟힌, 그들 말로는 치욕의 날.
중국의 대침략.
딱 이 시기 즈음, 두 집단은 약속이나 한 듯 종적을 감췄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지 않나?
항간에는 영국과 중국, 두 나라 중 한 곳 아니면 둘 다 진화단과 TA를 지원하고 있던 거 아니냐, 의심을 하긴 했지만.
그러기에는 현재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영국마저도 국내 사정이 처참했다.
결국 의심은 유야무야 넘어갔다.
빌런을 지원했다면 무슨 이득을 봐야 하는데 나라 꼴이 저 꼴이잖나.
또한 때마침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상 게이트 현상’으로 진화단과 TA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서서히 잊히게 된다.
그렇다.
여기까지가 일반인이 아는 시점이고.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두 집단의 은밀하고 복잡한 속사정이다.
……
…
“힘! 오직 더 압도적인 힘!!”
TA(The top of Arena).
힘과 피, 전투에 미친 전투광들.
이들은 사실 황룡이 비밀리에 지원했던 빌런들이었다.
약자멸시, 약육강식.
뭔가 결이 같은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TA의 보스 ‘원(One)’은 황룡의 적전제자 중 하나였다.
그들의 목적은 의외로 심플하다.
미국에 있는, 그러니까 황룡이 가장 경계하는 ‘수호령 기간트’의 움직임을 경계하는 거였다.
“기간트는 기형적인 힘을 가졌지. 녀석은 우리 같은 상위 존재에게 천적과도 같다.”
TA의 본거지가 미국인 것도 이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된 TA는 서서히 몸집을 불렸고, 황룡이 내려 준 무공과 차이나 머니를 앞세워 세계적인 조직이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황룡의 암중 세력을 보고 벤치마킹한 영국의 태사자.
그렇게 탄생한 게.
“작금의 인류는 열등하다!”
진화단(進化:Evolution).
인류가 생존하려면 ‘진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미치광이들.
인간을 열등 생물로 보는 우생학적 사상과, 인간을 노예로 여기는 태사자의 뜻.
역시나 그 결이 같다.
“인간은 열등하죠. 기쁘게 우리 상위 존재를 섬겨야 해요.”
하나 진화단은 TA처럼 성공하지 못한다.
황룡이 나름대로 TA에 자신의 지식을 제공했던 것과는 다르게, 의심 많은 태사자는 노예 같은 인간에게 자신의 고귀한 지식을 전수하는 걸 꺼렸다.
그 결과 진화단은 태사자의 ‘사상’에만 광적으로 집착하는 기형적인 집단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TA와 진화단, 각자의 사정이 있는 두 집단.
이제 이야기는 쉽다.
왜 활동을 멈췄냐고?
1차로, 지시를 내려 줄 머리가 사라졌으니까.
지원이 끊겼으니까.
머리가 사라진 조직은 진통을 겪는다.
조직의 구성원들이 악의와 쾌락에 미친 악당 놈들이라면 그 진통은 더 거세다. 왜냐하면 이들은 규범이나 신념 따위로 묶일 놈들이 아니었으니까.
자연스럽게 여파는 2차로 돌입.
내부 항쟁이 시작된다.
악당들의 탐욕이 자신의 조직이라고 빗겨 갈까. 더 높은 자리, 더 높은 권력을 가지려 동료의 등을 찔렀다.
이렇게 세력이 개편되자.
3차, 전면전.
TA와 진화단, 이 빌런계의 거두들이 서로에게 칼을 꽂는다.
너희만 없으면 우리가 이 바닥의 지배자다.
모든 걸 건 전쟁.
전쟁의 승자는 전부를 가지고, 패자는 비참하게 추락한다. 바야흐로, 지하 세계의 패권을 건 피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무려 10년, 추악한 전쟁이 종장을 맞이했을 때.
패자의 살을 취하게 된 승자는.
그들은 구닥다리 같은 이름을 벗어던지고 새롭게 태어난다.
세상의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고 집어삼키겠다.
그렇게 신세계의 지배자가 되려 하니.
그들은 스스로를 이렇게 칭한다.
요르문간드.
* * *
보스턴의 톰슨 레스토랑.
자리를 가득 메운 손님들의 시선이 TV로 향하고 있다.
- 제가 나온 곳은 뉴욕 센트럴 파크입니다. 요르문간드의 습격으로 도시가 비상에…… 보시는 대로 현재 뉴욕은 요르문간드의 공습으로 괴멸적인 피해를…….
- ……오늘 아침 테러리스트와의 모든 소통을 거부한다는 주지사의 긴급 성명이 발표됐…… 스타 히어로가 참여했으며, 한국의 옵티멈은 물론 아카데미의 주요 전력까지…… 아! 저기! 말씀드린 한국 아카데미의 유망주인 박봄 양이…….
- 비켜요!!
카가가가각-!!
철근 다발에 깔리는 박봄.
“어이쿠!”
“저런-!”
“어떡해!”
손님들이 탄성을 터트렸다.
자신들 눈에는 겨우 소녀티를 벗은 아이가 건물을 옮겨 놓은 듯한 철근 더미를 막아서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저, 저거 미친놈 아니야. 왜 계속 찍고 있어.”
“대가리에 총 맞았나. 기자 새끼 꺼지라고!!”
“안 되겠어요. 저기 방송국 어디예요. 얼마나 상식이 없으면…….”
요르문간드가 본격적으로 활개를 친 지 이 주가 지났다.
그들은 등장부터 심상치 않았다.
자신들을 진화단과 TA의 정신을 이은 진정한 ‘빌런’이라 칭했다.
신화 속 요르문간드처럼 세계를 집어삼켜 무의 세계에서 새로운 질서를 세우리라! 라는 기치를 세우며 새롭게 만들어질 신세계로 여기 ‘미국’을 선택했다.
그리고.
주지사 둘을 그 자리에서 참수, 미국이라는 세계 최강국에 정식으로 선전 포고하며 미 전역으로 테러의 불길이 치솟게 된 것이다.
“요르문간드인지 오르간인지 모르겠고, 대체 연방 정부는 뭐하는 거야!
“FBI는! CIA는! 빌런 대응 팀 만든다며!! 언제부터 우리 미국이 꼬맹이들을 전쟁터에 보내게 됐냐고!!”
“어머어머! 저기 빌런들 더 와요. 저거 어째……!
“애 혼자 싸우잖아! 도와주라고, 병신들아!!”
미국 입장에서는 불운이 겹친 면이 없지 않다.
유럽이 신음하고, 중국이 찢어진 현재, 미국은 누가 뭐래도 세계 최강국이 맞다.
한국이 있긴 하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서 체급이 다르니까.
그래서 미국 정부는 드디어 확고한 세계 최강국에 오른 걸 자축했는데.
한 가지 문제가 터진다.
이상 게이트 현상.
불특정 지역에 게이트가 발생하는 현상.
미국이 있는 여기, 아메리카 대륙은 이 이상 게이트 현상이 유독 심한 지역이었다.
전문가들이 측정한 수치는 2.8배. 어림잡아 타 국가보다 3배 이상 많은 게이트가 생성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좋았다.
게이트를 처리해서 나오는 마석들이 달콤했지. 하지만 이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시민의 안전까지 위협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그 많던 히어로들은 전부 게이트로 처박혔고, 에이전트들은 매일 같이 공략대를 꾸리기에 정신이 없었다.
신문을 장식하는 히어로?
이제 더 이상 없다. 그들 모두 게이트에 처박혔으니까.
힘이 있으면 뭐하나. 이걸 밖으로 드러내야 쓸모가 있는 법인데.
미국이 자랑하는 세계 최강국의 힘은 자국의 게이트를 막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런데 이 아슬아슬했던 균형을 요르문간드가 무너뜨린 것이다.
“아니! 제정신인가? 게이트 현상 막겠다며 큰소리를 뻥뻥 치더니 정작 빌런은 패싱했네? 하, 미친놈들.”
“정부 놈들, 대가리에 총 맞은 게 분명해.”
“약에 취했든지.”
“그럴 수도? 킥.”
“게이트에 있는 놈들 다 데려와! 개자식들부터 잡아넣으라고!!”
이상 게이트 현상으로 손발이 묶인 미국.
반면 요르문간드는 닥치는 대로 몸집을 부풀리며 기회를 노렸다.
이 차이로 전쟁이 성립됐고 현재 뉴욕, 세계 경제의 중심임을 상징했던 마천루가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무너지는 각도가 좋지 않다. 자칫하면 도미노처럼 뉴욕이 쑥대밭도 될 수 있는 상황.
손님들은 식사는 잊은 채, 머리를 움켜쥐며 소리쳤다.
“무너진다! 무너져!!”
“안 돼!”
“막아!!”
그 순간.
사람들의 염원이 닿았는지.
무너지던 빌딩이 허공에서 멈췄다.
안도의 한숨이 들려오고 잠시 뒤 화면에 보이는 건, 여자였다.
동양인이라기에는 약간 짙은 색의 피부를 가진 여인이 무너지는 빌딩 아래에서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사람들의 대피가 완료되고 무너지던 구조물을 최대한 안전하게 처리한 여인은 요정의 날개를 펄럭이며 빌런을 향해 날아갔다.
“와, 퍽킹! 지렸어. 건물 부수는 거 작살인데?”
“역시 헤나 팍. 나 오늘부터 헤나 팬이야.”
“헤나? 저 여자 이름이 헤나야?”
“너 몰랐어? 박헤나. 마왕의 두 딸 중 하나잖아.”
“마왕? 그게 누군데?”
“젠장, 이래서 미국인들이 무식하단 소리를 듣지.”
“이봐, 수준을 맞춰야지. 너 캡틴 타이거는 알지? 쫄쫄이에 가면 쓴 걔. 그 양반 딸이야.”
“아! 캡틴 타이거! 진즉에 그렇게 말해야지. 오케이, 이해했어.”
박헤나, 박헤나, 박헤나……
사람들의 입에서 박헤나란 이름이 거론된다.
마법의 폭격을 맨몸으로 뚫는 과격함. 창, 철퇴, 망치, 대검 등 중병기를 마음대로 다루며 적을 분쇄하는 호쾌함.
마초이즘이 남아 있는 미국인들이 열광하기에 충분한 요소였고, 카메라맨도 그걸 아는지 박헤나를 집중적으로 찍고 있었다.
“쟤 나이가 몇이라고? 21살? 21살밖에 안 됐어? 미쳤네.”
“아쉽다. 쟤가 우리 히어로여야 하는데.”
“데려올 수 없을까.”
“우리가 돈은 많잖아. 연봉으로 수십억 달러 조지면 어떻게 안 될까?”
“한국이 잘도 내주겠다.”
“근데 한국이 어디 있는 나라야?”
“신이시여…… 이 바보를 구원하소서.”
“놔둬. 쟤는 보스턴이 어디 있는 줄도 모를걸. 밥이나 먹자. ‘에일리’ 여기 커피 좀…… 에일리??”
“잠시만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에일리라는 웨이트리스가 TV를 뚫어지게 보고 있다.
손님들이 커피를 달라고 해도, 주문을 해도 뭐에 홀린 듯 TV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보다 못한 주인이 “에일리!!” 크게 소리쳤지만.
“쉿.”
손가락 하나를 들며, 일축한다.
에일리는 일 따위가 어찌 되든 전혀 상관없다는 것처럼, 뚜벅뚜벅 TV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화면 속 박헤나를 눈동자에 꾹꾹, 욱여 담는다.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잘 컸네…… 내 딸.”
그렇다.
이 여자는.
과거 세계를 지탱하던 여덟 기둥 중 하나였으며, 아프리카 연합이라는 세계 최대 규모의 연합을 일궈 냈고, 처음으로 자유를 찾아 떠났던 수호령.
에우리아.
에일리의 정체였다.
* * *
십여 년 전.
“그동안 고마웠어요.”
에우리아는 쪽지 한 장을 남긴 채 아프리카 연합을 떠났다.
인간을 사랑했던 그녀의 성정치고는 실로 충격적인 행보였다.
어쩔 수 없었다.
에우리아는 수호령 중 가장 인간을 사랑하던 존재. 설령 그 사랑이 수평이 아닌 수직적이었다고 해도 사랑이라는 근본이 바뀌는 건 아니다.
사랑하기에, 자신이 일궜던 아프리카 연합을 사랑했기에.
그녀는 더 담백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떠나야 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요.”
에우리아는 여행을 떠났다.
위그드라실과 비슷한 행보다.
다만 그 의미는 비슷하지 않았는데…….
위그드라실이 여행을 떠남으로써 자유를 만끽했다면, 에우리아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확실히 이해하는 것을 넘어 인간 사회에 완전하게 섞이는 것을 목표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안녕하세요. 알바 구하신다고 하셨는데…… 네, 제가 ‘에일리’예요.”
온갖 일을 해 봤다.
간단한 알바부터 그럴듯한 직업도 가져 본다.
이렇듯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일을 하며 인간들과 부대꼈고, 조금씩 인간을 이해하게 됐다.
기쁨(희:喜)
“하하! 있잖아요. 우리 아내가 아이를 낳았어요!”
“어머. 축하해요, 스미스 씨.”
“하하하! 나도 이제 아빠다!!”
노여움(노:怒)
“사장님, 이러면 곤란하죠. 갑자기 출근하지 말라니요. 그리고 주급도 주지 못하겠다니. 지금 어쩌란 거죠?”
“아, 몰라 몰라. 배 째. 난 못 주니까.”
“말 잘하세요. 정말 쨀 수도 있으니까요.”
슬픔(애:哀)
“사람이 살다 보면 헤어질 수도 있는 거예요. ……우세요? 우시네…….”
“제기랄!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네가 어떻게 날 버려. 흑흑.”
“울지 마세요. 더 좋은 여자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자요, 이거 서비스. 마시고 잊으세요.”
즐거움(락:樂)
“어? 이거 죽이는데? 에일리, 이거 누가 만들었어요? 더럽게 맛있는데요.”
“훗. 감사해요. 오랜만에 주방에 들어갔거든요.”
“이야, 이런 영국 최고의 요리사가 서빙을 하고 있다니. 기다려 봐요. 내가 당장 사장 놈한테 말해야겠네.”
에우리아가 지켜본 인간은 다채로웠다.
아이의 사진을 들고 기뻐하는 아빠, 비겁하게 임금으로 장난을 치던 사장, 이별에 세상이 무너질 듯 울던 남자, 겨우 식사 하나에 웃음 짓던 손님.
어떤 이는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고, 어떤 이는 큰 성공에도 만족할 줄 몰랐다. 신뢰가 배신당하는 경우도, 보답받는 경우도 있었다. 욕심이 누군가를 이롭게 하는 경우도 있으며, 거짓이 배려를 품은 것도 봤다.
모두 달랐다.
100이면 100의 색깔이 있었다.
같은 색은 없다.
인간은 오롯이 자기만의 색으로 빛났다.
에우리아는 그렇게 인간과 부대끼며 조금씩 인간을 알아 갔다.
“이제야 확실히 알겠어요. 사랑과 동정의 차이를요.”
그리고.
인간을 알아 갈수록, 에우리아의 내면에 감춰져 있던 감정은 커져 갔다.
처음에는 스스로도 몰랐던 감정.
그것은, 애정이었다.
이 여행의 종착지인 딸, 헤나를 향한 사랑과 그리움.
견디기 힘들었다.
당장이라도 헤나의 곁에 가고 싶었다.
그럴 때면 에우리아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아직은 부족하다.
아직 그녀는 인간으로 부족하다. 그렇게 결심해도 다음 날이면 ‘이제는 충분하지 않을까?’ 타협하는 자신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소식을 끊고 미국으로 온 것인데.
에우리아의 눈앞에 딸이 있다.
저기에 내 딸이 있다.
“에일리! 일 안 할 거야?!”
막아 놨던 둑이 무너진다.
“……네, 안 할 거예요.”
“에일리?”
“안 할 거라고요.”
이제 모르겠다. 어찌 되든 상관없다.
앞치마를 아무렇게나 벗어 사장에게 던졌다.
“안녕히 계세요.”
가자. 헤나를 보러.
에우리아가 밝게 웃으며 밖으로 나간다.
지금 그녀가 짓고 있는 웃음은, 어느 때보다 인간적인 웃음이었다.